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창작

백 일의 달과 나무

월목 계연 100일 기념 글 / 2021.11.28 업로드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일본식의 한적한 전통가옥에서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릴지 아닐지 내기를 벌이는 소리가 조곤조곤 들려오고, 태어나서 한 번도 겨울을 겪어본 적 없는 어린 잉어들은 커다란 어항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평화로운 오후.

아리키 모나는 머리를 잘랐다. 어깨를 겨우 넘는 길이의 중단발로, 뒤로 묶으려고 하면 꼭 한쪽 옆머리가 흘러내리는 애매한 길이였다. 막상 그의 연인은 그 순간을 좋아하는 듯했지만. 자신이 손대기도 전에 귀 뒤로 섬세하게 머리칼을 넘겨주는 손길은 그들이 어떠한 특별한 관계를 맺기 이전부터 이루어지던 행위였다. 아주 익숙하고, 또 자연스러운.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관한 논의 이후로 딱히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그들은 이제 정적에 몸담을 줄 알았다. 끊임없이 말을 걸고, 그에 관해 답을 하고 또 재차 질문을 하며 상대에 대한 정보 값을 끌어내려던 학창 시절과는 썩 달라진 풍경이었다. 더 이상 그리할 필요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눈빛을 얽는 것만으로도 의중을 전달할 수 있게 된 탓이었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기다란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흐른 지 몇십 분. 먼저 입을 움직인 쪽은 카야마 이츠키였다. 특유의 느른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리키 모나는 제 목덜미에 파고드는 미지근한 입술을 손가락으로 덜어내듯 두드렸다.

"카야마 상, 나는 현재 다중 작업이 불가하니까 말이야. 금일 목표는 백 페이지까지니까, 그때까지 대기하는 것으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종이보다 더 하얀 손가락이 책장에 고정된 고개를 부드럽게 잡아 돌렸다. 곁눈질로 시계를 확인한 결과, 고양이의 참을성은 어제보다 2분 일찍 바닥났다.

"그렇다고 해도, 애인을 너무 방치하는 것 아닌가요? 나는 관심이 필요한 사람이에요."

"내가 백 일 동안 당신에게 헌신한 것치고는 상당히 서운한 발언인걸."

"그쪽이 오늘을 잊어버리지는 않아서 다행이네요."

양쪽 모두 사소한 기념일을 기를 쓰고 챙기는 편은 아니었다마는, 오늘은 두 사람이 연인이 된 지 백 일째 되는 날이었다. 카야마 이츠키라면 제 연인이 그 사실을 망각할지도 모른다는 염려 같은 것을 애초에 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굳이 저리 말하는 것은 무언가 원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지금이라도 문답해볼까. 카야마 상, 금일 소원하는 것이 존재해? 데이트 코스라든가, 말이야."

"그쪽은 늘 질문이 너무 늦어요."

애초에 어딘가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면 진즉에 말했을 이들이었다. 아무 언급도 없었다는 것은 암묵적으로 집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기로 합의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며, 지금의 둘은 철저히 그 약속을 행하고 있었다. 물론, 카야마 이츠키가 원한 것에서는 조금 빗겨 난 것 같지만.

"하루 종일 당신에게만 시선이 고정되기를 원하는 걸까."

"음, 적어도 지금은?"

그제야 녹색 눈동자가 방향을 돌렸다. 금색으로 빛나는 금속 책갈피가 81페이지에 얹히고, 보라색의 양장본 표지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덮이면 그제야 곱게 휘어지는 눈꼬리가 있었다. 아리키 모나는 습관처럼 그 기다란 속눈썹을 매만지고서, 고운 뺨을 한 번 쓸어주었다. 마치 반려 고양이를 칭찬하듯. 곧장 품에 파고드는 까만 머리통을 무심히 내려다보며, 반듯한 입꼬리를 가진 여인은 생각했다. 이게 카야마 이츠키라고 하면……, 누가 믿기나 할까.

"졸려요."

"평소만큼 취침했어, 당신."

"으응, 그런가요?"

잔잔한 웃음소리와 함께 잠시 말이 없던 남자는, 여자의 티셔츠의 둥근 넥라인에 입 맞추고서 몸을 일으켰다. 녹색의 시선도 그를 따랐다.

"나랑 갈 곳이 있어요."

평소에도 이런 급작스러운 일정은 종종 있는 편이었다. 갑자기 고급 레스토랑을 데려간다든가, 괜찮다는 말을 무시하고 기어이 고가의 선물을 안겨준다든가……. 하필 오늘은 기념일이기까지 했다. 그러니 녹색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도 기이한 일은 아닐 테지.

"걱정 말아요.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놀이공원이나 식당을 통째로 빌리진 않았으니까."

해사하게 웃는 눈은 분명 누구라도 안심하게 만들 만큼 아름다웠으나, 카야마 이츠키의 최측근에 속하는 이에게는 썩 반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래, 고양이가 사고 치기 전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허리에 팔이 감기고, 그대로 손쉽게도 들어 올려진 여자는 오늘의 첫 한숨을 내쉬었다. 간만에 얌전하다 생각했더니.

"씻고 나와요. 옷은 내가 준비했으니까. 참고로 가격표는 이미 뗐어요. 궁금해하지 말아요."

가지런히 정리된 욕실 슬리퍼 위로 내려진 아리키 모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였다. 딱히 저항할 의미도, 이유도 없는. 운명에 순응한 여자가 묵묵히 칫솔을 집어 드는 사이, 그의 다정한 연인은 늘 그렇듯 널브러진 앞머리를 정리해주고는 퇴장했다. 저번에 선물 받은 옷도 딱 두 번 입었는데, 그새 또 새 옷이라니. 거품을 문 채 고개를 젓자 아슬아슬하게 꽂혀 있던 옆머리가 또다시 흘러내렸다.


"카야마 상은 도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이런 장소들을 수색해내는 걸까."

"카야마 가의 정보력을 무시하지 말아요."

"불편한 인간의 뒷조사도 순식간에 가능할 것처럼 말하는걸."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나요?"

아리키 모나는 더 이상의 말을 삼가기로 했다. 둘 다 술을 즐기지 않는 탓에 와인잔에는 단맛이 맴도는 탄산음료가 찰랑이고 있었다. 교제를 시작한 이래로, 남자가 알아 오는 가게들은 하나같이 영화에 나올 법한 곳들이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어느 하나 실망시키는 것 없는- 세트장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곳들. 그마저도 같은 가게를 두 번 가는 경우마저 없었으니 할 말은 이 정도로 충분하겠다.

잘 알고 있겠지만 아리키 모나는 위장이 넓지 않은 편이었으므로, 그를 배려해 카야마 이츠키가 주문한 것은 수프, 샐러드, 메인 요리, 디저트의 네 단계로 구성된 양식 코스 요리였다. 메인 디쉬로 이미 오늘 하루에 대한 만족을 가득 채웠음에도 아직 달콤한 디저트가 남아 있다는 것은 나름 행복한 일이었다. 식전 빵이 담긴 바구니가 수거되고, 민트 잎이 올라간 샤베트가 그들 앞에 놓였다. 아주 잠깐- 아리키 모나는 이 샤베트 속에 반지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했지만, 자신의 연인이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할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금방 차분하게 스푼을 들었다.

"참, 선물이 있어요."

그리고 다시 내려놓았다. 아리키 모나가 이 자리에서 착용한 귀걸이, 원피스, 팔찌, 구두 등은 모두 카야마에게 받은 것이었다. 꼭 굳이 그 조합을 요구하여 입고 나오기는 했지만, 여기서 더 받는다면 분명 걸어 다니는 자동차가 될 것이었다. 하나 그러한 생각이 다 드러나는 표정을 보고도 카야마 이츠키는 웃으며 작은 상자를 테이블에 올려놓을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샤베트 다 먹으면, 그다음에 열어줄게요."

그러면 애초에 다 먹은 다음에 꺼내면 되지 않던가. 아리키 모나는 물리는 어금니를 애써 떼어놓아야 했다. 꼭 좋은 곳엘 데려와 놓고 체하게 하는 것은 그대로다. 아리키 모나는 자신을 닮은 민트 잎을 잔의 한쪽에 덜어두고, 샤베트를 입에 머금었다. 달고 차가운 감촉에 속도 나름 풀리는 듯하였다. …… 아, 그래서.

"당신 말이야. 일부러 이 타이밍에 상자를 꺼낸 것, 상당히 영리한 판단이었어."

아리키 모나의 매서운 눈빛에도 적색 눈동자는 화사하게 휘어질 뿐이었다. 이런 것으로 말싸움해 봐야 이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백 일- 아니, 카야마 이츠키를 안 시점부터 뼈저리게 느낀 터라 그 뒤로 더 이어지는 잔소리는 없었다. 하여튼 부잣집 아들내미란.

계산은 당연히 카야마의 몫이었다. 아리키 모나라고 매번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마는, 자존심을 중시하는 카야마 이츠키가 그것을 용납할 리 없었다. 그 때문에 자신의 여자친구에게까지 재수 없다는 평을 종종 듣기는 하지만, 그에게 넘쳐나는 것은 돈이었으며 즐기는 것은 '카야마 상, 재수 없는 것 인지하고 있지?' 하는 제 여자친구의 표정이었으니 달리 어쩌겠는가.

그리고 대망의 상자가 열릴 시간이었다. 작았으나, 작은 만큼 무서웠다. 아리키 모나는 잠시 상자를 가늠해 보려 했으나, 그럴 시간도 없이 열린 상자에는…….

"보자마자 그쪽 것 같길래. 이건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능청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희고 고운 손가락에 은빛 줄이 달랑였다. 레스토랑의 은은한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 빛나는 것은, 나비였다. 첫눈에 그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알아본 아리키 모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향이 가까워지고, 팔이 제 목 뒤로 둘려 마침내 금속의 차가운 온도가 쇄골에 닿을 때까지.

"마음에 드나요?"

마지막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정리되고 나서야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아리키 모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금세 제 체온으로 데워지는 은색의 나비를 손가락으로 매만질 뿐.

"나는 마음에 드는데."

"…당신이야 그러하겠지. 표식을 각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말이야."

이럴 때 먼저 빗기는 것은 늘 녹색의 눈동자였다. 카야마 이츠키는 제 연인이 볼 수 없도록 조용히 미소 짓고, 레스토랑 문을 열어준 뒤, 제가 사준 원피스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검은색 차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조용했다. 카야마가 아저씨라고 부르며 아버지처럼 따르는 기사님은 그들의 분위기에 입술을 깨물었으나, 그 웃음을 알아챈 카야마 이츠키에게 눈짓을 받아야 했다.

선팅이 된 창문에는 온통 카야마 이츠키의 흔적으로 둘러싸인 녹색의 아가씨가 비쳤다. 가로등 빛이 흘러들어 나비가 반짝일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성격 나쁜 애인이 즐거운 표정으로 구경하는- 한 사람만 긴장한 귀갓길을 마지막으로 그들의 백 일이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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