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열 (시리즈)

[백호열] 행복해?

업로드 2024.01.24

* 백호열 너를 위한 수호천사! 후속편

* 백호열 트친 생일축하연성

* 글의 특성상 태섭네 언급 있음

* 모바일 작성/PC 작성


할 줄 아는 거라곤 호열이 다쳐왔을 때 천사의 힘으로 치유하는 것 외에는 없는 수호천사 백호와 지낸지 3개월이 지났다. 백호는 호열의 눈물 젖은 교육 덕분에 전자기기를 박살내는 일은 줄었지만 이상하게 멀쩡한 전자기기들이 백호의 손에 잡히기만 하면 원인 모를 고장이 나 결국 모든 집안일을 호열이 하기로 했다. 그 이유를 아는 건, 백호 뿐이다. - 백호의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이 그리 되는 이유를 안 건 한참 뒤의 이야기다.-

호열은 불린 쌀을 전기밥솥에 담고 취사 버튼을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 모를 고장으로 집안일에 손을 못 대게 했더니 입이 댓발 나온 백호 때문이었다. 충분히 이유를 설명했으나 백호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못마땅해했다. 수호천사인데 치유 말고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싫다고 했다. 자존심 상해하는 것 같아 네 손에 닿는 모든 것의 파손으로 돈이 너무 많이 나간다는 말은 할 수 없어 이리저리 돌려가며 말해서 그런가. 치유만으로도 충분하다고말해서 그런가.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호열이 생각했다. 씽크대에서 손을 씻다 손목으로 시선이 향한다. 최근 걸려온 시비에 응하다 상대가 휘두른 딱딱한 물체에 맞은 탓에 뼈가 어긋났던 곳이다. 싸우는 동안은 몰랐는데 끝나고 나니 잔뜩 부어올라 뭐가 있겠구나 했는데 뼈에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다. 병원에서 사진을 찍고 반깁스로 고정한 뒤 집에 들어왔더니 청소 목적으로 쥔 청소기 모가지를 반토막 내고 들여다보던 백호를 마주쳤다. 손목보다 청소기가 더 문제라 호열이 뭐라 하려는데 백호의 표정이 너무 매서워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미 운명한 청소기를 살려보겠다고 부서진 틈을 맞추던 백호가 손에 쥔 것을 휙 던지고 호열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키도 그렇고 덩치도 커서 현관에 서 있는 호열에게 닿기까지 몇 걸음 되지도 않았다. 처음 마주했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호열은 누구를 마주하든 졸아붙은 적 없는 기백 2미터의 남자였으나 이상하게 백호를 앞에 두면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느꼈다. 이상하지. 그럴때마다 호열은 눈 앞의 존재가 확실히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에 미묘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 왜 자꾸 다쳐오는 거냐.

- 어… 시비가 많이 걸리니까?

- 내가 혼꾸녕 내줄까?

-  … 천사가 그래도 되는거야?

그나저나 혼꾸녕이라는 말은 어디서 배운거야… 혼자 생각하는데 입이 또 댓발 나온 백호가 큰 손으로 호열의 손목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 너 다쳐올 때마다 뭔가 속상하다.

- 그치만 이거 아니면 수호천사님께서 할 줄 아는 게 없지 않아?

- 누, 누우웃…!

백호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호열이 웃었다. 욱신거리던 손목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가볍고, 통증이 사라져 있었다. 반깁스를 벗겨내 손목을 매만지던 호열이 백호를 보았다.

- 내가 다쳐오면 속상해?

- 응.

- 수호천사니까?

- 눗?

백호가 호열을 보았다. 호열은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수호천사라는 존재에게서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 수호천사잖아. 대상을 지켜주는. 근데 인간에게 더 큰 개입은 못 하고. 지켜야하는 대상은 계속 싸움질이나 해서 크고 작은 상처나 달고오고. 꽤나 속 썩히는 대상인 것 같단 말이지.

백호는 호열의 집에서 나갈 수 없었다. 능력 제한이었다. 그에 대한 설명은 백호의 선배 천사인 태섭이 해줬다. 천사가 된지 400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죽음의 검은 천이 드리워진 인간의 운명을 바꿔버린 것을 백호가 가진 힘이 감당하지 못 해서라는 거였다.

쉽게 말해 본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 그 이상을 발휘한 바람에 패널티로 호열의 집까지가 백호의 활동 영역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이상하게 집안 도구들은 손만 대면 부숴먹지, 호열의 집에서 나갈 일-호열 대신 장을 봐야한다던가-이 생길 때마다 태섭을 호출해야 그의 힘으로 나갈 수 있으니. 그의 입장에서 답답해할 만도 했다.

그런데 그런 것 보다 자신이 다치는 순간마다 치유하고 싶은데 그걸 못 하는 게 싫은 거라고 얘기를 하니까 호열 입장에서는 받아본 적 없는 케어 서비스에 가슴이 몽글해질 수 밖에. 뭔가 간질간질한 것 같고.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느낌이 들고.

다쳐오는 게 싫다하니 항상 받아주던 시비도 어지간한 게 아니라면 그냥 피하게 되고.

양 옆으로 붙은 꼬맹이들도 귀찮아 죽겠다는 태섭에게, 안에만 있으면 답답해할 후배 천사 기분 전환 좀 시켜달라고 주기적으로 연락을 넣게 되고.

다 박살내서 그렇지 집에서 하는 모든 일이 자신을 위한 일인 걸 아니까 화도 못 내고 알바나 착실하게 하게 되고. 학교는 뭐… 어쨌든 출석은 꼬박꼬박하고 있으니까 졸업은 할 수 있을테고.

그러니 호열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마냥 이상한 건 아니라는 거다. 그것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 했기에 본인도 왜 이런 질문을 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 싸움질 그만할까?

- ! 진짜?

- 근데 그거 그만두면 딱히 할 게 없는데.

- 할 게 없다고 싸움질을 한다니 인간은 역시 이상한 것 같다, 호여라.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에 호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새 또 둥글해져서 후눗? 하고있는 백호의 손을 잡는다. 백호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 네가 바라는대로, 싸움질 그만두려고 노력해볼게. 여태 삐딱하게 살아서 이제와서 반듯해질 수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걱정마라! 이 천재가 도와줄 테니까!

- 대체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야?

호열이 다시 웃었다. 백호가 따라 웃는다. 어째, 백호를 만나고 나서 진심으로 웃게되는 날이 많아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호열은 알바를 하면서, 백호가 고장내는 가전제품이 줄어드는 만큼 월급날이면 백호를 위한 것을 하나씩 사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만화책이었고, 어떤 날은 백호가 맛있다고 했던 음식을 포장해오기도 했다. 백호는 호열의 집이라는 작은 세상 속 인간 세상에 적응하고 있었다. 잘 보지 않던 TV도 백호가 보기 시작한 이후로 항상 틀어놓았다. 백호는 TV에서 봄의 풍경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고보니 본명의 축일(세례명으로 따온 성인의 생일)이 4월 1일이라 한창 봄이긴 했다. 생일이 봄이라 그런지, 연한 분홍과 하양 사이에 흐드러지게 피어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을 흩날리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백호는 벚꽃의 풍경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백호의 붉은 머리는 짙긴 했으나, 벚꽃의 안쪽으로 갈수록 붉어지는 모습을 생각하면 퍽이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끼워맞춘 생각이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호열은 그렇게 생각했다.

월급이 나오면 음식을 사가든, 장난감을 사가든, 책을 사가든 할 순 있었지만 봄을 살 수는 없었다.

호열은 학교에서 수업을 가르치는 선생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멍하게 고민했다. 백호에게 봄을 선물하고 싶었다. TV가 아닌, 실제 벚나무를 보게 해주고 싶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눈처럼 흩날리는 그 모습을 보게 해주고 싶었다. TV도, 사진도 아닌 실제의 모습을 보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호열은 그런 능력이 없었다. 그러니까, 백호를 제 집에서 밖으로 나오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태섭을 찾아가보기도 했지만, 어째서인지 태섭은 만나면 만날수록 좋지 않은 안색을 한 채 고개를 저었다.

- 얼굴이 왜 그래?

- 별 거 아냐. 그래서, 백호를 밖으로 나가게 해주고 싶다고?

- 응. 백호가 벚꽃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음에 봄이 오면 보여주고 싶어서. 봄도 아닌데 봄을 만드는 건 천사라도 할 수 없는 일이잖아.

- 그거라도 잘 알아서 다행이네. 봄… 지금이 가을이니까….

태섭은 허공에 시선을 두더니 손을 들어 어깨죽지를 만지다 고개를 끄덕였다.

- 근처에 벚나무 보기 좋은 곳이 있는지 한 번 알아봐. 너무 멀리까지 나가는 건 나라도 좀 힘들거든.

- …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신경쓸 거 없다니까. 태섭은 그 말을 끝으로 다음에 돌아올 봄을 기약하고 제 집으로 갔다. 호열은 그 뒷모습이 신경쓰였지만, 본인이 신경쓸 거 없다고 한 걸 보면 개입을 원하지 않을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백호보다 선배고, 힘도 강하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시간이 지나고 가을이 겨울로, 겨울이 봄으로 넘어갔다. 호열은 TV에서 봄의 풍경이 계속 나올 수 있도록 TV를 인터넷에 연결해 봄의 풍경이 나오는 채널을 고정으로 틀어놓았다. 리모콘 동작법을 알려줬으니 질릴만큼 보고 다른 게 보고싶다면 다른 채널도 보겠지.

마주앉아 식탁에서 밥을 먹고있는데 백호가 말했다.

- 호여라.

- 응.

- 내가 네 수호천사잖냐.

- 응.

- 너는… 나 만나서 행복해졌냐?

- …응?

호열이 백호를 보았다. 깨작이던 백호가 호열에게 말했다.

- 너를 행복하게 해주는 수호천사인 나는 지금 너랑 같이 있는 이 순간들이 무지 좋거덩. 너는 어떤가 싶어서. 내가 물건도 많이 부수고 치유밖에 할 줄 모르고. 밖에 나가서 너를 돕지도 못 하는데. 그래도 행복한가 싶어서.

한번씩 백호는 호열에게 행복한지 확인받고 싶어했다. 잘 웃긴 한데 행복해보이는 티가 별로 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아마 평생 혼자 살아오면서 깊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아왔던 것 때문인 것 같은데,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이 순간만 되면 호열은 제 포커페이스가 원망스러워지곤 했다. 백호가 누차 확인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에게 행복을 느끼지 못 한다는 것 같아서. 백호가 제 눈치를 보는 게 싫어서.

- 나 너 만나고 불량청소년 생활 청산했잖아?

- 눗…….

- 내가 행복하지 않았다면 네가 날 치유할 수 있다는 명목으로 더 싸움질을 하고 다녔겠지?

- …그런가…….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도 백호는 긴가민가 하고 있었다. 밖에서 생활하는 것이 싹 바뀐건데 집 안에서의 호열은 좀 더 자주, 진심으로 웃게된 것 말고는 큰 변화가 없었으니 체감하지 못 하는 것 같았다.

밖으로 나갈 수 있으면 주위에서 나를 보고 얼마나 놀라는지 볼 수 있을텐데.

백호가 받은 패널티의 기간을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언제까지 태섭에게 부탁해 백호를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호열이 테이블을 손 끝으로 두드리다 물었다.

- 아직 혼자 힘으로는 밖에 못 나오지?

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열이 한숨을 내쉬었다.

- 내가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

- 당연하지? 네가 밖에 나갈 수 있었으면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 알 수 있을 거잖아. 난 너로 인해 삶의 행복을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변했는데. 정작 너는 밖에 못 나오니까 변한 나를 보지 못해서 내가 정말로 행복한 게 맞는지 의심하니까.

- 의, 의심 아니거든!?

정곡인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호열이 말했다.

- 네가 나갈 수 있으면 같이 벚꽃도 보러가고 싶었는데.

- 눗?

- 너 좋아하잖아, 벚꽃. 네가 봄을 볼 때마다 화면 속 벚꽃이 아니라 실제 벚꽃을 보여주고 싶었어. 둘이… 같이.

그렇게 말하는 호열의 손끝이 붉었다. 백호가 시선을 들어 호열을 보았다. 시선을 돌려 딴청 피우는 호열의 귀가 붉어져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낀 백호도 다시금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 호여라.

- …응.

- 나… 좋아해?

백호의 손 끝이 호열의 손 끝에 닿았다. 호열의 손이 움찔하더니 주먹을 쥔다. 그 위로 백호의 커다란 손이 덮였다.

- 나는… 너 좋아해. 수호천사로써가 아니라, 네가 정말로 행복해했으면 좋겠어.

- …바보야.

말아쥐었던 손을 편 호열이 손을 뒤집어 백호와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 내가 행복하지 않았다면 좋은 방향으로 바뀌지도 않았을 거야.

행복하다고.

너 때문에.


둘 다 밥을 입으로 먹는건지 코로 먹는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뚝딱거리면서 식사를 마무리한 뒤 거실 소파 밑에 앉았다. 백호가 먼저 앉더니 다리 사이를 팡팡 두드려 호열이 그 사이에 앉았고, 자연스럽게 백호가 그를 끌어안고 정수리에 뺨을 부빈다.

'우… 우와아… 자연스러운 스킨십……!'

의식하기 전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분위기가 그리 됐다보니 엄청 부끄러워졌다. 그… 그러고보니 천사는 어떻게 사랑을 하지? 인간과 똑같나? 손을 잡고, 껴안고, 입을 맞추고? 호열이 백호의 크고 단단한 손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TV에서 익숙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해변가 근처 도로 가로수로 벚나무를 심어 벚나무길을 만들어놓은 곳으로, 호열이 사는 곳과 그리 멀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나가야했지만.

호열은 봄이 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침과 저녁으로 자전거를 타고 나가 벚나무길이 아름다운 곳을 찾아다니며 영상을 찍었다. 인터넷에  업로드해 백호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태섭과 장을 보러 다녀오는 길이었는지 백호가 신나하며 아는 체 하는 게 기뻤다. 그만큼 같이 나가지 못 하는 게 아쉬웠다.

- 같이 나가서 보면 더 좋았을텐데…….

호열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백호가 말없이 그의 뒷목을 내려다본다. 호열이 찍은 영상 멀리 바다가 보였다. 백호가 말했다.

- 바다 위에 커다란 벚나무가 있으면 더 예쁘겠지?

- 바보야, 벚나무가 어떻게 바다 위에 있어?

- 그럴 수도 있지! 파란 바다에 비치는 커다란 벚나무에 가득 핀 벚꽃은 정말 근사할 거야.

- 말도 안 되는 소리.

호열이 웃었다.

- 그래도 정말 그게 된다면 예쁘긴 하겠다. 파란 하늘일 때도 예쁠 것 같은데 노을질 때면 더 예쁠 것 같긴 하네. 불가능하겠지만.

호열의 말에 백호가 그를 내려다 보며 좀 더 힘주어 끌어안는다. 백호야? 하며 팔을 타고 올라오는 손길이 따스해 그의 어깨에 재차 뺨을 부빈다.


백호와 그런 대화를 나누고 며칠이 지났다. 호열이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학교에 출석만 하고 수업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데 옆에서 소곤소곤 웅성웅성 하는 소리가 들려 시선을 돌렸다.

- 와아, 이거 진짜야?

- 너무 예쁘다…….

여자애들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예전같았으면 관심 갖지 않았을텐데 예쁘다는 소리에 백호에게 보여줄법한 건가 싶어 호기심이 일었다.

- 뭔데 그래?

호열이 작게 묻자 휴대폰을 보여준다.

쿵.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감각과 동시에 호열의 눈이 커졌다. 여자애들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왕왕 울렸다.

이거 봐. 바다 위에 이렇게 커다란 벚나무가 생겼어! 말도 안 되는데 너무 예쁘지 않아?

호열이 시끄럽게 의자를 밀며 벌떡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호열에게 몰렸다. 선생이 또 너냐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 하기도 전에 호열이 뛰쳐나가며 외쳤다.

- 몸이 안 좋아서 조퇴합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빠르게 학교를 빠져나온 호열이 백호 모르게 산 오토바이 시동을 걸고 휴대폰을 꺼내 태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태섭이 전화를 받자마자 외친다.

- 강백호 어디있어!

-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집에만 있을 애를 왜 찾아?

- 뭐? 백호랑 같이 있는 거 아니야?

- 네가 얘기한 것도 없는데 왜… 뭐야. 무슨일인데? 백호한테 무슨 일 생겼어?!

- 백호랑 바다 위에 벚나무가 필 수 있냐 없냐 하는 얘기를 한 적 있었는데, 오늘 학교 애들 sns에서 바다 한 가운데 핀 거대한 벚나무를 봤다고!

호열의 말을 확인하는지 잠시 말 없던 태섭이 앓는 소리를 내며 외쳤다.

- 거기 어디야! 진짜 이 바보가!

오토바이의 속력을 높이며 호열이 태섭에게 위치를 알렸다. 태섭이 바로 가겠다며 거기서 보자고 하곤 통화를 마쳤다.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빠득 들어갔다.

백호는 집에서 나올 수 없다. 패널티를 받고 있으니까. 그런 백호가 태섭의 도움도 없이 혼자 밖으로 나가고, 저런 힘까지 쓴다? 분명 무리하고 있는 거다. 패널티를 무시하면서 힘을 썼다간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호열이 이를 갈았다. 괜한 소리를 했다. 백호를 자신도 모르게 자극한 것 같았다. 미쳤지. 백호는 인간이 아닌데.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을 법하다고 생각했을텐데. 바보같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자신의 힘이 가진 한계와 패널티의 무게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여태 무리하게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겠지.

그러니 지금은 순전히, 백호가 호열을 위해 무리하는 것이다.

이를 악물어 힘이 들어간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오토바이의 속력을 올린다.

빨리, 백호에게 빨리 가야했다.


호열이 오토바이를 멈추고 넘어질 듯 내려 해변가로 달렸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우뚝 멈춰서 숨을 고르며 멍청하게 그 풍경을 보기만 했다.

바다 위에 솟은 거대한 벚나무. 가득 피어난 벚꽃이 보라색과 주홍빛 사이의 파란 하늘과 그 밑의 바다에 비쳐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만큼 호열에게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혼자 보고자 한 게 아니었다. 호열이 눈물로 뿌연 시야 속에 두리번거리며 백호를 찾았다. 이 아름답고도 이상한 풍경에 사진과 영상을 찍는 사람들만 보였다. 어딜 봐도 백호가 보이지 않았다.

- 아아아…… 백호야…….

바닷물이 발목에 닿을 정도로 다가간 호열이 그대로 무릎 꿇고 주저않았다. 밀려오는 바닷물에 무릎과 바닥을 짚은 손을 차갑게 적셨으나 호열은 느낄 수 없었다. 백호가 저기 있었다. 강백호가 저기 있었다. 스스로 벚나무가 되어 빛나고 있었다. 아름다운 것을 함께 보고싶다고 말하는 제 연인을 위해서.

내 수호천사라면서.

나를 행복하게 해줄 거라면서.

왜 내가 이렇게 엉망으로 울게 하는 거야.

당장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서 나를 안아줘야지.

백호야.

백호야.

- 백호야아…….

호열이 절망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백호는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절망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밀려들어오는 바닷물 위로 호열의 눈물이 떨어져 함께 빠져나갔다. 

그때, 무력한 절망에 빠져있는 호열의 어깨를 누군가 힘주어 잡았다. 호열이 여전히 눈물로 흐린 고개를 들었다.

- 정신차려! 그리고 내 말 잘 들어.

태섭이었다. 호열이 눈을 깜빡여 눈물을 내보내곤 그를 올려다보았다. 엉망인 얼굴을 보고 잠시 놀라던 태섭이, 곧 눈썹을 누그러뜨리며 미소했다.

-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 ……?

- 백호 좋아해?

호열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 백호… 좋아해…….  백호로 인해 살아가는 행복을 알았어. 백호가 있으니까 알게 된 거야. 백호, 백호를 내가 너무 사랑해…….

잔뜩 젖은 목소리의 절절한 고백에 태섭이 옅게 웃었다. 호열의 양 어깨를 잡고 고개 숙인 그를 일으킨다.

- 그럼 너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백호 기다릴 수 있어?

끄덕.

- 백호가 천사가 아니어도 기다릴 수, 사랑할 수 있어?

끄덕.

- 백호가 그 무엇이라도 사랑할 거야…….

호열의 대답을 들은 태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태섭? 호열이 멍하게 그를 보았다. 태섭이 씩 웃었다.

- 사고만 치는 못난이 후배지만. 잘 부탁해.

- …어?

호열이 반응하기도 전에 태섭에게서 눈부신 황금빛이 뿜어져나왔다. 호열이 눈을 가리고, 빛이 약해지자 고개를 들었다.

- 날개가…….

- 어차피, 나는 틀렸으니까.

- 뭐?

- 너 이걸로 빚진거다. 그리고 분명히 말했다. 백호를 언제가 됐든 기다린다고. 백호가 무엇이 되든 사랑한다고.

- 잠깐, 송태……!

백호를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천사의 모습으로 돌아온 태섭이 너덜하고 검게 물들어 녹아내리는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솟구쳤다. 높게 솟은 벚나무보다 더 위로 날아오른다. 금빛이 잔광을 남기며 높이 날아오르는 모습에 벚나무를 보러온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하늘로 향했다. 휴대폰과 함께.

태섭이 외쳤다.

[지금 이 것을 본 모든 인간의 기억과 저장장치의 기록은 모두 사라지고, 그대들이 본 것을 영원히 잊으라.]

태섭으로부터 강렬한 금빛이 터져나왔다. 그 금빛은 순식간에 퍼져나가 하늘을 금빛으로 물들여나갔다. 호열이 그것을 멍하게 보았다. 벚나무가 금빛으로 물들며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호열이 한걸음씩 바다로 들어섰다. 크기가 줄어드는 벚나무가 파도로 인해 호열에게 밀려나오고 있었다. 호열의 다리에 몸이 투명해져가는 백호의 몸이 닿았다. 호열이 울음을 삼키며 백호를 끌어안았다.

- 백호야… 이 바보같은 자식…….

- 헤헤… 어떠냐… 내가 된다고 했지……?

- 그래… 너무 아름답더라…….

- 내가 울렸냐?

- 내가 너 때문에 진짜 미치겠다…….

- 내가 싫어졌냐…?

호열이 백호를 세게 끌어안았다.

- 그럴 리 없잖아, 이 바보야…….

백호의 몸이 투명해질수록 호열이 끌어안는 품이 줄어들어갔다. 멀리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검은 연기를 피워올리며 추락하는 태섭과 그에게 달려가는 누군가가 보였다. 그것을 함께 보던 백호가 말했다.

- 섭섭… 결국 천사 박탈이구나…….

- 뭐?

- 만날 때마다 날개가 썩고 있었어. 아버지께 매일 기도드리는데도 날개가 썩는다는 건, 아버지가 섭섭에게서 등을 돌렸다는 거거든.

- 그렇다면…….

- 섭섭은 이제 인간으로 살아갈거야.

호열이 태섭쪽을 보다 백호를 보았다.

- 그럼 너는. 너는 뭐야? 너는 어떻게 되는건데?

- 나는…….

백호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졸려보였다. 호열이 다급하게 외쳤다.

- 너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강백호!

- 나는… 일단 아버지께 돌아가면… 심판을 받고…….

- …백호야?

백호가 호열을 보았다.

- 호여라.

- …….

- 호여라.

- …왜 이 자식아.

- 나 만나고 행복했냐?

- …자꾸 당연한 거 물을래? 너 만나서 행복했어! 네가 날 행복하게 만들어줬잖아! 내가 너 없이 안될 정도로 행복하게 만들었다고! 백호야… 제발 나 두고 사라지지 마…….

백호가 손을 들었다. 뺨을 적시는 눈물에 손을 대었으나 투명한 손으로는 그것을 닦아줄 수 없었다.

- 나도 너 만나서 행복했다. 호여라.

- 사라지지 말라고…….

- 내가 너 많이 좋아해.

백호가 씩 웃었다. 호열이 외쳤다.

- 나도 너 좋아해! 많이 좋아해! 너를 만나고 엉망이던, 의욕 없던 삶이 행복으로 가득해졌어! 너와 함께할 미래를 꿈꾸게 됐어! 백호야. 백호야. 제발. 제발… 나 두고 가지마, 백호야……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한다고…….

품안에 느껴지던 존재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호열이 오열했다. 희미하게 남은 온기를 그리며 울고 또 울었다. 

수호천사라더니 거짓말쟁이였어.

내가 이렇게 우는데. 이렇게 슬퍼하는데.

왜 내 곁에 없는거야. 수호천사라면서.

행복하게 해주겠다면서.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내가 사랑한 거짓말쟁이 수호천사.

나를 위한 수호천사……


- 오늘도 여기?

- 시꺼.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곳이다. 백호를 떠나보낸 이 바닷가는. 호열은 매일 하루에 한 시간씩 백호를 보낸 이 곳에 서 있다 돌아가곤 했다. 태섭을 뒤로한 채 돌아보지도 않는 호열이 담배를 피웠다.

- 백호가 있었다면 대번에 잔소리했을텐데.

- …시끄럽다고 했다.

- 10년은 더 지났는데 백호 잊을 때도 안 됐나?

- 간만에 찾아와놓고 왜 시비지?

- 간만에는 내가 할 소리지. 평소에 연락도 안 받아놓고.

- 연락해도 그 껌딱지 꼬맹이들한테서 숨겨달란 거였잖아.

- 그 꼬맹이들이 나보다 훌쩍 크고 힘도 좋아져서 이길 수 있어야지.

대화를 이만큼이나 하는데도 호열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는다. 태섭이 날개죽지가 가려워져 한번 긁고는 뒤를 흘끔 보았다. 다시 호열의 등을 본다.

- 행복하냐?

- …넌 내가 행복해보여?

- 백호는 네가 행복하길 바랐는데.

- …….

호열이 손에 쥐고있던 담배를 부러뜨렸다. 돌아서려는 것을 멈춘다. 고개를 숙여 담배를 쥐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깊은 한숨을 쉰다.

- 걔가 알려줘서 알게된 건데 걔 없으면 무슨 소용이야?

- 그거 백호가 있으면 다시 행복해진다는 얘긴가? 안 어울리는 순애네.

- …그러니까, 왜 자꾸 시비를-.

- 들었지? 그렇다네, 백호야.

…뭐?

한 번도 돌아보지 않던 것이 거짓처럼 쉽게 휙 돌아섰다. 씩 웃는 태섭의 앞에 그보다 조금 작은 백호가 멋쩍게 서 있었다. 손에 쥐고있던 담배가 툭 떨어진다. 입술만 달싹이는데 백호가 그랬다.

- 이 몸이 돌아왔으니 다시 행복해지는 거냐?

작은, 어린 백호가 씩 웃었다. 제가 사랑했던 그 웃음이었다. 멍하게 보던 눈에서 눈물이 왈칵 터졌다. 백호의 어깨를 잡고있던 태섭이 그를 밀자마자 호열이 달려가 와락 끌어안았다. 품을 가득 채웠던 부피감은 줄었지만 여전히 강백호였다.

- 담배냄새.

- …윽. 미안.

- 이 몸이 등장했으니 끊는거다!

- 응. 응. 오늘부터 당장 끊을게.

백호가 조심스레 호열을 안으며 말했다.

- 나… 이제 치유도 못 하는 평범한 인간인데 그래도 괜찮냐?

호열이 끌어안았던 팔을 풀고 백호의 얼굴이며 팔이며 쓸어내리더니 웃으며 말했다.

- 네가 그 무엇이든 상관없어. 너만 내 곁에 있으면 난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

백호의 얼굴이 밝아졌다. 서로를 다시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보던 태섭이 짓궃은 표정으로 말했다.

- 나이차이가 열 살이 훨씬 넘지만~

- …시꺼!

- 푸핫!

나이 차가 별건가. 둘은 종족도 초월한 사랑이었는데. 이제 둘 다 행복하게 살겠네. 태섭이 둘을 보며 웃었다.

- 호여라. 행복하냐?

- 응. 나 너무 행복해. 너라는 행복이 내 옆에 잏어서, 난 평생 행복할거야.

- 나도! 나도 너랑 다시 만나게 되서 행복하다, 호여라!

- 행복해?

- 응. 행복해! 사랑해, 백호야.

- 나도 사랑해, 호여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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