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열 (단편)

[백호열] IF 의 세계

* 모두 성인

* 느바백

* 글리프 3주차 챌린지 [걷지 않는 길]

if

1. [가정·조건을 나타내어] 만약 …면, …의 경우에는:

2. [현재·과거·미래의 실현 가능성이 있는 사항에 관해 추측할 경우]

3. 조건, 가정; 불확실한 것

- 출처 영어사전[동아출판]

백호가 농구를 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호열이 이따금씩 생각하는 것이다. 담을 쌓은 공부의 영역에서 유일하게 눈여겨 본 단어.

if. 처음에는 꼬부랑 글자에 불과했던 호열이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은 부상을 딛고 일어서 더욱 성장한 백호가, 자신의 길로 농구를 택했던 그 넓은 등을 보면서였다.

농구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 백호가 농구를 포기했다면 어땠을까. 호열은 백호의 부상 건으로 자연스레 농구부 최후의 날을 떠올렸다. 농구를 할 때 가장 빛났던, 유망주로 촉망받던 중학MVP가 무릎 부상으로 인해 망가질대로 망가져 농구하는 다른 이를 쳐부수러 왔던 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그의 주위를 감싸던 이들 역시 기억한다. 부상입고 삐뚤어진 중학MVP, 부상입고 삐뚤어진 백호. 그의 주위에 존재하던 무리, 백호의 주위에 존재하는 자신을 비롯한 백호군단.

산왕공고와의 시합이 자신에게 영광의 시대라고 말하던 백호가 죽은 눈으로 다른 이들의 농구를 부수는 것은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괴로움을 지나치지 못해 함께할 것을 알았다. 서로가 소중하기에 백호군단은 기꺼이 그 길을 함께할 것을 알았다.

백호가 부상을 딛고 일어서서 다행이었다. 농구를 다시 하는 것 역시 다행이었다. 인생을 뜨겁게 불태울 무언가를 만나는 것은 달가운 것이었다. 백호는 농구로써 빛을 찾았다. 백호군단은 농구로 성장하고 강해지는 백호를 보며 자신의 진로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만년 불량청소년을 벗어나 지금은 멀쩡하게 사회생활하는 직장인이 되었고, 불량식품과 조금의 철 비린내를 추억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백호군단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는 당연 농구고.

백호가 처음부터 채소연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농구 좋아하냐며 다가온 그에게 백호가 첫눈에 반하지 않았더라면. 여느 때처럼 백호의 고백에 소연이 도망쳤다면. 백호에게 농구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해동중 시절에 만나 북산고에서도 어김없이 시비거는 녀석들과 싸움질을 매일같이 했을 것이다. 크고 작게 다치기도 할테고. 인상도 매서운 편이라 학교에서도 여러모로 유명인사였겠지. 타고난 붉은 머리와 큰 키는 눈에도 잘 띄니까.

사실 멀쩡하고 평범한, 보통의 직장인이 된 지금은 그 때의 생활이 지속되면 어떻게 살았을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서로의 등에 등을 맡긴 채 싸움질을 그렇게 해댔으니 주먹질 하고 살지 않았을까. 동네 양아치가 건달이 되고 뒷골목의 존재가 되고… 뭐 그런 거.

싸움은 스릴 있지만 점차 목숨이 오가는 상황도 많이 생길지도 모른다. 다섯명이 완전체인 백호군단이 완전체가 아니게 될 수도 있다. 호열은 팔에 돋아난 소름을 쓸어내렸다.

백호가 농구를 시작한 것이 다행이었다.

애초에 백호군단에게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하고 조용한 일상이라는 게 없었으니까. 아무래도.

백호가 다른 진로를 택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붉음이 지독히도 잘 어울려 소방관 옷을 입고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관도 생각해본 적 있고, 어색하게 넥타이를 바로 매고 일반 회사에서 키크고 무서워 보이는 사람 소리를 들으며 일반 직장인이 된 모습도 생각해본 적 있다. 먹는 걸 좋아하니 식당에서 일하다 홀라당 다 먹어버려서 혼나는 모습을 상상했을 때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온 몸에 문신을 새기고 뒷골목의 주인이 된 모습을 생각했을 때는 간담이 서늘했지만.

농구하지 않는 강백호.

농구라는 길을 걷지 않는 강백호.

그리고, 농구가 아닌 어떤 길을 택해도 그의 등을 바라보며 사랑할 자신.

- 야. 양호열.

쪽 하는 소리와 동시에 호열이 눈을 깜빡였다. 미국에서 경기 일정을 마치자마자 한국에 돌아온 제 연인의 부루퉁한 얼굴이 보였다.

- 아.

- 아? 아아? 아- 는 무슨! 이 천재가 돌아왔는데 계속 딴 생각이나 하고! 진짜 너무하다고!

툴툴거리며 휙 돌아선 연인이 성인이 되어서도 더 크는 바람에, 2미터는 훌쩍 넘는 그의 등을 꽉 끌어안으며 호열이 푸스스 웃었다.

- 왜 웃는거냐.

- 그냥. 농구하는 강백호가 제일 멋져서.

- 어엉?

- 네가 농구라는 길을 걷지 않아도, 나는 너를 사랑할거야. 백호야.

미국에서 짙어진 피부를 하고 돌아온 연인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등 뒤에서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기백 2미터의 연인을 확 끌어와서는 아이를 들어올리듯 안아올린다.

- 으악! 백호야!

- 돌아오자마자 딴 생각하고 있더니 이런 앙큼한 말이나 하고. 유혹하는 거냐?

- 유혹이 아니라 사실을 얘기한 건데.

- 나한테는 그만한 유혹이 없다고.

높게 호열을 들어올렸던 백호가 팔을 내려 안아든 호열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 내가 농구를 하지 않아도 사랑한다는 거, 진짜냐?

- 물론이지. 미국에서 농구하는 너를 화면 너머로 보고있으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하거든.

- 누웃… 미안. 그러니까 같이 미국에…!

- 너 나 데리고 미국 가면 여기 남아있을 녀석들 자주 안 볼 거 아냐. 나보러 왔다가 겸사겸사 보는거 걔들도 다 아는데.

- 후, 후눗! 그, 그런 거 아니거든!!

- 큭큭큭. 농담이야. 아무튼 농구하지 않는 너는 어떤 모습일까 한번씩 상상할 때가 있어. 미국이 아닌 이 곳에서 함께하는 상상을.

- …내가 미국 간 게 많이 서운해?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사랑스러워 그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춘다. 호열이 그를 바라보았다.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 아니? 농구할 때의 네가 가장 빛나는 걸.

백호야. 농구라는 이름의 길을 걷지 않아도 너를 사랑할 테지만, 농구하는 너를 가장 사랑해. 농구할 때 가장 빛나는 내 사랑.

- IF 의 세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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