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KAMOTO DAYZ

악몽의 이름

폐허 by 필멸
6
0
0

지금이라면 알 수 있었다. 그날 왠지 모든 것이 이상하게 돌아갔다는 것을. 코토다마 신코우는 구태여 항상 데리고 다녔던 사용인에게 이상한 잔심부름을 시켰다.

“나기사. 여기 있는 물건들을 구해 오면 좋겠는데. 급하게 좀 필요해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내민 얇은 종이에는 날린 글씨가 빼곡했다. 한자어와 가타가나가 가득했는데 한자를 잘 읽지 못하는 코토다마 나기사를 배려해서 평소라면 하나하나 달아줬을 요미가나가 전혀 없었다. 평범하게라면 무슨 글자냐고 물어볼 수도 있고 요미가나를 좀 달아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나기사가 저에게 뭘 묻지도, 부탁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알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었다. 나기사는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종이를 보더니 그대로 가지고 간단히 인사를 남긴 후 바로 저택을 나섰다.

나기사는 저택이 있는 숲을 나와 인파에 섞여 걸으며 전혀 읽을 수 없는 글자들을 빤히 쳐다봤다. 읽을 줄 모르는 글자를 계속 쳐다본들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달리 말을 할 수가 없으니 누군가를 붙잡고 글자 읽는 법을 물어보기도 곤란했다. 그렇게 하루종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가격표나 가판대 글자 따위를 마구잡이로 읽으며 적혀 있는 물건들을 찾아다녔지만 제대로 구한 물건은 두 세가지 밖에 되지 않았다. 우선 포기하고 돌아가기로 한 건 밤 열 시 쯤 됐을 때였다. 돌아가는 길도 왜인지 발걸음이 축축 늘어졌다. 아무래도 주인이 시킨 일을 완수하지 못해서겠지. 나기사가 시킨 일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당초에 신코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을 시킨 적도 없었고 나기사 역시 충성이 깊고 끈기가 있어 주어진 일을 팽개치거나 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낙심한 탓인지 돌아가는 길은 길기만 했다.

멀리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코토다마 나기사는 숲의 입구에서 퍼드득 날아오른 까마귀 떼를 망연히 쳐다봤다. 까마귀는 불길의 상징.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메스껍고 역겨웠다. 무언가 크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나기사는 까마귀가 날아가버린 나뭇가지를 쳐다봤다.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무언가를 암시하듯 벌건 달이 보였다. 달이 붉을 리가 없다는걸 알았는데도 그랬다. 코토다마 나기사는 애써 사온 것들을 숲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대로 땅을 박차고 저택 앞까지 순식간에 달려갔다. 저택 앞엔 못 보던 검은 차가 있었다. 안엔 아무도 없었지만 차 키가 꽂혀 있었고 시동을 끄지 않은 채였다. 대문이 열려 있었고 저택에서 기르던 커다란 개가 죽은 듯이 나무 밑에 쓰러져 있었다. 나기사를 곧잘 따르곤 했던 리트리버였다. 나기사는 개에게 한 번 정도 눈길을 주고, 그대로 지나쳐 이미 열려 있는 저택 문으로 뛰어 들어갔다.

발을 들인 순간 피냄새가 훅 끼쳐왔다. 온 사방에 방금 흘린 듯한 적색 피가 페인트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여기저기에 사용인들이 쓰러져 있고 사방이 조용했다. 그곳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코토다마 나기사, 그 뿐인 듯 했다. 사슴 조각상 근처에 쓰러진 집사장의 인기척을 느끼고 그 근처로 갔을 때, 그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겨우 2층을 가리켰다. 나기사가 2층을 본 순간 계단 위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발소리는 천천히, 무언가를 마중 오듯 확실하게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계단 난간 끝에 모습을 보인 것은 창백한 표정의 나구모 요이치였다. 그리고 그 손에 잡혀 끌려 오는 것은…….

코토다마 신코우였다.

나구모는 신코우의 옷을 잡고 그를 질질 끌고 오다가, 계단 아래로 휙 던져버렸다. 이 저택의 셋째 주인은 그대로 계단을 굴러 1층 복도로 떨어지곤 나기사의 앞까지 굴러갔다. 그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됐다는 건 구태여 맥을 짚거나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눈앞이 핑 돌고 손이 벌벌 떨렸다. 그는 그 흔한 유언 하나 들려주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아니, 죽어버렸을 터였다. 여기까지는 코토다마 나기사가 기억하는 대로였다.

망자는 그대로 땅에 발이 붙어 굳어버린 나기사의 발목을 홱 잡아채더니 제 심장에 박힌 나구모 요이치의 칼을 뽑아 그 발목에 꽂았다. 저도 모르게 앓을 것만 같아서, 나기사는 손으로 입을 콱 막았다. 칼이 박혔는데도 발에서 피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왜인지 망자의 몸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쳐 나기사의 앞치마를 더럽혔다. 칼을 몇 번이고 뽑았다가 찌르기를 반복하는 그 손을 잡았을 때 눈이 마주쳤다. 깊게 패인 그 눈에는 안구가 없었다. 조금 벌린 입에서는 검은 독약이 흘러 신발을 녹여버렸다. 바닥에 흘러 넘친 검은 늪으로 나기사는 점점 가라앉았다. 제 발목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주인도 함께였다. 싸늘한 표정의 나구모 요이치가 점점 멀어졌다. 그는 평소처럼 웃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슬퍼하지도 않았다. 한없이 불쾌한 표정으로 눈을 돌릴 뿐이었다.

악몽은 거기까지였다.

코토다마 나기사는 잠에서 깨났다. 불안에 잔뜩 흔들리는 눈은 발밑을 향했다. 발끝엔 그저 포근한 솜이불이 덮였을 뿐이었다. 머리맡엔 푹신한 솜베개가 있었고 옷도 자기 전과 똑같이 깨끗했다. 제 허리를 끌어 안은 손과 얽혀있는 다리, 맞닿은 발로 누군가의 품 속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저 꿈이었다는 걸 알게 되자 현실감이 찾아왔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열이 나거나 덥진 않았다. 오히려 몸은 얼어붙은 듯 창백했다. 입은 달뜬 숨을 뱉었다. 손이 떨려와서 나기사는 저도 모르게 이불을 꽉 쥐었다. 나구모 요이치는 땀에 젖은 머리를 살짝 넘겨주며 물었다.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나기사가 앓기 시작해서 덩달아 깨난 참이었다. 나구모 요이치는 그의 삶이 악몽보다도 더한 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알았기에 잠버릇이 없는 나기사가 앓을 만큼 괴로운 꿈을 꾼 것이 신경 쓰였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 아프게 할까. 사실 굳이 묻진 않아도 됐었다. 나기사가 꾸는 악몽의 이름은 나구모 요이치였다. 그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구태여 물어본 것을 후회했다. 이미 썩어 곪은 상처를 쑤셔 파내는 것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슬그머니 불안해져서 그는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코토다마 나기사를 더 강하게 끌어 안았다. 차갑게 식은 몸에 얼굴을 파묻고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나기사는 느릿하게 몸을 움직이더니 그의 방향으로 돌아 누웠다. 힘없이 툭 기댄 얼굴이 밀랍처럼 창백했다. 그 입에서 뱉은 말은 더욱 차갑게 떨어졌다.

“그건 꿈이 아니야.”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