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첫 크리스마스
샴페인 슈퍼노바& 네로 커티스 크리스마스 합작
01.
크리스마스라고 하면 역시 가족이랑 함께 하는 시간이 최고죠! 친애하는 사람을 품에 끌어 안아주고, 상대와 박자를 맞춰 캐롤 특유의 잔잔한 스탭을 밟아보세요. 가족끼리 함께 하는 시간이 무엇보다 최고랍니다. 한 번 더 말씀드릴게요. 공동체와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최고의-
달칵.
정상성 이데올로기 광고는 볼 필요가 없는 관계로 곧바로 텔레비전의 전원을 끈다. 순식간에 조용함이 찾아온 방에, 이 적막 못 견디겠다는 듯 입을 여는 이가 있다. 그래서 말이죠, 노바. 상투적인 묘사로 발언을 시작한다.
“예전엔 크리스마스 파티를 했나요?”
“그런 걸 제대로 보내지도 못했던 것 같기도 해. 해봤자 선물은 한 해에 한 번씩이었으니깐.”
“그런가. 그렇다면 받고 싶은 선물은 없어요? 올해에 한 번 찬스라고 생각하고요.”
“이미 생일 선물 거하게 줬잖냐.”
“그거 말구. 크리스마스 전용 선물. 나 이래보여도 전직 의사였어서 돈은 좀 있어요.”
“빚 있다고 했으면서.”
“그건 현대 사회인의 소양에 가깝죠. 하여튼간에. 응? 말해봐요. 들을 준비 됐어요.”
“됐어! 생각나는 것도 없고, 너는 내가 원하는 거 있다고 하면 금방 넙죽넙죽 사주잖냐.”
“아무렴. 그래야죠. 나는 당신을 소중히 여기니까. 기꺼이 그럴 의향이 있어.”
“됐어. 지금 정말로 생각 안 나니깐, 인마.”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네로 커티스는 고민에 잠긴다. 뭐. 노바는 나를 좋아하니까, 나와 관련된 것이라면 다 좋아하겠지. 단순한 회로가 결론을 내린다.
샴페인 슈퍼노바는 필히 자신이 주는 모든 것을 좋아하리라. 그야, 자신을 좋아하지 않던가. 좋아하는 사람이 주는 선물인 뭐가 됐든, 휴지 쪼가리라 하더라도 기쁜 법이다. 라고 네로 커티스는 오만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냥 ‘아무거나’ 주고 싶지 않은게 사람의; 마음이다. 옷을 챙기기 위해 복장을 재단하는 곳에 연락을 넣고, 연말을 즐기기 위한 식당을 물색한다. 아니, 취소. 직접 요리하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른다. 주변 상황에 예민한 족속들은 으레 집 안에 가둬져야 하는 법이니까…….
정성을 들인 것이 티가 나는 홈메이드 푸드. 흠, 가산점을 딸 수 있겠어. 게임 스테이터스로 친다면 이미 호감도 만점일텐데도 불구하고 네로 커티스는 더 받아먹을 수 없나. 어디 단물이 떨어지진 않나 고개를 내밀게 된다. 2인용 숙소. 그보다 조금 더. 아니 실은, 부피가 제법 큰 냉장고에 담아둘 재료를 선별하기 전- 88839 지역 음식이나 찾아보고자 검색을 한다. 당연하게도 찌라시들이 먼저 뜨고, 잡다한 기사와 헌터 샴페인 슈퍼노바에 대한 속보가 이를 따른다.
맨 상단에 뜬 기사는 이와 같다. <샴페인 슈퍼노바, 현상금 사냥꾼……. 가족을 팔아넘긴 치!> 흥미롭다는 듯 허공의 버튼을 눌러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한다. 내용은 예상 따라 가관이었고, 한 번도 기사에 응한 적 없는 샴페인 슈퍼노바의 심정을 멋대로 휘갈긴 3류 신문, 아니 잡지보다도 못한 내용이었다. 기자의 신고 및 건의물을 500자 빼곡하게 적어 제출을 한 후 화면을 끈다.
… 그래서, 뭘 하려고 인터넷에 접속했더라? 어리둥절한 채로 서있는다.
02.
겨우 목적을 되찾아 원하는 바를 얻은 뒤, 인터넷의 파도에서 헤엄친 것에 대한 대가로 두통이 밀려오면… 무력하게 의자에 기댄다. 눈을 감는다. 그리고 분해가 된 생각을 무형의 손으로 잡아와 퍼즐을 어거지로 맞춰보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내가 그곳에 소속되어 너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내가 88839의 일원으로 남아 너에게 상흔이라는 관계를 남길 수만 있다면 좋았을텐데. 그러면 조금이나마 이 답답함과 갑갑함이 해소가 될텐데. 기댄 의자를 움직여 앞뒤로 천천히 움직인다. 이대로 뒤로 넘어지면 머리가 다칠까. 앞으로 기울어지면 코가 깨질까. 옆으로 움직이면 탁자에 부딪힐까. 오만가지 파괴적 망상과 상상 끝에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은 단 하나다. 불청객이 연락을 한다. 아니, 반가운 이가 연락을 걸었다. 화면 위에 뜬 NOVA라는 글자에 낯이 환하게 변한다. 반색하며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이봐, 네에에에에에로 커티스.”
“응, 노바. 나 듣고 있어요.”
“지금 어디있냐!”
“기숙사에 있지.”
“뭐 하고 있었어!”
“으음, 네 생각 하고 있었지?”
“나 또 엿보고 있었냐?!”
“그건 아닌데, 어. 음. 맞기도 할 듯? 왜냐면, 이번에 노바 오기 전에 방 구조를 약간 바꿔서요… 구경 가능한 어항을 거실 구석에서 탁자 옆으로 바꿨거든요. 언제든 심심하면 구경할 수 있게.”
“그러냐. 잘했다! 그럼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지도 보이겠네?”
“응. 문 열어줄까요?”
“응!”
문을 연다. 팔을 벌려 품에 한껏 들어오지도 않는 얇은 체구를 강하게 끌어안는다. 체향을 맡으려는 듯 목덜미에 코까지 박아넣고 나면 드는 생각이 있다. 그래. 역시 과거에 연연하지 말자. 내가 ‘네로 커티스’가 됐기에 너의 새로운, 유일무이한, 서로 상호작용적인 형태의 ‘우리’가 될 수 있었던 거니까… 웃음이 터져나온다. 키득키득, 낄낄. 야, 너 무슨 생각했냐! 헤헤. 음침하게 웃기는! 머리를 팍팍 마구 쓰다듬는 소리. 현관에서 신발을 떨구고 안으로 들어선다. 사람은 둘, 성큼성큼 걷는 인간은 하나.
03.
네로 커티스는 샴페인 슈퍼노바의 머리카락을 빗어주면서 크리스마스 날 뭘 하고 보내면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아참, 그러고 보니 제작 주문한 옷이 왔었지. 일어나라고 보챈 뒤 옷장으로 가서 제 사이즈에 맞지 않는 옷을 꺼내든다. 한 품 작은 옷. 탈의하고 옷을 입혀두는 것 까지 제 손으로 해야 만족하는 이 한 명과, 이 녀석 취향 하나 참… 싶지만 가만히 있어주는 사람 한 명. 그런 식으로 균형이 맞춰진다. 그래서 내일 노는 거 맞죠? 어엉, 맞아. 너 위해서 일정도 비워뒀다, 야! 애초에 그 날 근무를 하는 사람들이 더 드물지만요. 잡다한 소리들이 도르륵, 도르륵 굴러간다.
“사실,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은 예헤바 법과 관련된 서류거든요. 왜, 요전에 설명해줬잖아요. 내가 살던 지역에선 서로를 가족이자 친구, 형제로 묶어둘 수 있는 특수한 법이 있다고. 간단한 정보를 제공하고 서로 간에 안전을 증명할 수 있는… 무 섬에서도 적용이 가능해서 제안하는게-“
말을 멈춘다. 표정을 본다. 네로 커티스는 급하게, 혹은 느릿하게 박자에 맞춰 샴페인 슈 퍼노바를 끌어안는다. 등을 토닥이고 머리카락을 살살 빗어준다. 괜찮아요, 괜찮아. 지금은 제안할 시기가 아니었을 지도 모르지. 자신의 품에 단단하게 가둔 채로 안정감을 제공하고자 별의별 손짓과 몸짓을 구사한다. 이마에도 입을 맞추고 뺨을 맞대어 부비적거리기까지 하고 나서야 샴페인 슈퍼노바가 입을 연다.
“싫은 건 아냐. 그런데…”
“응. 알고 있어요. 신경쓰여서 그런 거잖아.”
“…….”
88839의 기사가 머리 뒷편에서 스쳐지나간다. 공동체로 묶이지 못한 아이. 비리를 터뜨리고 말아버린 아이. 모든 걸 외치고 도망친 청년.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어려보이는 청년. 자신이야 동안이라 그렇다 쳐도, 노바. 너는 되게 젊어보인단 말이지. 낭패다. 선물을 너무 ‘내 기준’ 에서 준비한 것임에 틀림이 없어. 조금만 더 네 생각을 했어야만 했는데. 여전히 어렵다. 기준점과 쌍방 합의가 되는 것을 고른다는 것은…….
04.
크리스마스의 시간이 뎅, 하고 울린다. 밖에서 성탄절을 준비한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약간 열린 창문 틈으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일어나서 창문을 닫아 소리를 차단한다. 지금 가봤자 킬 대원들이 많을 것임에 뻔하니 나가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은 덤이다. 대신에 허브 한 줄기를 꺾어 천장에 달아두고, 빨간 원형 장식과 노란 별 대신 꼬마 전구를 방 문 위에 걸쳐둔다. 이스팁살을 걸어두면 되냐는 질문에 노바가 경멸의 눈빛을 줬기에 포기했다.
손에 손을 잡고 방 안에서 천천히 춤을 춘다. 콧노래로 캐롤을 흥얼거리다가… 피곤하면 깔깔 웃으면서 침대에 그대로 누워버린다.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의 장점 하나. 언제든 바닥에 드러누워서 쉴 수 있다. 그렇지, 노바? 그래, 네로 커티스.
마침 크리스마스에 맞춰 새로 바꾼 녹색 이불이고, 옷은 붉고, 포인트로 별까지 수놓아져 있고… 저 위에서 보아야만 완성되는 크리스마스 트리 하나 완료.
05.
트리가 잠에 든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무릇 인공 자연물은 눈을 뜬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자연물은 적당히 쉴 시간이 필요하며, 인간으로 만들어진 트리는 필연적이게 하루에서 여섯시간에서 여덟시간 사이의 수면이 보장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눈을 감았다 떠 아침 해를 마주한 게으른 헌터들은 전날 밤에 미리 만들어둔 미트로프를 데워서 으적거리고, 비몽사몽 상태로 잠옷을 입은 채 수다를 떤다.
주된 이야깃거리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는 선물을 받았을까, 누구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누구는 어디로 여행 갔다더라, 누구는 어디보자 오늘 기사 1면에 떠서 화려하게 비리를 터트렸다더라…….
그러다 이마를 맞댄 채 애정을 속닥인다. 소중한 날에 귀한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일은 당연지사한 것. 뺨을 맞잡은 채 문지르고, 손가락으로 눈가를 살살 쓸어내린다. 너를 정말 아끼고 있다고 고해를 하면… 돌아오는 말은 엉뚱한 소리다.
“이걸로 선물은 충분하겠다, 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이렇게 구는 것 만으로도 난 좋다고, 바보 멍청이 네로 커티스.”
“그래도 난 뭐라도 주고 싶은데…”
“이미 받았다고!”
이마 쿵. 기절하는 사람 한 명. 그리고 어라, 너무 세게 박아버렸나? 하고 사사삭 옆으로 가서 살아있는지 확인하는 사람 한 명. 뭐. 이런 어설프고 황당한 엔딩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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