지금 나는 아마도 죽음의 근처에 숨을 죽인 듯하다.
프리마베라 : 더 비기닝 / 다이앤 아르터스의 편지 / 2021.03.18 업로드
보르도 스노우.
알다시피 나는 이기적이라 너를 먼저 보낼 수가 없다. 너를 잃고 남은 50년을 아이 잃은 어미 심정으로 살아갈 자신이 나는 없다. 그래서였다. 반려도, 아이도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까닭은.
괜찮을 줄 알았다. 다 딛어낸 줄로 착각을 삼고 만 것 같다. 그 봄을 지난 나는 더 이상 아무도 잃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니 두려워함을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어리석게.
지금 나는 아마도 죽음의 근처에 숨을 죽인 듯하다. 전쟁에도, 황실의 한가운데에도 멀쩡하던 목이 내가 일궈낸 평화 속에 뜬금없이 달아날 지경이다. 네 탓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너는 내 책임으로 그곳에 있으니, 너와 나의 숨을 맞바꾸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내 탓이다. 아니, 따질 겨를도 없이 내 탓이겠다.
이 편지를 네게 남기는 일조차 지금은 창피하기 짝이 없다. 감정을 배우고 그것을 온전히 견디며 아파하라 말할 때는 언제고, 내 항상 옆에 있을 테니 여태껏 네 외면한 상처들을 똑바로 직시하라 말할 때는 또 언제고, 나는 병을 주고서 약속했던 진통제를 감춘 채 사라져버리기 직전이다. 확신하건대, 너는 내가 없었으면 덜 아팠을 것이다.
그래도 후회는 않는다. 나 없는 너는 차라리 덜 고통스러웠을지언정 조금이라도 나아지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아니냐? 아니라면 답장이라도 부쳐 보아라. 어차피 말로 내게 이긴 적도 없는 녀석이.
나를 떠올리지 말라고 백 번 말해도 천 번 거절을 놓을 것을 안다. 그러니 의미 없는 소리는 굳이 적어 풀지 않으련다. 나를 비워낸 속에 진물이 들어차고 피가 굳어 영영 너를 아프게 할까 겁나니 하지 않겠단 말이다. 대신에 더 채우지는 말아라. 딱 있는 만큼만 가지고 살다가, 때 되면 내게 돌아와라. 그게 내가 네게서 나의 흔적을 칼 같이 빼앗은 이유이며, 여기 적을 수 있는 위로의 전부다.
사람을 시키지 않고 방을 직접 정리했다. 내 손으로 내 방을 청소해본 게 얼마 만인지. 새삼 방이 넓더라. 혼자 쓸 적에도 넓다는 생각은 안 했는데, 창틀에, 책장 사이에, 의자 다리에 닿는 손이 바빠 잠시 내일에 미뤄둔 죽음을 잊을 뻔했다. 가끔은 감정의 망각도 필요한 것 같더라. 그래야만 했던 너를 이제야 이해한다.
너에게 처음 나의 이름을 쥐여주던 순간을 기억한다. 결국 그 이름 한 짝밖에는 남겨줄 것이 없어 미안하다. 고작 그것 하나 주고서 울음을 그치라 말하는 것은 참으로 못된 짓이나, 그래도 나는 그 말을 해야만 하겠다. 어차피 딱히 못되지 않았던 적도 없으니.
뻔뻔하게도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누굴 만나서 결혼을 하든 누군가의 양자로 들어가든 그것은 네 자유이나 타고난 성만큼은 바꾸지 말아라. 봄의 생명을 틔워내는 페리오의 눈으로 남아라. 그래주면 좋겠다.
그리고, 괜찮았으면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을 알아도 나는 네가 괜찮기를 바란다. 그게, 너는 여전히 내 아기 오리가 아니냐. 봄의 색으로 태어나 겨울의 색으로 자란. 부디 어미가 없이도 괜찮아라. 행복하지는 말고, 적절히 괜찮기만 해라.
잘 지내.
다이앤 아르터스,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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