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열 (시리즈)

[백호열] 할로윈이잖아

업로드 2023.11.02

* 추억언덕 시리즈 (인간 백호x요괴 호열) 마지막 이야기 

** 사망 소재 있습니다. (사고 그런거 아님)

*** 할로윈과 망자의 날 의미가 혼용된다는 탐라 트윗을 접하고 일부 수정***


마을이 할로윈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가로등 곳곳에 가지각색의 표정이 그려진 호박들이 씌워졌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트릭 오어 트릿! 을 외치며 꺄르르 웃었다. 할로윈 분장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던 호열이 백호를 불렀다.

"백호야."

"엉?"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뭐를?"

제게 달려와 사탕바구니를 내밀며 웃는 아이들에게 바지 주머니에서 한웅큼의 사탕을 꺼내 넣어주던 백호가 호열을 돌아보았다. 분장한 사람들을 보던 호열이 말했다.

"저렇게 분장하고 다니는 사람 중에, 진짜 요괴인 사람이 있으면 말이야. 어떨 것 같아?"

백호는 호열을 보았다. 흰 털의 여우귀 모양 머리띠와 여우꼬리 허리띠를 맨 여우가면을 쓴 호열을. 할로윈을 모두가 즐겼으면 한다며 마을 입장도 분장을 해야 가능하다는 말에 꾸며본다고 꾸며본 것이었다. 백호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뒷머리에서 빠져나오는 손끝에 나사모양의 머리장식이 걸렸다. 프랑켄슈타인이 된 백호가 호열에게 말했다.

"요괴든 뭐든 무슨 상관이냐? 나랑 좋은 관계면 그만이지."

"…그래? 그렇구나."

여우가면을 쓴 호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백호는 그런 그를 보다 또다시 한웅큼 달려오는 아이들을 향해 크앙! 천재 괴물이다! 겔겔겔! 하며 두 팔을 위로 뻗어 달려간다. 꺄아아! 하는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호열은 얼굴을 가린 가면을 살짝 들어올리며 중얼거렸다.

"좋은 관계면 그만, 인가."


"오, 여기도 진심으로 꾸미셨어~."

"섭섭! 뭐지? 개? 늑대?"

"다 틀렸다! 코요테야, 임마!"

백호가 태섭의 머리 위로 솟은 귀를 매만지며 눈을 둥글게 떴다. 감촉 특이하다. 백호의 말에 호열이 고개를 휙 돌렸다. 눈이 마주친 태섭이 씨익 웃어보였다. 호열이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미쳤어?'

백호가 바로 앞에 있어서 그런지 태섭은 입모양도 달싹이지 않은 채 어깨만 으쓱해보일 뿐이다. 호열이 백호를 살피며 한 손을 뻗어 백호를 태섭에게서 물렸다.

"이제 가자."

"엉? 섭섭이 방금 만났는데?"

호열이 태섭을 노려보았다. 태섭이 두 손을 들어 머리 뒤로 깍지끼며 여유있게 웃어보였다.

"네 친구들 저 안에 있더라~ 재밌는 시간 보내라고~"

"섭섭! 너는 어디가는데!"

태섭이 슬쩍 호열을 보았다. 호열은 여전히 백호의 뒤에서 매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피식 웃던 태섭이 백호를 보며 손을 흔든다.

"할로윈 때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거기 간다~"

그럼 이만~ 태섭이 가벼운 걸음으로 먼저 몸을 돌렸다. 제법 빠른 걸음으로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태섭을 노려보던 호열이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백호가 그를 돌아보았다.

"저게 무슨 말이야?"

"…할로윈이 그거잖아.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모호지는 날. 인간이 아닌 것들이 인간들 속에 섞여 노는 날이라고."

"그럼 섭섭이는 인간이 아닌 사람을 만난다는 거야?"

백호의 질문에 호열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픽 웃으며 말했다.

"백호야, 그걸 믿어? 이건 그냥 축제를 즐기기 위한 핑계에 불과한 거야. 세상에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가 모호해지면 온갖 사건사고가 일어나지 않을까? 인간이 아닌 것들이 어떻게 인간세상 속에 섞여들 수 있겠어? 그리고 할로윈은 악령이 찾아오면 그 악령을 속이기 위한 날이잖아. 이런 날 아니면 이렇게 대놓고 코스프레 해볼 일이 얼마나 있냐고. 같은 날 다른 나라에서는 망자의 날이라고 죽은 자의 영혼이 가족과 함께하는 날이라 듣긴 들었다만. 그저 상술이야, 상술. 좀 특이하게 놀아보고 싶은 사람들이랑, 축제 관련 물품들 반짝 팔아서 돈 쓸어모으고 싶은 사람들이 잘 짜맞춘 상술."

"……."

"궁금한 거 풀렸으면 이제 가자. 애들 기다리겠다."

호열이 돌아섰다. 용팔과 다른 친구들이 축제라고 음식을 만들어 판다고 했다.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구경해야지. 뺏어먹어보기도 하고.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 가는데, 뒤에서 따라붙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의아함을 느낌 호열이 뒤를 돌아보았다. 백호가 저만치 서서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크. 무시했다고 생각했나?'

"백호야! 안 오고 뭐해!"

불퉁한 얼굴을 하고 걸음을 하지 않는 백호에게 호열이 무안한 듯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호열이 그의 앞에 서 고개를 들었다. 백호가 여전히 뚱하게,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호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열이 어색하게 웃었다. 분위기 왜 이래.

"내가 너무 흥 깼어? 미안하다."

"너……."

"응?"

백호의 짙은 눈썹이, 진한 눈동자가 호열을 응시했다. 호열이 그 모습을 보며 웃던 것을 멈추었다. 끌어올렸던 입꼬리가 서서히 직선을 긋기 시작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하… 화났어? 왜 그래, 백호야."

"……."

천재는 다 알고 있었다면서, 그런 것도 모를 줄 알았냐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화를 펄쩍 내야했는데. 백호가 조용하니 호열쪽에서 어쩔 줄 몰라했다. 이런 백호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백호의 시선이 호열의 눈을 꿰뚫듯 하다 그의 머리 위에 끼운 여우귀 모양 머리띠로 옮겨졌다. 호열이 저도 모르게 여우귀를 만지작거렸다.

"왜? 내가 여우였으면 좋겠어?"

"…갈래."

"백호야! 같이 가야지!"

먼저 성큼성큼 가버린다. 잔뜩 토라진 애 같은 얼굴을 하고서. 태섭의 귀를 만져보고 뭔가 자신이 쓴 귀모양 머리띠도 그러길 바랐나. 호열은 태섭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혀를 찼다. 못 되가지고. 장난만 쳤으니 죽은 제 형 만나기 전에 자정이 지나버려라. 태섭의 입장에서 지독하면 지독한 악담을 중얼거린 호열이 제 발 밑으로 드리워진 그림자를 힐끗 보았다.

"……."

허리띠의 여우 꼬리는 하나이건만 그림자에 비치는 꼬리는 아홉개였다. 호열의 시선이 닿자 아홉개던 꼬리가 하나씩 합쳐져 허리띠의 여우꼬리처럼 하나의 그림자만 비쳐진다. 그 모습을 잠시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경계가 모호해지는 날이다보니 영향을 받지 않을 순 없는 듯 했다. 

'오늘은 신경 좀 써야겠는 걸.'

호열이 새어나가려는 기운을 갈무리하며 백호가 먼저 간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야, 양호열. 백호 왜 저래?"

"…아직도 그래?"

"아직도? 무슨 일 있긴 있었구만?"

대남의 질문에 호열이 머쓱하게 백호를 보았다. 백호는 호열과 눈을 마주치자 마자 흥! 하고 고개를 팩 돌려버린다. 그런 백호에게 자신들이 만든 축제 간식거리들을 내밀어 먹이던 용팔과 구식이 호열을 보았다.

"할로윈이 상술이라고 했거든. 너무 기대하는 것 같길래."

"에헤이! 상술이라니 거 너무하네!"

"어허! 이런 즐거운 날에 초를 쳐도 말이야! 엉?"

"푸하하! 하필 당일에 그런 말을 했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백호가 너를 이렇게 내팽겨치고 온 이유가 있구만! 푸하하하!"

"으윽! 시끄러워! 그런 거 아니거든!?"

용돈벌이를 방해한 멘트임을 확인한 친구들이 호열을 질책했다. 그와중에 구식은 백호의 어깨를 팡팡 치며 웃기 바쁘다. 발끈한 백호가 구식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쳐냈다. 호열이 하하 웃으며 백호에게 다가왔다.

"미안하다니까. 할로윈에 보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었어?"

호열은 백호가 바다숲 근처의 마을에 살다 부모와 함께 떠나던 시기를 떠올렸다. 무너진 바다숲을 뒤로하고 백호를 찾기위해 흔적을 좇을 때 들었던 부모의 사망소식이 떠오른다. 아아. 그런거였나. 호열이 눈썹을 누그러뜨렸다. 백호는 할로윈을 망자의 날로 생각했던걸까. 부모를 만나고 싶었겠지. 잘 지냈었으니까. 덩달아 형을 만나러 간 태섭을 떠올렸다. 태섭의 형도 굳이 따지면 악령은 아니었으나 태섭처럼 인간이 아니었기에 할로윈이며 망자의 날이 해당되는 예시는 아니긴 하지만.

태섭과 백호는 가족을 잃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다른 점은, 백호는 인간이라 부모가 찾아온다 해서 눈으로 볼 수 없고, 태섭은 요괴기에 형이 찾아와도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지 않나. 너는 인간이라서, 정말로 죽은 이가 찾아온다 하더라도 얼굴을 볼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손을 잡아볼 수도 없다는 것을.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지.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상처받을 게 뻔한데.

호열의 질문에 부루퉁해있던 백호가 호열을 보다 고개를 팽 돌리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죽었다면……."

"응?"

백호의 가족은 현재 이 세상에 있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반응은 뭐지? 정말로 죽었다면? 가족 중 누군가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뜻인가? 호열은 백호와 헤어지고 나면 마력을 풀어 짐승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해볼 생각을 했다. 그때 들었던 정보에 의하면 가족들은 도시에서 적응하기 위해 무리하다 병사 했다고 들었었는데. 마력이 정보를 물어왔던, 여우가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닿았을텐데. 호열 정도 되는 대요괴의 마력이면 전국으로 마력을 흝어 야생이든, 동물원이든 살아있는 여우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닿을테다. 카더라 정보였나? 호열은 백호의 주위를 맴도는 악령들을 들여다보았다. 백호의 가족은 없다. 당연하게도. 괜히 몸 한 번 뺏어보려는 잡귀들이었다. 슬쩍 손을 등 뒤로 해 마력을 흘려보내자 백호의 주위를 얼쩡대던 잡귀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할로윈이라고 해서 관련된 영혼들이 모두 찾아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할로윈과 망자의 날은 다르기도 하고. 태섭이 혼자 다니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태섭의 형이 산 자의 세계를 방문했을지부터 알 수 없었고, 방문해있다 하더라도 여기에 있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그저 이 근방을, 혹은 이 밤이 지나기 전 멀리 어디까지라도 달리며 찾아야했다. 백호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산 자의 세계에 발을 내딛었을지도 알 수 없었고, 발을 들였다 하더라도 이 곳에서 발을 들인게 맞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호열의 영역이 아니었으니까. 요괴라고 하더라도 특정 영혼을 특정 장소까지 이끄는 것은 영역 밖의 일이었다. 영혼과 관련된 일은 죽은 자의 세계를 관리하는 자들의 영역이기에.

호열은 괜히 속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괜한 소리를 했나 싶어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런 생각하고 있을 줄도 몰랐고. 호열이 입술을 우물거리다 백호를 어화둥둥 달래는 친구들을 보다 부스를 벗어났다. 삐진 거 아니라며 버럭하던 백호의 시선이 호열을 향한다.


"왜 혼자 있어?"

"……."

인적이 드문 마을 외곽의 건물 옥상에 앉아있던 호열에게 태섭이 물었다. 호열이 태섭을 흘기자 양 손을 들어보인다.

"들키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해?"

"미안- 미안. 그래도 이정도는 아무도 모르잖아? 백호한테 마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태섭의 등 뒤로 코요테의 꼬리가 살랑거렸다.

"백호한테만 안 들키면 되는 거 아냐?"

"괜한 생각하게 만들기 싫어서 축제 흥 깨는 소리했다고 삐지고 난리났잖아."

"백호한테 그런 순진한 구석이 있었나? 아, 뭐. 순진하다면 순진하긴 하지. 요즘 인간치고는."

태섭이 웃었다. 그런 태섭을 여전히 흘겨보던 호열이 퉁명스레 물었다.

"그래서, 너는. 만났냐?"

"…흐흥."

흐리게 웃더니 고개를 젓는다. 쉽지않네. 그런 소리를 한다. 호열이 팔을 뒤로 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름달이 밝은데다 컸다. 속에서 요동치는 마력을 눌러내리며 태섭을 보았다. 태섭이 제 귀끝을 몇 번 매만지다 꾹 누르자 귀가 사라진다. 꼬리도 한번 쥐니 그대로 사라진다.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 된 태섭이 후드티의 큰 주머니에서 강아지 귀 모양 머리띠와 꼬리를 한 허리띠를 꺼내 착용했다. 이제 한 시간 정도 뒤면 자정이 지난다. 할로윈 축제의 밤은 한창일지 몰라도 인간이 아닌 것들이 인간들 속에 섞여들 시간도 한 시간 남짓 남은 것이다.

"백호가 가족이 죽은 게 아닌 것 처럼 중얼거리던데."

"엉? 그때 전국 싹 뒤졌지 않나?"

"가족을 찾는 게 아닌건가? 그럼 누굴 찾는거지?"

몸을 바로 해 앞으로 숙이더니 손으로 턱을 짚는 호열을 태섭이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백호를 그려보다 심각한 호열을 다시 본다.

"난 왠지 알 것 같은데."

"네가 어떻게 알아?"

"어… 있어, 그런 거."

"뭔데?"

호열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태섭에게 다가왔다. 

"이게 선배한테 자꾸 막 말하네."

"뭔지 얘기 좀 해주시죠, 태섭 선배."

"으. 소름."

"아 어쩌라는 거야. 빨리 말이나 해봐. 내가 모르는 백호에 대한 게 있다고?"

"……."

누가 들으면 강백호 스토커 소리 듣는다……. 진심으로 걱정한 태섭이 호열을 보았다.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에 태섭이 다 풀어진 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너잖아."

"뭐?"

"옛날에 보고, 이후로 한 번도 본 적 없으니까. 찾아가도 싹 다 밀려있으니 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걔가 어떻게 알겠어? 바로 옆에 그 첫사랑이 있어도 아무 말도 안하고 입 싹 닫고 있는데."

"……."

"저 정도면 쟤도 중증인데 그냥 말 하는 게 안 낫나?"

"나는……."

호열이 답지않게 망설인다. 태섭은 호열의 안에서 요동치는 마력의 몸부림을 보았다. 하늘을 슬쩍 보았다. 밤의 요괴에 속하는 태섭이나 호열이 보름달이 차오를 수록 마력이 강해지고 본능이 날뛰긴 했지만, 호열의 경우는 좀 더 심했다. 보통 이런 날 호열은 어디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는 편이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이 할로윈인 바람에 신난 백호를 따라 나선거다. 여길 보나 저길 보나 중증인 놈들 뿐이다. 이 놈 한 놈만 입을 열면 모두가 해피엔딩인데 그걸 하질 않으니. 독하다고 해야할지 미련하다고 해야할지.

날뛰는 마력에 흔들리는 호열을 들여다본다. 요괴는 원래 자기 것에 집착이 심했다. 달이 기우는 시기에는 본능을 잘 내리누를 수 있지만 반대로 달이 차오르는 시기에는 컨디션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가뜩이나 달이 모두 차오른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마력이 요동쳐 태섭도 힘든데, 꼬리가 하나도 아니고 아홉개 모두 달린 구미호면 진짜 미칠 노릇이겠지. 가지고 싶어 죽으려고 하겠지. 강백호를. 태섭이 눈을 가늘게 떴다. 본능이 날뛰려는 것을 겨우 억누르고 있는 호열의 귓가에 속삭인다.

"가지고 싶지 않아? 예전부터 갖고 싶어했잖아."

호열이 크게 흠칫했다. 언제부터인가 호열이 숨을 헐떡이며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태섭은 그런 호열에게 은근히 어깨를 붙이며 말을 이었다.

"슬쩍 말해버려. 네가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첫사랑이 바로 나야, 백호야."

"허억……."

"네가 나를 잊지 못했듯, 나도 너를 여태 잊지 못했어. 숲이 파괴되고, 터전이 사라질 때까지 너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리워하기만 하던 내가. 네 옆에 있었어. 백호야."

"그만……."

태섭의 입술이 호열의 귀에 붙었다. 입술이 움직이며 호열의 귀를 진득하게 문질렀다.

"너를 가지고 싶어, 백호야."

퍽 소리와 함께 호열이 거칠게 태섭을 밀었다. 두어걸음 물러선 태섭이 눈썹을 삐딱하게 떴다.

"어쭈? 이걸 억누른다고?"

호열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다른 손으로 태섭의 입술이 문질러진 귀를 감쌌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태섭이 자극한 탓에 마력이 터져나오기 직전이었다. 숨을 애써 고르는 호열에게 태섭이 말했다.

"네가 언제 죽을지 어떻게 알아? 백호가 다음 생에 너를 기억할지 안 할지 어떻게 아는데? 뭘 믿고 그렇게 미련하게 굴어? 너 구미호야, 알아? 일미호도, 삼미호도, 칠미호도 아니고 여우 요괴들 중에 가장 강하고 가장 오래 사는 요괴라고. 너 지금 정도의 힘이면 진짜 못 해도 오천 년은 더 살아. 멍청아. 그런데도 네가 죽으면 그 언젠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거야? 진짜로?"

"시끄, 러워……."

호열이 고개를 젖혔다. 숨을 고른다. 뛰쳐나가기 직전의 마력을 어떻게든 억눌렀다. 허. 이게 된다고? 태섭이 입을 벌렸다. 좀 더 정신이 나갈 때 자극했어야했나? 땀으로 푹 젖은 호열을 보며 태섭이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시끄러워. 그건 내가 감당해."

"어련하실까. 네가 인간으로 태어날 그 언젠가를 위해서, 백호는 아무도 만나지 말고 계속 강백호라는 인간으로 환생하면서 기다리고? 진짜 어쩜 이렇게 이기적이지. 여우새끼라서 그런가."

"너 진짜 대체 누구 편이야?"

"편이 어딨어? 네가 오죽 멍청하게 구니까 답답해서 하는 말이잖아. 내가 말했지. 백호 북산 농구부에 없어서는 안될 인재가 될 놈이라고. 너 때문에 백호가 자꾸 흔들리는 게 보이잖아. 방해된다고, 네가. 너에 대한 마음을 지우면 뭐해? 어떻게든 기억을 해내는데."

"뭐라고?"

호열이 눈을 크게 떴다. 태섭이 팔짱을 끼며 삐딱한 눈썹 그대로 호열을 보았다.

"너, 네가 마력 잘 다루는 구미호라고 믿고 깝쳤지? 백호 순진하다고 했잖아. 원래 순진한 인간일수록 마력 해독력이 뛰어난 거 네가 더 잘 알텐데?"

또륵 흘러내린 땀이 호열의 턱 끝에서 매달리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호열의 심장이 그런 것처럼. 마력을 완전히 제어하고 억눌렀음에도 호열이 흔들렸다. 영혼이 흔들리는 모습을 본 태섭이 말했다.

"네가 암만 백호 기억 지워대봤자, 시간이 지나면 다 풀린다는 뜻이야. 한마디로 네가 한 짓은 전부 뻘짓이고 의미없는 짓이라고. 자기 첫사랑의 얼굴만 기억 못한다 뿐이지, 다른 건 다 기억하고 있다고."

그래도 계속 뻘짓할래? 태섭이 물었다.

호열은 평소와 달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섭의 말에 혼이 나간 얼굴로 마을 중심으로 돌아온 호열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축제도 끝물이었다. 부스 여기저기 정리하는 분위기였다. 호열은 익숙하게 친구들이 열었던 부스를 향해 걸었다. 부스를 정리하고 돈을 세던 용팔이 호열을 보곤 손을 흔들었다.

"양호열 이 자식! 바쁜데 도와주지도 않고 도망을 쳐?"

"오늘 번 돈 너는 하나도 안 나눠줄거다!"

"백호는? 어디있어?"

용팔의 말에 맞장구친 구식을 보던 호열이 백호를 찾았다. 그런 호열에게 대남이 말했다.

"그 뒤로도 계속 기분 별로였어. 너 계속 안오는 거 보다가 그냥 간다고 집에 갔어."

"집에 갔어?"

"한 5분 됐나? 분위기 안 좋길래 우리도 더 건들진 않았는데… 야, 어디가?"

"크아악! 저 놈 정리도 안도와주고 도망가네!"

"야! 양호열! 너 진짜 네 몫 분배 안 한다! 우리끼리 다 나눈다!!" 

등 뒤로 외치는 친구들의 말을 싸그리 무시한 호열이 백호의 집을 향해 달렸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아무도 없는 시간인 것을 이용해 가볍게 땅을 박찬 호열이 그대로 높이 뛰어올라 건물의 지붕과 옥상 사이를 뛰었다. 얼마를 그렇게 이동했을까. 느린 걸음으로 집으로 가는 백호를 발견한 호열이 한 블럭 떨어진 골목길로 뛰어내렸다. 사뿐히 내려선 호열이 옷 매무새를 대강 정리한 후 골목에서 빠져나온다. 탓탓 뛰어 익숙한 뒷모습에 가까워진다.

"백호야!"

"……."

걸음을 멈춘 백호가 뒤를 돌았다. 호열이 숨을 고르는 '척'을 했다. 옷을 쥐고 탈탈 터는 '척'을 한다. 호열이 이마에 흐른 땀을 훔치며 말했다.

"내가 한 말이 그렇게 기분 나빴어? 축제도 제대로 안 즐겼다며. 미안해서 어떡하냐."

"……."

백호가 호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백호야? 호열이 고개를 기울였다. 백호가 손을 들어 호열의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꼬리."

"!!!!"

호열이 다급하게 제 뒤를 더듬었다. 꼬리를 붙잡고 그림자를 확인한다. 비치는 그림자는 꼬리 하나뿐. 헉… 당했다. 호열이 뻣뻣하게 백호를 올려다보았다. 백호의 미간이 한데 모여있었다. 호열의 등 뒤로 식은땀이 미친듯이 흘러내렸다.

"그 꼬리 가짠데 왜 당황하냐?"

"으, 응? 어, 그, 그러게. 하하… 오늘 하루종일 달고 있었더니, 지, 진짜인 줄 알았나아~?"

"……."

백호의 손이 위로 움직였다. 머리 위로 백호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진짜 귀'에.

"……."

호열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귀가 절로 바싹 누웠다. 저도 모르게. 백호의 손을 피해서. 날뛰는 마력도 안정시켰는데 백호에게 귀를 들켰다는 것만으로 크게 당황한 호열의 뒤에서 아홉개의 퐁실한 꼬리가 마력 대신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

"……."

백호의 입술이 벌어졌다. 아. 망했어. 호열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잠시 말 없던 백호가 말했다.

"너 맞지?"

"…뭐가."

"내 첫사랑."

"!!!"

인간이 아닌 것을 들키는 것과 백호의 첫사랑이 자신이라는 것을 들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호열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백호와 눈이 마주친다. 백호가 말했다.

"역시 너지? 양호열."

내 첫사랑.

지금 드는 감정은 무엇일까.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을 모조리 들켜 어딘가에 당장이라도 숨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알아도 크게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백호를 보며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빌어먹을 코요테 자식이 꼬시던 것 처럼 -순도110% 장난-, 이렇게 된 거 백호를 가지고 싶다는 그런 생각도 했다가. 정말 별의 별 생각이 호열의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헤집었다.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이지만 정리조차 되지 않은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올리는 만무했다. 그래서 그런가. 호열은 말 대신 눈물을 쏟았다. 눈 앞이 뿌옇게 차올랐다 쏟아내며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놀라는 백호에게, 달싹이던 입술이 마음대로 움직인다.

"맞아. 나야. 바다숲에,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숲에 살던 요괴. 그거 나야. 네 첫사랑도 나고. 백호야. 그거 전부 나였어. 나 맞아……."

"……."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나도 너를 좋아했어. 네가 좋아서, 네 옆에 있고 싶었는데. 내가 인간을 잡아먹는 요괴잖아. 백호야. 너는 인간인데. 나는 인간을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가 없는 요괴잖아. 백호야."

"……."

"그래서 그 숲에, 바다숲에 계속 있었어. 네가 살던 곳이 재개발지역이 되면서 마을 사람들이 쫓겨나는 것도 다 지켜봤어. 마지막까지 남았던 가족이 너의 가족이었던 것도 모두 다 지켜봤어. 네가 네 부모의 손을 잡고 마을을 떠나는 것까지, 모두 다. 봤어. 내가. 나를 떠나는 너를 봤다고. 백호야."

"……."

호열의 암녹빛 눈에서 눈물이 계속해서 쏟아져 내렸다. 들켜서 당황해서 그런건지,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해서 그런건지. 무엇때문에 눈물이 이리도 쏟아지는지는 호열 역시 알지 못했다. 그저.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백호를 보며 눈물을 쏟아내는 것 뿐이라는 것 그것 하나만 알았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어. 바다숲까지 밀리는 그 순간까지도. 네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걸 차라리 다행으로 생각했어. 나는 요괴고, 너는 인간인데. 나는 인간을 잡아먹는 무서운 요괴고, 너는 평범한 인간인데. 요괴인 내가 어떻게 인간인 너를 사랑해, 백호야. 응?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야."

"……."

"그런데도, 그런데도 너를 잊을 수 없었어. 너를 좋아하지 않고 싶어서, 너를 그리워하고 싶지 않아서 바다숲이 사라질 때까지도 너를 찾지 않았어. 요괴가 어떻게 인간을 사랑해. 그건 인간에게 너무 위험하고 요괴에게 너무 잔인하잖아. 백호야. 말도 안 되는데, 그러면 안 되는데."

그래도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서… 결국 너를 찾아와버렸어.

"네가 사는 곳을 어떻게든 찾아서, 네 주위를 맴돌다가, 너와 같은 학교를 다니고, 너와 함께 다니고, 첫사랑이라는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너를 보면서 내가… 백호야. 왜 나를 잊지 않았어? 너 그때 알았잖아.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았잖아. 맞지."

호열의 말에 백호가 가만히 있다 고개를 끄덕였다. 호열의 눈에서 눈물이 더 왈칵 쏟아졌다.

"왜 날 좋아해? 왜 좋아했어?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왜? 왜 나를 찾아? 그대로 잊고, 네가 여태 그랬던 것처럼 예쁜 여자애들에게 고백하고, 차이고, 그러다가 다시 고백하고…, 누군가 너를 받아주는 좋은 사람을 만나서 예쁘게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그래야하는데. 왜?"

"…그럼 너는 왜 날 좋아하는데?"

"내 감정은 중요하지 않아, 백호야. 인간인 네가 더 중요해. 백호야. 나 좋아하면 안 돼. 기억하면 안 돼, 백호야."

"그러니까, 왜 안되냐고."

"나는 인간이 아니잖아, 백호야……."

호열의 떨리는 손이 백호의 옷깃을 쥐었다.

"백호야, 나는 인간이 아니야. 지금 보고도 모르겠어? 나는 요괴야. 그것도 일반 여우 요괴보다 훨씬 강한 구미호라고. 훨씬 강하고, 훨씬 오래 살아. 백호야. 나는 너랑 같은 시간선에서 살고 있지 않아. 나는 나조차도 내가 얼마나 오래 살지 알 수 없는 종족이야. 백호야. 너는 인간이잖아. 응?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너는 그러면 안돼. 백호야. 왜 내가 기억을 계속 지우는데도 계속 나를 떠올리는 거야, 백호야… 나 이제 네 기억 지우기 싫어……."

"…그럼 안 지우면 되잖아."

"백호야,"

"네가 구미혼지 뭔지 하는 요괴고, 내가 인간이라는 게 그렇게 달라? 그냥 네가 나를 좋아하고,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거면 안 돼? 내가 단순하고 무식한 놈이라는 건 아는데, 서로 좋아하면 그대로 서로를 좋아하는 걸로 끝내면 된다는 것 정도는 알아, 양호열. 그러면 안 돼?"

"백호야아……."

호열이 백호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백호가 호열의 손을 쥐고 제 뺨에 댔다. 백호의 뺨이 눈물로 얼룩져있었다. 호열의 손 끝이 백호의 뺨을 적시는 눈물을 훑었다.

"네가 나이를 먹고 늙어 죽어가는 걸 내가 어떻게 봐……."

"나의 모든 순간을, 너에게 줄게. 그러니까 내가 지금보다 더 성장하고, 나이를 먹고, 늙어가고, 죽을 때까지의 모든 나를 내 옆에서 지켜봐. 나를 좋아한다면."

그러니까 양호열.

"네 진짜 마음을 나에게 말해줘."

백호가 고개를 숙였다. 호열이 고개를 들었다. 가까워지는 입술이 서로의 눈물에 젖어 짭짜름한 맛을 냈다. 맞닿았다 떨어진 입술 사이로 호열이 속삭였다.

"네가 좋아, 백호야……."

백호가 호열을 끌어안았다. 흐느꼈다. 호열이 백호의 등을 끌어안고 그대로 울었다.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고,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올해도 여기?"

"태섭 선배."

"으. 선배 소리 한번 하랬다고 지금까지 선배라고 하냐?"

"그으래. 올해도 여기다."

10월 31일이면 항상 찾아오는 곳. 다른 사람들이 할로윈을 즐길 때, 망자의 날을 맞이하는 곳. 호열이 바다숲이었던 도로 위에 앉아있었다. 태섭이 그 옆에 앉아 챙겨온 술을 내밀었다. 호열이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는 뚜껑을 따 그대로 입을 대고 술을 들이킨다. 한참 술을 넘기던 호열이 병을 옆에 내려놓고 말했다.

"여기 있으면, 언제가 됐든 만나러 온다고 했으니까. 기다리는 거야. 나 기다리는 거 잘 하잖아."

호열의 말에 태섭이 픽 웃었다.

"어우, 죽어서도 염병천병 다 하는구만."

"다시 태어나도 염병천병 다 할 건데?"

"징그러워서 살겠나 진짜."

"하하."

호열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름달이 떴다. 속에서 일렁이는 마력을 거부하지 않는다. 머리 위로 솟아오른 귀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아홉개의 꼬리를 느끼며 호열이 눈을 감았다.

아, 들린다. 영혼이 경계에 발을 들이는 소리가.

입꼬리를 올리며 호열이 눈을 떴다. 눈 앞에 일렁이는 무언가를 보며 웃어보인다.

"어서와, 백호야. 오늘만을 기다렸어."

네가 다시 태어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게. 언제까지나.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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