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찰나 늦어버린 모든 것을 향하여
디스코 엘리시움 해리킴 CP/NCP 해석자유
CW: 총살 등 살인 언급
붉은 물줄기가 수직으로 낙하한다. 코모도어 레드는 쿠프리 40의 빛바랜 유리창을 적시며 기울어진 표면을 따라 길을 내었다. 유월의 온화한 공기 위로 달큰한 와인 향이 퍼져 나간다. 가장 외롭고 슬프고 고통스럽던 날들의 향기. 해리 드 부아는 여전히 앞유리창을 바닥에 맞대고 고꾸라진 쿠프리를 보면 가슴이 쑤셔오는 걸 느낀다. 그것과 함께한 기억은 일절 남지 않았더라도. 그는 느낄 수 있다. 네 손가락 아래로 달칵 소리를 내며 열리던 문의 손잡이, 한 발을 올리고 전신의 무게를 실었을 때 살갗에 스미는 오래된 가죽 향. 주인의 등골을 따라 굴곡을 낸 등받이. 손 안에 감기는 레버와 클러치. 모든 게 창백 속으로 날아가 흩어진 뒤에도 유착된 감각은 피부에 남는다. 그를 슬프게 하는 건 그런 형상 없는 감각이다.
해리는 침묵 속에 동력 마차의 장례이자 도유식을 치른다. 그가 쿠프리 위로 술병을 기울일 때 킴 키츠라기도 잠자코 추도한다. 땅속에 머리를 묻은 쿠프리가 말없이 핏물 같은 술을 마신다. 유리병의 입구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밝은 잿빛 땅에 선명한 붉은색 원을 그렸다. 하나. 둘. 셋. 네 번째가 형태를 늘이는 중에 병이 거두어진다. 마지막 방울은 미끄러져 해리의 손가락 안으로 스민다. 그는 비탄 어린 얼굴로 한쪽 무릎을 꿇는다. 그는 쿠프리의 머리맡에 반짝이는 빈 술병을 내려놓는다. 아이에게 밤사이 선물을 가져다주는 아버지처럼. 묵묵히 있던 킴이 작게 헛기침을 한다.
형사님, 병은 들고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왜? 프맅트에 가져다주게?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러셔도 상관은 없지만요. 분리수거 차원에서 말입니다.
아니야. 이건 의식의 일부야. 내가 쿠프리 40을 이 땅 위에서 추모했다는 증표라고.
그렇군요. 그럼 좋을 대로 하시죠.
해리는 곧 몸을 일으키고 두어 발짝을 물린다. 온전한 부품을 몇 개씩 떼어내고 나자 커다란 동력 마차가 살을 베어내 앙상하게 시든 사과 같다. 뼈대를 드러내고 주저앉은 동력 마차는 물에 삭고 닳아 벌겋게 녹슨 자국을 드러낸다. 해리의 노상 붉은 낯빛이 유독 타는 듯 홧홧해진다. 눈가가 가늘게 떨려 온다. 킴이 곁눈질로 해리의 얼굴을 훑다가 파란 손수건을 건넨다. 아냐, 됐어. 나 안 울어. 해리는 훌쩍거리면서도 굳센 표정을 지으려 애쓴다. 킴이 손수건을 모서리를 맞춰 접어 넣으며 답한다. 좋습니다. 급히 떠날 필요는 없으니 원하시면 더 있다가 가죠. 해리가 끄덕인다. 마르티네즈 만의 바닷바람이 뺨을 스친다. 푸른 바다의 염도가 바람결에 섞여 그들을 훑는다. 시야 구석에 물비늘이 반짝이며 튀어 오른다. 해리는 가만히 서서 허공에 손을 뻗는다. 눈송이가 날아와 손바닥 위로 앉을 것처럼.
레바숄이 하나의 서가라면 이곳은 그중 가장 부드러운 표지를 두른 책이다. 마르티네즈는 처음 닿은 순간 새겨진 손때를 간직하고 있다. 얇은 종잇장에 닿은 순간, 겨울의 알싸한 향기. 어깨 위로 쌓이던 눈. 부둣가의 긴 나팔 소리와 맥주를 마시던 일곱 명 노조원의 왁자한 목소리. 시끄러운 키니마의 엔진 소리 그리고 끔찍한 숙취까지도. 눈 내리던 삼월의 마르티네즈와 햇살 쬐는 유월의 마르티네즈는 별반 다르지 않다. 심지어는 연합군의 폭격을 맞은 전쟁 시절과도 다르지 않다. 도보는 역사가 가지를 치듯 갈라졌고 과거가 그러하듯 그 모습 그대로 잠들어 있다. 나라를 몰락시킨 방탕왕 필리프 삼세마저 여기서 달린다. 어딘가에는 분명 미러볼이 빛나고 있을 것이다. 그 아래서는 기욤 르 밀리온의 노래를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 이곳은 발을 붙이고 서 있는 매 순간이 향수다. 해리가 천천히 해안을 따라 발을 내디뎠다. 킴은 언제나처럼 두 발짝 뒤에서 그를 따랐다.
유빙이 녹으며 발치에서 갈라지는 소리를 낸다. 갈매기가 우는 소리를 내며 푸른 바다 너머로 곧게 날아간다. 몇 마리가 더 합세하고, 연푸른색 하늘 아래 흰 새들의 무리가 여행을 떠난다. 그들이 떠나자 어촌은 조용해진다. 이따금 나무판자가 못 박힌 채 바람에 흔들거린다. 발아래서 자갈 채는 소리가 간간이 들리고 미풍이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휴일의 산책을 즐기는 해리는 뛰지 않았기에 킴도 여유로이 어촌을 가로질렀다. 해리의 발자국이 곧게 새겨진다. 경로를 바꿀 생각도 없이 일직선으로 걷는다. 그의 뒷모습은 무브먼트가 고장 난 인형 같다. 킴은 41 관할서에서 일한 두세 달 동안 그런 모습을 지켜봤기에 그 단일한 목적의 등을 익숙하게 좇는다. 그와 걸음을 맞추던 킴은 바람결처럼 조용한 해리의 말을 잠시 놓친다.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걸로 끝이 아닐 거야.
어떤 게요?
그냥…… 뭔지는 모르겠어. 내 머릿속에서 말해준 거야.
킴이 가만히 끄덕인다. 그는 형이상학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지만 해리의 머릿속 목소리는 그 나름의 체계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다. 원리야 어찌 되었든 그것은 해리 드 부아의 세계에서는 참이다. 해리는 마구 엉킨 발자국을 바라보며 신발 크기와 사람 수를 재고 매끈한 창 너머로 이전 창문을 뚫어낸 탄도의 퍼센티지를 산출한다. 그는 현실의 모든 걸 잊어버린 사람치고 많은 걸 정확히 묘사할 수 있었다. 41 관할서에 복귀하고 일주일 뒤 A동의 순경이 길에서 담배를 피우다 총에 맞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에밀 물랑이라는 청년이었다. 해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맞아, 그랬지 하고 답했다. 그는 에밀 순경과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도. 그리고 해리는 ‘귀환’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킴은 매번 캐묻지 않았다. 그때마다 다른 급선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킴은 그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좋아요. 다시 사건으로 돌아갑시다.
하지만 지금은 휴일이었고, 당장의 사건들은 마무리가 된 상태였다. 다른 할 일은 없었다. 지금 해안가를 걸으며 잡담을 하는 게 그가 할 일이었다. 때가 허락해주자 킴은 선선히 묻는다. 형사님. 그 머릿속의 목소리란 건 어떤 느낌입니까? 해리는 다시 뒤를 돌아 걸으려다 멈춰 섰다. 으음. 그는 현실에 없는 어딘가를 응시하며 턱을 매만졌다. 긴 침음 속에는 막연함이 아니라 수많은 답이 차 있었다. 그는 수 개의 목록을 따지고 수십 개의 목소리와 논박을 하는 듯했다. 킴이 참을성 있게 기다린 끝에 해리가 말했다.
누군가 말을 하면 그에 맞는 목록이 나타나. 그중에 특별한 게 있기도 해. 실패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고 영원히 실패할 수도 있는 것들.
그렇군요. 그건 어떻게 알죠? 성공 확률이라는 거요.
내 상태에 따라 달라. 만약 내게 영감을 주는 것들이 가까이 있다면 더 쉽게 성공할 수 있어. 그건 구닥다리 안경이나 더러운 재킷일 수도 있고 끔찍한 넥타이일 수도 있지. 그래, 넥타이도 말을 걸었었는데. 줍슨 AS 남성용 패션 ‘알록달록한 타이’ 말이야.
그는 돌연 깨끗한 붉은 넥타이를 손에 쥐고 감상에 빠져들었다. 얼핏 정말로 고통스러워 보였다. 킴은 질문 두 번 만에 이 대화가 도통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걸 절감했다. 하지만 돌아갈 사건이 없는 탓에 그는 헛기침을 하고 애써 집중을 유지한다.
그럼 지금 대화하는 중에도 목록을 떠올리고 계십니까?
그렇지. 아주 많이.
특별한 선택지에 성공한다면요?
아, 그때 목소리들이 가장 말을 많이 걸어. 가끔은 자기들끼리 싸우기도 한다니까. 걔네가 중요한 단서를 줘. 보지 못한 것들, 듣지 못한 것들. 난 모르는 것들까지도. 지금은…… 41 관할서에서 체스터가 또 유디에게 장난을 걸고 있군. 유디 표정이 안 좋아. 레바숄의 모습은 좋은 것보단 나쁜 게 많이 보여. 레바숄이 언제나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말이야. 르 자르댕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아도 포부르는 들을 수 있어. 그곳에서 죽고 다친 사람들이 선명히 들려. 하지만 모든 게 그런 식이야. 아무리 사소한 것도 알고 있는 게 아니라 듣고 있는 거야. 세계의 최고봉 코르푸스 문디, ’38년도의 <에 퓌 뒤 상> 앨범.
그 말을 하는 내내 해리는 허공의 어느 지점을 붙박여 바라보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동서남북을 오가고 다른 이솔라를 다녀오지만 그가 바라보는 건 오직 하나뿐이다. 시선 끝에 교회의 십자 모양 별이 걸려 있다. 킴의 시선에서는 교회를 가리고 선 해리의 머리 위로 긴 철사의 별이 뻗은 것 같다. 그는 여기서도 돌로레스의 모습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부서지지 않고 온전히 빛나는 무결자 돌로레스 데이 성하. 혹은 레바숄. 해리가 발아래를 보며 개울을 건넌다. 초록색 구두 아래서 얕은 물이 찰박거린다. 갈색 가죽 신발이 한 번 더 찰박 소리를 낸다. 두 켤레 신발이 교회 앞을 돌아 물가를 따라간다. 해리의 말은 가만가만하게 이어진다.
가끔은 나 자체가 그냥 목소리의 총체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 연속하는 단일한 개체가 아니라 수십 개 목소리가 나를 잠깐씩 구성하고 다시 흩어지는 거야.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 가운데 매번 하나를 골라내는 게 내 선택인지도 모르겠을 때가 있어. 내 과거는 그들이 말하는 과거지. 무엇까지 내 것인지 헷갈려. 이전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모든 답은 내가 아닌 데서 오고 나는 매번 늦은 시점에 있는 것 같아. 빅에게 옛날의 나는 어떻게 살았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뭐라고 하던가요?
개같이 살았다고 했지.
킴이 해리의 등 뒤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해리는 그걸 알기라도 한 듯 긍정하는 단음을 낸다. 킴은 뒤늦게 판단을 유보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는 의식적으로 해리의 진술을 자신의 규정으로 흐리지 않으려 한다. 시간을 낭비하기 가장 좋은 때였다. 영원석 판자가 밟히며 나는 끼익 소리가 바닷새 소리와 조화를 이룬다. 멀리 파란 바다 위에서 섬은 빙하처럼 하얗다. 굉활한 수평선이 시야를 가로지른다. 그들의 젖은 구두가 단단한 땅 위로 발자국을 그렸다. 해리는 이다음 말을 시작하기까지 오래 뜸을 들이며 보폭을 줄인다. 따듯한 햇살에서 겨울 공기가 느껴진다. 너른 바다가 잘게 몸을 뒤채는 소리가 공백을 채운다. 입이 떨어지는 작은 소리가 있고도 한 박자 뒤에 그가 말한다.
포르타 로사에 간 적 있어.
음. 계속하세요.
별건 아니고. 알잖아, 내 패션에 변화를 주고 싶었어. 다시 깨어난 이후로는 처음 가 보는 곳에서 새로운 걸 얻으려 했지. 그런 영감을 주는 물건 방면에서 끝내주는 게 포르타 로사라고 들었어.
이미 가신 건 어쩔 수 없지만 포르타 로사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인민의 원자로가 폭발한 뒤 갈 곳 없어진 기술자들이 암거래를 벌이는 곳이죠. 수사 목적이 아니라면 홀로 찾아가는 건 추천 드리지 않습니다. 늦은 밤이라면 더더욱이요.
그래, 그렇더군. 그날따라 온갖 목소리가 날 뜯어말리더라고. 부드러운 살구 향을 경계했던 것처럼. 하지만 걔네가 뭐라 말하든 간에 선택권은 나한테 있다고 생각했지. 부기 스트리트를 따라 포르타 로사를 걷던 그때는 밤이었고, 장사판을 벌이려는 사람들이 들개처럼 눈을 번뜩이며 주변을 살피더군. 나는 거길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다신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한 적 있던 것처럼, 하지만 잊어버린 걸 책망하는 것처럼. 어떤 목소리는 내게 염치가 없댔어.
그 지점에서 킴은 결말을 예상한다. 41 관할서, 포르타 로사. 오 년 전 일이었던가. 그는 굳이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런데 그 많은 눈 사이에서 날 똑바로 바라보는 눈길이 있었어. 대강 덮어둔 장막 그늘 아래서 그 눈빛은 점점 흔들렸고. 그 눈의 주인은 호리호리한 남자였는데 비틀거리며 내게 다가오더니 멱을 잡아당겼지. 어떻게 여기 올 수 있냐고 했어. 난 당신을 모른다고 했을 때 그의 표정이 기억나. 그런 건 기억나. 다신 잊지 말라고 하더라. 당신 총에 머리를 맞고 죽은 자기 형을 기억하래. 이름은 페팽 우엘레. 잊기 어려운 이름인 것 같은데 완전히 잊어버렸어. 염치없이. 집에 와서 옛날 장부를 한참 뒤지고서야 포르타 로사의 그 남자가 에메 우엘레라는 걸 알겠더라고. 오 년 전 장부는…… 한참 닳고 구겨지고 손때가 묻어 있더군.
갈대가 흔들린다. 허리께에서 다갈색 풍랑을 일으킨다. 파도가 울렁거리고 갈대가 서로 스치며 섬 위로 켜켜이 소음을 쌓았다. 소리가 가슴께에서 넘실거리다 천천히 등을 타고 오르는 것 같다. 해리의 목소리가 갈대의 노래에 얽혀 꿈결 같다. 아주 오랫동안 꿈을 꾼 것 같아. 좋은 꿈은 아니었는데 깨어나 보니 다 잊어버렸어. 그런데 그게 다 나였대. 모두들 그게 다 내가 한 일이래. 모든 사건이 끝난 뒤에 가장 늦게 눈을 뜬 사람이 된 것 같아. 게다가 아주 오래 산 사람의 탈을 쓰고 있지. 나는 내가 죽인 세 개의 천공을 위해 코모도어 레드를 부어줬는데 그 사람들도 구멍 세 개가 아니고 내 추모도 술병 하나로 끝이 나지 않는 것 같아. 몇 병을 부어야 할지 모르겠어. 삼월 이전의 내게도 누군가 한 잔을 기울여줘야 했을지도 모르지. 그 누군가가 이젠 나인 것 같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섬이 파랑 안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해리 드 부아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 섬에 머물렀던 사람은 이제 거기 없다. 이곳에서 흔들리는 갈대가 저곳에서도 흔들린다. 이제는 저곳에서 자라는 은방울꽃이 여기서도 자란다.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스치자 작게 나부끼는 소리가 들린다. 그 바람 가운데서 킴은 나직이 속삭인다. 형사님, 해야 했던 일은 없습니다. 해야 할 일뿐이죠. 그렇지 않으면 좋겠지만 저희에겐 앞으로도 추모를 올릴 일이 많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따금 자신이 누군지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뭔지 모르겠다고도 생각하고요. 과거가 멀게 느껴질수록 그렇죠.
너도 그랬어?
저도 그랬죠.
해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어찌 됐든.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코모도어 레드를 기울일 기회는 있습니다. 형사님은 앞으로 할 수 있는 것도 될 수 있는 것도 많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지금의 형사님께 달린 일입니다. 해리어 드 부아든 해리든 복상등경위님이든 간에, 지금의 당신이요.
그 말은…… 오늘 한잔하러 가자는 거야?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 그럴 수도 있겠죠.
킴이 어렴풋한 미소를 지었다. 해리가 마주 웃었다. 걸음의 끝에 그들은 버려진 군사 요새 앞에 선다. 절대로 열리지 않는 문. 다시는 들어갈 수 없는 문이다. 느리게 요동치는 바다를 두고 선 그들은 쓰러져 가는 마을 위 두 개의 점처럼 보인다.
그들이 선 땅은 아주 오래되었다. 이 땅을 밟는 사람들은 종종 그들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이 누군지 잊을 때도 있고, 무엇인지도 잊곤 한다. 당연한 일이야. 킴이 생각한다. 이상한 일이 아니지. 해리 속의 목소리가 말한다. 빛날 사람은 전부 빛났고, 잊힐 사람은 전부 잊혔다. 과거가 너무 많은 곳이라 그에 질식한대도 의심스러울 게 없다. 현재를 살면서도 끝없이 옛날이야기를 하게 된다. 언제나 죽은 사람의 이야기는 산 사람의 이야기보다 감동을 준다.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이 되고 나면 미사여구를 몇 개씩 더 붙여 거룩하게 회자된다. 그들은 미래를 그릴 때조차 귀환한다고 말했다. 그랬던 시절이 있다. 불가역의 과거는 찰나의 틈도 주지 않고 그들의 발밑에 퇴적된다. 손끝에서 가장 먼 곳이 마르티네즈에선 가장 가까이 있다.
다리 건너 동쪽에는 한때 붉은 중유로 그라피토가 있었다. 언젠간 네 곁으로 돌아갈게. 공산주의자들이 연합군의 폭격을 맞았던 땅 위로, 그렇게 쓰여 있었다. 지금은 글씨가 흐리다. 군데군데 다른 액체로 덮이고 지워진 곳이 많다. 흥건한 피를 뒤집어쓴 채 말라붙은 중유는 알 수 없는 냄새를 풍긴다.
누군가 먼 미래에 향수 속에 이 냄새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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