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열] 우리의 사랑은 태양과 달과 별 만큼
* 안드로이드 시리즈 외전
* 안드로이드 강백호 X 인간 양호열
* 내용 이해를 위한 앞 시리즈
→ 껍데기 https://glph.to/j8cz8r
→ 안드로이드도 사랑을 알까요 https://glph.to/yrhscu
* 외전으로서 이 시리즈는 정말… 정말로 끝입니다.
결과만 놓고 얘기하자면, 인간인 호열과 안드로이드인 자신의 시간선을 맞추는 것은 실패였다. 인간에서 안드로이드로 개조하는 것은 가능했으나, 안드로이드는 안드로이드였다. 종족부터 달랐기에 인간에서 안드로이드화 되었다고 해서 인간의 시간선에서 살 수 있도록 바꾸는 것은 불가능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인간인 호열은 세상을 떠났고 안드로이드인 백호만 남았다. 자신을 안드로이드로 만든 대만을 비롯한 북산의 장인들도 인간이었기에 세월의 흐름을 이길 수 없었다. 누가 좀 더 오래 사느냐 정도의 차이였다. 노화든, 건강 악화든. 세상을 떠난 인간들의 빈자리를 새로 태어난 인간들이 채웠다. 무기와 전투용 안드로이드를 만들던 북산은 더이상 무기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었다. 북산은 북산의료센터만 남았고 나아가 무기를 제조했던 장인들이 구조용 안드로이드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인간을 치료하고 고장난 안드로이드를 수리하는 포괄적인 메디컬 센터로 변화했다. 전쟁을 부추기는 무기를 만들던 회사 중 작지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회사가 사그라드니 다른 무기회사들도 점차적으로 힘을 잃어갔다. 전쟁은 사라졌다. 무기도 사라졌다. 만들어진 무기들은 인간보다 강한 안드로이드들이 처리했다. 인간들은 압력에 의해 금세 짜부라질 정도의 깊은 땅 속에 들어가 무기를 처리할 창고를 만들고 그 안에 무기를 봉인했다. 살상용이자 파괴를 위한 도구이기에 함부로 터뜨릴 수 없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무기를 봉인한 창고는 지구가 끌어당기는 힘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견고했다. 혹여 기후가 상승하는 지구로 인하여 창고가 녹아내려 무기가 터질 것을 대비하여 그 위로 겹겹이 금속을 덧씌웠다. 이 창고가 녹아내리고 폭발할 때가 되면, 이미 지구는 기후를 조정하는 기능을 상실하고 인류나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모두 죽고난 뒤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안드로이드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안드로이드가 숨을 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발을 딛고 살아갈 땅이 없다면 제 아무리 안드로이드라고 해도, 기계라고 해도 죽음이라는 걸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백호는 눈 앞에서 생생히 그려지는 연인을 떠올렸다. 펼쳐지는 화면 속 그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와 품에 안길 것만 같았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자신보다 한참은 작은 그를 품에 꽉 껴안고, 답답하다며 웃음을 터뜨리는 그의 이마와 입술에 제 입술을 겹치는 상상을 했다. 시야 속 호열은 같은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기도 했고, 자신이 취향이라고 말했던 옷을 입고 있기도 했다. 북산의료센터에서 활동하면서 입었던 응급구조사 유니폼을 입고 부상당한 환자를 향해 달려가기도 했다.
언제든, 어디서든. 자신이 부르기만 하면 웃는 얼굴로 돌아서는 그가 있었다.
백호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양 팔을 활짝 벌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그가 있었다.
백호의 눈 앞에서 그 모습이 끊임없이 재생되었다. 실제 눈 앞에 그는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실은. 사실은. 그가 보는 자신은 안드로이드인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가 부르는 자신이 안드로이드인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팔을 벌려 안아주면서도 떨리는 손끝을 알고 있었다. 안드로이드 강백호와 인간이었던 강백호의 차이라고는 인간의 육체가 안드로이드의 신체로 바뀐 것 밖에 없는데. 키도, 골격도, 기억도 모두 완전히 이식했기에 인간이었던 강백호는 안드로이드 강백호와 다를 게 전혀 없었는데. 인간이기만 한 그는 자신을 보면서도 자신 너머의 무언가만을 좇았다. 그것을 알았다. 알고 있으나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전투용으로 개조된 자신은 그런 쪽으로 분석하는 알고리즘이 없었다. 사랑을 했고 사랑을 알고 있으나 어떻게 해야할지 알지 못했다. 그에게 자신은 인간이었던 강백호가 맞고, 너와 함께한 연인인 강백호가 맞다고 얘기를 하는 게 옳았을까. 호열이 자신을 곧이 곧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을 계속 모른척 하는 게 옳았을까. 강백호는 사랑을 위해 태어난 안드로이드가 아니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 너는 사랑이 뭔지 아냐?
인간의 욕망과 애정을 위해 태어난 섹스로이드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이 선명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 어느 순간에 느껴지는 게 있어.
가슴께에 손을 얹는 것을 눈에 새긴다.
- 인간의 심장과 같은 안드로이드로서의 가동엔진이 빠르게 작동하고, 항상 눈 앞에 그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들의 목소리가 내 곁에 머무르기를 바라게 되고.
눈을 감고 사랑한다는 그들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모습을 눈에 새긴다.
- 손을 맞잡았을 때 느껴지는 온기가, 다른 사람들의 손을 잡았을 때와는 다른 걸 느낄 때.
갈색 눈이 자신을 향한다.
- 이 모든 것을 상상만 해도 벅차오른다면, 그게 바로 사랑이야.
섹스로이드가 말하는 사랑은 인간이었던 강백호가 항상 느끼던 것이었다. 인간 강백호의 뇌속에 저장된 기억으로 알 수 있다. 인간이었던 강백호는 양호열을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갑작스레 찾아온 죽음으로부터 그를 지키고 숨을 거둘 때까지 섹스로이드가 말했던 감정을 모두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안드로이드가 된 자신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안드로이드 강백호는 양호열을 다시 만날 때부터 그가 세상을 떠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랑했다. 사랑하고 있다.
간직했던 사랑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그에게서 사랑이 닿지 않았던 시간동안 안드로이드 강백호는 어땠나. 전투만을 위해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는 사실 지금까지도 그것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저 그의 눈길이, 그의 미소가, 그의 목소리가. 그의 손길이 한번이라도 제게 닿았으면 하는 생각만 있었다.
“호열아.”
- 백호야!
이름을 부르면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안드로이드 강백호의 기억 속 양호열이 웃는 얼굴로 자신을 부른다. 양호열은 안드로이드가 되기를 거부했다. 인간이면 인간답게.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거두어지는 숨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젊었을 때의 모습은 없고 노쇠한 얼굴에 마른 몸이었으나 강백호의 눈에 비치는 양호열은 찬란하고 젊게 빛나던 젊은 시절의 양호열로 보였다. 힘없는 손이 제게 내밀어지고, 그 손을 잡았을 때. 힘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미약한 목소리가 제게 전해지던 마지막 순간을 기억했다.
“미안해.”
양호열의 마지막 말은 그 한마디 뿐이었다. 심전도에 아무 움직임 없는 직선이 그어지고, 입가에 씌워진 마스크에 습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도. 안그래도 차가운 손이 시린 감각을 전하며 힘없이 미끄러질 때도. 강백호는 양호열의 모든 순간을 눈에 새겼다.
우리의 사랑은 태양처럼 뜨거웠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태양과 달 사이의 거리만큼 멀었다.
네가 느꼈듯 나 역시 우리의 사랑에, 태양과 달과 별만큼의 거리감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네가 마지막에 내게 건냈던 ‘미안해’라는 말만이 유일하게 안드로이드로 다시 태어난 나를 향한 말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우리에게 태양과 달과 별의 거리만큼 먼 시간이 지나고 난 뒤였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은 태양과 달과 별만큼의 거리가 있었고
그와 동시에 태양과 달과 별만큼의 크고 많은 사랑이었다.
그러니 나는 내 속에 자리한 엔진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그 거리를 헤아보려 해.
태양과 달과 별만큼의 거리를.
- 우리의 사랑은 태양과 달과 별만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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