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고약한 심보

월드 트리거. <베일 아웃>에서 이어지는 글

비자림 by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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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편

랭크전에 새로운 규칙 하나가 추가되었다. 상대 팀 대원이 반경 60m 안에 존재하여 자발적 베일 아웃이 불가한 상황에서 베일 아웃을 목적으로 스스로 트리온체를 파괴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규칙으로, 이를 어길 경우 큰 점수가 감점되어 해당 부대는 사실상 랭크전에서 패배하게 되었다. 소급 적용은 하지 않기로 하였기에 이미 지나간 랭크전에서의 행위는 별다른 규제 없이 넘어갔으나 이 행위는 랭크전이 개시된 이래 딱 한 번 시도되고 직후 금지되는 역사를 갖게 되었으며 역사에 남을 문제의 행위자 역시 처벌은 없었지만 대신 상부로 불려가 긴 시간 문책을 들었다고는 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막까지 랭크전 규칙서에 기술되진 아니했다. 따라서 이 당시엔 보더에 없었다가 후일 입대하고 B급으로 승급하여, 처음으로 참가할 랭크전 규칙서를 뒤적거리며 꼼꼼히 필독하는 대원들에게 궁금증을 일으키기도 했다. 보통은 이미 랭크전을 경험해 본 선배들에게 규칙서를 가져가 물어보는 편이었다. ‘이거, 진짜로 시도한 사람이 있었나요?’ 그러면 그들은 대체로 순순히 대답은 해주면서도 시선은 피했다. ‘……모든 규칙서의 금지 행동은 그것을 저지른 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의미한다고들 하지.’ ‘진짜요? 그럼 누군지도 아세요? 지금도 보더에 계시나요?’

“하하.”

“웃음이 나오세요?”

새로 전달받은 개정된 규칙서에 추가된 조항을 읽은 카코가 눈을 흘겼다. 니노미야는 그제야 그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순순히 그들 뜻을 따르겠다고 한 걸 알게 되었고, 미와는 어찌 되었든 아즈마가 두 번 다시 그런 행동은 못하겠다는 생각에 안도했으며, 츠키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될 줄도 알았고 자신도 두 번은 안 할 생각이었던 아즈마는 곧장 반영된 새로운 규칙에 제법 유쾌한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는데, 당시의 아즈마는 보더의 허점을 찌르는 데 꽤 재미를 붙이고 있었고, 그럼에도 이렇게 눈에 띄게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고 마지막이 될 터였다. 아즈마는 제가 속한 조직의 허점을 찌르고 이에 상부가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에야 지고 싶지 않다는 호승심에 제법 짓궂은 짓을 저지르긴 했으나 보통은 대안을 함께 궁리하고 제시했으며, 그러한 역할을 그 시점에서부터 이미 맡고 있었다. 새로운 포지션―스나이퍼, 저격수란 포지션을 정립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맹점을 찾아내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고 가치도 있었다. 대학원에 진학하는 연구자란 존재는 거의 다 그런 식의 인간이곤 하였다.

동시에 자신의 행동이 앞으로 어떤 위험을 초래할 줄도 알았다. 그렇다고 자신을 악성의 선구자로 매도할 일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 앞에 어떤 가능성을 보인 것은 암암리에 돌던 ‘장난’을 조명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다행인 걸까. 지금은 랭크전의 규칙서에만 머물 규칙이지만, 후일 보더 전체의 규칙으로 변용, 확대될 건 자명했다. 스스로 트리온체를 파괴하는 행위에 관해서. 물론 보더는 입대 시 철저한 인성 면접을 거치도록 되어 있었지만 사람이란 본디 어느 한 순간에 고정되기가 쉽지 않은 존재였다. 그때의 상태를 언제까지나 유지하는 것은 트리온체로 고정된 육신의 외양밖에 없으니, 지속적인 상담이 필수라고는 해도 변질은 막을 수 없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저 또한 턱 아래에 총구를 대고 스스로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를 어디 가서 해보겠냐는 생각을 했으니.

이젠 어디서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베일 아웃은 트리온체가 파괴될 시 자동으로 실행되지만 수동으로도 실행할 수 있는 기능이었다. 그러니 베일 아웃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트리온체를 파괴할 필요는 없었다. 트리온체에서 다시 원래 육체로 전환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트리온체를 스스로 파괴한다면 아마 다음과 같은 상황일 것이다. 랭크전과 마찬가지로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발적인 베일 아웃 실행이 불가능해 트리온체 파괴로 인한 자동 실행을 시도해야만 할 때. 그때라면 아즈마가 보여준 행동이 예시가 될 수도 있겠다만 이건 과할 정도의 선의로 해석한 행동이었다. 아즈마 본인에게도 그런 생각은 없었으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실행한 행동이었으니.

스스로 가능성을 개시한 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규제가 없을 때 행한 자로는 마지막이 되었으니 이후의 자유는 그가 끊어냈다고도 볼 수 있었다.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조명함으로써.

조금은 고약한 심보임을 인정하는 바이다.

미소 지은 아즈마는 부대원들을 향해 손짓해 탁자로 모이게 했다. 다음 라운드를 위한 전략을 짜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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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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