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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기억의 윤회

삿된것은삿된것을부르고또길러서다른삿된것을낳을터이니

자캐 by 해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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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당신 이야기에 가볍게 맞장구 치며 고개를 끄덕이던 참이었는데. 단순히 눈과 눈을 마주하고 있었을 뿐이었으나, 손 쓸 틈도 없이 네 행동이 빈틈을 파고든다. 당신 손에 들린, 순간 옅게 반짝인 금속재질의 무언가. 마치 지금을 위해 등 뒤, 혹은 그 근방 어딘가에 고이 숨겨놓은 것 같이. 막기엔 늦었다, 당신 팔을 잡아봐야 늦었다. 이 말을 잊고 있었다. 고향에서 언제나 기억하라던 말. 방심은 죄악이라는 말을.

순간의 고통과 동시에 아득해지는 정신. 각막을 지나 눈두덩이 뒤에 묻힌 공막까지 가위로 주욱 긁히며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유독 여린 눈의 안쪽 살가죽에 가위가 자리를 잡고, 깨끗한 날을 벌린다. 곧 도려내어지는 안구. 아니, 도려낸다고 하기엔 투박한 손길. 당하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무턱대고 파낸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시신경, 망막 혈관이 끊어지며 안구가 바닥으로 툭, 굴러 떨어진다. 텅 비어버린 눈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피.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울고있나? 눈이 파내진 자리를 부여잡고 있나? 비명을 지른 것 같은데. 일단, 몸에 힘이 풀린 것 같은데. 팔다리 무엇하나 제대로 가누어지지 않는다. 갑자기 비틀어진 균형을 바로잡기란, 제정신도 아닌 사람에게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알고 있지 않은가. 얇은 바지 너머 하반신, 이어 상반신 일부까지 차갑고 단단한 감각이 몸 뒤편에 느껴진다. 주저 앉았나, 쓰러지기라도 했나봐. 파여진 자리는 피의 온도 외에도 따스한 걸 보면, 한 손으론 여전히 꾹 붙잡고 있나봐. 그 행동이 살아있는 증거라도 되는 것처럼. 그대로 너 올려다본다. …잠시만, 왜, 왜? 어째서, 방금까지 쓰레기장 아니었나? 그런데, 네가 왜 여기-

여기 있는 거야? ○○, 아, 아니야. 아니, 꿈이지, 그래. 잠시 내가 미친 거야. 또 환각이지, 응? 역시 눈을 뽑은 것도 너지? 그래, 초면인 사람이 막, 그럴 리가 없잖아. 초면인 사람이.. 방금 전까지, 사소한 공통점가지고 운명이니 뭐니 시시덕대던 사람이. 갑자기 날붙이를 들고 달려들 리가 없잖아. 언제까지 이럴 거야? 여긴 또 왜, 왜 끌고 온 거야?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던, 그리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칠흑빛 풍경이 또. 또 눈앞에 펼쳐진다. 한 쪽 벽을 주욱 늘어놓은 무기들, 그것을 품고 있는 보관함. 마치 나에게 반항할 거면 해보라는 듯이, 활짝 열려있는 갈색 목재 무늬의 두 문. 반대편에는 교도소에서나 쓸 것 같은 딱딱한 침대에, 이곳저곳 핏자국과 손톱으로 긁힌 자국이 즐비한 회색벽. 내 눈앞에는 또 네가. 네가, 날 웃으며 바라보는 네가. 아닌데? 아니야, 이건 걔가 아닌데. 내 앞에 있던 건, 다른 사람인데. 생각할 틈도 없이 흉터에 통증이 가해져온다. 등부터 복부, 어깨, 목 부근까지 꾹 조이고 베이고 푸욱 깊게 찔리는 듯한, 생생해서 더욱 끔찍한 이 감각이. 돌아왔다는 공포 자체로 자연스레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입밖으로는 얼빠진 소리만 내뱉고 있다. 어린아이의 옹알이같이. 아무것도 모르던 때로 돌아간 것처럼. 한 손은 패인 자국을 감싼 채, 다른 한 손은 제 머리를 꾸욱 감싸고 있다. 아동학대를 일삼는 부모의 밑에서 자란 아이가 트라우마에 눌린 듯한 모습이다. 어눌한 발음으론 거듭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그만해, 그런 말들만 늘어놓는 채. 이건, 널 올려다보고 있지만, 널 보는 시선이 아니다. 너에게 겹쳐보인 또 누군가가, 지레 더 겁을 먹게 한 거지. 네 귓가에 여러 소리가 울린다. 당신이 아닌 것을 올려다보며 주춤 뒤로 물러나는 소리와, 울먹임과, 땅바닥에 뒹구는 눈알 한 짝이 다시 따스한 품을 찾는 소리와, 어린아이의 중얼거림 같은 작은 소리가. 죄송해요. 미안해. 그만, 그만해. 다 잘못했어. 아니야, 살려줘. 죽기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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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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