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열병

커미션

누군가 물어뜯기고 짓밟히는 광경은 A에게 있어 결코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지나치게 고지식해서,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지나치게 부유해서, 지나치게 가난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은 타인을 끌어내리는 일에 희열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표현일 때의 이야기였다.

회색으로 얼룩진 창문 너머 도시는 이미 그들에게 삼켜진 지 오래였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응당 들려야 할 자동차 소리, 말소리, 하다못해 새가 날갯짓하는 소리마저 죽음의 공포 아래 잠겨버린 세상. A는 이따금 자신이 보이지 않는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가고 있다 느꼈다.

무슨 일이에요? 멍한 얼굴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전자제품 코너를 뒤적이던 B가 A의 어깨를 쿡 찔렀다. 해 떨어지면 돌아가기 힘들어요. 더 추워지기 전에 서둘러야지. 그 말에 뒤늦게 상념에서 깨어난 A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쓸모 있는 물건은 대부분 사라진 뒤였지만, 아예 건질만한 물건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새 추려낸 물자를 꾹꾹 눌러 담은 B가 A에게 손짓했다.

두 사람이 발견한 폐상가는 1층에 입점해 있던 옷 가게와 관리 사무소로 추정되는 2층의 방을 제외하면 멀쩡한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난장판이 된 내부, 박살 난 유리창, 곳곳에 드러난 뼈대... 어쩌면 그 덕에 다른 사람들이 찾지 않았는지도 모르지. 잘게 난자된 초여름의 사체를 떠올린 B는 진저리를 치며 관리실 명패가 붙은 문을 걸어 잠갔다. 누가 뭐라고 한들 위기 상황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은 또 다른 인간이었다. 그 경계의 범위에서 벗어난 것은 기껏해야 자신, 그리고...

흐린 노을마저 차단되자 은신처 안은 곧장 암흑으로 뒤덮였다. 익숙하게 팔을 뻗은 A가 작은 간이 램프의 전원을 올렸다. 창백한 백색 불빛이 방을 밝혔다.

추워?

겨울이니까...

B는 말없이 A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전처럼 새콤달콤한 느낌은 아니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아무 일 없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입 안을 맴돌던 질문은 그대로 목을 타고 넘어가 심장을 불쾌하게 간지럽혔다.

익숙한 체향, 익숙한 체온.

B가 그리워하는 늦여름의 A.

가는 손가락이 잊힌 형체를 그리듯 바닥을 쓰다듬었다.

...있잖아요, A 오빠.

왜?

이제껏 엄마를 끌어안은 시간보다 오빠랑 마주 안은 시간이 더 긴 것 같아요.

예상치 못한 농담에 A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너 진심이야?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나직한 웃음소리가 말끝을 이었다. 냉기를 이기지 못하고 되레 뜨끈해진 체온이 온몸에 기분 좋게 닿아왔다. B는 A를 끌어당기며 한층 크게 웃었다. 한겨울 열기에 취한 것만 같았다.

당연히 진심이죠. 오빠 이제 책임지셔야 해요.

책임? 무슨 책임을?

겨울이 끝날 때까지 제 전용 난로가 되어야 하는 책임. B는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겨울. 걸어 다니는 시체가 활보하는 곳에서 우리는 다음 봄을 기약할 수 있을까. 설령 다음 봄을 맞이한다 한들 우리는... 두 머리를 가득 채운 생각은 이내 열 어린 체온에 녹아내렸다. 겨우내 쌓인 눈이 초봄 햇살에 흔적 없이 사라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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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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