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연성교환

241224

2500자

백업 by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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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셋. A가 손에 잡힌 종이들을 한 장 한장 세어갔다. 학생회에 소속된 학생들은 늘 그렇듯 각자의 역할에 맞는 업무를 수행 중이었고, A 또한 다를 건 없었다. 오히려 더했다면 더했지,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굳이 열심히 하려는 의지라기보단…… 원래부터. 성격적으로도 워낙에 섬세했던 사람인지라 가능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겹쳐져 있는 서류들에 엄지를 올려 첫장을 부드럽게 밀어넘기면 모습이 드러나는 다른 한 장. A가 의문을 띄운 건 이때부터다. 한 장이 비어 있었다. 각 장마다 오른쪽 아래에 적혀있어야 할 숫자가 차례대로 넘어가지 못한 것이다. 41페이지 다음은 42페이지가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엔 43페이지가 있어야만 하는데. 곧바로 44페이지로 이어지는 걸 보니 답은 둘 중 하나였다. 다른 페이지 사이에 잘못 섞여들어갔거나, 혹은 서류철을 들고 복도를 걷던 도중 빠져나갔거나. 그리고, 결과는 후자.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몇 번이고 천천히 세어봐도 잃어버린 페이지는 나오지 않았다. ……어디 있지? 작지만 긴 숨을 내쉬는 A다. 별 수 없다. 선생님께 찾아가 그 페이지만 출력을 부탁드리거나, 하교 후에 알아서 출력하거나. 그래도 당장 오늘 있는 회의에서 사용할 서류는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누군가가 A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약하고도 짧은 두드림 두 번.

“……이거.”

아. 짧고도 작은 탄식이 입에서 흘러나온 A와는 정반대로 새하얀 머리칼의 상대는 말 없이 손만을 내밀고 있었다. A가 왼팔을 뻗어 내밀어진 종이 한 장을 받고 나서야 그 눈과 같은 흰 소녀는 맑고도 붉은 눈꼬리를 곱게 휘어 미소짓곤 입을 열었다. ……A도 뭔가 흘릴 때가 있구나. 정곡을 찌르는 듯한 말에 A 본인은 그저 가볍게 미소지으며 넘겼지만, 사실상 맞는 말이다. 평소에는 종이 한 장, 그것도 이렇게 중요한 서류는 흘리지도 않았다. 중요할수록 서류철에 잘 보관했고, 하다못해 클립이나 스테이플러로 항상 고정시키던 편이다. 그런데도 이런 부주의한 일이 일어나다니, A는 다음에는 절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스스로 결심한 참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새삼 예상치 못한 만남이라고도 생각한다. 그야 만나자고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닌데, 페이지 한 장으로 하여금 만나게 된 순간이다. A는 이 순간을 놓치면 제법 아쉬울 것이라는 판단을 내려서, 평소와 같이 그 하늘색 눈을 유하게 휘어서는 미소를 짓곤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야, 학생회실이니까. 네가 떨어뜨린 서류는 아무리 봐도 학생회 관련 서류 같고……. 사람 없으면 그냥 두고 갈까 했는데, 마침 있길래.”

“뭐, 그것도 맞는 말이지.”

그래도 나한테 주려고 직접 찾아와준거라 생각할래. 그래도 되지? A가 말을 내뱉고는 뭐가 그리 좋다는 듯 작은 웃음을 내지었다. 하여튼…… 만약 이게 만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이야기 속이라면 분명 A는 주인공 같은 역할이었을 거라고 S는 생각했다. 척 봐도 그랬다. 성격 좋지, 누군가와 싸우는 모습도 보이질 않지. 마법이 일어나는 세상 속이었다면 왕자님까지도 어울릴 듯하다는 것까지 떠올릴 즈음, A가 S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무슨 생각 해? ……아니, 그냥. 그냥이라니, 말 안 해 주려고? 응. 그렇게 말하니까 괜히 궁금해지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43페이지의 인연이다 생각하고 같이 하교하는 건 어때?”

“……응?”

S가 한쪽 눈썹을 까딱 올렸다. 정말로 한쪽 눈썹만 올라간 건지, 타인들이 보기엔 그저 순하게도 눈을 크게 떴을 뿐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S는 A에게 의문을 띄우고 있었다. 그야, A 정도라면 별다른 이유가 없더라도 함께 하교하기에 응해줬을 터다. 아니, 사실상 함께 하교하는 건 제법 자주 있던 일인데 굳이 핑계를 댈 이유가 있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등하교 시간에 귀에 들렸던 학생들의 잡담은 언제 어디서나 교내의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 뿐이었다. 물론 한창 그런 쪽에 관심이 많을 나이라고 선생들은 말하지만, 정작 S 본인은 ‘연인’이란 두 음절로 이루어진 단어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은 것도 같았다. 남들의 시선, 남들의 이야기. 들으려 노력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A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어쩌면 학생회장이라는 직책 탓에 다른 학생들의 시선 또한 중요하게 여겨야 했지만, 그렇더라도 동시에 S와의 연인관계에 대해서는 긍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끝나고 먼저 가면 안 돼.”

“응. 약속할게.”

“약속까지야…….”

약속 그런 거,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 아냐? S가 묻는다. 단순한 투로 내뱉은 말이었지만 어쩌면 나름의 진심 또한 담겨 있었다. 하지만 S가 뒤이어 살짝 미소를 지어보인 이유는, A가 이 작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가능성은 전무했다는 이유다. A가 한쪽 손을 들어서는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린 후 그 손을 두어 번 좌우로 까딱여보였다. 그렇기에 S는 평소보다 제법 가벼운 발걸음으로 학생회실을 나섰다. 교실로 돌아가서 가방을 싸고 문 앞에 서 있으면, 그 왕자님 같은 후배가 늘 그렇듯 웃어주며 다가오겠지. 흰 머리칼이 신난 듯 어깨 위에서 흐드러진다. 비어 있던 페이지 하나를 제자리에 끼워넣던 A 또한 멀어지는 S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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