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야의 전야

커뮤니티 NW-0891 엔딩 이후의 크리스마스

뒤로가기 by 상자
22
0
0

쓰라린 패배와 달리 승리는 모호하다. 999년 12월 23일, 오후 10시 24분의 일이다.

에스퍼는 승전의 영광된 자리에 초대받지 못했다. 성취를 등지고 두 다리로 땅 딛고 섰다. 차례를 기다리는 그들 사이에서 제이 켈리는 맞지 않는 시계 앞에 쩔쩔맸다. 이런 적 없었는데. 엄습한 불길한 예감 명확히 분간 못하고 초침 앞에 발 구른다. 승리보다 무거운 작은 실수가 마음을 어지럽힌다. 톡톡. 시계는 여전히 바보다. 승전으로부터 어긋난 위치에 선 그의 처지와 같다. 춥다, 아직 멀었나? 에스퍼들이 한 데에 모여 웅성거리는 소리는 지원팀의 소란 너머로 사라졌다. 켈리는 여전히 시계 하나 해결하지 못했고.

손목 시계 하나 제대로 고치지 못한 제이 켈리라는 에스퍼가 여기 있다. 그는 과거에는 경찰이었으며, 지금은 국가에 등록되어 기약 없는 복무 중인 에스퍼다. 그의 불을 다루는 이능력은 수색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치열하고 꼼꼼한 수사관으로써 방식을 고수한 덕에 켈리는 유령 도시에 파견된 유일한 경찰이었다. 이제 자신의 일을 성실히 마친 그는 본부로 복귀하는 운반선에 몸을 실었다. 그는 가는 동안 꾸벅 졸았다. 그간 며칠이나 지속된 불침번과 험한 모래 먼지로 인해 잠 들기 쉽지 않은 날들 뿐이었다. 수송 차량이 피로에 지친 사람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소란한 사람의 마음도 흔들었고, 이로 인해 누군가는 결국 결단하지만 잠이 든 켈리는 아니다. 잠결을 부유한다. 최근 일어난 사건은 늘 바쁜 켈리의 삶에도 시간의 흐름 잊게 할 만큼 분주하였다. 그러니 정말 중요한 한 가지 잊었어도 탓할 사람 누구도 없다.

"이제 크리스마스네."

누군가 말한다. 켈리도 눈을 뜬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여기 모인 이들의 뺨에 드디어 크리스마스의 밝은 열기가 내린다. 아직 노래 잊지 못한 참혹한 거리에 캐롤이 울리고 있다. 이런 날씨에도 삼삼오오 거리를 나온 사람들의 얼굴에 기대의 오색찬란한 빛이 감돌았고, 저 밖 남일을 구경하는 오르도에도 전염된다. 켈리는 몽롱하여 부유하는 의식을 굳이 벗지 않았다. 인간에게서 노래를 영영 빼앗을 수는 없나 봐. 위험을 알고도 나아가기로 한 오늘의 결정도, 축제의 기쁨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다. 차 내의 누군가 조용히 허밍한다. 듣는 이 적어 안타까울 만큼 놀라운 실력이었다. 켈리는 잠결에 뜻 모를 고마움을 느낀다.

많은 것이 조만간 달라질테지만 켈리까지 알기엔 아직 멀었다. 오래 묵은 먼지를 털고 씻어 정신을 돌린 후에, 켈리는 곧장 사무실로 돌아가야만 했다. 차라리 쌓인 일감이 기대될 지경이다. 사실 과중한 업무를 예감한 대부분의 오르도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역사에 기록될 많은 일을 겪었으나 귀찮은 안부 인사 몇 번 외에는 오르도는 조용히, 실로 바쁘다. 켈리는 기이하다. 지금의 환난이 단 번에 해소되길 기대할 만큼 어리지 않았다. 그러나 약하고 불안하다. 황금기의 편린에 몸 달아 뛰던 어제를 돌아보면 다시 빈 손을 보기 두렵다. 책상에 코를 박고 일에 매진하는 수밖에. 켈리는 자리에 쌓인 많은 일을 고르고 또 분류한다. 그는 목 뒤에 앉은 불안이라는 이름의 벗을 보지 않기 위하여 몸을 더 숙인다. 무엇도 약속한 적 없고 누구라도 기만하려는 제 성정 같은 것.

그래도 무언가 바뀔까요? 그는 한층 더 방어적으로 물었다. 아니, 더 나빠질 걸. 날이 서린 목소리가 척박하여 싹도 되지 못한 기대를 도려낸다. 여기저기서 큰 한숨이 난다. 켈리는 등받이에 몸을 구겨 넣고 한숨을 따라 쉰다.

이제 시간이 흘러 전야다. 피로가 낮아진 어깨를 겹겹이 눌렀다. 이제 정말 휴식이 간절할 때가 왔다며 고통이 신호한다. 집에 돌아가자. 너저분한 책상 사이로 낡은 열쇠를 끄집어 올려, 켈리는 가장 밑 서랍에서 완벽하게 관리 된 한 정의 총기를 꺼낸다. 그는 한 때 이에 사로잡힐 만큼 경찰의 무게 잘 알았으나 지금은 고작 작은 장난감과 같다. 후, 오랜만에 보는 검은 형태 위로 짧은 입 바람을 분다. 보통이라는 삶의 형태가 점차 멀게 느껴지고 있다. 그리하여 켈리는 다시 몸 가까운 곁에 총기를 두기로 결정한다. 이 무게 이 땅의 삶에 자신을 닻 내리게 하길 바라면서. 탄환의 한계가 없는 총기를 의식 한 켠으로 완벽히 내려놓으면, 홀로 될 세상에 발가벗겨진 두려움을 알게 될까 진정 두려웠으나 노력한다. 켈리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방아쇠 대신 한동안 "진짜" 총이라는 걸 곁에 둔다.

"메리 크리스마스," 복장을 갖춘 켈리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먼저 인사를 던진다. 피곤에 찌들었으나 제법 경쾌한 인사가 마주 돌아온다. 모두의 안녕을 의미하는 인삿말을 하나와 같은 마음으로 주고 받는다.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귀가한다.

날은 춥고 눈의 끝 물이 내린다. 켈리는 목도리를 단단히 두르고도 어김없는 추위에 몸 떨었다. 낡은 눈은 구두를 젖게 했고, 눈꺼풀은 서서히 감긴다. 좋을 것 하나 없는 귀가길에 약속한 경찰 동료의 양 뺨은 별 것 아닌 크리스마스의 열기로 적빛이다.

"너는 부를 사람이 없어서 오늘."

"넙죽 나온 게 누구더라." 이후 다른 약속이 없는 켈리는 홀로 식사하고, 동료는 싸구려 맥주 한 잔을 주문한다. 식사는 즐겁고 따뜻하였으나 내용은 다가온 종업원도 혀를 내두를 만큼 실로 삭막하다. 에스퍼가 얽힌 범죄는 갈수록 사상자가 늘어 경찰 내부에서도 독자적인 대응 방안을 검토 중이었고, 켈리는 한탄에 맞게 몇 가지 조언을 건낸다. 동료의 좋은 얼굴은 이제 취기가 올라 분노로 일렁인다. 켈리는 간만에 변명하고 싶은 기분 앞에 초라하다. 변명 대신 입에 퍼석한 빵을 가득 밀어 넣는다. 우리는 그래도 살아가려 노력하고, 나 또한 그렇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며 말을 꺼내고 싶었으나 실로 피로하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 곳에 주의 기쁨이 함께 하길. 켈리는 오랜만에 심사가 뒤틀린다. 그래도 너는 우리와 같아 다행이라는 안도의 말을 배반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니까. 켈리는 이 곳을 삼킨 불길을 상상하지 않으려 무척 노력한다. 코트 안 쪽의 평소와 다른 묵직한 무게가 제법 도움이 된다.

"다음에 보자," 웃는 낯의 얼굴이 인사를 던지면, 켈리는 뒷머리에 대고 외친다. "웃기지 마. 다음엔 안 볼 거야."

집에 돌아가는 길에 익숙한 피칸 파이 대신 골목 옆 책방 앞에 선다. 유리 진열대에 열 오른 이마를 바짝 붙이고, 자신의 느닷없는 행동에 긍정적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책이란 놈은 앞만 보며 지내는 켈리와 같은 이 시대의 젊은 이들에겐 옛 유물이다. 사치이고, 시간 낭비이며, 조롱이다. 켈리는 결국 초라한 만큼 친숙한 크리스마스 장식과 점원의 온화한 미소 덕에 발길이 묶였다 결론을 내린다. 모든 것을 크리스마스의 탓으로 돌린다. 곧 멈출 시계도, 뜻 모를 고통도. 그는 낡은 가판대 앞을 오래 떠돌았다. 이 책 저 책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점원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답지 않게 고민하던 켈리는 책 한 권을 결정한다. 들었던 이름의 책은 아니었고,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표지에 이끌려 무작정 골랐다. 켈리는 자신의 선택으로 비롯한 책을 다 읽으리라 자신하지 못했다. 혹시 알아, 책 한 권이라도 책상 위에 두면 앞으로 잘 살 수 있게 될 지 모른다. 그 뿐이었다. 몇 번 배반한 기대 앞에서도 다시 거기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를. 켈리는 켈리 자신을 도무지 싫어할 수 없었다.

불길이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때까지. 그저 안정과 평화를, 그리고 안녕을 바라면서.


다른 분들과 했던 대화 혹은 상황을 일부 반영하였습니다.

공개 된 세계관과 배경 외의 설정은 날조하였습니다.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