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Under the water

월드 트리거. 나스쿠마. 인어 AU. 팬아트

비자림 by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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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아트입니다.

‘공주’를 처음 본 순간 ‘쿠마’는 생각했다.

우리는 대대손손 저주를 받으리라고.

물 한 방울 없는 뭍 위에서 익사하리라고. 분명 그러리라고.

*

‘공주’는 쿠마가이 유코가 ‘레이’라는 이름을 알기 전 마음속에서 혼자 그를 부르기 위해 붙인 이름이었다. 쿠마가이가 그를 ‘공주’라 명명한 이유는 단순했는데, 그를 처음 본 순간 그 외의 단어를 떠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 키의 두 배는 될 깊이에 가로로 활짝 벌린 제 한쪽 팔의 끝에서 다른 쪽 팔의 끝까지, 그 길이의 다섯 배 되는 폭의 유리 수조는 거대했지만 그럼에도 그 아이의 위광을 담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쿠마가이는 아직도 자신이 레이를 처음 본 순간 그곳에 창이 없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분명 자신은 수조 가운데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그 아이와 그 아이 뒤의 휘광을 보았던 것 같은데. 후일 제게 알려준 ‘레이’라는 이름답게 저를 관통하는 빛줄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곳엔 창 하나 없고 다만 천장에 달아둔 조명만이 눈 아프게 밤낮 가리지 않고 빛날 뿐이다. 그래서 밤이 되면 거대한 수조 위로 마찬가지로 거대한 방수포를 덮어 어둠을 만들어주는 것도 쿠마가이가 맡은 일 중 하나였다. 사다리는 다행히 수조 옆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별다른 안전장치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방수포를 짊어지고 3m가 넘는 높이를 오르는 데는 좁은 발판 외엔 디딜 구석도, 믿을 구석도 따로 없었다. 고작 3m라고 해선 안 됐다. 쿠마가이의 전임자는 그 3m밖에 되지 않은 사다리에서 미끄러져 그 자리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사다리 발판이 젖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쿠마가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그런 생각은 있었다. 기왕 미끄러져 떨어질 거라면 바닥이 아니라 수조 속으로 떨어지게 해달라고. 그쪽이 좀 더 살 가능성이 높으니 가능한 한 그랬으면 좋겠다고. 이는 쿠마가이가 수영을 할 줄 알기 때문이 아니었다. 레이를 믿기 때문이었다. 실로 그랬다.

쿠마가이가 레이를 돌보는 일을 맡고 이틀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방수포를 덮기 위해 사다리를 오르던 쿠마가이와 수면 아래의 레이의 눈이 마주친 것은. 그때만 해도 쿠마가이는 레이의 이름을 알지 못했기에 ‘공주’라고 다만 생각하고 있었다. 동화 속 인어공주가 있다면 너와 같을 거라고. 아니, 네가 바로 동화의 모티프가 된 인어공주일 거라고. 홀린 듯 바라보는데 어깨에서 그만 방수포가 미끄러지고 말았다. 앗! 떨어지는 방수포를 붙잡기 위해 허둥대다 그만 발판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풍덩! 사람 살려!

수조 속에 빠진 쿠마가이를 살려준 건 다름 아닌 레이였다. 쿠마가이는 수영을 잘했지만 무거운 앞치마에 장화까지 신은 상태에서 수영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버둥대는 쿠마가이를 뒤에서 끌어안고 수면 위로 올려준 레이는 쿠마가이의 ‘공주님’에 더해서 ‘생명의 은인’이 되었다. 고, 고마워. 정말로. 그 말에 다만 명화 속 소녀처럼 그린 듯한 미소를 지은 그의 ‘레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그를 보았을 때 빛줄기가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그것과 같은 이름이었다. 그 이야기를 털어놓자 레이는 어쩐지 평소보다 더 환하게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며 쿠마가이에게 물을 튀겼고, 쿠마가이는 꼬리에서부터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으며 수조 천장 가장자리에 팔을 얹은 채 깔깔 웃었다. 레이, 하지 마. 그러나 진심은 아닌 것을 레이도 모르지 않았다. 레이는 더 힘차게 물보라를 일으켰고, 그 기세에 흠뻑 젖으면서도 쿠마가이는 제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그러니 그런 거야. 그럴 수 있는 거야. 널 위해서.

*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다.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 사장은 그가 웃돈을 얹어서라도 레이를 데려가길 원했다며 어느 대부호의 수행원 정도로 그를 생각했다. 쿠마와 비슷한 연배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수조도, 이동장도 이미 준비되어 있다’며 사장의 제안이란 탈을 쓴 강매를 예의 바르게 거절했지만, 사장이 요구하는 온갖 추가 요금에는 군소리 하나 없이 어음을 쓰고 현찰도 내어놓았다. 쿠마가이로선 단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액수의 금액을 그 자리에서 지폐 다발로 턱턱 내어놓았더랬다. 그리곤 한참 동안 수조 속의 레이를 응시한 뒤 몸을 돌려 가게를 나갔다. 일주일 후 남은 잔금을 치르고 그날로 레이를 데려가겠다 하니 사장의 입은 일주일 내내 귀에 걸려 있을 성싶었다. 부르는 대로 주겠다고 하지 뭐야. 관상어로 이만한 떼돈이라니. ‘관상어’. 그 단어는 쿠마가이의 귀에 굉장히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더 참을 수 없던 것은 그 뒤로 쩝 입맛을 다신 뒤 이어지는 말이었다. 그날 저것의 부모도 산 채로 잡았어야 했는데. 반항이 오죽 심했어야지. 그래도 이제는 저것도 잘 먹고 잘살지 않겠어? 지금껏 길러준 값을 더 받았어야 했는데. 아쉬워. 쿠마가이, 네 생각도 그렇지 않아?

사장은 대답을 듣지 못했다. 쿠마가이는 그 길로 레이에게로 달려갔다.

피 묻은 앞치마를 보고 그가 놀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없으니 별수 없었다. 평소라면 방수포를 짊어지고 레이에게로 갈 시간, 방수포 대신 이동형 수조를 수레에 싣고 달린 쿠마가이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레이. 간신히 입 밖으로 낸 이름이었다. 레이. 그 외의 다른 수식어는 붙일 수 없었다. 나의 레이. 감히 그렇게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왜냐면 이토록 아름다운 공주님을 이 비좁고 어둡고 자유롭지 않은 수조 속에 가두었으므로. 그런 그들은 모두 저주받아 마땅하였으므로.

“레이. 조금만 기다려. 꺼내줄게.”

우리 도망가자. 도망가면 돼, 레이.

그럼 아무 문제없을 거야. 아니…….

“너에겐 없을 거야.”

쿠마가이의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레이를 바다에 놓아준다. 그리고 자신은 자수한다. 자신과 함께 있다간 레이는 멀리 도망가지 못한다. 계속 추적당할 가능성이 크다.

“너에게는 없을 거야.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야.”

나의 공주님. 아, 감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부름은 입 속으로 삼켰다. 입속으로 삼키는데.

물속의 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다는 듯이. 그러길 원치 않는다는 듯이.

물론 그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쿠마가이가 일단 레이를 꺼내고자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을 때였다. 쿠마가이, 이 배은망덕한 계집애가 감히, 먹여주고 재워준 은혜도 모르고! 사장의 아들이 고함을 지르며 쿠마가이를 쫓아왔다. 언제나 그 눈빛이 기분 나빴던 남자였다. 쿠마가이는 언제나 그 눈빛이 레이를 향하지 못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그를 방해했고, 그러다 거슬린다며 한 대 얻어맞고 걷어차이는 것이 쳇바퀴처럼 반복되던 일상 중 하나였다. 남자는 한 손에 총을 들고 있었고, 쿠마가이의 발은 사다리의 마지막 단을 밟고 있었다. 죽어! 고함과 함께 방아쇠가 당겨지는 것이 보였다. 눈을 질끈 감는데, 갑자기 수면 아래에서 뻗어온 손이 쿠마가이를 물속으로 끌어당겼다. 레이! 그대로 수조 속으로 풍덩, 빠지는 동시에 총성이 울리니, 탕, 타탕, 탕! 어푸! 하고 수면 위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앞으로 맥없이 고꾸라지는 사장의 아들이 보였다. 그 뒤엔 낮의 그 손님이 총을 들고 서 있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레이가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

“토오루.”

“레이.”

데리러 왔어. 널 일주일이나 더 이런 곳에 내버려둘 리가 없잖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낮에도 말하고 싶었는데. 그 다리는 어떻게 된 거야? 사정이 있어. 이따가 얘기해줄게. 그리고……. 레이의 품에 끌어안긴 채 오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멍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쿠마가이에게 ‘토오루’라 불린 자의 시선이 닿았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박이는데 대답한 건 레이였다.

“같이 갈 거야. 쿠마도.”

“그래? 그럼 서두르자.”

“응.”

귀를 기울이면 멀리, 문밖에서도 총성이 간헐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비명도. 쿠마가이는 레이를 처음 본 순간 깨달은 미래가 지금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모두 대대손손 저주받으리라. 물 한 방울 없는 뭍 위에서 익사하리라. 핏물 속에 엎어져 질식하리라. 그러나 ‘쿠마’의 몫은 레이가 가져가기로 했기에 오늘이 쿠마가이의 그날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날이 오늘은 아니었다.

“같이 갈 거야. 쿠마도.”

그 말속에 쿠마가이의 선택은 존재하지 않았다. 쿠마가이의 발도 바닥을 딛지 못하고 물속에 떠 있는 채였다. 쿠마가이의 몫은 레이가 가져갔다고 했다. 쿠마가이의 몫의 저주는 이제 레이의 손에 쥐어질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공주님의 손에. 저주받아 마땅한 쿠마가이는 더는 그의 손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으리라. 그럴 수 없으리다.

등 뒤에서 저를 끌어안은 몸은 축축하고도 부드러웠다. 그제야 쿠마가이는 제가 무엇을 사랑했는지 생각했다. 그것은 여전히, 쿠마가이가 사랑한 인어였다.

영원히, 사랑해야 할 인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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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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