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재판

한 잔의 당신

역전재판3 스포일러 주의

220 by Aster
38
0
0

김이 폭폭 올라오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주전자를 앞에 두고 카미노기 소류는 숫자를 세었다. 실은 150번 대와 220번 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집중력이 분산되어 그 후로 숫자는 그냥 대강 세고 있었다. 적당히 감에 의지하여 그럼 이제 슬슬, 하고 찻주전자를 건드려보려는 순간 아야사토 치히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제지했다. 아직이에요, 선배. 조금 더 기다려야 충분히 우러나와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지? 음, 한 2분 정도? 남은 시간을 헤아려낸 그녀가 읽고 있던 판례집을 덮어 무릎맡에 두고는 블라우스의 소매를 살짝 걷었다. 잔을 덥히기 위해 미리 따라 둔 물을 찻종에서 몇 번 굴려낸 뒤 오목한 사발에 부어내는 손동작이 한없이 나긋나긋했다.

언제 봐도 수고로운 과정이군.

다도라는 게 그래요. 학문과 교양의 한 갈래로 분류될 법하죠?

인스턴트 커피라면 다섯 잔을 가득 비우고 남았을 시간이다. 첫 번째로 우려낸 찻물은 마시지 않는다고 했으니, 다시 또 물을 붓고 기다리는 동안 여덟 잔의 커피를 마셔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겠군. 효율의 측면에서는 언제나 커피의 압승이다.

하지만 선배, 인스턴트 커피는 별로 안 좋아하지 않던가?

뼈 있는 반론을 제기하는 아야사토 치히로에게 카미노기 소류가 머그잔을 건넸다.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아기 고양이에게 맛보여줄 커피는 어느 하나도 싸구려가 아니니 이건 안심하고 즐겨 보도록. 평소의 세 배는 더 자신만만해 있는 그의 기세에 아야사토 치히로는 흐음?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순순히 잔을 받아들었다. 눈을 감고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반의반 모금을 시험 삼아 호록 하고 머금는 그녀에게, 정확히는 그 입술에 너무 오랫동안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카미노기 소류는 아직 든 것이 없는 자기 몫의 찻잔에 눈길을 옮겨 두었다.

의외로 뜨거운 음료에 약한 편인 아야사토 치히로가 커피를 삼분지 일 정도 마신 후에야 그의 잔에도 티끌 한 점 없이 잘 걸러진 찻물이 따라졌다. 발갛고 말가며 향기로운 액체가 담긴 다완을 양손으로 감싼 채 열기를 즐기는 동안 함께 준비되었던 다과가 그녀의 손에서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져 갔다. 수백 년 간 세속과 거리를 두며 이렇다 할 유희거리를 누리지 못했다는 영매사의 가문에서 소박하게 향유해 온 사치를 한 모금. 또 한 모금. 정성껏 만들어진 음료의 따뜻한 기운을 만끽하며 눈 맞춤도 조금씩. 그런 식으로 머그 한 잔과 찻종 두 잔이 비워지고 몇 점의 다과 또한 동이 났을 즈음 카미노기 소류가 물었다.

슬슬 감상을 나눌 시간이군. 오늘의 커피는 어땠지? 아기 고양이.

으음, 저번 것보다 맛이 더 깊고 진하네요.

이봐, 그게 네 감상의 전부라면 난 무척 슬플 거야.

저번에 마셨던 커피는 쓴 맛이 강하고 신 맛까지 오래 뒤따라서 솔직히 한 잔을 다 마시기가 고역이었어요. 반면에 이번 커피는 초콜릿의 향과 견과류의 고소한 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게 마음에 드네요. 과하게 달지도 않고.

아기 고양이는 커피의 산미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것 같아서, 네 까다로운 취향과 타협하기 위해 고민깨나 했지.

이 한 잔을 네게 맛보이기 위해 나흘 하고도 반나절 동안 원두를 고심하고, 거기에 독자적으로 고안해낸 블렌드까지 곁들였노라는 말까지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마음에 둔 여자를 위해 기꺼이 감수하기로 한 것들을 본인 앞에서 일일이 떠벌릴 만큼 카미노기 소류는 좀스럽지 않다. 그리고 아야사토 치히로는 말로 굳이 전해지지 않는 타인의 선의를 능히 짐작할 만큼 감이 좋은 여자다. 두 사람의 관계는 어느덧 그 정도로 발돋움해 있었다.

그러는 선배는요? 차를 즐기는 데에 좀 익숙해졌나요? 모의재판에서 상대의 엉터리 논리를 꼬집어낼 때만큼이나 의욕적인 눈빛을 보이며 새로 우린 찻물을 잔에 따라주는 아야사토 치히로였다. 카미노기 소류로서는 난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이런 자리를 가지기는 벌써 일곱 번째이지만 아직도 차라는 음료와 차를 즐기는 데 필요한 이런저런 것들에는 익숙해지기 어려운 감이 있다. 커피 한 잔에 샷을 세 번 넣는 습성에 충실히 적응한 미각으로 차의 향긋함을 예민하게 느낀다면 그것도 매우 이상한 일일 테지만, 그래도 준비한 사람의 성의에 부응해주는 것이 좋겠지 싶은 생각에 입을 열었다.

그렇군. 생각해보니 꽤 익숙한 향이 나. 이건……. 아기 고양이, 네 목덜미에서 맡을 수 있는 냄새와 비슷한 것 같군.

꺄악? 선배, 지금 무슨 말을!

내 나름대로는 진심 어린 감상을 들려주는 건데, 너무 소름 돋아하는 거 아닌가? 나 같은 남자에게도 그런 반응은 꽤나 상처라고, 치히로.

어디 나가서 그런 말 하면 경범죄로 잡혀갈 거라구요! 역시 선배의 미감에는 이상한 데가 있어.

방금 그 말은 조건 자체가 부적절해. 내가 ‘어디’ 나가서 아기 고양이가 아닌 ‘다른 누구’한테 이런 말을 건넬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다고 단언하고 싶군.

아으, 정말이지……. 당해낼 수가 없네요. 선배의 취향과 언변은.

아기 고양이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지. 그래서 내가 치히로, 너를 좋아할 수밖에 없어.

옆에 두었던 판례집까지 들고 팔뚝을 가볍게 때리려 드는 아야사토 치히로에게서 재빠르게 몸을 피하며 카미노기 소류가 이죽거렸다. 한참을 그러다가 슬쩍 그녀의 손목을 잡아 책을 내려놓게 하고 집게손가락으로 손등을 톡톡 건드려보았다. 꽤나 볼 만한 표정이 되어 있던 아야사토 치히로가 곧, 소파에 기대어 있는 그를 향해 몸을 조심스레 굽혀 왔다. 차와 커피의 잔향이 기묘할 만큼 어우러지며 두 남녀의 뺨을 안쪽에서부터 간질였다.


참 많이도 변했구먼. 사무실의 손때 묻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호시카게 소라노스케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전혀 모르는 사람의 껍질을 뒤집어쓴 듯한 모습으로 찾아온 애제자를 더 잘 살펴보기 위해 잔 먼지가 앉은 안경알을 손수건으로 두어 번 훔쳐도 보았다. 당연하게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완연히 달라진 것만이 무수하고 처참했다. 그가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만큼 후유증이 심각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지라, 어쭙잖게 과거와 지금을 견주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책장 두 번째 칸에 대강 올려두었던 물건 하나가 갈 데 없는 시선을 사로잡자마자 얼굴이 환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아, 마침 좋은 차가 들어왔으니 한 찬 들게. 내가 차 우리는 솜씨는 별로치만, 워낙 좋은 찻잎이니 이럭처럭 마실 만할 걸세.

……. 

그래, 무슨 얘기부터 하면 좋을까……. 차네 I군 기억나나? 그 친구가 얼마 전에 법률사무소를 개업했어. 차네 동기들 중에 체일 늦게 독립한 셈인데 그럭저럭 전망은 좋은 편이지.

그는, 여전히 발음을 독특하게 튀기며 누군가의 근황을 두서없이 나열하는 스승을 구태여 막아세우려 들지 않았다. 그럴 만큼의 의욕이 없다고나 할까, 최소한의 예의를 가장 게으른 형태로 갖추고 싶었다고나 할까. 다른 사람들을 향해 관심을 기울이게 하려 애써봤자 무의미한 혼잣말에 지나지 않음을 스승이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그저 기다렸다. 결국 20여 분 만에 제풀에 지친 호시카게 소라노스케가, 이쪽을 향해 가장 꺼내기 저어하던 화두를 입에 올렸다.

치히로 양은 차네가 그렇게 된 이후로 커피를 차주 찾아 마시게 됐다네.

…….

왜, 고양이 혀라고 차네가 종종 놀리기도 하지 않았나. 가끔은 여기 와서 나와 함께 커피를 마시기도 했지. 차네가 자주 마시던 커피 블렌드도 얼추 흉내 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어. 커피 원두에도 초금쯤 감이 좋아졌던가.

…….

차네를 참 많이 그리워했지. 그러면서도 한 사람의 변호사로 훌륭히 성장해나갔어. 치히로 양이 커피에 적응하게 된 것도 차네와 함께했던 기억을 소중히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겠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

카미노기 군?

망연해하는 티가 역력한 스승의 시선에도,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생각했다. 눈앞에 내놓아진 저 한 잔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바이저가 투사하는 세상에는 붉은색이 없고, 비강과 미뢰는 반절 이상 제 기능을 잃어 가벼운 자극일수록 불감해진다. 그리하여 한 잔의 당신조차, 한 줌의 추억조차. 그리고 사랑마저도. 이런 몸으로는 도저히 즐길 자격이 없음을 알았다. 그러니 내놓을 대답에도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입안에 스미는 비린 맛을 혀끝으로 훔치며 카미노기 소류였던 남자는 대꾸했다.

차 같은 건 잊어버렸습니다. 커피나 한 잔 내어주시죠.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H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