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열 (단편)

[백호열] 너를 위한 수호천사!

업로드 2024.01.03

* 인 외 조 아

* 백호열 트친 생일축하연성

* 천주교 관련 소재를 소량 끌어오고 날조양념을 대량쳤읍니다. 소재만 일부 차용한 거라 실제 종교에서 얘기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알립니다.

* 모바일 작성


호열은 패싸움을 끝낸 직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학교 옥상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눈 오는 흐린 하늘을 멍하게 본다. 숨이 느릿해지고 있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이 아주 느리게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 세상에 느려져가는 호열의 숨소리만 들리는 듯 했다. 느려지는 숨만큼 느리게 눈을 깜빡인다.

함께 다니는 무리가 있다. 끼리끼리 논다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량학생들이지만 질이 나쁜 이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질로 따지면 내가 더 나쁜가. 호열은 멍하게 누워있는 상태로 피식 웃었다. 이렇게 피와 상처가 많은 싸움은 호열이 얽히면 꼭 빠지지 않았다. 자잘한 상처만 있던, 일명 호열의 군단은 주축인 호열을 노리는 싸움이 벌어지면 항상 피를 봤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호열이 자신처럼 널부러져 뻗어있는 제 친구들을 보다 다시 하늘을 보았다. 느리게 눈을 감는다. 목표도 없이 정처없이 세상을 떠다니는 게 조금은 지겹고, 지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혼자 왔다 혼자 가는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교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가족관계를 떠올려본다. 불량학생이라고 낙인과 편견으로 저를 찍어누르려는 선생을 떠올려본다. 군단 외에 다른 이들이 저를 보며 불편해하고 때로는 무서워하던 시선을 떠올려본다.

숨이 느릿해진다.

눈이 느리게 깜빡인다.

이대로 깨어나지 않을 영원한 잠에 들고 싶어졌다. 숨이 느릿해진다. 눈을 느리게 깜빡인다.

- 안돼, 마카리오!

…응?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학교 옥상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는데.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불량학생이라도 엄한 곳에 불똥 튀는 건 사양이었다. 특히 군단 녀석들에게 튀는 건 더욱.

호열이 눈을 떴다.

태양.

호열은 제게 달려오는 태양의 빛을 느꼈다. 느릿하게 깜빡이던 눈이 커졌다. 고개를 뒤로 꺾어 군단 녀석들을 찾았다. 아무도 깨어있지 않았다. 이거, 위험한 거 아냐!?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양쪽 뺨을 가득 감싸쥐는 뜨거운, 손길을 느꼈다. 태양의 빛에서 뜨거운 손길이, 느껴졌다.

- 아! 저 어리석은!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다니!

호열이 눈만 굴렸다. 목소리가 어디서 들리는지 당최 알 수 없었다. 하늘 사방에서 들려왔으니까. 자신의 얼굴을 붙든 손길이 억세서 고개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호열이 굴리던 눈을 제자리로 굴렸다. 태양의 빛을 머금은 찬란한 두 쌍의 날개가 펄럭였다. 호열의 눈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을 담은 빛덩어리가 실루엣을 형상하는 것을 따라 보았다.

- 천,

- 이 천재 천사가 보는 앞에서 인간이 죽는 건 볼 수 없지!

- 뭐?

- 마카리오!

다급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쏟아졌다.

- 죽음을 앞둔 운명을 거둬들이다니! 대체 어쩔 셈이야!

…어? 뭐라고?


호열이 침을 삼켰다. 몸이 가라앉아가던 감각이 사라졌다. 크고 작은 상처는 태양빛의 손길이 닿던 순간에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해본다. 눈 앞에 선 존재를 본다. 시선이 자연스레 위를 향했다.

- 너 왜 이렇게 작은 거냐? 다 큰 게 맞는 거냐?

- …남이사… 요.

짧게 깎인 붉은 머리를 벅벅 긁은… 그러니까… 천사……는 호열을 내려다보며 목을 좌우로 꺾었다. 우득거리는 소리가 선연해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상대가 자신보다 키가 크다고, 덩치가 크다고 기 죽어본 적이 없는데 눈 앞의 존재에게서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방심할 수 없는 위험한 예감이 비명을 질러댔다.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감각에 계속해서 입 안의 침이 바싹 말랐다.

천사가 이렇게 크고 위협적이게 생겨도 돼?

갈색에 가까운 눈 속 홍채 테두리가 새빨갛게 타오르다 찬찬히 빛이 사그라든다. 어깨를 돌려보던 천사가 허리를 틀자 빛가루를 뿌리던 커다란 날개가 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앙증맞게 줄어있었다.

- 하 나 미치겠네…….

한참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다시 들리자 호열이 두리번 거린다. 눈썹을 씰룩이던 천사가 그 모습을 보다 어딘가를 보며 외쳤다.

- 이 인간은 죽기에 너무 아깝다고!

- 천사가 인간의 정해진 운명에 개입해서 뭐하려고! 그러다 벼락 맞고 날개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 이냐시오! 이 몸의 날개를 봐라! 벼락은 커녕 이 인간을 수호하라는 의미로 아기천사의 날개로 바꼈잖냐!

- 아오! 마카리오! 너의 본분이 뭔데!

- …….

천사도… 말다툼… 하는구나……. 호열이 태산같은 천사…와 눈에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서로 투닥거리는 모습에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기 바빴다.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이름만 들리지 않았다. 뭐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이 세상의 언어로 이루어진 게 아닌듯한 느낌이 들었다. 발음을 따라해보려 해도 혀가 굳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낱 인간 따위가 따라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처럼.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싶은데 귀가 번쩍하는 순간이 있어 호열이 고개를 들었다.

- 수호?

- 오! 우리 얘길 들었나본데?

눈 앞의 천사가 어깨를 으쓱하자 말다툼하던 목소리가 침묵했다. 이내 눈 앞의 천사와 달리 금빛을 뿌리며 옥상에 발을 내린다. 붉은 천사의, 처음 마주했던 날개와 같은 커다란 두 쌍의 날개가 펄럭이다 등 뒤로 가지런히 접힌다. 저와 비슷한 키에 호열이 홍채 테두리가 금빛을 띄고있는 천사를 마주보았다. 금빛의 천사는 갈색의 곱슬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채 밑머리를 시원하게 밀어놓은 외형이었는데, 현실에서 있을법한 헤어스타일이라 천사 중에서도 패션에 신경을 쓰는 이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 꽤나 무례한 생각을 하고있나본데.

찔끔한 호열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두 천사는 어디 영화나 만화에서 볼 법한 흰 천을 옷처럼 두르고 있었다. 양쪽 손목과 발목에 금빛으로 반짝이는 링을 걸고 있었고, 옥상을 딛고있는 발은 맨발이었다. 머리 위로 천사링은 보이지 않았다. 저 키, 덩치, 외형들을 생각하면 천사링이 없는 게 차라리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그러니까 무례한 생각 그만하라고.

- 아.

키가 비슷한 천사의 일침에 호열이 박터지는 소리를 냈다. 키 큰 천사가 두어걸음만에 호열의 뒤에 선다. 마주본 천사의 삐딱한 눈썹이 가팔라진다. 천사들이 인상이 이렇게 험해도 돼?? 이거 영화나 만화에서 선입견을 주입하고 있던 건가? 천사들은 미화된 존재인가?

- 거 생각 그만 좀 하고.

- 아.

무럭무럭 자라는 상념을 깨뜨린 목소리에 호열이 머쓱하게 뒷목을 쓸어내렸다. 그런 호열을 보던 천사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 이 이름도 들리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이름이 호열의 귓가를 맴돌다 그대로 흩어졌다. 호열이 고개를 젓자 천사가 흠, 하며 말했다.

- 이 근처에 신앙이 신실한 자가 있어. 그 자를 통해 인간 세상의 이름을 받아올테니 여기 있어. 알겠냐! 마카리오!

- 아! 알겠다고!

금빛의 천사가 날개를 퍼덕여 공중으로 떠올랐다. 호열이 그대로 올려다보다 눈을 크게 떴다. 잿빛으로 물들어 눈을 뿌리던 하늘이 학교 옥상에서만 맑게 개어있었다. 옥상 너머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금빛의 천사가 처음 그대로 금빛이 되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 여기서 왜 싸웠냐?

- 어? 어… 네?

- 말 편하게 해도 돼. 난 이제부터 너의 수호천사니까.

- 수호천… 엥?

에에에에에엥?!

참으로 황당한 만남이었다.


호열의 수호천사는 강백호라는 이름을 얻었다. 인간세상의 이름이라더니 아무리 얘기해도 알아들을 수 없던 본명과 달리 또렷하게 귀를 파고든다. 본의 아니게 송태섭이라는 이름을 얻어온 금빛의 천사는 그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안색이 좋지 않았으나 그가 먼저 얘기하지 않아서인지 강백호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크게 중요하진 않은가. 호열은 멍하게 제 앞에 선 수호천사를 보았다. 정확히는 그가 손에 쥐고 있는 제 집의 전자제품을. 다른 천사, 태섭이 말했었다. 백호는 호열의 수호천사가 되어 호열과 함께 지낼 거라고. 죽었어야할 운명을 멋대로 거둔 죄로 힘을 봉인당해 호열의 집 안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태섭의 말을 반쯤은 흘려었던 것이 후회가 됐다.

- 아. 이게 왜 이렇게 되는 거냐?

- …….

그때 백호가 태섭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는다기 보다 그럴만한 눈치가 없다가 더 정확하겠다. 고 생각했다. 호열은 여태까지 미디어 매체에서 부르짖은 천사의 이미지는 다 거짓투성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없는 집안 살림 다 부숴먹고 있는데 이게 어딜봐서 천사냐고. 호열이 패싸움을 하고 다쳐오는 날이면 태양처럼 찬란한 빛이 백호의 손을 타고 넘어와 치료하는 그 순간만 백호가 자신의 수호천사라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그 말인 즉슨,

- 어! 야! 호여라! 이거 또 부서졌다! 이거 불량아니냐?

- …하아아…….

호열의 수호천사 강백호는 치유 능력을 빼면 모조리 빵점이란 뜻이었다. 백호는 호열 외에는 아무것도 수호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이걸 좋아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호열의 집에 있는 가전제품에게는 슬픈 일이 맞겠지.


호열은 아르바이트를 늘렸다. 평소처럼 받은 월급으로 빠칭코를 가진 않았다. 거기에 돈이 들어가기도 전에 개박살 나는 집안 살림을 메꾸기에도 벅찼다.

백호는 정말… 정말, 치유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쌀을 씻고 넣고 버튼만 누르면 되는 전기밥솥을 박살내고, 냉장고 문이 활짝 열리지 않는다고 확 열었다가 냉장고 문짝을 뜯어버렸다. 아르바이트로 어찌해볼 수 없는 금액의 가전제품은 귀신 같이 알아서 이것저것 만져보다 다 부숴먹었다. 나를 구하러 온 구원자가 아니라 타락시키러 온 악마 그 자체라고 보는 게 더 가까울 것이다. 이 얘기 한 번 꺼냈다가 거하게 삐친 이후로 입 밖으로도 꺼내지 않았지만. 천사는 천사인가 보네 싶다. 악마 얘기에 저렇게 거품을 무는 걸 보면.

그래도 호열의 집에서 보면 백호는 아무래도 천사보다 악마에 가깝겠지. 백호의 손에 처참히 부서져간 가전제품들이 생각하기에.


호열은 언젠가 백호를 앉히고 천국에 대해 물었다. 백호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말했다.

- 거기는 모든 것이 넘쳐나는 곳이야. 배 곯을 일도 없고, 아플 일도 없어. 싸울 일도 없고. 아버지(하느님이라고 했다.)의 나라니까 백성들이 평생 고통받지 않고 행복하게 지내는 곳이거덩. 아버지가 바라는대로 아버지를 찬미하고 노래하기만 해도 충분해. 여기 인간 세상처럼 밥을 해먹지 않아도 되고, 일 하지 않아도 되고, 싸울 필요 없는 곳이야. 그 곳은.

- …….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삶.

듣는 이로 하여금 혹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일텐데도 종교에 관심도, 흥미도 없는 호열에게는 아주 까마득한 얘기였다. 천국은 누구라도 갈 수 있냐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 일단 아버지의 백성임을 증명해야지? 이냐...아. 태섭이 얘기하기로는 세례를 받아 새로 태어난댔나. 암튼 거기서부터 시작이라고 했어.

- …….

안그래도 썩 와닿지 않는 천국의 입구가 더욱 좁게 느껴졌다. 세례 어쩌고면 성당인가? 어쨌든 종교에 귀의해야한다는 거잖아. 무교인 사람들은 어느 종교에서든 찬밥신세군. 천국 얘기를 하는 게 재밌기라도 했는지 호열에게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면서도 백호는 말을 줄줄 해댔다. 천국 관련으로 이렇게 다 말해도 되는건가? 어디 천벌받고 그런 건 아니겠지?

- 아무튼 인간에게는 정해진 운명이 있는데, 그걸 거스르면 안 돼.

백호의 말을 흘려듣던 호열이 눈을 번쩍 떴다. 백호를 보자 그는 언제부터였는지 호열을 보며 웃고 있었다. 가슴께가 뜨끔해오는 것을 느끼며 호열이 물었다.

- 그때 처음 만났을 때도 그 얘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 그 말은 내가 그 날 죽을 운명이었다는 거야?

- 그렇지?

- 그런데 왜 모습을 드러내면서까지 날 구한 거야? 운명을 거스르면 안되는 거 아냐?

- 그렇지? 송태섭 말에 따르면 인간의 운명은 함부로 바꿀 수도 없을 뿐더러 그 운명을 거스르게 한 자도 그 댓가를 치루게 된다고 했으니까?

호열의 눈이 빠르게 백호를 훑었다. 육안으로는 크게 보이는 변화가 없었다. 날개가 작아진 것을 빼면. 아. 태섭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호열의 집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던 그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게 댓가인가. 호열이 생각했다. 그러다 궁금해졌다.

- 너는, 왜 내 운명을 거스르면서까지 날 구한… 이게 맞나? 왜 나를 구한 거야?

딱히 그대로 죽었어도 상관 없었을텐데. 눈 앞에 자신의 운명을 뒤집은 상대 앞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호열이 뒷말을 삼켰다. 그런 호열을 보던 백호가 태양을 품은 빛을 한 눈을 접으며 웃었다.

- 몰랐냐? 너 나랑 눈 마주쳤었잖아. 나한테 살고 싶다고 했는데. 구해달라고. 살려달라고 그랬어. 그래서 네 머리 위에 드리워진 죽음의 천을 걷어낸 거야. 네가 살고자 했으니까.

백호는 입을 벙긋거리는 호열을 보았다. 아마 인간인 그는 최초로 눈이 마주친 순간을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인간의 눈에 천사는 볼 수 없는 존재니까. 천사는 그만큼 신앙이 신실한 자에게나 보이는 존재였다. 천국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숨을 받아 태어난 하늘의 존재. 하늘의 군대. 하늘의 소식을 인간에게 전하는 존재. 아버지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는 존재.

종교 무관하게 전반적으로 신앙이 죽어가는 지금 세상에서 천사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인간은 거의 전무했다. 그렇기에 호열의 목소리는 백호에게 더 크게 다가왔다. 운명이라는 이름의 죽음의 검은 천이 전신을 덮어가는 그 때. 죽어가던 흐린 암녹색의 눈은 본능적으로 태양을 찾았다. 붉게 타오르는 태양의 빛을 찾고, 그에게 삶을 바랐다. 살고싶다고. 죽고싶지 않다고.

그것은 호열이 인식할 수 없는 영혼의 외침이었다. 신앙과는 상관없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자에게 보이는 마지막 기회였다. 죽을 병에 걸려 생명이 꺼져가는 환자가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아무도 없는 방에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고 외치는 것과 같았다. 검은 죽음의 천은 죽어가는 인간의 눈 앞에서만 모습을 드러냈다. 그 눈 위로 검은 천이 드리워지고, 이윽고 두 눈을, 얼굴을, 몸을 덮으면. 죽음이 찾아오는 것이다. 호열에게도 죽음의 검은 천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들었다. 태섭과 함께 이 세상에 보기드문 신앙을 갖고있는 인간을 찾아 날아가던 백호에게 똑똑히 들린 목소리를. 그 영혼의 외침이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태양을 찾는 검은 영혼과 눈을 마주친다. 천국에서 한번도 뛴 적 없던 심장이 그때, 처음으로 생명으로 충만한 박동을 시작했다.

전신을 드리운 죽음이라는 이름의 검은 천을 걷어낸다. 흐려지던 암녹빛 눈에 빛이 돌고, 드디어 맞닥뜨린 태양의 붉음과 운명같은 만남이 성사된다.

…라는 말을 해도 믿지 않겠지. 지금도 저렇게 영혼없이 듣고있으니.

애초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 걸쳐져 있다 기적처럼 살아난 이들은 그 당시의 기억이 없었다. 당연했다. 신의 권능으로 일어난 일을 인간이 어찌 기억하겠는가. 그래서 백호는 호열에게 그 부분까지 얘기하지 않았다. 말해봐야 믿지도 않을테고. 지금 세상의 신앙을 생각하면.

혼란한 얼굴로 내가 그랬다고? 하는 호열에게 어깨를 으쓱해보인 백호가 몸을 일으켰다. 호열이 어어, 하며 얼결에 같이 일어선다.

- 궁금한 건 다 해결됐냐? 나 이제 밥 해야된다. 전자렌지가 터져서 즉석밥 끓여서 데워야 돼.

- 뭐!? 그게 왜 터져?!

백호의 태연한 말에 기절초풍한 호열이 이미 운명한 전자렌지를 끌어안으며 아연실색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호가 히히 웃었다.

운명을 거스르고, 죽음을 거스르게 한 댓가. 그것은 백호가 호열의 집 안에서만 생활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정도로 끝나면 정말 가벼운거지. 다른 것도 아니고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준 일이다. 제 아무리 천사라고 해도 삶과 죽음에 관여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백호가 짊어진 댓가라는 이름의 저주는 묵직하다. 호열은 절대 알 수 없겠지만. 딱히 알게 할 생각도 없고.

커다랗고 장엄하게 빛나던 날개가 날갯죽지에 겨우 매달릴 정도로 줄어들고, 손에 닿는 모든 것이 형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것.

제가 수호하는 호열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백호의 손에 닿으면 어떤 형식으로든 부서져 내리는 것이다. 파괴적인 행위는 천사에게 허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천사라면 원치 않는 댓가였다.

운명 하나 구하는 건데 그 정도면 싼 거지.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도 아니고. 호열이 함께 있는 이 집안이면 어디든 다닐 수 있는 거니까. 백호는 그걸로 만족했다.

아르바이트 월급을 계산하며 좌절하는 호열이 안쓰럽긴 하지만, 목숨값이라고 생각하면 뭐…….

그치?

그리고 그 사실-백호의 손에만 들어가면 모든 제품이 제 형태를 잃게 되는 이유-을 알게 된 호열에 의해 백호는 집안일에 손 끝 하나 대지 못 하게 되어 슬퍼했다고 한다. 

- 그래도 집안일하는 거 재밌었는데.

- 내 목숨 구해준 값으로 평생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살게 해줄테니까 제발 내 지갑은 지키게 해주라.

내 수호천사라면 그 정도는 거뜬하지?

그게 영혼의 고백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얼굴이 희게 질린 호열의 손가락에 난 상처를 치유하며 백호가 웃었다. 밖에서 싸우고 가져온 상처가 백호의 손 안에서 나아간다. 백호가 당당하게 외친다.

- 당연하지! 난 너의 수호천사니까!

- fin.

* 낯선 이름은 애들 생일이 축일인 세례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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