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Not Today

월드 트리거. 풍인 후보자 쟁탈전과 자키 씨

비자림 by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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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트리거 풍인의 소유자를 가리는 일명 ‘후보자 쟁탈전’에 관한 공문이 내려왔을 때 공문을 읽은 아라시야마는 다만 말했다. ‘그래서 진이 요즘 예민했구나.’ 공문을 받은 건 일전의 테스트에서 풍인을 기동하는 데 성공했던 대원들로, 곧 대상이 아닌 대원들에게도 알려지지만 아라시야마 부대인 데다 때마침 아라시야마가 공문을 확인할 때 곁에 있던 카키자키는 그들보다 조금 이르게 쟁탈전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풍인은 블랙 트리거 치고 사람을 별로 가리지 않는 트리거라고 했다. 적합자만 해도 당시 이미 스무 명을 넘겼을 정도라 카키자키 주변에서도 속속 발견되곤 하였다. 당장 제 곁에 있는 입대 동기인 아라시야마를 포함해서, 동갑내기란 이유 하나로 아라시야마가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 친해진 유바, 그리고 타지역에서 스카우트되어 왔다는 이코마까지. 어쩌다 보니 동갑내기 친구 중 풍인을 기동하지 못한 건 카키자키 저뿐이었지만 풍인 기동이란 어디까지나 상성의 문제지 실력의 지표를 나타내진 않는다는 건 일전의 테스트에서도 주지시켰던 사실이었다. 다만 평소 뭉쳐 다녔던 친구 중 저 혼자만 제외되었다는 사실이 조금 쓸쓸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제 쓸쓸함 정도야 진이 느끼고 있을 감정에 비하면 별거 아니란 생각에 떨쳐내는 카키자키였다. 보더의 원년 멤버 중 하나인 진이 또 다른 원년 멤버였다는 모가미가 남긴 풍인에 가지는 애착은 유명했다. 풍인을 최초로 기동한 사람이 진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 말은 곧 모가미가 블랙 트리거를 만들었을 때 바로 곁에 있던 사람이 진이었다는 뜻도 되었는데, 블랙 트리거를 만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카키자키도 알고 있었다. 카키자키로선 그 심정을 짐작할 수 없었다.

카키자키는 아직 눈앞에서 가족이나 친구, 지인을 잃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임종을 곁에서 지킨 적도 아직 없었으니, 자신은 진의 심정을 추측하거나 짐작할 뿐 감히 이해한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는 카키자키였다. 그래도 최근 진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있던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다행이기도 하였다. 듣기론 키도 사령관을 찾아가 언성을 높인 적도 있다는데, 미래를 보는 그의 SE에 그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미래가 중첩되어 비쳤던 것일까? 아니면 일말의 가능성도 용납하지 못할 만큼, 일말의 가능성이 제시하는 불안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풍인을 제 곁에 두고 싶기 때문이었을까. 그래도 너랑 있을 땐 편해 보이던데,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게 된 지금, 그래서 너랑 있을 땐 편해 보였구나, 라곤 말하지 않은 친구의 배려가 고맙긴 하나 어쩐지 씁쓸했다. 친구가 제게서 안정을 찾았다면 기쁜 일이다만 순수하게 기뻐하지만은 못하는 저 자신이 마음에 차지 못했다. 경쟁 상대로 여겨지지 않는 기분이 마냥 좋을 수는 없기 때문이라. 그들이 같은 선상에 서 있지 않다는 건 진작 알았지만 그래도 그 차이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은 다른 일인지라.

“다녀올게.”

“간다.”

풍인은 호월과 비슷한 형태의 트리거라 사용하기에는 어태커가 사용하는 게 아무래도 낫겠으나, 어태커가 아니어도, 풍인에 큰 욕심이 없어도 난투전 자체에 흥미를 느껴 쟁탈전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후보자 전원이 쟁탈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친구들을 배웅한 뒤 로비로 돌아온 카키자키는 화면을 통해 그들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일대일 개인 랭크전에서는 몇 번 붙어본 적 있는 친구들이지만 이렇게 한데 엉켜 난투를 벌이는 건 그들 모두 처음이었다. 팀 랭크전에선 그나마 같은 부대원, 동료가 있었지만 그마저도 없는 것이 난투전이었다. 백업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나 아니면 모두 쓰러뜨려야 할 적뿐이다. 풍인의 소유자를 가리는 데 개인의 강함을 평가하는 것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으니 하나는 풍인을 더욱 잘 사용하기 위해서, 다른 하나는 적에게 빼앗기지 않고 지켜내기 위해서였다. 이를 가려내기 위하여 후보자를 한데 모아놓고 서로 싸우게 하여 단 한 명만을 남긴다. 결과에 승복한다면 이보다 더 깔끔한 방식은 없을 만도 했다. 적어도 카키자키의 머릿속엔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에 말이다. 저 역시 풍인을 기동하는 데 성공했다면 저 또한 저 후보자 쟁탈전에 참여했을까?

카키자키는 예전부터 제게 실력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라시야마보다, 다른 친구들보다.

이건 너무나 당연하지만, 진보다.

“진이 이기겠지.”

돌아보면 타치카와가 벽에 기대어 서서 감정을 읽기 어려운 눈빛으로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소리 또한 마찬가지라 기쁨도, 서운함도, 쓸쓸함도, 그 어떤 감정도 짚어내기 쉽지 않았다. 타치카와의 말대로 어태커 1위인 타치카와가 빠진 지금 가장 순위가 높은 사람은 진이었다. 게다가 진은 오늘 저 자리에서 이기기 위하여 자신의 SE를 아낌없이 쓸 게 분명하고 또 자명했다. 그러나 진뿐이랴. 진 외에도 카자마라던가 개인 랭크전에서 만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사람들까지 모두 저 안에 포함되었으니 만약 카키자키가 저 안에 있었을지라도 모두를 제치고 풍인의 소유자가 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니, 불가능했다. 카키자키는 제게 그만한 실력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과소평가가 아니었다.

그만한 실력은 타치카와가 가지고 있었을 텐데. 블랙 트리거에 선택받지 못한 타치카와에겐 처음부터 저와 같이 자격이 없었다. 저와 같다는 말을 이럴 때 빼고는 언제 쓰려나 싶긴 하지만 틀린 말은 없었다. 설령 바라지 않았을지라도 배제되는 기분이 좋을 리는 없으리다. 타치카와에게도. 아니, 아니다. 어쩌면 그런 건 처음부터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블랙 트리거 사용자가 되어 S급으로 올라가면 더는 개인 랭크전에 참여하지 않는다. 더는 그 상대와 싸울 수 없다는 게 블랙 트리거에 선택받지 못한 것보다 더 아쉬운 일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에게는. 저와 달리.

시간이 조금 지나자 쟁탈전에서 탈락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부는 로비로 나와 그들을 기다리며 지켜보던 친구들과 합류했으며 이는 카키자키에게도 마찬가지라 이코마, 유바, 이어서 아라시야마까지 한데 모여 카자마와 진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승리는 진에게로 돌아갔다. 타치카와의 예상대로.

“진 오면 밥 먹으러 가자.”

“그 녀석 기분도 이젠 나아졌겠지.”

그 말에 저 역시 웃으며 그러자, 대답하는데 어딘가, 뭔가, 이젠 다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 뭔가 결린 듯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대로 있어도 괜찮은 걸까, 같은 질문을 누구에게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스스로 던진 질문일 텐데도 불구하고.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은 어떻게 대답할지 결정하지 못했으므로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계기만 생긴다면 그때가 곧 때가 되리란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대로 있어선 안 된다는 결심이 설 때가. 움직여야 할 때가. 변화해야 할 때가. 하지만 실은 도망칠 뿐이라는 걸 알고 있을 때가.

그때가 오리다. 다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었으므로 카키자키는 환해진 얼굴로 나오는 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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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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