輪廻の狭間で 02
触れてば溶けてゆくよ、命の優しさで。
五,
그분께서는 인간의 삶을 택하셨습니다. 정좌한 쥬즈마루의 앞에 앉은 콘노스케는 그리 말해왔다. 져가는 석양빛이 비스듬히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그의 온화한 답에 되레 뒤에 서 있던 닛카리 아오에의 눈썹 한쪽이 치켜 올라갔다. 인간의 삶을 택했다. 이번 생에는 사니와가 되지 않겠노라 말했단 뜻이었다.
이전의 삶과 무엇이 다르셨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결과는 상이하게 달랐다. 앞으로의 미래 또한 그러했다. 더 이상 그녀가 혼마루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두 자루의 아오에의 검들 사이에서 번져나갔다. 그러나 그 파문은 자칫하면 검들 사이에서 화마같이 크게 번져나갈 위험한 것이었다.
“…왜 주인을 붙잡을 생각은 하지 않아?”
“저는 그 분께 선택권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도요. 그 말에 닛카리는 불편한 감정을 숨길 마음도 없는 듯이 표정이 굳어졌다. 문틀에 기대서서 자신의 형제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닛카리는 당사자인 쥬즈마루보다도 널뛰는 감정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쥬즈마루의 감정을 대신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는… 그분의 첫 생에서 인세로 돌려보내드리고 싶었습니다.”
“…….”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더군요. 저는 결국 그 말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쥬즈마루는 고개를 들어 장지문 너머의 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잠깐의 정적 후에 그는 다시 입을 떼었다.
“그분께 마음을 드리고, 육신을 드리고, 가정을 드리고, 가족을 드렸으나 유일하게 드리지 못했던 것이 그분이 가장 바라셨던 평범한 인간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그때 하지 못한 제 몫을 갚는 것뿐입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그리 전하고는 그는 입꼬리를 올려 살짝 웃었다. 그 말을 들은 닛카리의 입매는 반대로 내려갔다. 닛카리는 낮은 한숨을 쉬고는 몸을 돌려 밖을 향했다.
“카슈말고 다른 검에게는 말하지 않을게.”
그 말에 쥬즈마루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다정한 이였다. 싫다고 말해놓고서는 저렇게 이치를 읽고 행동하는 이였다. 그의 말대로, 쥬즈마루 츠네츠구에게는 여러 선택지가 있었다. 난폭한 방식으로는 그녀를 인간의 틀에서 찢어내버릴 수도 있었고, 부드러운 방식으로는 인연실을 거꾸로 더듬어 그녀를 찾아 자신에게 이끌 수도 있었다. 많은 남사가 그런 식으로 자신의 반려이자 주인인 사니와를 다시 품에 데려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갑갑할 정도로 목 위로 올라온 옷의 이음매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한 개씩 이음매를 풀어내자, 목에 걸린 은색 줄이 드러났다. 긴 은색 줄에 걸린 반지 하나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그 목걸이를 풀어 반지를 약지에 끼워보았다. 손을 위로 들어 올리자, 석양빛 아래 반짝이는 반지는 그의 유려한 손가락에서 보라색으로 빛났다. 그 빛을 보고 있노라면 처음 이 반지를 받았을 때를 떠올리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근시인 쥬즈마루 츠네츠구의 앞에 서서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쥬즈마루의 손에는 그녀로부터 건네받은 자그마한 상자가 들려있었다. 그가 주먹을 쥐면 숨겨질 정도의 작은 보라색의 벨벳 상자였다. 그가 그것을 받아 열면 그 안에는 반지가 하나 있었다. 오밀조밀한 세공의 은반지의 중간에는 투명한 자수정이 박혀 있었다.
“원래 결혼반지는 다이아몬드라고 하지만, 역시 당신의 눈 색인 보라색으로 하고 싶었어.”
결혼반지는 환금성 때문에 다이아를 쓴다지만, 어차피 팔 것도 아니잖아. 그녀는 자랑하듯이 같은 반지가 끼워진 자기 손을 내밀었다.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녀를 끌어안았었다. 끌어안은 작은 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웃어 보이던 그녀의 표정, 자그맣게 속살이던 목소리, 손가락에 닿는 어색한 차가움까지도. 그 모든 것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는 몸을 일으켜 제일 아래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똑같은 크기의 상자가 가득 늘어서 있었다. 다 똑같은 보라색, 다 똑같은 벨벳의 상자들. 안에 꽂혀있는 반지들도 다 똑같은. 몇 번이나 함께 마주하고 몇 번이나 새롭게 손을 겹쳐 잡아도 그녀는 항상 자신을 선택해 주었다. 이 반지의 개수는 그녀 스스로는 영영 기억해내지 못하는 그녀의 사랑의 개수였다.
“…….”
설령 그녀가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는 모든 것을 기억했다. 인간이 아니기에 망각의 축복을 가지지 못한 그는 그 모든 시간을 곱씹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어떻게 검을 쓰는데 반지를 끼냐며 제 목에 은목걸이를 걸어주던 모습도, 자신에게 사랑을 논하던 풋사랑을 하는 어린아이 같던 표정도, 울며 무저갱을 헤매던 와중에도 자신의 손을 찾던 온기도.
“… 늘 제 손을 먼저 잡아주시는 건 당신이셨습니다.”
인간의 감정이 어색하여,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께 조심스러워서, 온갖 이유를 붙여 망설여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당신이 말씀하시던 만큼 대답해 드렸을 것을. 당신이 잡아주시는 만큼 잡았을 것을. 손에 닿는 온기가 사라지고 나서야 없어진 것을 애틋이 여기는 이 어리석음조차 인간의 육에서 온 것. 당신에게서 제가 받은 것. 이 고통도 번뇌도 당신에게서 비롯된 것. 그리 생각하면 고통조차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제 스스로도, 이 감정을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는 당신의 부재에 섭섭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신의 죽음을 보지 않아도 되는 삶에 안도합니다. 그는 수많은 그녀가 이 혼마루에서 숨을 다해가는 장면을 지켜봐왔다. 처음 봤던 때와 비슷한 나이대의 그녀가 다시 주인이 되고, 다시 배워 성장하며, 작은 생명이 꺼져가는 것까지. 조금씩 다른 모습의 그녀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그녀의 가장 옆에 서 있었다.
얼굴을 태울 듯이 차가운 석양을 보며 그는 매 삶마다의 그녀의 끝을 생각했다. 조용히 잠든 당신의 몸을 깨끗한 수건으로 닦아내며 당신과의 추억을 다시 닦아내고, 새하얀 수의로 갈아입히며 슬픔을 체념으로 갈아입히고, 거센 불에 미련과 함께 태워내어 다음까지 기다릴 수 있을 만큼의 애정만을 남기어, 함에 담아내고 나면 이번의 당신과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그 막막한 감각.
처음에는 인간이고자 하는 당신을 위해, 이제는 당신이 있는 삶을 살아갈 저를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번 반복되는 삶 안에서 이번이 마지막일지, 다음이 마지막일지, 혹여 저번이 마지막이지는 않았을지. 이미 많이 닳아버린 그대의 혼이 더 이상 윤회를 버티지 못할지….
“제게 다시 와달라고는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부디 탈 없이, 부디 행복하세요. 당신의 길을 바르게 나아가세요. 그것이 제가 당신께 바라는 모든 것일 테니…. 닿지 않을 말을 홀로 중얼거리는 그는 양손을 모아 기도했다. 텅 빈 바닥에 기도하는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백 년이 지나고, 이백 년이 지나도 혼마루는 여전히 닫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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