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초우담

木草雨談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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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는 운전석에 몸을 완전히 기대고 눈을 반쯤 감은 채 차창을 때리는 소낙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통행량이 드문 국도 한켠의 오솔길에 소나무의 자가용은 서 있었다. 차를 세운 이십 분 전부터 지금까지 그의 곁을 지난 차는 한 대도 없다.

차의 시동은 꺼졌다. 이동 중 켰던 에어컨의 찬기는 아직 남아있다. 조금 서늘한 정도의 한기가 반팔 셔츠 밖으로 드러난 피부를 어루만진다.

백정우와 만날 일이 있었다. 구 산백파 쪽에서 뭔가 이상한 흐름이 관찰되었다고 했다. 구 산백파라고 할까, 구 보스의 지인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에 가까웠지만 정우는 어쨌든 구 산백파의 소행이라고 뭉뚱그렸다.

흐름의 내용이 무언가 하니, 그 지인이라는 사람이 산백파의 이름을 대고 이상한 약물을 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무가 새로이 권력을 잡은 이래 산백파가 약물 판매에 손을 댄 적은 없다. 뭔가 큰 이유가 있어서 손을 대지 않은 건 아니고, 단순히 나무의 인간관계망에서 약물을 조달하고 처리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마약 얘기하는 거지?”

나무가 조수석의 정우에게 물었다. 서류철을 뒤적거리던 정우는 네, 하고 일단 대답하기는 했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마약…… 일 겁니다. 아마도요.”

“아마도요라니.”

나무가 보채자 정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뒷말을 이었다.

“그게요. 실은 약물의 조성이 마약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 같습니다. 마약이 우리 몸에 악영향을 주기는 해도 아예 독극물의 형태를 띄는 일은 별로, 아니 거의 없는데요.”

정우는 그리 말하며 서류철의 페이지를 펄럭펄럭 넘겼다. 일견 원소 기호처럼 보이는 영단어들이 가득한 표와 그래프가 있는 페이지에 정우의 손가락은 멈췄다.

“그쪽에서 푼 약물에는 소량이지만 비소 같은 독극물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먹으면 위험한 정도의 양인가?”

“그 정도는 또 아니랍니다. 중요한 건요, 보스. 이게 여타 마약들과는 완전히 다른 조성을 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정말로 마약인지, 아니면 의약품인지 다들 혼란스러워하는 모양샙니다.”

독과 약은 한끗 차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 있지만 마약과 약이 한끗 차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 정우는 그 뒤로 해당 약물에 대한 또다른 설명을 덧붙였다.

마약인지 의약품인지는 아직 판명되지 않았지만 일단은 시중에 유통되는 마약들처럼 비밀스러운 경로를 통해서 유통됨. 최근에는 백화점의 초콜릿 팝업스토어에서 초콜릿으로 위장해 유통된 사례가 발견됨. 팝업스토어의 캐셔를 신문한 결과 이전의 다른 팝업스토어들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유통된 것으로 파악됨. 유통 시작 시기는 올해 초봄 정도로 추정.

“유통 목적은 뭐라고 생각되나?”

정우의 브리핑을 듣던 나무가 조용히 물었다.

“글쎄요. 아직 명확하게 나온 건 없습니다. 자기 이름이 아닌 산백파의 이름을 대고 팔아대는 걸 보니 자기 조직의 영역 확장 목적은 아닐 테고요. 지금으로서는 돈이 목적이지 않은가 싶은데요. 그 사람 개인의 이름을 대는 것보단 우리 이름을 대는 게 판매의 안정성 측면에서 낫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요.”

정우의 말대로라면 그건 분명 의약품이 아닌 마약일 것이다. 의약품은 의사의 이름을 대고 팔지, 조직폭력단의 이름을 대고 팔지는 않는다.

“그래? 돈이 필요해서 약을 파는 것치곤 선택이 과감한데. 헤로인이나 LSD는 분명 레드오션일 테지만 아무리 그래도 독약을 파는 건…… 깡이 좋네.”

“다른 곳도 아니고 우리 이름을 대는 것도 그렇고요.”

“권 씨 지인이라면야 꿀릴 거 없겠지.”

머릿속에서 권진백의 굴곡진 얼굴이 부상했다. 그는 오래 전 어떤 이유로 나무에게 산백파의 권력을 세습했다. 그에게는 친아들은 없지만 양아들은 있었다. 양아들도 아닌 나무가 보스의 권력을 손에 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양아들이 조직폭력단이라면 벌레 보듯 했기 때문이다.

“우리 쪽에 위협이 될 것 같진 않은데. 네가 말하는 것만 들으면.”

서류철을 들고 있던 정우의 단정한 얼굴이 조금은 굳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유통 흐름을 보니 약을 다른 조직에 넘길 생각도 없어 보입니다.”

권 씨의 지인이 풀고 있는 약의 유통량은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고 한다. 헤로인이나 LSD 같은 메이저한 약물은 수요도 그만큼 많아서 메이저한 것이다. 비소가 들어간 마약은 아무래도 마이너한 수준의 수요만을 불러일으킨 듯했다. 그렇다는 건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니……. 다른 조직들이 탐을 낼 일도 없다.

“돈을 위해서 약을 풀었지만 썩 돈이 되지 않은 건지, 아니면 당초부터 돈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건지. 궁금하네. 그 지인이라는 사람을 직접 만나볼 수는 없나?”

“저도 찾아보긴 했는데, 지난 봄 이후로 행방이 묘연합니다.”

“우리 정보망으로도 못 찾는 사람이 많네.”

나무의 짧은 대답에 정우의 말문이 막혔다.

“…죄송합니다.”

“아냐. 계속 찾아보면 되지.”

그리고 정우는 조수석의 차 문을 열고 나갔다. 산백파의 이름을 댄 약물 유통 건 외에 이런저런 브리핑을 하기는 했지만, 나무가 줄곧 바라고 있었던 건의 해결은 오늘도 여전히 보지 못했다.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소낙비가 차창을 때리는 소리가 균일한 속도를 가지고 차 내부에 울려퍼진다. 눈을 반쯤 감고 있던 나무는 문득 자신이 물로 이루어진 튀김기 안에 들어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기이한 발상이었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이상야릇한 발상.

생각에 잠겨있다가 조금 졸았다는 뜻이다.

권진백의 얼굴을 또다시 떠올린다. 그는 매년 일정한 수익을 약속하는 조건 하에 소나무를 산백파의 보스로 인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는 약을 팔지 않았다. 그 당시에도 약은 이미 레드 오션이었다. 레드 오션이 아닌 불법적인 돈벌이 수단은 하나 뿐이었다. 사설 도박, 불법 도박. 아직 완전한 규제가 잡히지 않은, 인터넷 상에서의 불법 도박…….

인터넷은 무서울 정도로 접근성이 좋다. 스마트폰이 보급된 현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돈을 뜯어낼 수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 나무는 발빠르게 기술자들을 수소문했다. 약물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적었지만 인터넷에 골몰한 사람들은 천지에 수없이 많았다.

그렇다고 오프라인 도박장을 아예 버린 건 아니었다. 인터넷 도박으로 초기 자본을 모은 다음 놀 거 하나 없는 산간벽지를 돌아다니며 도박 오락시설을 하나하나 설치했다. 어떤 곳은 평범한 룰렛방이었고 다른 곳은 화투방이었으며 또다른 곳은 카드방이었다…….

약을 판 적은 없다. 비소 같은 독약은 더더욱 판 적이 없다.

최근에는 큰 건을 성사시켰다……. 정선의 카지노를 벤치마킹하여 탄생한 동두천의 국립 카지노와 계약을 맺었다. 산백파가 소유한 부지에 카지노를 짓게 해 준 대신 토지 사용료를 매년 받겠다고…….

나무는 약간 졸았다. 열기가 도는 몸이 생각에 방해가 된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이거 곤란하게 되었다. 유신이한테 감기를 옮기면 안 되는데. 당분간은 밖에서 잘까.

진유신에 대해 생각한다. 이유 모를 화제전환이다.

자연스럽게 작년 봄 부산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녀는 갤러리에서 발생한 시신 절단 사건을 완벽하게 해결했다. 나무가 의도적으로 내세운 허황된 추리에 전혀 휘둘리지 않았다. 무리 하나 없는 깔끔하고 아름다운 논리를 관망하면서 나무는 문득 미량의 공포를 느꼈던 것도 같다.

이 여자는 그렇다면 나에 관한 것도 꿰뚫어보는 게 아닌가, 하고.

나무는 이제껏 정우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자신의 위치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조직폭력단의 보스라는 자리는 당연하게도 언제나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타 조직에게 견제당해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고, 경찰에게 붙잡혀 옥살이를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나무에게는 없었다.

그는 돈이나 명예를 위해 보스의 자리에 오른 게 아니었으므로.

단순히, 조직폭력단이라는 집단의 특성이 나무에게는 필요했을 뿐이었으므로.

나무는 산백파의 수익 전부를 세탁하여 권진백의 계좌로 넣어주고 있다. 생활비는 자신이 따로 벌어 쓴다. 산백파의 수익에 손을 대는 일은 없다.

현재로서는 리스크밖에 없는 일을 자신은 도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무엇을 위해서 조직을 이끌고 있는가 하면…….

똑똑

하는 소리가 바로 근처에서 들렸다. 반사적으로 운전석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모르는 사람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안쪽을 살피려 든다. 나무의 자가용은 선팅이 되어 있어 밖에서는 안의 상황을 살피기 어려운 것이다.

셔츠 차림의 남자 두 명이었다. 나이는 각각 쉰과 마흔 정도일까. 차창에 얼굴을 대고 있는 건 좀 더 늙은 쪽이다. 길고 풍성한 머리를 하나로 묶은 스타일이 나이에 영 걸맞지 않다고 나무는 생각했다. 젊은 쪽은 평범하게 생겼는데, 왼쪽 눈을 머리카락으로 가린 게 또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다.

나무는 대처를 생각했다. 이 길은 국도에서 빠진 오솔길이다. 이대로 쭉 길을 따라가면 국도에 다시 합류할 수 있다. 다른 길로 빠질 수도 없는 외길이다. 왜 터 놓은 건지 의문이 생기는 길이기는 하지만 아마 도로 건설 계획에서 어떤 착오가 있었던 흔적일 거라고 나무는 여기고 있었다.

오솔길은 왼편에 국도를 두고 오른편에 산을 낀 채로 놓여 있었다. 얼핏 보기에 사람이 드나들 만한 등산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국도에 인도가 놓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차도 오토바이도, 하다못해 자전거도 하나 대동하지 않고 이곳에 나타났다.

나무는 약간의 혼란에 빠졌다.

오른쪽의 산을 오르다가 길을 잃어 등산로가 아닌 길로 내려온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복장들이 전혀 등산객의 그것이 아닌데. 두 사람은 모두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다. 나이 든 쪽은 더군다나 정장 바지를 걸치고 있다. 등산할 때의 차림새라고는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국도까지는 차를 타고 온 다음 오솔길 앞에서 하차해 걸어들어왔다? 그것도 말이 안 된다. 그래야 할 이유가 뭐가 있다는 말인가? 이 길에는 노상 가게는 커녕 졸음 쉼터 하나도 없는데.

납득 가능한 이유는, 실은 하나가 있었다. 이들이 자신을 추적해 따라온 어떤 피라미들이라면 일련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무리가 있다. 다른 사람의 차도 아니고 내 차에서 사건을 벌여서 뭘 어떡할 셈인가. 여기에 어떤 덫과 장치가 설치되어 있을 줄 알고. 만약 나를 타겟으로 해서 일을 벌일 거였으면 자신들의 차를 고스란히 끌고 왔어야지.

똑똑

나이 든 남자는 다시 한 번 차창을 두드렸다. 네가 이 안에 있는 건 알고 있으니 대답해 달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치지 않는 소낙비에 흰 셔츠의 어깻자락이 축축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주름이 잡혔던 미간은 어느새 쭉 펴져선 인자한 미소를 얼굴에 걸고 있다.

시동을 걸기 직전 나무는 고민했다. 두 가지의 활로가 그에게는 있었다. 첫 번째는 이들을 무시하고 차를 출발시켜 귀가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차창을 내려 말이라도 한 번 들어보는 것이었다. 만약 이곳이 국도 한복판의 우회도로가 아닌 도심 주차장이었다면 나무는 생각도 않고 전자를 골랐을 터였다.

하지만 이곳은 국도 한복판의 우회도로다. 이들은 대체 어디서 나타나 남의 차창을 두드리는 것인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마주하는 건 또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무는 끝내 시동을 걸고 차창을 내렸다.

나이 든 남자는 자신을 민속학자라고 소개했다. 천안 모처의 대학교에서 민속학을 가르치고 있다고도 했다. 양석민이라는 이름을 검색하니 확실히 교직원 일람에 얼굴이 올라 있었다. 함께 있던 젊은 남자는 독고유진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조수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포털사이트에 등재된 그의 이름에는 작가라는 부연설명이 달려있었다.

“이 산에는 문헌에 기록된 굴이 하나 있습니다. 과거에는 불교의 석굴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그 존재를 잊음에 따라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은 채 구전으로만 알음알음 전해져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 무속 수련을 위해 산에 오르던 지역 무당이 그 굴을 발견해서…….”

그래서 양 교수는 조수를 데리고 굴을 조사하러 왔다고 한다. 뒷자리에 앉은 그는 스마트폰으로 찍은 굴 내부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행적을 증명했다. 조수석에 앉은 독고 작가는 말 한 마디 꺼내지 않고 그저 묵묵히 오가는 대화를 관찰하고 있었다.

“우리 같은 민속학자나 고고학자는 현장 답사가 무엇보다 중요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돌연 소나기가 쏟아져서, 하산길을 잃어버렸지 뭡니까.”

양 교수는 선하게 처진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그 산은 등산 목적으로 오가는 사람이 없는 무명산이라 마땅한 등산로도 하나 없다고 했다. 굴을 찾았다는 무당과 접촉하여 그나마 사람의 발로 다져진 길을 찾아 오른 건 좋았는데, 답사를 마치고 굴에서 나오니 굵은 소나기가 방해가 되어 내려가는 길을 잃고 말았다고.

“…그래서 가장 완만한 길을 따라 산을 내려왔습니다.”

조수석의 독고 작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무는 대외용 미소를 흐리게 입가에 걸고 그렇군요, 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흘긋 살핀 두 사람의 신발은 확실히 진흙이 잔뜩 묻은 운동화였다.

“천안에서 오신 건가요? 그럼 여기서는 좀 먼데요. 차는 따로 가져오셨습니까?”

“아아, 예. 이 도로를 따라서 서울 방면으로 빠지면 얼마 가지 않아 졸음 쉼터가 하나 나오는데, 그곳에 차를 대고 산행했습니다.”

원래는 그쪽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길을 잃고 엉뚱한 곳으로 나와버린 것이다. 이치에는 맞는 설명이었다. 나무는 쉴새없이 앞 유리를 닦아대는 와이퍼 두 개를 의미 없이 흘긴다. 빗방울을 밀어내며 끄윽끄윽 뭉툭한 소리를 낸다. 어딘가 음산한 면이 있는 소리다.

“그래도 선생님을 만나서 다행입니다. 이 인적 드문 길에 선생님도 안 계셨으면 꼼짝없이 산으로 다시 돌아갈 뻔 했군요.”

하기사 국도 한복판에 택시가 서는 일은 없을 테니. 그런 생각을 하며 룸미러로 시선을 옮겼다. 양 교수는 빗물로 젖은 안경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웃고 있었다.

“잠시 쉬고 계신 것 같던데……. 저희가 방해가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슬슬 출발하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네비게이션으로 경로를 탐색했다. 서울 방면으로 빠지는 길목은 이곳에서 십이 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나무의 귀갓길과 같은 방향인 건 다행인 일이었다.

엑셀을 밟았다. 선팅된 차가 천천히 움직인다. 아무도 통행하지 않는 오솔길을 나와 국도로 합쳐진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길 위에는 그다지 차가 없었다.

에어컨을 틀었다. 갑작스레, 여태 의식하지 못한 흙냄새가 훅 끼쳤다. 나무는 내색 않고 그저 조용히 운전대를 잡는다. 뒷좌석의 양 교수는 말끔해진 안경을 도로 쓰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니까,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조수석의 독고 작가는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왼눈을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있기 때문에. 국산 차의 운전석에 앉은 나무는 그의 시선을 확인할 수 없다.

미묘한 불안감이 가슴 한구석부터 퍼져나간다.

여태까지의 그들의 말이 전부 거짓말이었다면? 굴이니 무당이니 산행이니 하는 말은 전부 꾸며낸 이야기라고 한다면. 그 뒤에 예상하지 못한 진실이 있다고 한다면. 진실은 대체 어떤 형태를 띄고 있을까.

제 눈에 띄지 않는 진실이라는 건 없었다.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반상을 한 번 살피면 이후의 흐름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흑돌과 백돌이 아닌 인간이 그 위에 있어도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돌의 행로는 정해져 있다. 인간의 행로 역시 그러하다. 그들이 합리적인 최선의 선택을 한다고 가정한다면, 지금의 상황을 살필 수 있다면, 그 뒤로의 전개는 언제나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다르다. 기이하게도 현 상황에 대한 합리적인 해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들은 반상 위의 돌이 아니다……. 그런 불건전한 예감만이 나무의 뇌리에 부유하는 것이다.

인간이 반상 위의 돌이 아니라면 무어란 말인가?

반상 밖의 돌인 인간이 있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 기보를 보아야 하는가?

나는……. 반상 밖의 돌을 만나본 적 있는가?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경로라면 네비게이션이 안내하고 있습니다만.”

양 교수는 이쪽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그저 미소지었다. 차창 밖에서 지었던 것과 같은 인자한 미소다.

“뭔가 고민이 많으신 것 같으시군요.”

“고민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하, 그런 선무당 같이 뜬구름 잡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젖어버린 어깻죽지를 괜시리 툭툭 털면서 말을 이었다.

“탄소에 황, 산소, 수소. 이거야 뭐 당연한 거고. 철과 알루미늉, 규소, 칼슘에 칼륨……. 그리고 비소와 수은이라. 재미있는 약물을 연구하고 계시는군요, 선생님은.”

나무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룸미러로 향한다. 조금 수축된 자신의 동공 뒤로 양 교수의 인자한 얼굴이 보였다. 다른 곳을 보는 일 없이, 여전히 이쪽을 향하고 있다.

이 사람은 대체 왜 그걸 알고 있는 거지?

나무는 등골을 스치는 오한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또다시 웃는다. 네 반응이 흥미롭다는 듯이.

“선생님이 만드신 약물입니까? 그건 아닌 듯한데. 약물을 다루는 사람 특유의 고약한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무슨 약물인지 알고 계십니까?”

“물론입니다. 신기하군요. 이 시대에 이런 약물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최근의 학계에서는 전혀 본 적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과거의 약물이라는 뜻입니까?”

“판단이 빠르시군요. 좋은 학생인걸요.”

네비게이션에 설정한 목적지까지는 오 분 가량이 남았다. 나무는 이 이상 말을 섞어도 괜찮은지에 대해 고민한다. 정보를 어디까지 내어주는 게 나을지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양 교수는 일방적으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이건, 제가 알기로 오석산이라는 고대의 약물입니다. 고대의 약물이라 하면 보통 약초와 같은 식물에서 유래된 것이 많습니다만. 오석산은 그렇지 않습니다. 식물이 아닌 여러 광물을 혼합해 만든 약물이거든요. 그러니 철이며 알루미늄, 더 나아가 비소와 수은 같은 무기성 독극물들이 포함되고는 합니다.”

학생에게 강의를 하는 투로 양 교수는 줄줄이 말했다.

“원래는 정신적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만들어진 약물입니다만, 독성이 만만치 않아 투약법을 아는 사람만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 고대의 약물을 어떻게 선생님이 연구하고 계시는지 궁금해지는군요.”

그의 다갈색 눈동자는 명확히도 나무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조수석의 작가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이쪽으로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그저 앞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는 분명 나무 자신이 그 약물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째서 그런 판단이 내려졌는지에 대해 나무는 생각한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아까 정우가 보고 있었던 서류 중 하나가 의자 밑으로 떨어져 뒷좌석으로 밀려갔다……. 그리고 뒷좌석의 양 교수는 그걸 보고 자신을 약물 연구자로 착각했다. 그래, 그는 안경을 닦는 척하며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읽고 있었던 게 아닐까.

침묵을 오래 이어가기도 뭐해서, 나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적당한 대답을 골라 던져본다.

“실은 제가 연구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아는 연구자가 우연찮게 특이한 샘플을 손에 넣어서 기기로 분석해 봤는데, 이상한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공유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뿐입니다.”

교수님의 말씀이 그 친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라는 말도 덧붙였다. 룸미러 안의 양 교수는 나무를 보고 긴 속눈썹을 움직여 눈웃음쳤다. 큼직한 덩치와 풍성한 머리칼에 비해 묘하게 선이 가는 얼굴이었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연구여야 할 텐데요.”

나무는 그의 대답을 잠시 이해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무거워진 차 안의 공기를 뚫고 양 교수의 듣기 좋은 저음이 뒤이어 울려퍼졌다.

“더 이상의 무의미한 희생은 없도록 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나무는 운전석 시트 밑의 권총을 의식했다.

양석민이 풀어놓은 대부분의 말은 진실이었다. 문헌에만 기록되었던 굴은 정말로 그 산에 있었고 최근 들어 목격 정보가 생겼다는 것도 진짜였다. 한때 불교의 석굴로 사용되었던 굴에는 소량이나마 마력의 흐름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석민이 틈만 나면 찾아다니는 아티팩트와 비슷한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티팩트는 없지만 마력은 흐르는 걸 보아하니 아마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사라지는 종류의 아티팩트가 아니었을까, 하고 석민은 자신의 추측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원래대로였다면 두 사람은 석굴 앞의 통로로 천안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석민이 제 마력을 사용하여 차원을 억지로 찢어둔 양방향의 통로는 석민의 연구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석굴 밖으로 나오자 통로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 이런……. 또 이러는구나.”

얼마 전부터 석민의 능력은 눈에 띄게 불안정해졌다. 그건 유진도 인지하고 있는 사항이었다. 그래서 차라리 차를 타고 오자고 한 건데. 석민은 구태여 통로를 열고 몸을 들이밀었다.

석민은 자신이 약화됐다는 사실을 유진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했다. 그것 역시 유진은 인지하고 있었다. 석민은 유진이 성인이 되었을 때부터 그의 스승으로 군림했으므로 언제까지나 개인의 능력으로는 유진을 압도해야만 했다. 스승은 본래 그런 존재이니까. 제자를 보살펴야만 하는 존재이니까.

하지만 그는 이미 약해졌다……. 쇠약해졌다.

그리 생각하면 유진은 문득 가슴 한켠이 아려왔으므로, 풀죽은 얼굴을 하고 통로가 있던 허공을 더듬는 석민을 애써 못 본 척했다. 이 때부터 빗방울은 이미 거칠게 떨어지고 있었다.

석민은 조금의 시간이 있으면 다시 통로를 열 수 있을 거라 말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통로를 열었던 곳에서 다시 열었다가는 이전에 사용했던 마나의 흐름과 뒤섞여 아주 이상한 곳으로 출구가 열릴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두 사람은 결국 완만한 경사를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올 때 걸었던 적당히 다져진 흙길은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이러다간 고속도로 한복판으로 나가게 되는 게 아닌가, 하고 유진은 내심 걱정했다. 그리고 걱정은 어느 정도 실제가 되었다. 국도 한구석의 오솔길로 두 사람은 나오게 된 것이다. 주인을 알 수 없는 선팅된 차가 오도카니 주차된 그 오솔길로.

“왜 그렇게 도발하신 거예요?”

졸음 쉼터의 나무 밑에서 유진이 투덜거렸다. 석민은 그의 차에서 가지고 나온 종이 한 장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다. 조수석에서 떨어진 듯, 뒷좌석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던 서류다. 표와 그래프가 잔뜩 그려져 있다.

“사람의 목숨을 그만치 많이 쥐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니.”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석민이 대답했다. 비에 젖은 흰 셔츠 밑으로 살색 팔뚝이 드러난다. 외려 유진이 그에게서 시선을 떼내야만 했다.

“붙어 있는 저주가 많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그건, 아무리 봐도 그 사람한테 향한 저주가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붙어 있던 것이 어떤 연유로 그에게 옮겨붙었겠지. 저주의 상속은 흔하게 발생하니 말이다. 그 정도로 덕지덕지 붙은 걸 보니 아마 어떤 악한 조직의 수뇌……. 사이비 종교나 조직 폭력단의 수뇌겠구나.”

“알고 계셨으면서 대체 왜……. 그 사람, 운전석 밑에 총을 숨기고 있었다고요. 제가 계속 보고 있어서 망정이지.”

그제야 석민은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유진을 바라본다. 물기 서린 갈색 머리카락이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유진은 스승의 머리칼을 정리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유진이 네가 있었으니까 마음 놓고 있었던 거란다.”

그리고 석민은 한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반으로 접어 들었다.

“사이비 종교와 조직 폭력단은 공통점이 있지. 둘 다 수뇌부의 지시라면 사유도 의심도 하나 않고 이행한다는 거야. 그런 일방적이고 무분별한 행동력이 두 조직의 중요한 특징이 된단다.”

나무 뒤편으로 몸을 숨기고 허공을 손으로 긋는다.

“그러니 그런 사람을 도발해서, 인연을 이어 두어서 나쁠 건 없지.”

손의 움직임에 따라 허공이 유려한 모양으로 찢겨나간다. 차원의 절취선은 마치 오로라와 같은 미려하고 환상적인 색깔을 내어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차원의 틈으로 홀려 들어갈 것만 같다. 통로 사용에 있어 석민에게 가장 처음으로 배운 게 바로 이거였다. 차원의 틈을 오래 보고 있지 말 것. 차원의 저 너머, 목적지만을 응시하고 있을 것. 그렇지 않으면 차원의 미아가 되어 나조차도 너를 찾으러 갈 수 없으니 말이다.

통로 앞으로 한 발을 내민 석민이 잠시 유진을 돌아보았다.

“혹여 내 쪽으로 공격이 들어올 걸 걱정하는 건 아니겠지, 유진아.”

그래봤자 인간 세계의 공격이라는 말을 석민은 생략한 듯했다.

비에 젖은 스승의 윤곽은 평소보다 조금 더 작아보였다.

“그럴리가요. 제가 교수님 곁에 있는데요.”

석민의 살색 어깨 너머로 연구실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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