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분명 ncp로 썼는데 왜 cp 같지 ncp 맞습니다
“젠장!”
스케이트 보드가 비탈진 산맥을 가로질렀다. 최대한 속도를 내고는 있지만 고르지 않은 흙길을 달리며 눈앞의 오토바이보다 빠르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아가사 박사님, 소년탐정단과 함께 캠핑을 온 장소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범인은 어렵지 않게 잡았다. 문제는 범인의 발악이었다.
살인미수를 저지른 범인은 죄가 들통남과 동시에 피해자가 목숨을 부지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오토바이를 타고 도망쳤다.
“거기 서!”
더 가면 막다른 절벽이다. 어차피 멈추게 될 거라 생각한 코난이 스케이트 보드에서 내려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난 그 인간과 같은 공기를 마시면서 살 수는 없어. 그 인간이 죽지 않았다면, 내가 죽어.”
오토바이에서 뛰어내리다시피 한 범인이 광기 어린 얼굴로 절벽을 향해 뒷걸음질 쳤다.
막아야 돼.
“안 돼!”
어린아이의 몸이 불편한 점은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건장한 성인이 바다를 향해 몸을 던지려던 것을 온몸을 내던져 막은 결과는, 코난 본인의 추락이었다.
거세게 밀쳐진 범인이 마른 기침을 내뱉으며 기절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훅 꺼졌다. 천만다행인 것은 본능적으로 휘두른 손에 절벽 모서리가 걸려 추락이 멈췄다는 점이었다.
“으윽……”
범인을 밀쳐낸 반동으로 온몸이 욱신거린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으나 발을 디딜 곳이나 붙잡고 위로 올라갈 모서리도 없었다.
나무도 없는 절벽이었으니 벨트를 위로 던진다 해도 고정할 곳이 없다.
“꼼짝없이 매달려 있어야겠네…”
박사님과 하이바라가 곧장 쫓아오겠지만 워낙 빠른 속도로 도망쳐온 데다가 복잡한 산길을 거쳤기 때문에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추격하느라 땀에 젖고 힘이 빠진 손으로는 몇 분 몇 초도 장담할 수 없는데.
추락할 때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재수없고 뻔뻔하지만 서로 목숨을 여럿 빚졌던 그 좀도둑.
하지만 그는 오지 못할 것이다. 제가 여기서 이러고 있다는 것도 모르겠지만 정체를 들킬 위험을 감수할 리 없으니까.
그러니—
“앗!”
손이 미끄러졌다. 모서리 끝에 간신히 걸쳐있던 손이 완전히 허공에 놓이자 본능적인 공포심이 일었다.
죽는다.
찰나의 깨달음이 머릿속을 점령할 때였다.
거센 바람과 함께 추락하던 몸이 붕 떠올랐다.
이질적인 부양감과 허리를 단단히 두른 온기를 깨달았을 때, 번쩍 뜨인 두 눈에 들어온 것은 모노클을 쓰지 않은 청자색 눈이었다. 하얀 실크 햇이 만들어낸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경악과 안도가 여실히 느껴지는 눈.
“흐아아아아악?!”
“왜 그래, 카이토?”
“아니, 아니야. 응,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 카이토의 동공이 미친듯이 흔들렸다. 아오코가 싱겁다는 기색으로 금방 고개를 돌려버리자 자석에 이끌리듯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평범한 소년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호자가 정성들여 고른 옷으로 코디해준 티가 나는 소년.
하지만 아무도 모를 것이다. 더없이 무난해 보이는 저 빨간색 운동화, 저게 어떤 살인적인 위력을 발휘하는지.
“코— 난! 빨리 안 오면 우리 먼저 간다?”
“간다, 가!”
아이답지 않게 깊은 한숨을 내쉰 소년이 또래의 여자아이와 함께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겼다.
명탐정이 왜 여기서 나와…?
망했다. 진짜 망했다. 완전 망했다.
카이토가 이미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더 헤집었다.
학교 단체 여행으로 온 곳에서 명탐정 일행을 마주치다니 이렇게 섬뜩한 우연이 있을 수가 있나?
명탐정은, 그러니까 에도가와 코난은 늘 함께 다니는 박사님 일행과 캠핑을 온 모양이었다. 특유의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서 캠핑 준비를 돕는 모습이 여상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명탐정이 ‘쿠로바 카이토’를 알 리는 없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에 잔뜩 겁을 집어먹었던 카이토로서는 가슴을 쓸어내릴 일이었다. 정말 우연하게 행선지가 겹쳤을 뿐이고, 일정 상 에코다 고교 학생들은 내일 돌아가야 한다.
게다가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숙소에서 머무르고 있는 그들과는 다르게 명탐정 일행은 외곽 쪽 캠핑장에 있을 예정이니까.
“아무 일도 없겠지…”
그렇게 마음을 놓았다.
“바카이토, 하품 좀 그만 해!”
“잠을 제대로 못 잔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정신승리에는 성공했지만 불안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몇 시간이나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으니 쉼없이 하품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품을 할 때마다 벌어지는 입 안으로 바닷가의 짠 바람이 가득 들어찼다. 여행 일정의 일부로 방문한 해안가였다. 옅은 푸른색의 하늘과 짙은 푸른색의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 그리고 좌우로 펼쳐진 높은 절벽이 이루는 장관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졸린 상태에선 큰 감흥이 없었지만.
“흐아아아— 아아악?!”
“왜, 또!”
느긋한 하품이 경악을 담은 비명으로 이어지자 아오코가 기어코 씩씩대며 다가오려 했다. 하지만 이미 누군가를 봐버린 카이토는 다급하게 아무 말이나 입에 주워담았다.
“내가 원래 하품을 이렇게 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바카이토!”
“맞다니까?! 오지 마, 아오코. 나 화장실 갈 거야!”
“카이토!”
젠장. 저게 대체 뭐야.
무리에서 거리가 멀어질수록 뛰는 속도가 빨라졌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시야 속 또렷하게 보이는 것은 절벽에 위태롭게 매달린 명탐정의 모습이었다.
별의별 위험에 다 처하더니 이제는 절벽에 매달리기까지 해? 도대체 어쩌다 저런 상황에 놓인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깎아지른 듯 가파르고 매끈한 절벽에 간신히 매달린 상태에선 명탐정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축구공이나 운동화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그 박사님이 무언가 조치를 취할 때까지 기다리기엔 늦는다.
타고 온 버스로 돌아간 카이토가 거칠게 짐가방을 잡아챘다. 정말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가져온 행글라이더와 키드 복장이 그 안에 있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빅쥬얼 하나가 전시된 곳이 있다고 해서, 답사가 가능할 경우 입으려고 챙겨온 것인데 이런 식으로 쓰게 되다니.
망설일 틈이 없었다. 절벽 끝으로 내달리며 키드의 모습으로 변한 카이토가 허공으로 뛰어내림과 동시에 행글라이더가 펼쳐졌다.
거칠게 불어닥치는 바닷바람을 가르고 날자 당황으로 물든 명탐정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 작은 몸을 잡아채 끌어안고 다시 날아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키드…!”
“명탐정 제정신이야?! 거기서 왜 그러고 있어!”
“나라고 이러고 싶은 줄 알아? 너는 왜 그 모습인데!”
“명탐정이 그러고 있으니까 그렇지!”
한쪽은 비행하느라 바쁘고 한쪽은 떨어지지 않도록 얌전히 안겨있느라 언성만 높아진 말싸움이 이어졌다. 바닷가라 바람이 거세 이리저리 흔들리는 행글라이더를 안정적으로 조종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으나 작은 몸을 끌어안은 힘은 더 단단해졌다.
“읏차.”
인적이 드문 절벽에 착륙하자 작은 몸이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거리를 벌려 마주 본 명탐정의 눈빛이 무시무시하다.
“생명의 은인한테 너무한 거 아냐?”
행글라이더를 접고 무릎을 굽혀 앉은 채로 삐딱하게 묻자 만만치 않게 불량한 시선이 돌아왔다.
“너야말로 제정신이냐?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울화가 확 치밀어 반격하려던 카이토가 멈칫했다.
명탐정, 내가 이미 여기 있던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 않나…?
“내가 여기 있는 거, 알고 있었어?”
“어.”
“어떻게…?”
“어제 마주쳤잖아?”
어제라면, 잠깐 스쳐지나갔을 때.
“그 잠깐 새에…”
“기척이 느껴졌고, 나랑 닮은 사람이 있었으니까.”
“말도 안 돼.”
“불가능한 것을 모두 제외하고 나면 아무리 믿을 수 없어도 그게 진실—”
“어떻게 알아보냐고! 그게 불가능한 거지!”
“탐정을 얕보지 마, 좀도둑 녀석.”
결국 필사적인 정신승리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뜻이다. 이미 그때 ‘쿠로바 카이토’는 들킨 거니까.
“그럼 나 체포할 거야?”
한심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명탐정이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입가에는 특유의 자신만만한 미소를 띤 채로.
“네 말마따나 목숨을 빚졌으니까, 이번엔 넘어가 줄게.”
“병 주고 약 주고.”
“뭐라 그랬냐.”
“명탐정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하다고요.”
“적어도 내가 ‘쿠로바 카이토’를 잡아넣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안심해.”
담담히 덧붙이는 말에 카이토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매번 투닥거리고, 부정할 수 없는 라이벌의 위치에 있지만 퍽 친밀한 사이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들 간에는 정의할 수 없지만 분명한 유대가 있으니까.
어쩌면 키드 뒤의 본모습을 들킨 건 좋은 일일 수도.
“… 근데 명탐정, 내가 내 본명 말한 적 없지 않아?”
“……”
“들켰네.”
카페 테이블 위로 신문이 들이밀어졌다. 거기에는 대문짝만한 글씨로 헤드라인이 적혀 있었다.
괴도 키드, 해안의 빅쥬얼을 노리러 나타나다?
슬쩍 시선을 돌린 그가 말없이 빨대로 음료 위의 생크림을 떠먹자 명탐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초등학생의 한숨일 뿐인데 몸이 움찔 떨렸다.
“하기야, 하얀 행글라이더가 대놓고 날아다녔으니 안 들키는 게 더 이상하겠지? 괴도 키드.”
“쉿, 명탐정!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카페에는 둘 뿐이었고 목소리도 크지 않았지만 입막음엔 성공했다. 문득 억울함이 치밀어 입을 삐죽이던 카이토가 말했다.
“명탐정 구하느라 그런 건데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
“그래서 눈감아 준다잖아?”
“뭐 고맙다. 네 덕이다. 그런 말은 안 해?”
무언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구해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들지 않았으니까.
이상하게 추락할 일이 많은 명탐정을 매번 구하는 게 제 운명인가 싶은 이상한 생각도 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쌀쌀맞은 태도라니.
“명탐정은 방금 순수한 괴도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힌—”
“고마워.”
음료를 휘휘 저으며 퉁명스레 중얼거린 카이토가 눈을 크게 떴다. 정작 말을 내뱉은 당사자는 여상한 낯이었지만.
“이번에도, 예전에도. 네가 날 구해준 게 한두 번은 아니잖아?”
“그… 치?”
“생각해 보니까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늦어서 미안해.”
“아니, 뭐.”
헛기침을 하며 숨기려 애썼지만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그런 카이토의 미소를 보던 코난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고작 이 정도 칭찬에 저런 반응이라면, 추락할 때 제 생각을 했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지.
“흠흠, 뭐. 그럴 수 있지. 내가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이해해줄게.”
“또 멋대로 얘기하지.”
어쩐지 조금 더 친밀해진 기분이다. 괴도와 탐정이 아니라 그저 아는 사이로 만나 가끔 투닥거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나저나 명탐정— 숙제 해야 되지 않아? 이 형이 좀 도와줄까?”
“한 번만 더 형이라고 해봐.”
“왜, 안경잡이 꼬맹이.”
“이 좀도둑이?”
다이얼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카이토는 재빠르게 일어나 카페 바깥으로 뛰어나가며 생각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저 운동화부터 빼앗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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