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웅태섭]이어지지 않는 이야기
*태웅태섭 전력: 짝사랑, 감기
그는 나를 사랑한다. 안 한다. 사랑한다. 안 한다. 사랑한다. 안 한다. 서태웅은 마지막으로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의미없는 꽃점의 종착점은 길거리에 핀 들꽃들이 지는 책임이었다.한참이나 쭈구리고 앉아, 꽃점을 친 만큼 쌓인 꽃잎들이 서태웅의 마음만큼 쌓였다. 희고 가는 꽃잎들이 꼭 꽃길처럼 펼쳐져 있어서 눈에 자꾸만 밟혔다. 드라마에서는 사랑도 쉽게 하던데. 제 사랑은 왜 이렇게 어렵기만 한지. 서태웅은 울렁이는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유난히도 맑았다.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서면, 찌르르 울리는 감각이 제 마음인지. 근육의 아우성인지. 이제는 분간도 하기가 어려웠다. 일렁이는 마음을 겨우 다잡고, 접었다. 판판하고 고른 마음에 기다란 줄이 생겼다. 발걸음을 느릿하게 옮기면서 서태웅은 늘 반듯한 등을 떠올렸다. 언제부터인가, 눈에 밟히던 등. 언제나 당당하게 제일 앞에 서 있던 등.
"아."
투둑. 비가 내렸다. 마음에 줄이 남아 서러웠다. 한 번 터진 울음은, 눈물은. 쉴새없이 뺨을 타고 흘렀다. 서태웅은 그것을 닦아내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가 봐줬으면 해서. 놀란 눈으로 다가와서는 무슨 일이냐고 물어주길 바라서. 하지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건, 서태웅 제 스스로가 더 잘 알았다. 맑았던 하늘에는 노을이 수놓아지고 있었으니까. 오랜만에 부 활동이 없이 이르게 끝난 날이기 때문에. 그는 누군가와 함께 가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서태웅은 제 손을 들어, 축축하게 젖은 뺨을 닦아내었다. 접은 마음에 눈물자국이 선연하게 남았다.
그 뒤로 서태웅은 그 마음 한 자락도 드러내지 않았다. 서태웅이 가진 애정의 주인은 그저 그것만으로도 되었다는 듯, 안심하는 얼굴이었다. 요 며칠 집중을 통 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걱정했노라는 말에 서태웅은 그저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분명 그런 말을 듣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는데도, 그 주인은 알겠노라며 흐지부지 넘어가 주었다. 서태웅은 그게 참. 참으로 밉다고 생각했다.
한 번쯤은 왜 그런 말을 하냐고 물어봐주면, 안 그래도 신경 쓸 게 많은 주장을 신경쓰이게 한 것 같다는 말을 해주려고 했었는데. 그럼 당신은 웃으면서 어련히 잘 할까. 그래도 정 어려우면 털어놓기다?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줄 텐데. 그것만으로도 마음 언저리에 떨어진 눈물자국을 지워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 마음은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을 마음이었다. 오늘도 서태웅은 문단 하나를 삼켜내었다. 속이 더부룩한 것 같았으나, 더는 팀 전체에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농구는 참 좋았다. 음울한 서태웅의 짝사랑쯤은 금세 휘발되게 만들었으니까. 서태웅은 그의 손길이 참 좋았다. 공과의 마찰로 뜨끈한 손바닥이 머리 전체를 감싸는 느낌. 그 느낌이 꼭 그의 애정 같아서. 그래서.
"태웅아."
"네."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줄 테니까. 너무 삭히지 마, 알았지?"
서태웅은 제 마음에 박히는 문장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꾹, 말아문 채로. 안 그랬다가는 그에게 이 마음을 쏟아낼 것 같았으니까. 안 된다. 그건 안 돼. 접기로 한 마음이니, 절대 티를 내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서태웅은 마음을 또 접었다. 눈물자국이 남은 마음에 또 한 줄의 선이 그어졌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거면 되었으니까. 그의 손길에 눈물자국이 지워졌으니까. 그러니까.
"뭐해?"
"아, 주장."
"웬 꽃점?"
그는 흥미가 어린 눈으로 서태웅을 바라본다. 서태웅은 단 한 개만 남은 꽃잎을 떼어냈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서태웅은 꽃잎이 다 떨어진 꽃을 주머니에 쑤셔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 안 해줄거야? 장난스러운 말에, 서태웅은 한참만에 대답을 건네었다. 여자애들이 하는 말을 들었어요. 꽃으로도 점을 본다고. 그래서 해본 거에요. 그는 오롯이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 눈을 접어 웃어보이며 그랬다.
"누군지는 몰라도 엄청 럭키네."
"왜요?"
"천하의 서태웅이 사랑하는 사람이잖아."
서태웅은 잔뜩 접힌 눈가와 볼록 솟은 광대, 벌어진 입 따위를 보며 그저 옅게 웃어보였다. 어? 진짜야? 놀란 듯 대꾸하는 말에, 서태웅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응? 사랑, 아니에요. 그럼 뭔데? 서태웅은 꽃잎 줄기가 잔뜩 우그러지는 걸 느끼며 말했다. 저 혼자 하는 거예요. 그의 눈이 크게 띄였다.
"고백, 안 하려고?"
"네."
"왜?"
서태웅은 그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거까지 제가 주장에게 말해야 하나요?
"아, 그렇지."
그는 아차,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게 사과를 건네었다. 서태웅은 고개를 내젓고는 그의 머리 위에 얹어진 아직 채 지지 않은 벚꽃잎을 떼어주고는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해보였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어어. 그의 대답을 뒤로, 자전거를 타고 멀어진 서태웅은 시큰거리는 눈가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잔뜩 낀 게 꼭 비가 올 듯 싶었다.
울렁이는 마음을 잠재우려 해변가에 자전거를 두고 한참을 바다를 보고 있던 탓인지. 돌아오는 길에 비를 흠뻑 맞아서 그런건지. 아니면 짝사랑이라서 그런건지. 서태웅은 그 뒤로 크게 앓았다. 열이 들끓었고, 마른 입술 새로 기침이 터졌다. 아, 진짜 아프다. 서태웅은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에 열감을 이유로 두고 엉엉 울었다. 차마 가족 앞에서는 울 수가 없어서. 서태웅은 밤마다, 새벽마다 울었다.
호되게 앓고 나서일까. 서태웅은 더는 잔뜩 접어 너덜거리는 마음에도 슬프지 않았고, 그가 다정하게 굴어도 슬프지 않았다. 어차피 내보이지 않을 마음인 건 같았기에. 서태웅은 그것마저도 품기로 했다. 온 걱정을 받으면서 서태웅은 농구부에 복귀했다. 서태웅은 더이상 그를 보아도 서럽지 않았다. 마음을 내보일까 전전긍긍 하지도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는 애정을. 애정 그대로 받아드릴 뿐이었다. 농구 코트로 되돌아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서태웅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내쉰다. 빨리 와, 에이스! 그의 외침에 아주 조금 웃어보이며, 제가 속한 곳으로 돌아간다.
더는 그 무엇도 서럽지 않았다. 이 사랑마저, 이 마음마저. 서태웅의 것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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