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열 (단편)

[백호열] 순간의 기록

* 느바 백호 X 사진작가 호열

* 시즌 언제 하는지.. 잘 모름 주의

* 사진전.. 한번도 안 가봄.. 잘 모름 주의…..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바래질 기억들을 잊지 않고 생생히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 천재 이 몸! 드디어 미국행이다!

- 축하해, 백호야.

- 이야! 이거 진짜냐? 강백호! 진짜 미국 가는거야? 대단한데!

- 언제 가는 거야? 이럴 때가 아니지! 오늘은 파티다!

- 진짜로 가는구나, 미국! 강백호가 미국 진출이라니! 하하하!

왁자지껄하게 웃는 소리. 즐거운 분위기. 그 속에 우뚝 서있던 너를 기억한다. 축하하면서도 거짓 아니냐며 장난치는 녀석들에게 헤드락을 걸며 응징하는 너를 기억한다. 그때부터였나?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을 영원히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자자. 분위기도 좋은데 먹을 거 잔뜩 사서 근처 공원이라도 갈래? 날도 좋으니 밖에서 먹기 딱 좋잖아.

- 그거 좋은 생각인데, 양호열!

- 좋아! 아~ 뭐 먹지?

- 오늘의 주인공이 먹고 싶은 걸로 하는 건 어때! 기분이다!

- 오오오오!

- 네 녀석들의 지갑을 모두 털어주마!

- 야야, 이거 잘 생각한 거 맞냐?

- 푸하하하하!

양손에는 포장해온 음식으로 가득하고, 지갑은 그만큼 홀쭉해졌으면서도 뭐가 그렇게도 좋았는지 모두 웃기 바빴다. 넓게 자리한 공원에 도착해 적당히 좋은 곳을 골라 자리를 폈다. 그 때가 언제였더라? 해가 지기 전이었나, 낮이었나? 땡땡이가 워낙 일상이었던 우리였기에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자각할 때의 나에겐 카메라가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 당시 시간에 대한 기억이 흐릿한 것도 이해가 됐다. 음식을 펼치고 전투적으로 먹을 태세인 녀석들을 두고 근처 매점으로 달려가 싸구려 필름 카메라 하나를 샀다. 같이 지갑이 털렸던 상태라 알바비로 받은 돈을 모두 탕진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 야! 양호열! 어디갔다 오냐!

- 빨리 와! 강백호 이 자식 벌써 시작했다고!

- 눗!! 이용팔이 먹고 있는 건 안 보이냐!!

- 어? 뭐야? 양호열, 그거 카메라냐?

음식을 두고 싸우는 백호와 용팔, 둘을 가리키며 웃기 바쁜 구남과 나를 보며 물어오는 대식까지. 카메라라고는 백호가 농구 연습을 할 때 들었던 캠코더 촬영이 다였던 터라 녹화가 아닌 셔터를 누르는 손끝이 어색했다.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나를 돌아보았다.

[찰칵]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 순간의 기록, 양호열 사진전

“그 때 사진 처음 찍은 걸 시작으로 사진작가가 될 줄이야. 세상 모를 일이다, 진짜.”

“백호 농구 연습하는 영상 찍었던 것도 그런 전자기기 만진 게 처음 아니었나?”

“난 그 때 백호 미국 결정된 날 밖에서 처음 찍었던 사진이 여기에 걸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야.”

“너네 사진전에 사진 거는 거 초상권 다 허락해놓고 이제와서 무슨 소리야.”

“백호한테도 사진 건다고 연락했냐?”

“연락했지. 백호도 흔쾌히 허락했다.”

“백호는 사진전 안 온대?”

“미국에서 한참 시즌 중일텐데 어떻게 오겠냐? 사진전 끝날 때까지 시즌도 안 끝날텐데.”

“아쉽지 않아?”

대식이 묻는다. 호열은 고등학생 시절의 순간이 기록된 사진 앞에 선, 이제는 모두 성인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백호 없는 백호 군단을 슥 보았다. 어깨를 으쓱한다.

“사진전이 아니어도 시간만 맞추면 언제든 볼 수 있으니까.”

“하긴, 이제 우리도 시간만 맞추면 언제든 볼 수 있는 성인이 된지 한참 됐으니까.”

“진짜 이 때가 언제적 사진이야~”

다들 액자에 걸린 사진 앞에서 추억에 젖어 과거의 이야기에 여념이 없다. 호열은 사진전 담당자의 손짓에 군단의 양해를 구한 후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호열의 작품, 사진을 구매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호열은 고개를 끄덕이며 구매 희망자를 만나기 위해 걸음을 옮긴다. 벽에 걸린 크고 작은 사진들은 모두 호열이 기록한 순간들이다. 산 정상 위에서 찍은 사진이기도 했고, 수평선을 드러내는 해변가의 사진이기도 했다. 봄의 향연이 펼쳐진 온갖 꽃들의 사진과, 여름 비가 쏟아지는 어느 순간, 단풍잎이 나무에서부터 떨어지는 순간을 담아낸 기록, 앙상한 나뭇가지 위로 쌓인 눈을 담아낸 겨울까지. 사계의 순간이 가득 걸려있었다.

호열의 시선이 순간 옆을 향한다. 따로 공간을 낸 벽에 크게 나무가 그려져 있고, 뻗어나가는 굵은 나뭇가지 위로 봄을 기록한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시선이 길게 머무르다 담당자를 따라 발걸음을 재촉한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보며 감탄하는 목소리를 즐겁게 듣는다.

사진전의 하루가 막을 내렸다. 호열은 아무도 없는 사진전에 홀로 남았다. 검은색 캐주얼 정장 바지에 손을 꽂아놓고, 가장 마음에 드는 곳 앞에 선다. 사진전의 대부분은 한 곳에 사계를 비롯해 호열이 의미를 담아낸 사진들 끼리 모여있었는데 호열의 앞에 자리한 사진들은 봄의 사진이 가득했다. 커다란 나무가 그려져있는 벽의 한 면. 나뭇가지에 걸린 사진들은 하나같이 희고 분홍빛을 발하는 벚꽃 사진들이었다. 호열의 시선이 나무 기둥을 시작으로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손을 내밀어 나무를 쓸어내린다. 사진 속 공간은 모두 같은 공간이었다. 미국으로 떠난 백호가 그리워질 때마다, 백호의 생일을 맞이할 때마다, 봄을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매년 4월 1일이면 백호를 생각케 하는 가장 큰 벚나무를 찾아 같은 날, 다른 시간에 찍은 사진들이 모여 한 그루의 벚나무를 이루어 낸 것이다.

사람들은 그저 사진작가 양호열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봄이고, 그 중에서도 벚나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에서도 호열이 봄은, 벚나무는 특별하다고 했으니까. 어떤 이유로 특별하다고 하는지 궁금해했지만, 사진을 보고 있으면 형용할 수 없는 뭉클한 감정이 들기도 했고, 가슴이 벅차기도 하고, 어떤 것은 가슴을 찌릿하게 만들기도 했기에 사람들은 호열에게 있어 봄과 벚나무는 이만큼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특별하구나 하고 생각한다. 사진에서 감정이 느껴진다고 하면 의아해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진을 보면서 떠오르는 추억이 가져오는 감정이 있기에. 사진전을 찾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추억과 감정을 가지고 호열의 작품을 찾았다.

호열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정말 나와야할 시간이었다. 제가 문을 닫겠다고 했음에도 담당자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시간이 얼마가 걸려도 좋으니 볼 일 다 보고 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시간을 확인한다. 누가 데리러 오냐고 물었더니 데리러 오는 건 아닌데 기다리는 사람은 있다고 했다. 미안해진 호열이 정말로 괜찮으니 먼저 가보라고 했음에도 담당자는 단호했다. 시간 넉넉해요. 작가님 시간 충분히 기다릴 수 있어요. 대화를 상기한 호열이 머리를 긁적이며 밖으로 나왔다. 사진전 마감한 게 노을지던 때였던 것 같은데 어느 새 하늘이 깜깜했다. 생각보다 너무 감상에 젖어있었던 모양이다.

호열이 밖에 나오자마자 담당자를 찾았다. 담당자는 누군가를 기다린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는지 아주 키가 큰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키도 크고, 멀리서 봐도 덩치가 좋아 절로 백호를 떠올리게 했다. 백호를 기다리는 순간을 담아낸 장소에 머물러있었어서 그런가. 호열이 머쓱하게 뒷목을 쓸어내렸다.

“담당자님. 늦어서 죄송해요. 이제 가보셔도…….”

걸음을 재촉한 호열이 담당자에게 말을 건네다 우뚝 멈췄다. 담당자가 고개를 돌렸다. 담당자와 대화를 나누던 이 역시 고개를 든다.

“작가님, 여기 계신 분이 멀리 미국에서 이제 도착하셔서요. 실례만 되지 않는다면 잠깐 사진전 안내를 드려도 될까요?”

“…….”

멍하게 둘을 보던 호열이 픽 웃었다. 담당자가 고개를 갸웃하자, 호열이 말했다.

“제 지인에요. 제가 안내할게요. 담당자님은 늦었으니 얼른 가보세요. 혹시 차량 있으신가요? 없다면 택시비 드릴게요.”

“앗. 그러셨군요. 어쩐지 작가님을 아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럼 저보단 작가님이 안내하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으니 전 이만 가볼게요. 자차 있어서 제가 운전하면 되요. 그럼 내일 뵐게요!”

“감사해요, 담당자님.”

담당자를 보낸 호열이 입을 다물었다. 담당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고 나서야 몸을 돌린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호열의 시야가 깜깜해졌다. 눈 앞에 가득찬 덩치에 호열이 눈을 깜빡였다.

“강백호?”

몸통을 조일 정도로 강하게 호열을 끌어안았던 백호가 팔을 풀어내며 말했다.

“서프라이즈!”

“진짜 깜짝 놀랐어. 어떻게 알고 왔어?”

“사진 얘기 했었잖냐. 다른 녀석들한테 얘기 듣기도 했고. 나도 네 사진들 봐도 되냐?”

“물론이지.”

호열이 백호를 안으로 이끌었다. 호열이 처음 카메라를 잡고 찍었던 고등학생 시절 사진을 시작으로 온갖 사계로 가득찬 사진을 보며 감탄하던 백호가 호열이 기록한 봄의 순간 앞에 멈춰섰다. 한참을 말 없이 사진을 본다. 호열이 그랬듯, 나무 기둥부터 시선이 천천히, 나무를 타고 오른다. 호열은 백호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기다렸다. 백호가 가만히 사진을 보며 말했다.

“호열아.”

“엉.”

“이거 언제부터 찍은 거냐?”

“엄… 잘 기억은 안나지만 그 때 카메라를 사고나서부터 였던 것 같아.”

“그러냐?”

“왜?”

사진을 보던 백호가 호열을 내려다보았다. 호열이 그 시선을 마주 본다. 미국에 간 뒤로 만난 게 손을 꼽을 정도였던데다, 고등학생 시절로부터 최소 15년은 흘러있었기에 백호는 호열이 기억하던 고등학생 강백호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중에 사진 찍자고 해야지. 호열이 생각했다. 백호가 입술을 움직였다.

“그 때부터 나를 기다렸다는 뜻이잖냐.”

“…어?”

어떤 카메라로 백호의 순간을 담아낼지 즐거운 상상을 하던 호열이 삐끗한 목소리를 냈다. 백호가 사진을 다시 둘러보았다. 호열의 손을 잡고, 사진전의 입구부터 끝까지 쭉 걷는다. 사진전의 끝에 도달하고 나서야 손을 놓은 백호가 팔을 뒤로 뻗었다가 앞으로 움직이며 말했다.

“이 사진전 안에 있는 모든 사진들에게서 같은 마음이 느껴지니까.”

“…….”

호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백호가 그런 호열을 보며 말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

“…백호 네가 사진을 보면서 감정을 느낄 정도로 감성적인 줄은 몰랐는데.”

“네가 기록한 모든 순간에 봄이 있잖아.”

“…….”

“필름 카메라에 찍힌 날들을 봤어. 매년 4월 1일에 찍은 사진들만 봐도 알겠던데.”

“…….”

“왜 말 안 했어?”

“말해서 뭐해? 너는 미국에 가고, 나는 한국에 있는데. 내 마음 얘기할 생각도 없었어. 말하면 네가 신경 쓸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난 네가 미국에서 좋아하는 농구를 하면서 즐겁게 살아가는 걸 보고 싶은거지, 네 발목을 잡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

“네 마음을 왜 그런식으로 표현해?”

“…….”

“이 사진전 전체가 네 마음이나 다름 없잖아. 나를 기다리고, 보고 싶어하고, 기억하고 싶어하는 네 마음이 가득한 이 곳에서 왜 네 마음을 그런식으로 취급하는 거냐고. 네가 찍어온 이 사진들을 부정하는 거냐?”

“무슨 말이 듣고 싶은거야?”

“이 사진전에 가득한 마음이, 지금도 그대로라면…….”

백호의 커다란 손이 호열의 손을 느릿하게 잡아왔다. 호열이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어 백호를 본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싶어.”

미국 가더니 말을 엄청 잘 하잖아. 버터국은 뭔가 다르긴 한가. 호열이 생각했다. 저를 보는 시선에 호열이 손끝을 움찔하며 말했다.

“미안할 게 뭐 있어. 내가 멋대로 그런건데. 됐고, 이따 사진이나 찍자. 근데 얼른 가봐야하는 거 아니야?”

“맞아. 네 사진전이 보고 싶어서 바로 온 거라 곧 다시 가야해.”

“…시즌 중에 방해한 거 아냐? 이래서 초대권 안 보낸건데.”

“너 보고 싶어서 온 거라서 괜찮아.”

“…….”

미국에 간 게 잘 한 게 맞나? 호열이 다시 생각했다. 기억과 전혀 다른 백호의 모습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난해한 기분이 들었다. 어색하고 불편한 것 같기도 했고, 새로운 모습에 설레기도 했다. 주책이지. 처음 마주하는 순간을 기록하고 싶었다. 기억하고 싶었다. 호열은 휴대폰 카메라라도 꺼내야하나 하고 생각했다.

“양호열.”

“응?”

“지금은 어떠냐?”

“응?”

“15년 만에 만난 강백호는 어떻냐고.”

“어… 멋지지? 말도 잘 하고.”

“…그게 끝이야?”

“……???”

손을 쥐어오는 손길에 힘이 들어간다. 호열은 여태 백호가 제 손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호열이 다시 백호를 보았다. 귀 끝이 붉어진 농익은 30대 청년의 NBA 선수 강백호가 오롯이 눈에 들어왔다. 호열의 눈이 커졌다. 아, 지금. 지금.

“백호야, 손 좀. 손 좀 놔주라. 나 사진 한 장만 폰으로라도…….”

“양호열.”

이럴 때는 사진이 아니라 키스부터 하는 거야.

호열의 손을 잡고있던 손을 놓은 백호가 그의 허리를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놀란 표정 속에서도 자신을 보며 설레하는 눈빛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백호가 상체를 숙여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며 생각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자신을 보는 시선에 애정이 가득해서 티가 났다는 건 모르나보다. 괘씸하지만, 사진전에 가득한 마음을 보기도 했고 무엇보다 15년 뒤에 마주한 자신을 보며 여전히 애정을 품은 눈빛에서 이미 용서가 끝났다. 백호가 여전히 눈을 뜨고 있는 호열의 눈을 직접 감겨주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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