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빈우준] 여름날, 혹은 겨울의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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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빈은 피곤했다.

오늘도 새벽같이 일어나 무림맹의 영역에 침입한 마교의 졸개는 없는지 순찰을 돌았고, 다녀와서는 사소한 일로 서로 죽일 듯이 싸우는 부하들을 중재해야만 했다.

자아 강한 어린 것들을 땅끝에 모아 처박아 두니 매일 같이 분란이 일어난다. 그나마 소빈의 말은 들었지만 잠깐만 떨어져 있어도 말썽이다.

사실 순찰 같은 번거로운 일은 부하에게 맡겨 버려도 충분했지만, 소빈이 직접 나선 것도 부하들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속내를 듣는다면 서운해할 테지만 말이다.

그나마 실력을 믿고, 뭔가 부탁할 수 있는 부하가 있다면…… 정말 딱 한 명 있긴 한데.

‘그 사람을 내 부하라고 할 수 있나.’

실력은 믿을 수 있어도, 그 됨됨이는 믿을 수 없다. 그가 이 척박한 땅까지 자발적으로 지원해 나타난 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어떤 사람인지 종잡기 힘들다.

애초에 왜 여기에 왔는지도.

‘단주님, 간밤에 푹 주무셨습니까? 일찍 일어나셨네요.’

왜…… 그렇게나 살갑게 말을 거는지.

‘단주님, 어디 가십니까? 달밤 산책?’

어째서 자신을 보면 마치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쫓아오는지 말이다. 그건, 분명 전처럼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는 아닐진대.

무림맹을 좌지우지하는 명문가, 오대세가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천 가문의 우준. 유서 깊은 무가의 자제가 그리하듯 어렸을 때부터 대단한 스승에게 가르침 받고 영약을 간식처럼 챙겨 먹었겠지.

그러니 당연히 소빈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났다. 이런 땅끝 촌구석에서 썩어갈 인재가 아니다. 그가 또 소빈을 죽이고 싶어서 휘하로 들어온 거라면 실행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그런 대단한 남자가 왜 자신의 밑에서 일하기를 소원했을까? 경력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도.

“단주님! 일 끝나셨습니까?”

우렁찬 우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 보였던 붉은 머리카락이 보인다고 생각한 순간, 눈치채지도 못한 사이에 그가 눈앞에 당도해 있었다. 만일 그가 칼을 들고 있었다면 지금 목이 베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소빈은 조금 소름이 돋아 목을 만지작거렸다.

“단주님? 어디 안 좋으십니까? 하긴 이런 춥고 척박한 곳에 오래 계셨으니, 기가 허해질 만도 하죠.”

우준이 시원스레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대답을 해주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대화를 이끌어가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는 그런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듯했다. 소빈은 이런 넉살엔 영 재능이 없어 회귀 전 사람들과 관계를 틀 때도 크게 노력해야 했었다. 사랑만 받고 자라 온 구김살 없는 도련님은 원래 이런 걸까?

소빈도 애써 웃었다.

“어제 본가에서 산삼을 몇 뿌리 보내 줬는데 그거라도 드릴까요? 기운이 나실 겁니다.”

소빈이 기겁했다.

“아니…… 아니요. 괜찮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우리가 대체 무슨 사이라고 산삼을 냅다 줘! 영약까진 아니지만 어쨌든 비싼 약임은 틀림없다. 천 가문에서도 갑자기 마교 근처로 가겠다고 지원한 우준이 걱정되어 보내 줄 것일 텐데 그걸 냉큼 자신에게 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대체 무슨 속셈인 건지. 이럴 때마다 정말 난감하다. 자신에게 잘 보여서 얻는 게 뭐가 있는 걸까?

“단주님이 편하셔야 제 생활도 편하죠. 한 뿌리, 아니 두 뿌리는 가져다 드릴 테니 드시고 몸보신하십쇼.”

진짜 괜찮다고! 소빈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니, 산삼이 몸에 잘 안 맞아서…… 호의는 정말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 보세요.”

소빈이 최대한 미안한 낯으로 고개를 몇 번이나 숙였다. 상사가 그렇게까지 사죄하니 아무리 서글서글한 우준이라도 더 이상 권유할 수는 없었던 걸까.

그가 아쉬운 기색으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이만 쉬시길.”

소빈은 겨우 안심했다. 황급히 발걸음을 돌려 낡은 방으로 돌아갔다. 건물이 낡아 외풍이 쌩쌩 들어차고, 바람이 불 때마다 창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허름한 방.

그래도 이 추위도 익숙했다. 이제 잘 때 이 삐걱대는 소리가 없으면 허전할 지경이다. 쾌적하냐고 한다면 역시 아니고, 자신도 한때는 공이란 공은 세워서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이 처지에 만족한다. 살아 있으니까. 피부에 스미는 추위를 느끼는 것도, 살아 있어서 가능한 것이니.

그러나 침상에 누운 순간 소빈은 온기를 느꼈다. 보드랍고 따뜻한 이불이 살결에 닿는다. 쌩쌩한 외풍을 포근하게 막아주는 목화솜이 듬뿍 들어간 도톰한 침구.

맞아, 이번에 침구를 전체적으로 교체한다고 우준이 말했었다.

‘……따뜻해.’

이곳이 낡은 방이라는 것을 잠시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침구였다. 하지만, 그래서 소빈은 곤란했다.

‘너무 따뜻해.’

몸을 감싸는 온기에 붉은 머리의 남자가 떠오른다. 밀어내고 피해도 여름날의 햇살처럼 따라오는 남자를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뜨거운 태양을 퍽 닮았다. 머리 색도……. 분명 여름날의 파괴적인 햇살처럼 소빈의 삶을 망가뜨릴 사람인데, 회귀 전에도 그랬는데. 이런 포근함을 맛보면 착각할 것만 같다.

그가 자신에게 이런 다정한, 겨울날의 햇살이 될 수도 있으리라고.

우준의 호의를 받으면 곤란해지는 것이 아닌 이런 상냥함을 맛볼 수 있으리라고.

그건, 기대 해선 안 될 일이라는 걸 아는데도…….

소빈은 밀려오는 상념에 눈을 감는다.

내일은 내일의 일이 또 찾아올 것이다. 내일도 피곤하겠지. 자자, 곤란한 일은 생각하지 말고.

나는 아직 살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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