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ll Me
리퀘 흑키드신
고요한 방 안. 그 흔한 시계 초침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곳에 적막이 가득 내려앉았다.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는 것에 병적으로 거부 반응을 보이는 방 주인이 시계를 갖다 놓지 않은 탓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침묵하고 있었을까.
방의 주인이라도 된 양 편안히 의자에 앉아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쿠도 신이치. 알죠? 베르무트.”
맥락없이 튀어나온 한 이름에 탁자에 슬며시 걸터앉아 있던 금발의 여자가 시선을 마주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태연하고 침착한 모습. 하지만 순간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모를 리가 있겠어? 진이 놓친 쥐새끼잖니.”
그녀의 말이 맞았다. 쿠도 신이치. 사망 처리 되어 세상에서 사라졌을 그 이름은 이제 조직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진이 직접 독약을 먹여 처리했음에도 보란듯이 살아나 조직을 휘젓는, 고작 스물의 남자애.
본래 머리가 뛰어난 책사인데다 거느린 배경이 화려해 조직에 노골적인 위협을 가하는 중인 유일무이한 케이스.
“왜? 새삼 관심이라도 생겼니?”
“새삼, 이랄 건 아니죠.”
“아아, 그렇지. 넌 ‘에도가와 코난’과 각별한 사이였으니 말이야. 그렇지?”
나른하게 웃은 베르무트가 똑바른 발음으로 문장을 끝맺었다.
“키드.”
“네, 맞아요.”
키드 킬러 에도가와 코난. 독약의 부작용으로 어린아이가 됐던 쿠도 신이치의 이름이었다.
“무슨 일일까… 우리 ‘키드’가 이렇게 관심을 드러내고.”
주도권을 되찾았다고 생각해 태도가 여유만만했다. 살며시 기울이는 고개에 눈부신 금발이 사르르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 우아한 눈매가 언뜻 일그러졌다. 경직된 입매 사이로 낮게 가라앉은 한 마디가 흘러나온다. 설마.
그 반응에서 확신을 얻은 키드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네, 베르무트. 보스께 명령을 받았어요.”
조직이 놓친 쥐새끼, 쿠도 신이치를 처리하라는.
“예상은 했지만 더 실망스럽네.”
한숨처럼 흘린 혼잣말에 벽에 시립한 조직원이 움찔했다.
보스의 가호 아래 조직의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이용할 수 있는 특권으로 열람한 정보였다. 직접 내린 명령인 만큼 정보에 제한을 두지는 않았을 테니 이게 조직이 가지고 있는 쿠도 신이치에 대한 정보 전부란 뜻이다.
이름, 나이, 거주지, 재학 중인 학교 그리고 관련 인물.
그와 조금이라도 가깝다면 누구나 알 수 있을 법한 정보.
그의 뒤에 있는 이들의 신분을 생각하면 더 자세한 정보는 거대 기관의 철저한 움직임 아래 보호되고 있을 확률이 높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으나 실망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인물 자체에 대한 정보가 엉망이지 않나. 무자비하고 냉정하다고? 손속에 망설임이 없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거다.
쿠도 신이치는 누구보다 사람 목숨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제 손으로 범죄 사실을 밝혀낸 범죄자라도 죽음을 택하려들면 온몸을 던져 막아내는, 태생이 선하고 신념이 단단한.
조직과의 전면전 때도 앞서서 나서기보다는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계획을 짜고 명령하는 관제탑의 역할을 할 텐데.
이제까지 쿠도 신이치에게 뼈도 못 추리고 당한 이유를 잘 알겠다. 이토록 정보가 허술해서야.
하지만 동시에 쿠도 신이치를 과대평가할수록 조직의 대응도 심해지기 마련이다. 이런 식의 정보로 얻을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조직원들이 그에게 겁을 먹어 함부로 덤비지 못하도록 하는 것.
의미없이 스크롤을 내리던 손을 떼고 방에서 나온 키드가 피식 웃었다.
“베르무트…”
생각해보면 진과 워커는 쿠도 신이치와 직접 부딪힌 적이 잘 없다. 조직의 간부 중 그와 자주 대면한 건 오히려 베르무트 쪽.
물론 그녀 혼자만의 힘으로 이렇게 정보를 교란시켜놓을 수는 없을 테니 조직의 상급 간부 중 쿠도 신이치의 스파이가 더 존재한다는 뜻이 된다.
그들이 오로지 쿠도 신이치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작한 정보.
베르무트의 낌새가 조금 이상하다 싶어 떠본 건데 확신을 얻었다. 그의 이름이 거론되었을 때, 보스의 명령을 전했을 때. 순간의 미약한 흔들림은 섬세한 마술사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아무런 이득도 없는 일에 변장하고 나서서 그를 돕는다 싶었더니.
참 대단해. 제각기 다른 목적으로 조직의 와해를 노리고 있는 이들을 모두 제 편으로 만들어 유기적으로 움직이게 만들다니.
유례없는 총연합의 중심에 다른 누구도 아닌 쿠도 신이치가 있었다.
그걸 보스도 알고 있기 때문에 제게 직접 명령을 내린 것이다.
본능적으로 눈치챈 모양이지. 그를 상대하려면 조직 단위로 움직일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어쩌나.
이쪽도 그를 다치게 하는 것이 유쾌하진 않은데 말이에요, 보스.
무려 1년 만의 예고장이다.
조직과의 전면전 준비로 눈코 뜰새없이 바쁜 지금, 연합의 책임자라 해도 무방한 쿠도 신이치 자신이 만사 제쳐두고 달려나온 까닭이 그거였다.
예고 장소에 가야겠다며 답지 않게 떼를 쓰는 자신 앞에서 후루야 씨는 말렸고 아카이 씨는 허락했다. 뒤늦게 합류한 부모님까지 허락하자 후루야 씨도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안전을 포기할 수는 없어 이 주변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인력만 수십이 깔렸을 테지만…
블레이저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권총이 새삼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보호할 사람 없이 혼자 조직원과 맞서게 될 경우를 생각해 받은 것이었다.
“예고 시간 2분 전입니다. 다들 경계를 늦추지 말아주세요.”
침착하게 지령을 내리면서도 고민했다. 분명 키드와 단둘이 남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런 자리에 험악한 것을 가져가고 싶진 않았다. 그쪽도 불살생의 신념을 가지고 있는 걸 뻔히 아는데… 조직의 일이야 이쪽의 사적인 문제니까 이해를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수많은 보호 인력 사이에 있거나 키드와 둘만 남거나. 어느 쪽이든 위험한 일은 없지 않으려나.
하지만 제 생각이 틀렸음은 정확히 2분 후, 키드의 예고 시각이 되면서 깨달았다.
탕!
발포음에 반사적으로 몸이 긴장했다. 총격적에 익숙한 경찰들의 고개가 사방으로 움직였다. 군중 사이에서 들린 소음이라 진원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탓이다.
“뭐야! 빨리 상황 파악 안 해!”
“그, 그게 어디서 발포된 건지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경부님!”
키드 현장에서 총격적이 벌어진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경찰 측에서는 인파가 몰리는 틈을 탄 몇 범죄자들의 소행으로 여기는 모양이지만 그것이 키드와 대적하는 조직의 소행임을 신이치는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경우일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아수라장이 되어 가는 현장 가운데, 신이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키드는 예고 시각을 어기는 법이 없다. 정확하게 정각. 키드는 늘 소리로 쇼의 시작을 알렸으므로.
“키드…”
망연한 부름에 응답하듯 보석이 놓인 방탄유리 케이스 위로 검은 인영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까마귀의 날개처럼 흘러내린 망토에 케이스가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저게 뭐야…”
실크햇과 망토 달린 정장, 유일하게 빛을 반사하는 모노클까지. 모두에게 익숙한 키드의 복장이었다.
단 한 가지, 새카맣게 변해버린 색만 제외하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에 모두가 얼어붙어버린 사이, 실크햇의 그림자에 가려진 입꼬리가 씩 늘어졌다.
그리고, 연달아 울리는 총성.
탕! 타탕!
쉴새없이 울리는 총성에 모여든 구경꾼들이 일제히 비명을 내질렀다. 번쩍이며 불을 내뿜은 늘씬한 검은색의 총, 그건 분명히 키드의 손에 들려 있었다. 연사의 반동을 익숙하게 받아내며 총을 쏴대는 모습이 너무나 평화로워 동시에 소름이 돋았다.
“… 다들 대피하세요! 지금 당장!”
나카모리 경부가 꼼짝 못 하고 키드만 바라보는 동안 대피 명령을 내린 건 신이치였다. 날카롭게 터져나온 외침에 정신을 차린 경찰들이 서둘러 인파를 인도한다.
“경부님!”
“아, 아. 미안, 미안하네.”
거칠게 어깨를 잡아채인 경부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한 차례 마른세수를 한 그가 경찰의 얼굴로 돌아와 지시 체계를 돌려받았다. 그럼에도 중간중간 키드 쪽을 힐긋거리는 것이 큰 충격을 받은 게 분명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쿠도 군, 너는—”
“대피가 먼저입니다. 전 알아서 나갈 수 있으니 사람들부터 내보내고 이곳을 봉쇄해 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경부가 인파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간간히 들리는 커다란 명령 소리로 그의 지시를 확인할 뿐이었다.
개판이다. 혼비백산해 움직이는 사람들 속 정적인 것은 오직 둘 뿐이었다.
‘안녕. 명탐정.’
느릿하게 움직이는 입모양이 전부 읽혔다. 등장부터 지금까지 키드는 단 한 순간도 제게서 눈을 뗀 적이 없었다.
아니, 저걸 ‘키드’라고 부를 수는 있는 건가?
온통 검은색 일색인 복장이 시야에 들어찰 때마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게 됐다. 먹물을 뒤집어쓴 듯, 불에 완전히 타버린 듯 짙은 검은색은 일종의 트라우마이자 위험 신호였다.
전면전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기에 하필이면 저런 복장으로 나타난 키드, 라.
쾅!
문이 닫혔다. 쇠사슬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강력진압반이 올 때까지 공간 자체를 봉쇄할 모양인가 보다. 경부에게 직접 권한 사안이니 놀라울 건 없었다.
내가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걸 알고 다시 저 문을 여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나카모리 경부든, 나를 보호하기 위해 안달난 사람들이든.
원없이 총을 쏴댄 키드가 총을 던져버리자 비로소 고요가 찾아왔다. 범행 후에 건물 옥상에서 늘 즐기던 익숙한 고요는 아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끈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다.
먼저 인사를 건넨 건 키드였다.
“안녕, 명탐정.”
우습게도 신이치는 그 목소리를 듣고 그가 키드임을 확신했다.
“… 그래, 안녕.”
“그동안 바빴나 보네. 얼굴이 많이 상했어.”
“그건 내가 해야 할 말 같은데. 더 많이 변한 건 네 쪽 아닌가.”
턱짓으로 그의 복장을 가리키자 그가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지? 검은색은 어때? 어울려?”
새 옷을 입고 들뜬 어린아이처럼 망토 자락을 붙잡고 빙그르르 돈다. 보석 전시대 위에 살짝 걸터앉는 것까지 연결되는 움직임이 유려하고 우아했다. 그의 쇼가 늘 그러했듯.
신이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 총은.”
“쇼를 할 필요가 있었거든.”
“카드건은 어디에 두고?”
“물론 카드건으로도 마음 먹으면 사람을 해칠 수는 있겠지만… 덜 위험해 보이잖아?”
“나만 남겨둔 이유는.”
“명탐정이 스스로 남았으면서 그걸 왜 나한테 물을까.”
개소리. 그 노골적인 시선은 분명히 저를 붙잡아 두려는 목적이었는데.
정말 모르겠다는 듯 능청스레 기울이는 고개가 정말 어린아이 같았다. 원래도 신비스러운 괴도셨다지만 오늘따라 유독 의뭉스럽게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닐 테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동안 고생 많았겠네.”
뜬금없는 위로였고, 그나마도 위로라고 부르기엔 불완전한 것이었다. 여전히 경계하며 거리를 두고 있었고, 여차하면 품 속의 총을 꺼내 대응할 수 있도록 긴장 중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네가 이렇게까지 했어야만 하는 이유를 알아버려서. 그 지난한 과정을 조금이나마 짐작해버렸기 때문에.
“… 하.”
그 흐름을 눈치채지 못할 키드가 아니었다. 순간 얼어붙었던 낯에 헛웃음이 스몄다.
그리고 미친듯한 폭소.
그 광기 넘치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신이치는 그저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봤다. 곧이어 희미하게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가 희열을 담아 울렸다.
“역시 명탐정이네.”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말이었다. 그때와 똑같이 박수까지 쳐가며 찬사를 보내는 키드의 눈빛은 역설적이게도 싸늘했다.
“힌트를 준 네가 할 말은 아니지.”
“힌트라기엔 너무 추상적이지 않았나.”
“그걸 알아내는 게 탐정의 역할이야. 넌 괴도라서 모르겠지만.”
“괴도, 라.”
피식 웃은 그가 느긋하게 등을 젖히며 턱짓했다.
“명탐정. 총 가지고 있지?”
“… 그래.”
부정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가 검은 조직 소속이 되었다는 건 방금 눈치챘고, 확인받은 사실이므로.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결론은 분명히 그러했다.
살풋 짓는 미소가 여느 때보다 달콤하다.
“그걸로 나 좀 쏴.”
내뱉는 말과는 다르게.
입술을 깨물며 눈을 꾹 감았다 뜬 신이치가 나지막이 물었다.
“변명이 필요해?”
“이쪽은 연사가 가능한 총까지 가지고 왔고, 단둘이 남기까지 했다는 사실이 뻔히 알려질 텐데 당연하지.”
“하지만.”
“명탐정.”
타이르듯 부드러운 어조였다.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회피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이기도 했다.
젠장할.
짓씹듯이 욕을 내뱉은 신이치가 권총을 꺼내들었다. 총알은 전부 장착되어 있었다. 빗맞힐 만한 사격 실력은 아니지만, 실수하지 말고 하나라도 꼭 맞히라는 것처럼.
“참. 명탐정.”
“왜.”
“다음에 볼 땐 이렇게 평화롭진 않을 거야.”
“너한텐 총 쏴대는 게 평화로운 거냐?”
“이 정도면 평화로운 거지?”
“다음엔, 어떻게 할 건데?”
“… 글쎄.”
널 죽여야겠지.
찰칵.
탕!
마음과는 다르게 사격은 흔들리지 않고 정확했다.
곧 깨끗했던 대리석 바닥 위로 피가 흘렀다.
“아가. 그게 정말이니?”
“네. 그와 직접 대면하고 알아낸 사실이에요.”
신이치의 확인 사살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렀다. 마른세수를 하며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거론된 인물의 위력이 대단했다.
“괴도 키드가 조직에 합류하다니…”
“1년은 된 일일 거예요.”
“정말 그의 의지로 들어간 게 맞아?”
조디의 물음에 신이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키드는 지켜야 할 게 많아요. 아마 그걸 빌미로 협박당하던 와중에 조직의 제안이 들어왔을 거예요.”
“그를 믿고 있구나.”
망설임없이 브리핑 하던 신이치의 말문이 처음으로 막혔다. 태연하게 정곡을 찌른 아카이가 눈을 마주친다.
“네 눈으로 그의 변절을 직접 봤음에도.”
좌중의 시선이 모여 있었다. 연합의 수뇌부이자 핵심으로서, 이번 일에 대한 유일한 정보원으로서 똑바로 대답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의 판단으로 키드를 대하는 연합 전체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네. 믿어요.”
그가 지키던 원칙. 사람을 해치지 않고, 노리는 보석이 아니라면 돌려준다. 설령 저를 체포하려 달려드는 호적수라 할지라도 위험에 빠지면 제 몸을 던져 구한다.
신념을 가진 자는 믿을 만 하지만 그런 사람의 변절은 더욱 위험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키드를 믿는 이유는.
“이 정보는 키드 스스로 흘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MAC-10을 가지고 총알을 연사했음에도 사상자 하나 남지 않은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의 충격을 걷어내고 나면 그의 행동은 이전과 달라진 점이 없습니다.”
키드는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조직원이라면 현재 목표 1순위는 쿠도 신이치 자신을 제거하는 것일 게 분명함에도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
그 점을 설명하자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사실로 신빙성을 높여놨으니, 이제는 거짓을 말할 차례다.
“그는 절 해칠 의도가 없어 보였습니다.”
키드에게는 찾아야 할 보석이 있다. 그 보석을 두고 대치하는 다른 조직이 있다. 그 조직으로부터 본인과 지인들의 목숨을 위협받았을 가능성이 높고, 그에 대항하기 위해 피치 못하게 조직과 손을 잡았을 것이다.
조직을 와해시키는 작전에 키드가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조직이 와해되는 순간 키드를 이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큰 전력이 생긴다.
한 번도 틀리지 않은 책사의 설득은 효과가 좋았다. 회의가 끝날 무렵에는 조직 와해에 이어 키드 포섭이 두 번째 목표가 되었다.
“쿠도 군.”
“아무, 아니 후루야 씨.”
“숨기는 게 있니?”
“숨기는 거라니요?”
여상하게 되물었으나 가늘어진 눈은 원래대로 돌아올 기미가 안 보였다. 고작 서른이 안 되는 나이에 공안의 에이스 직을 꿰찬 사람답게 쉽게 넘어가진 않을 것 같았다.
같은 것을 물을 목적으로 저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카이 씨까지 있다면 더더욱.
“총성과 핏자국. 네가 키드를 쏜 거겠지.”
“짐작하실 거라 생각했는데요. 절 해치지 못했다는 명분이 필요해서—”
“아가. 우리가 네 부모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 작전을 수행하면서 꽤 믿을 만한 동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 속이긴, 그른 건가.
두 사람의 신뢰는 중요하다. 에도가와 코난 시절부터 힘들게 얻어낸 믿음이고, 연합의 두 기둥인 FBI와 공안을 연결하는 연결고리이므로.
하지만.
“숨기는 게 있는 건 맞아요. 하지만 말씀드릴 수 없어요.”
“아가.”
“쿠도 군.”
“계획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것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잖아.”
“알아요.”
키드가 조직에 가담하는 것은 진심이다. 그에게 무언가 계획이 있어 잠입한 것이라면 제게 이야기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스스로 악역을 자처했던 ‘해바라기 사건’ 때 그랬던 것처럼. 직접 말하지 못한다면 힌트라도 흘렸겠지. 하지만 이번엔 그게 아니다.
가장 혼란스러웠던 건 신이치 자신이었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괴도 키드’를, 그 가면 너머의 누군가를 진심으로 신뢰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신뢰가 깨진 시점에.
적으로 간주하고 연합의 힘을 동원해 공격하느냐, 끝까지 믿고 보호하느냐.
생각이 정리됐다. 고민을 끝낸 명탐정이 말끔한 낯으로 웃었다.
“대신, 두 분께 드릴 말씀이 하나 있어요. 아니, 부탁이 있어요.”
조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좀 웃기지만, 전운이 감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쿠도 신이치 연합이 조직의 턱끝까지 다가왔다. 조만간 숨통을 틀어쥐러 올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만큼 쿠도 신이치 주변의 보안은 더 철저해졌다. 국가 원수도 이렇게까지 보호받지는 못할 것 같은데. 각국의 비밀조직이 연합해서 지키고 있으니 유례없는 보호라 할 만하다.
그런 사실은 키드에게 아주 훌륭한 변명거리가 되어 주었다. 그 날, 멀리서도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의 총상을 다리에 입고 돌아온 뒤 회복하기까지 한참 걸렸다. 이제 막 멀쩡해졌는데 보안이 저러니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다.
보스는 그게 못마땅한 듯 했다. 나름 비장의 무기랍시고 꺼내든 조커가 키드 자신이었을 텐데 허무하게 당하고 돌아와 이제는 기회를 잡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니. 그 탓인지 ‘괴도 키드’가 ‘에도가와 코난’과 퍽 친근해 보이는 관계였다는 사실이 새삼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완전히 휘어잡았다고 생각해 마냥 예뻐하던 새로운 수족을 경계하기 시작한 걸 보면.
톡, 톡.
가볍게 책상을 두드리는 손짓이 경쾌하다. 키드의 입가에 실금같은 미소가 그려졌다.
조직의 붕괴는 필연이다.
쿠도 신이치가 그렇게 결심했고, 그걸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니까. 단신으로 움직였을 때도 그는 성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거대한 권력을 손에 쥐고 머리를 굴리는 지금은 이렇게 허술한 조직이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버번이 공안 소속 스파이였음이 드러났다. CIA 소속 키르의 신분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어떤 분탕질을 쳐놓고 갔을지 가늠조차 가지 않는 가운데, 베르무트의 행적이 묘연했다. 이런 상황이니 조직의 누구도 믿을 수 없어 내부 결속이 약해지고 있었다.
버번과 키르의 행동은 쿠도 신이치의 명령. 베르무트의 행동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겠지.
승산이 없음은 내부에서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미 패배의 기운이 만연하니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대로는 연합의 승리가 너무나 쉽고 뻔하지 않나.
그래서 키드는 조금 움직여 보기로 했다.
쿠도 신이치가 짜둔 완벽한 판에, 스스로 변수가 되어 입장하는 것으로. 그는 늘 수수께끼를 좋아했으니 이것 또한 좋아해줄 것이다.
입가에 매달린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아무래도 이건 우리 둘의 싸움이 될 것 같지, 명탐정.
환한 불빛이 어지러이 밝혀져 있는 공간, 마련해둔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모니터만 바라보는 얼굴은 언제나와 같이 침착했다.
모니터의 빛을 받아 평소보다 훨씬 쨍한 색으로 빛나는 푸른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모니터는 여러 곳의 상황을 한 번에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집중하고 있지 않으면 상황을 놓쳐버릴 수 있다. 이번 작전은 무수한 양동 작전을 기반으로 정예조를 이용해 수뇌부를 말살시키는 것이 포인트이기 때문에 더더욱 예민해질 수 밖에 없었다.
보스 카라스마와 럼, 진과 워커. 스나이퍼 팀인 키안티와 코른. 실질적으로 유의미한 수뇌부라 할 만한 사람들은 이 정도에 불과하다. 각 개인의 전력이 일반인을 한참 상회하는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섣불리 방심할 수 없을 뿐 성공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작전이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승리를 확신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공들인 계획이다.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완벽하게 압살하기 위해서.
패배를 직감하고 궁지에 몰린 다수의 조직원들은 연합팀의 요원들이 안정적으로 쳐내고 있다. 아카이 슈이치가 이끄는 저격팀과 후루야 레이가 이끄는 행동조. 그리고 어딘가에 숨어있을 보스를 목표로 하는 정예조까지.
“파리에서 C조와 합류 성공. 다음 지령을 수행하겠습니다.”
“서울 측 작전 완수. 잔여 인원 없습니다.”
“마드리드 측 작전 완수. 도주 인원 5명.”
“도주 인원 중 5명 전원 처리 완료.”
쉴틈없이 무전기에서 울리는 승전보가 마냥 기껍지 않았다. 무전기 상으로 송신되는 음성으로 보나, 모니터 상의 상황으로 보나 물 흐르듯 순조롭게 성공을 향해 가고 있는데 이토록 두려움을 떨칠 수 없는 건.
키드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정말 조직의 일에 관여하지 않을 생각인 건가?
회의에서는 그렇게 말해둔 것이 사실이다. 그 말대로 키드의 모습이라고는 그 망토 자락 한 번을 볼 수 없었고, 이에 더 신뢰를 얻은 이들이 망설임없이 움직여주고 있었지만…
과거의 키드라면 그랬을지 모른다.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나오든, 초반부터 항복을 외치고 합류한 뒤에 자진해서 능력을 바쳤겠지. 적어도 쿠도 신이치가 아는 ‘괴도 키드’는 그럴 인물이다.
하지만 지금의 ‘키드’는 다르다. 그 날, 예고 장소에서의 짤막한 대화 동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토록 강렬한 위화감, 사람의 본질 자체가 뒤바뀌었다는 직감은 처음이었다.
차라리 정예조 앞에 나타나 위협을 가했다면 안심했을 것이다. 거기까진 예상했던 시나리오 안에 있었으니까.
키드가 총을 들고 사람을 위협하는 게 차라리 안심된다고 생각하는 날이 오다니…
한 차례 한숨을 내쉬고 고민하던 신이치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무전기를 집어들어 명령을 내렸다.
“B조에 명령합니다. 괴도 키드의 행방을 찾—”
정확히는, 내리려고 했다.
탁!
가볍게 휘두른 손짓에 무전기가 허공을 날아 벽에 처박혔다. 군사용 물품이니 고작 저 정도 충격에 고장나진 않았겠지만 지금 당장 쓸 수 없는 상황임은 확실했다.
곧이어 어디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아주 흔한 남성의 목소리가 울린다.
“괴도 키드의 행방. 찾았습니다, 보스.”
“… 그래 보이네요.”
모노클 너머의 눈이 장난스럽게 휘어졌다. 마냥 아이같은 표정에 비해 흑색의 전신이 두른 압박감에 짓눌리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널 죽여야겠지.
그 날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머릿속에 울렸다.
“… 너.”
“오늘도 바빠 보이네, 명탐정.”
익숙한 목소리로 돌아온 키드의 청자색 눈이 신이치의 등 너머 수십 개의 모니터를 향했다. 그 시선이 모니터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전부 훑기도 전에, 신이치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책상 아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얇은 유리를 힘으로 짓눌러 깨고 손톱 만한 버튼을 눌렀다.
현란하던 불빛이 하나둘씩 꺼졌다. 저격조를 살피던 모니터까지 꺼지고 나자 어둑한 방 안에는 없는 것만 못한 정도의 희미한 불빛만 남았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한 장치였다. 그 만약이, 괴도 키드가 될 줄은 몰랐지만.
느릿하게 돌아오는 시선에 대고 신이치는 오만하게 웃었다.
“어딜 봐.”
“… 흐음? 그건 명탐정만 보라는 뜻?”
“개소리 하네. 한가한가 봐?”
“명탐정에게 쏟을 시간은 언제나 있지.”
살풋 휘어지는 눈이 명백한 호감을 담고 있었다.
이 상황에, 호감?
단단히 미친놈이다. 그때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조금 재수없는 놈에 불과했던 괴도 키드가 완전히 미쳐버렸다.
그리고 신이치는 그 미친놈의 앞에 혈혈단신으로 서있었다.
“명탐정의 작전이야 뻔하지. 머릿수만 많아서 쓸데없이 귀찮은 말단 조직원들을 차례로 쳐내고, 그 틈에 머리를 친다.”
“알면서 내버려둔 거야?”
“명탐정은 철저해야 하지만, 난 아니어도 되거든.”
무슨 뜻이지? 문장 요소가 과하게 생략된 대화는 둘 사이의 일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키드의 의중이 전혀 해석되지 않는다.
그걸 다 안다는 듯이 미소 지은 키드가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너는 이 조직의 모든 것을 궤멸시켜야 하지만… 이쪽은 조직을 향한 위협만 없애면 되는 거라서.”
그리고 이 연합은, 명탐정이 없으면 의미를 잃을 것 같거든.
“그러니까 명탐정. 저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품에 든 권총을 꺼내 저항하기도 전이었다. 곱게 매어놓았던 넥타이가 강한 힘에 붙잡혀 끌려갔다.
입맞춤이라기엔 다소 거친 부딪힘. 놀라움에 반사적으로 벌어진 입새로 매끈한 알약이 넘어왔다. 동시에 목줄기를 탁 치는 힘.
알약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찾아온 것은 암전이었다.
명탐정의 작전과 자신의 작전은 비슷했다. 최종적으로는 조직의 수뇌부를 쳐 붕괴를 유도하는 것.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그는 자잘한 가지들까지 모두 없애려 했고, 이쪽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 작은 차이는 이런 파장을 불러왔고.
“이런 험한 걸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이런 수를 쓸 수밖에 없잖아, 명탐정.”
잠시 멈칫했던 손이 푸른 블레이저 안쪽 주머니를 뒤졌다. 길이 잘 든 권총과 여분의 총알을 꺼낸 뒤 던져버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이미 떨어져 있던 무전기가 박살나는 소리도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쿠도 신이치에게 ‘알약’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 특히나 이런 식으로 강제하는 방식이라면 틀림없이 의식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던 트라우마를 자극하겠지. 그 부작용이 어떤 식으로 발현될지는 전문가조차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심신미약이라는 건, 다시 말해 컨트롤 하기에 좋은 상황이 된다는 뜻.
기절한 신이치를 미리 마련해둔 은신처로 옮기는 것은 쉬웠다. 신이치의 작전 수행 스타일이 여기서 그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지령이 따로 없더라도 모든 상황이 매끄럽게 돌아가는, 하나의 기계 장치 같은 작전을 짰으니까. 감 좋고 귀신 같은 FBI 수사관이나 공안 경찰도 이번에는 눈치채는 것이 늦을 것이다.
혹시 눈치를 채더라도 작전을 완수하고서야 쫓아올 수 있겠지. 그게 신이치의 뜻이었을 테니.
수면제를 먹고 깊이 잠이 든 얼굴은 어린아이 같이 평온했다. 진짜 어린아이 몸이었던 시절에도 제 앞에서는 이렇게 순한 낯을 한 적이 없어 퍽 어색했으나 마음에 들었다.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채 늘어져있는 몸도.
“에도가와 코난 시절로 돌아가주면 좋을 텐데 말이야…”
그럼 기꺼이 그 역겨운 흰옷을 다시 걸치고 한 사람만을 위한 연극을 펼쳐줄 자신이 있다. 이 상황을 설명하려면 여러 거짓말을 곁들여야겠지만, 원래 마술사는 거짓으로 점철된 사람이 아니던가. 처음에는 의문 어린 얼굴로 경계할 그에게 차근히 거짓된 상황을 설명하고 네가 지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뿐이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속아 넘어가겠지. 아닌 척 해도 ‘괴도 키드’를 신뢰했으니까. 영리하니 영원히 속이진 못하더라도 그 순간을 즐기며 시간을 벌 수 있을 텐데.
이것으로 보스의 명령은 나름 수행한 셈이다. 멸망이 예정된 조직, 그런 조직의 보스가 내린 명령을 굳이 수행할 이유는 없으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제 사심이다.
“앞으로는 뭘 해야 하나 지루하던 참인데… 잘 됐네.”
훅—
자석에 이끌리듯 수면 저 너머로 가라앉았던 의식이 돌아왔다. 번쩍 뜨인 시야에 들어오는 천장이 하얗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조금 둔하게 움직여지는 손발이 멀쩡했다.
어린아이의 몸이 아니야.
깨어난 직후임에도 이전의 일들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키드가 약을 먹여 기절시켰다. 그리고 이곳으로 데려왔다. 정확히는, 납치했다고 해야 옳겠지만.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전과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한 번 자극된 기억은 육체의 통제권을 앗아갔다. 한참이 지나도 떨림이 잦아들지 않자 그냥 포기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마른세수를 하던 신이치가 고개를 들어 방을 둘러보았다.
“… 미친 새끼.”
일어났을 때 보이는 천장이 마냥 낯설지만은 않더라니.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익숙했다. 쿠도 저택에 있는 제 방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방이었다. 심지어 방의 주인조차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던 아주 사소한 오브제 하나까지 똑같아 거슬리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쓰러지기 직전의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더라면 무의식적으로 긴장을 풀었을 만큼.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사람’이 없다.
늘 책상 한쪽에 자리하고 있던 란과의 사진이나 졸업식 앨범, 피치 못하게 잠적했던 그 기간 동안 친구들이 남겨주었던 편지들을 모아놓은 상자 같은 것들이 없었다. 마치 쿠도 신이치의 인간 관계 자체를 없애 버리려는 것처럼.
소름돋는 집착이다. 이런 종류의 음습하고 짙은 감정은 제3자로 관찰했을 뿐 대상이 되어본 적이 없는 터라 익숙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런 게 익숙해질 수는 있는 건가 싶다.
이곳에 데려온 사람이 키드일 테니 이 공간을 조성한 사람도 키드일 텐데—
“일어났네, 명탐정?”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얕은 떨림 정도가 아니었다. 완전히 굳어버린 몸이, 노골적으로 진동했다. 문가에 서있는 키드에게도 선명히 보일 정도로.
“… 이런.”
난처하다는 듯한 대사와는 다르게 훤히 드러난 입가가 천천히 휘어졌다. 조금 전보다 더 다정해진 목소리가 말했다.
“이 옷 때문이구나?”
애석하게도, 정답이다.
검은 셔츠, 검은 재킷, 검은 망토, 검은 바지…
어둡게 입는 것이 뒷세계에선 당연한 일이라지만 이렇게 순수한 검은색만 고집하는 조직은 단 한 개 뿐이었다.
‘저’ 키드와 처음 마주쳤을 때는 조금 떠는 정도에 그쳤지만 알약과 관련된 기억까지 되살아난 지금은.
“이게 네 트라우마였구나. 이거였어…”
“… 개새끼.”
남의 트라우마를 알아놓고도 태연히 미소 짓는 모습이 정상인가.
살벌한 눈빛이 날아들었지만 키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옷을 보지 않으려 애쓰는 시선을 눈치챈 탓이었다.
스스로의 유약함에 환멸이 났다.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 몸이 답답했고, 몰랐던 트라우마를 하필이면 키드 앞에서 들켰다는 것이 수치스럽다 못해 화가 났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순간, 관계의 우위가 확실하게 결정되었음을.
“괜찮아, 명탐정. 나는 널 해치지 않을 테니까.”
“기절시켜서 납치해놓고 퍽이나.”
“말했잖아? 이쪽도 명령이 있었다니까.”
“이제는 아무 의미 없어졌을 명령 말이지.”
새하얀 침구에 강박적으로 시선을 고정하자 그제서야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정답이라는 듯,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명탐정의 계획은 늘 성공하니까. 본인의 안전과는 관계 없이 말이야.”
“날 어쩔 셈이야. 이미 조직이 와해되었다면 날 붙잡아봤자 소용 없을 텐데.”
“각 비밀조직의 에이스들이 싸고도는 네가 가치가 없을 리가.”
“적어도 네게는, 가치가 없겠지.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돈, 권력, 지위… 하다못해 신분세탁과 편안한 삶까지도. 키드는 저를 인질로 잡고 그런 것 따위나 얻어낼 인물이 아니다. 세기의 대괴도가 공들여 훔칠 만한 무언가.
“아, 모든 것은 아닌가?”
지금의 키드가 얻고자 하는 것이라면… 하나 뿐이겠지.
순간, 확신을 얻은 신이치가 키드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날 원하잖아, 너.”
논리적인 추리임과 동시에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아쉬울 것 하나 없는 눈앞의 상대가 갖고자 안달하는 유일한 것.
뛰어난 전략가이기도 한 탐정은 스스로를 말로 삼아 체스판 위에 올려놓았다.
“안달해봐. 그런다고 가질 수 있나.”
한쪽만 드러난 눈에 광기와 호승심이 동시에 차올랐다.
신이치는 직접 판을 뒤엎었다. 새로운 판에서 진행될 게임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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