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열 (시리즈)

[백호열] 마음 정리 불가 땅땅땅

업로드 2023.07.21

* 이전에 썼던 백호열 단편 사각사각 의 후속편

* 연성하는 모든 백호열은 친구들과 트친들을 위해 씁니다.

** 그… 백호가 여러 사람을 좋아하는 그거… 그겁니다. 용어가 정확히 기억이 안나는데 암튼 양호열 복장 터짐


마음 정리는 차근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차피 이루어질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고백을 한다거나 그럴 생각도 없었다. 동성과의 어쩌고 하는 것보다는 강백호가 분명히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게 더 컸다. 여태까지 수많은 여자애들을 좋아하고, 고백하고, 거절당하는 일과와는 달랐다. 채소연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그가 농구부로 스카웃되면서 농구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만큼 강백호 역시 채소연을 진심으로 좋아했으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말할 생각도, 의향도 없었다.

설레는 분위기, 설레는 계절에서 처음 마주친 사이도 아니었잖나. 중학시절 주먹다짐으로 친해진 사이에 피어나는 사랑이라니. 전쟁 속에서도 애는 생긴다는 같잖은 문구와 다를 바 없어 좋아하는 마음을 노트에 적어내려가면서도 코웃음을 친다. 그런데도 노트는 여전히 빽빽하다. 빼곡하고, 빽빽해서 얉은 종이의 한 페이지는 꽉 채우고 날 즈음이면 너덜거리곤 했다.

양호열은 책꽂이에 학교 교과서들을 빼내고 대신 채워넣은 노트들을 보았다. 강백호의 이름과, 좋아한다는 한 마디만 담겨있던 노트는 언제부터인가 일기의 형식을 띄기 시작했다. 일기라기 보다는 강백호와 함께한 일과를 적어놓는 관찰일지에 더 가까웠다. 오늘 강백호와는 무엇을 했고, 강백호가 채소연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고, 농구부에서 강백호가 무슨 사고를 쳤고, 정대만과 송태섭이 참가한 일명 바보트리오가 무슨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했는지 따위가 적혀있었다.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강백호였고, 양호열은 그를 보며 떠올린 생각을 첨가하며 항상 마무리로는 '그런 강백호가 좋았다.' 라고 써넣었다. 모든 어미는 과거형이었다. 과거형이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마음 정리는 차근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노트를 덮지만 다음날 학교에서 마주치게 되면 정리하던 마음은 언제 그랬냐는 듯 풀어헤쳐져 항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강백호와 보내는 하루의 일과, 집에 돌아가면 일기를 쓰고 마음 정리, 자고 일어나서 강백호와 마주치면 두근거리는 마음 시작. 매일같이 반복되는 양호열의 일과.

책꽂이를 가득 채우고도 노트가 책상 위 한쪽에 눕힌 채로 한 권, 두 권 쌓이고 있었다. 이미 책상과 한 세트인 책장은 그간 썼던 노트들로 꽉 채워져있었다. 양호열은 노트들의 위용을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 중증이다, 중증. 빼곡히 채워진 노트들에서는 일종의 광기마저 느껴지는 듯 했다. 저 노트 중 어느 것을 빼내 펼쳐도 가득 차있을 이름을 생각하니 집착을 하나 싶기도 했다. 광기와 집착.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이루어질 수 없는, 감정.

자리를 차지하는 노트들을 한 때 태워버리려 한 적도 있었다. 지포 라이터의 부싯돌을 엄지로 착, 착. 불을 피웠다 꺼뜨리기를 반복했다. 노트들을 내려다보는 양호열의 검은 눈은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들로 혼탁한 검은빛을 띄우고 있었다. 학교에서 제법 떨어진 거리의 다리 밑까지 그 무거운 노트들을 낑낑거리면서 가져왔던 양호열은 결국 노트들을 태우지 못하고 그대로 낑낑거리면서 집에 도로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양호열은 낑낑거리며 옮겼던 노트들을 애진작에 불태웠어야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참이다.

"양호열. 이거 뭐냐?"

"……."

좆됐네.

노트를 파라락 넘기는 강백호의 물음에 양호열은 입을 다물었다. 순간 양호열은 왜 자신은 외동인가 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도 해본다. 여동생이라던가, 누나가 있었다면 옴팡 뒤집어씌우고 나몰라라 했을텐데. 빠르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노트를 들여다보는 강백호를 보는 양호열은 가슴이 세차게 뛰는 것과 달리 눈과 표정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대답없는 양호열을 강백호가 노트를 보느라 숙였던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양호열은 시선만 내려 강백호의 주변에 널부러져 있는대로 펼쳐진 노트들을 본다. 모든 페이지에 언급되어 있는 이름 석 자. 강백호. 그리고 이름을 꾹꾹 눌러 쓰면서, 함께 꾹꾹 누르는 감정. 좋아해.

"왜 남의 일기를 멋대로 펼쳐보냐. 매너없게."

양호열은 눈썹을 꿈틀거리는 강백호를 지나쳐 책상 위로 함께 마시려고 가져온 오렌지 주스를 탁 소리나게 놓았다. 강백호의 붉은 시선이 양호열을 따랐다. 양호열은 따끔거리는 시선을 무시한 채 강백호가 널부러놓은 노트들을 주워 탁 소리나게 덮고는 오렌지 주스 옆에 쌓기 시작했다.

"이거 뭐냐고."

"뭐긴 뭐야, 일기지."

"너는 내 이름이랑 좋아한다는 말만 써놓은 걸 일기라고 하냐?"

"……."

다섯 권째 노트를 쌓은 양호열이 움직임을 멈췄다. 양호열이 뒷모습만 보여주는 탓에 강백호가 뒷통수에 대고 말했다.

"너 나 좋아해?"

양호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강백호는 노트를 보았다. 한 권도 아니고, 열 권이 넘는 노트를 펼쳐놓고 그런 질문을 했다. 글자 모르는 까막눈도 아니면서 그런 질문을 했다. 양호열은 강백호의 질문이 자신에게 기회로 날아드는 건지, 칼침으로 날아드는 건지 섣부른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이미 양호열은 결정을 내렸다. 마음 정리를 결정했다. 그것이 매일같이 새로고침하는 일상이었지만, 매일을 마음 정리하는 나날이었지만. 어찌됐든 양호열은 마음 정리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 결과물이 노트였다. 양호열의 마음과 감정이 든 결과물이었다. 그것을 펼쳐본 순간 양호열의 마음이 무슨 마음인지 누가 봐도 모를 수 없는. 그런 결과물이었다.

"너 나 좋아하냐고."

그런데도 강백호는 뻔한 질문을 했다. 양호열의 마음과 감정이 든 결과물을 싸그리 무시하고, 그랬다. 제 입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뭐라고 할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강백호가 채소연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백호군단은 물론이거니와 농구부에도 만연하게 퍼져있는 사실이었다. 정작 채소연은 서태웅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지만, 강백호가 그런거 신경 쓸 위인도 아니고. 채소연에게 one way, my way 인 강백호가 왜 자꾸 양호열의 감정을 입 밖으로 직접 확인받고 싶어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가 날 좋아할 것도 아니면서. 양호열은 생각했다.

"야, 양호,"

"어. 그래. 좋아해. 그래서 뭐?"

"뭐?"

계속 들쑤시는 강백호를 견디지 못해 양호열이 뒤돌아섰다. 삐딱하게 날아든 대답에 얼이 빠진 것은 강백호였다. 양호열이 강백호가 들고 있던 노트를 잡아채곤 그 노트를 둥글게 말아 강백호의 가슴께를 찌르며 말했다.

"다 봤잖아. 봤으면서 뭘 물어봐? 좋아해. 근데 뭐 어쩌라고?"

"야."

"다 봤으면서 물어보는 의도가 뭔데."

"너 화내는 거냐?"

"너 같으면 화 안나겠어? 노트를, 이걸 주인의 의사도 없이 제멋대로 펼쳐 읽어놓고. 그걸로도 부족해 있는 노트 다 잡아빼서 들쑤셔놨는데 화 안나겠냐고."

"…눗. 그건 미안."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사과하는 강백호에 양호열의 짜증섞인 표정과 눈빛이 탁 풀리고 만다. 둥글게 말린 노트가 강백호의 가슴을 꾹 누르던 것이 떨어져나왔다. 반대로 노트를 말아 몇번 굴리던 양호열이 다시 등을 돌려 책꽂이에 노트를 밀어넣었다. 짜증나. 삐져나온 노트를 손바닥으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언제부터 좋아했냐?"

"뭐?"

양호열이 신경질적으로 강백호를 돌아보았다. 강백호가 머쓱해하던 표정으로 말했다.

"언제부터 내가 좋았냐고."

"그게 중요해?"

"아니, 그냥. 이 몸이 몰랐던 거니까 좀 그래서."

"네가 알면 어쩔거고 모르면 어쩔거야? 사귈거야? 너랑 사귀고 싶어서 좋아하는 거 아니니까 더 파고들지 마라."

"나랑 사귀고 싶은 게 아닌데 어떻게 좋아하는 거야?"

"……."

물음표 살인마가 뭔지 확실하게 깨달은 양호열은 해동중 시절을 떠올렸다. 강백호와 미친듯이 주먹다짐했던 때를 떠올렸다. 강백호의 얼굴이며 옆구리며 주먹을 꽂아넣는 상상을 했다.

"그걸 네가 알아서 어쩔거냐고."

강백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양호열은 거기에 또 열이 받았다. 가져온 오렌지 주스가 담긴 컵을 한번에 마시고 소리나게 컵을 내려놓았다.

"그래 나 너 좋아해. 근데 네가 채소연 좋아하는 거 알고, 네가 여자 좋아하는 거 그전부터 알았고. 그래서 너한테 고백같은 거 할 생각도 없어. 사귀는 거나 키스하고 뭐 하고 그런 것들 다 할 생각 없어. 이렇게 노트에 많이 쓸 줄은 나도 몰랐고, 그냥 너 좋아하는 마음이 답답하니까. 정리도 하고 싶고 그러니까 혼자 썼다. 됐냐?"

"정리를 한다고?"

"너한테 좋아한다고 말할 생각도 없는 감정이야. 이거 계속 갖고 있어서 뭐할건데? 너는 채소연 좋아하고, 채소연이 좋아하는 농구를 좋아하잖아. 여태 쉽게 다른 여자애들한테 고백하고 차이면 다른 여자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계속 좋아하잖아, 채소연을. 여자애를 좋아하잖아. 근데 나는 시커먼 남자고, 너랑 주먹질하면서 친해진 사이고. 낭만이나 그런 거 죽쒀서 개나 준 놈인데 이런 감정 갖고 있어서 뭐하냐고. 갖다버리고 싶은데 그것도 잘 안되고 속은 답답하고 그래서 썼다. 아무한테도 말 안했고, 말 할 생각도 없고. 정리될 때까지 노트에 쓰고 있었다고. 진작에 다 갖다 태웠어야했는데. 내가 미쳤지."

"이걸 태우려고 했다고?!"

"진작 태울 걸 아깝다고 갖고 있다가 이 사단이 났는데 그런 생각 안 하겠어?"

"……."

"그래서 어쩔거야."

강백호가 노트에 시선을 떼지 못하다 양호열을 보았다. 인상을 찡그린 양호열이 강백호에게 재차 물었다.

"같은 거 달린 시커먼 놈이. 노트 하나도 아니고 이 책장을 가득 채우고도 넘치도록 네 이름과 좋아한다는 감정을 빼곡하게 채웠는데. 기분 더럽지 않아? 불쾌하지 않아? 어떻게 하고 싶은지 말해봐. 더러워서 친구도 못 하겠다고 말 해보라고."

"야!"

"뭐!"

양호열이 씩씩거렸다. 항상 잔잔한 파도같았던 양호열이 성난 파도가 되어 혼자 바위에 부딪혀 산산히 부서지고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에 도달하기도 전에 스스로 부서져 포말이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고백을 해봤으면 해봤지 받아본 적 없는 강백호는 순간 욱해 양호열을 불렀지만 스스로도 뭐라고 해야할지 몰라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양호열과 좋은 사이가 될지 몰랐다. 하지만 강백호가 확신할 수 있는 말이 있었다.

"이거, 버리지 마."

"뭐?"

"태울거면 나 줘."

"강백호!"

"나한테 쓰는 거잖아! 그럼 내 꺼지!"

"야!"

"너 나 좋아한다며! 그럼 이거 나한테 주는 선물이라고 하면 되잖아! 왜 좋아하는데 말을 안 해? 난 그런거 이해 못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 너 채소연 좋아하잖아! 나 너 좋아한다니까? 너 좋아해서 이 미친 노트들 써가면서 마음 정리하려고 했던 거잖아! 채소연 좋아하면서 내 마음이 든 노트 네가 가져가서 뭐할건데!"

"그래도 내가 가질거야!"

"뭐하는 거야!"

강백호가 무턱대고 양호열의 책장에 팔을 뻗어 큰 손으로 노트를 한번에 대여섯권을 움켜쥐었다. 기겁한 양호열이 강백호를 막으려 애썼다. 강백호의 키와 덩치가 더 큰 탓에 막는 것이 벅찼다. 농구에서나 블로킹을 해야지 이럴 때 블로킹 왜 하냐고 이 미친놈이! 양호열이 이를 악물었다. 두 고등학생의 몸이 앞으로 밀리고 뒤로 밀리고 반복한다. 책상이 흔들렸다. 책꽂이마저 덜컹거릴 정도의 힘에 책상 위에 놓았던 주스 컵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파열음과 함께 강백호의 발치에 떨어진 주스컵을 본 양호열이 강백호를 강하게 밀쳤다. 균형을 잃은 강백호의 한쪽 발이 붕 뜨면서 그대로 침대가 있는 방향으로 넘어졌다. 강백호의 손에 쥐어진 노트들이 일순간 뽑혀져나오면서 책꽂이가 흔들렸다. 노트가 와르르 쏟아졌다. 양호열의 머리 위로 노트들이 그대로 떨어져내렸다. 우당탕탕. 

"……."

"……."

그리고 침묵이 지독하게 둘을 싸고 돌았다. 지독한 정적과 쏟아진 노트들은 과열된 분위기를 식혀주기 충분하다 못해 과했다. 노트 비에 그대로 노출된 양호열이 아픈 머리를 문질렀다. 강백호는 양호열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멍하게 양호열을 보던 강백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데도 날 좋아하는 마음을 정리한다고? 내가 유리 밟을까봐 침대쪽으로 밀어놓고 자기는 저 노트들 피할 생각도 안 하면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시선을 내리깐 양호열이 바닥에 쭈그려 앉아 엉망으로 널부러진 노트들을 주워들었다. 차분한 양호열의 모습을 보던 강백호가 말했다.

"좋아한다면서 여태 얘기 안 한 게 소연이 때문이야?"

"…좋아하는 애 있는 거 뻔히 아는데 초 치는 것도 싫고. 괜한 말 했다가 지금 사이까지 틀어지는 게 싫었을 뿐이야. 애초에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노트를 이만큼 쓸 때까지 정리되지도 않는 감정이면서."

"비웃을 거면 비웃어라. 친구 사이 정리되고 싶으면."

"내가 왜 비웃어?"

노트를 줍던 양호열이 순간 멈칫했다.

"네 감정을 내가 왜 비웃냐고. 네가 나 좋아하는 게 우스운 거야? 아니잖아. 이렇게까지 할 정도면 나 많이 좋아한다는 거잖아. 친구 관계 잃을까봐 고백도 못하고. 내가 소연이 좋아하는데 방해되기 싫어서 말도 안 하고. 호열아. 내가 바보같을 순 있는데 염치가 없진 않아."

"……."

"그러니까. 나는 네 감정 비웃지도 않을거고, 네게 고백하라고 강제하지도 않을거야. 나 좋아하고 싶으면 좋아해. 친구로만 지내고 싶으면 그렇게 해. 노트는 태우지 말고… 내가 가져가도 돼?"

"고백을 받아주지도 않을거면서?"

"양호열 네가 제대로 말하지도 않았잖냐."

"내가 제대로 말하면 받아주긴 할 거냐?"

강백호가 눈을 둥글게 뜨고 양호열을 보았다. 여전히 시선을 떨어뜨린 상태로 양호열이 말했다. 

"너 그런식으로 하면 나 너 못 놔."

"안 놓으면 되잖아."

"너 채소연 좋아하잖아."

"내가 소연이 좋아하는 거랑 네가 나 좋아하는 건 다르잖아."

"…짝사랑의 짝사랑 싫다고."

양호열이 이를 악물었다. 씹어뱉듯 내놓은 말에 강백호가 고개를 기울였다.

"둘 다 좋아하면 안 되냐?"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는 표정으로 양호열이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강백호의 표정을 보니 진지하다. 진지하게 왜 둘을 좋아하는 건 안되는 거지? 라고 중얼거리고 있다. 진짜 미친놈인가. 

"나도 호열이 너 좋아하는데."

"…네가 좋아한다는 건 친구 사이로 좋아하는 거고."

"근데 너는 나를 친구 사이 이상으로 좋아하는 거잖아. 나도 그럴 수 있는 거 아니야?"

"장난쳐?"

"장난 아닌데?"

단순하고 무식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 더 빡쳤다. 한 명이 여럿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용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모르겠다. 암튼 강백호는 그런 쪽인 모양이다. 양호열은 그동안 썼던 노트를 죄다 불살라버리고 싶었다. 마음 정리를 확실하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강백호는 같은 거 달린 놈들끼리 좋아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별 생각이 없었고, 한 명이 둘을 좋아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별 생각이 없어보였다. 정말 말 그대로 그게 왜 안 돼? 였다. 뭐 발랑까졌다거나 우쭐해 하거나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한 사람이 두 사람을 좋아하는 게 왜 안 되냐는 거였다. 두 사람이 한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는건데, 한 사람이 두 사람을 다 못 놓고 좋아할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소연이가 먼저였을 뿐이지, 나 좋아한다는 호열이를 나도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둘 다 뭔가 비슷하고. 작고, 녹빛의 검은색에, 반짝반짝하고. 예쁘고. 귀엽고. 그런데. 왜 둘 다 좋아하면 안 돼?

"어쨌든, 얘들 내가 갖고간다?"

"…음침하지 않아? 집착에 광기까지 느껴지던데 나는."

"그만큼 나 좋아한다는 거잖냐. 난 좋은데. 사랑받는 느낌이라. 이대로 나도 네가 생각하는 감정으로 너 좋아할 수 있게 되면 더 좋고."

양호열은 생각을 포기했다. 결과적으로 평생 고백할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고백도 했고, 평생 걸릴 일 없던 광기와 집착어린 노트도 들켰다. 친구 사이도 쫑이라며 주먹이나 날릴 줄 알았는데 왜 둘 다 좋아하면 안 돼? 하고 뒷목 잡을 말까지 들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감정이 어떤 식으로든 전달된 게 홀가분하기도 했다. 둘 다 좋아하고 싶다는 말에 기대치 않은 설레임까지 느껴버리는 자신이 제일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했다. 복잡했다. 단순하고, 무대뽀의 대명사가 이렇게 복잡한 취향을 갖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그래서, 양호열은 더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노트는 불태워지지 않고 강백호의 양 손에 바리바리 쌓여 보내졌다. 텅 빈 책꽂이만 양호열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거, 괜찮은 거 맞겠지?

생각하기를 포기한 양호열은 조금 걱정만 하기로 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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