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열 (시리즈)

[백호열] 사각사각

업로드 2023.04.04

* 아마 쓰게되는 모든 백호열은 친구를 위해서 쓰는 거일듯

* 모바일 작성 / 퍼슬덩 O 원작 X 애니 X

* * *

양호열은 인정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함께 해온 친구를 좋아한다는 걸.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인정하기만 했다. 그 뒤로 넘어가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될 거라는 걸 양호열은 알고있었다. 자신에게도. 그에게도.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이 자신에게는 어떻게든 숨겨두려했던 감정이 터져나와 그 속에서 연신 허우적거리며 애정을 갈구하게 될 것이었고,

그에게는 앞으로 그를 기다릴 창창한 미래를 향해 발목이나 잡을 불쾌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 이상 같이 다니지도 못 할지도 모르고. 

어떻게든 터질듯한 감정을 움켜쥐고, 잡아누르고, 끌어안아야만 한다. 지금의 관계라도 유지하기 위해서.

피 끓는 청춘에, 열혈남아인 양호열에게 그런 세심하고 정교한… 아주 세밀한 조각을 깎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 커다란 키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게 좋았고, 농구 코트를 달리며 볼을 가지고 싸우는 모습이 좋았고, 자신을 비롯한 친구들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좋았으며, 항상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언제든 웃는 표정으로 자신을 부르는 것이 좋았다. 함께하는 그 모든 순간이 좋아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꿈에서도 나올 정도면 중증이었다. 그런 날에는 꼭 몽정을 했다. 헐떡이며 온 몸이 붉어져있었다.

야속하게도 몽정하는 날에 꾸는 꿈은 한 번도 양호열의 머릿속에 기억된 적이 없었다.


깨닫기 전에는 몰랐는데 깨닫고 나니 모든 일상이 그와 함께였다. 등교. 하교. 수업. 농구부. 아르바이트로 먼저 헤어지는 날 외에는 항상 함께였다. 그것은 양호열에게 있어 차오르는 감정을 견디기 어렵게 했다. 그의 손을 잡고 싶어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었다. 그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고백하고 싶어 채소연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와 입을 맞추고 싶어 사탕을 물었다. 원래는 입을 맞추고 싶어지면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허나 농구선수에게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아 잘 먹지도 않는 사탕을 바지 주머니에 여럿 챙겼다. 중증이었다.

멀어지고 싶을 때가 있었다. 항상, 매일같이 하루종일 보는 사이라 이 감정이 금새라도 넘칠 듯 그래서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아서. 그런 생각도 했었다. 무슨 일 있냐고 귀신같이 알아채는 눈치에 생각도 제대로 해보지 못 한 채 무산되버리고 말았지만.

아르바이트를 위해 거리를 걷던 양호열을 지나치는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귀를 스치던 것은 그때였다.

- 일기를 쓰면 좀 낫더라.

- 일기?

- 아니면 편지처럼? 주지는 말고, 혼자 쓰는 편지 같은 거.

- 그게 나을까?

-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혼자 끙끙대면 속만 버려. 뭐라도 그 감정을 표출하고 꺼내고 나면 갈무리 정도는 되더라고.

- 한 번 써도 계속 힘들면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계속 쓰는거지.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가던 것도 잊고 양호열이 여학생 무리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일기… 편지… 입모양으로 중얼거린다. 

그 날 양호열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노트 한 권과 펜 한 자루를 샀다.


강 백 호

사각사각 볼펜이 종이 위에 그려지는 소리가 낯설었다. 시험칠 때나 잡아보던 것을 스스로 꺼내쥐는 것이 퍽이나 낯설었다.

좋 아 해

볼펜을 쥐고 손 위에서 이리저리 돌린다.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도 같았다. 혼자 있는 방 안인데 괜히 두리번 거린다. 누가 볼 새라. 아무도 없는데.

손 끝으로 석 자 적힌 이름을 쓸어내려보았다. 알 수 없는 만족감이 들었다. 강, 백, 호,

강 백 호 

백 호 

백 호 야

백 호 야

강 백 호

좋 아 해

네 가 좋 아

좋 아 해 백 호 야

강 백 호

강 백 호

좋 아

좋 아 해

백 호 야

.

.

.

.

단 두 마디 였다. 강백호. 좋아해. 하지만 모른 척 한 번 쓰고 났더니 겉잡을 수 없어졌다. 양호열의 손이 빨라졌다. 누가 보면 열심히 공부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손을 놀렸다. 주먹질만 하고 일 할 줄만 알던 손이 펜을 쥐니 금새 저려왔으나 느낄 새도 없었다. 벅차오르는 감정만큼 그의 이름을 썼다. 넘쳐나는 감정만큼 그의 이름을 썼다. 부르지 못 할 만큼 쓰고 고백할 수 없는 만큼 또 썼다.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몰라 얇은 노트를 샀는데 그새 노트를 가득 채웠다. 노트 끝까지 두 마디로 가득 채우고 더 이상 이어쓸 수 없을 때가 되서야 양호열이 손에서 펜을 놓았다. 고생은 손이 했는데 숨이 가빴다. 양호열이 숨을 몰아쉬었다. 뺨이 축축했다. 오른손이 저려 왼손으로 뺨을 훑었다. 양호열은 제가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단 두 마디로 얇은 노트를 가득 채울만큼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 해소가 되는 것 같으면서도 부족했다. 두 마디 뿐인 노트에서는 일말의 광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쏟아낼 수 없는 감정의 결말에 대한 광기.

양호열은 다음 날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에 가는 길에 노트를 샀다. 전날과는 달리 노트도 두껍고, 권 수도 많았다. 볼펜도 한 통으로 샀다. 이 감정을 평생 안고 가야한다면 평생 안고 갈 것이다. 이 노트들을 모두 채우고, 볼펜들이 다 닳고 나면 또 살 것이다. 집에 한 권씩 쌓일 노트를 상상한다. 노트 속에 가득 채워질 두 마디를 떠올렸다.

좋아해.

강백호.

결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두 마디를.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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