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한 잔

ㅁㅇ님 커미션(2024) / 1차 / 현대 CP / 4,800자(크롭)

“감사합니다.”

편의점 야간 알바생이 딸기 맛 우유를 계산대 위로 밀어놓았다. 초점 없는 눈이다. 그것을 집어든 회사원은 역시 하는 둥 마는 둥 목례를 흘리고, 유리 문을 어깨로 밀어 젖혔다. 자잘한 종소리가 생채기처럼 귀에 거슬렸다. 까만 겨울날의 밤거리는 영 친절하지 못했고, 우유갑으로 젖은 손에 찬 공기가 닿기 무섭게 이 소시민은 직전의 구매를 약간 후회했다. 그러나 착실하게도 막 입구를 뜯은 터라, 또 별다른 수가 없어서, 그는 편의점을 나오며 빨대를 꽂았다. 부드러운 달콤함이 혀 위로 차갑게 쏟아졌다. 여러 모금에 걸쳐 팩을 비우면서 야근의 피로가 조금씩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손이 완전히 가벼워짐과 동시에 그 느낌은 몇 초 전으로 날아가 사라져 버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소소한 행복의 원천이었던 우유갑이 집까지 들고 가야 할 짐 덩어리가 됐다는 걸 깨닫고, 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불행해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우유를 샀을 때부터? 야근이 결정됐을 때부터? 업무를 넘겨받았을 때부터? 아니, 애초에 이번 프로젝트를 맡기로 했을 때부터 잘못된 걸지도 몰랐다. 여하간 더는 한 걸음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집까지 남은 거리를 도저히 걸어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의 눈에는 이제 길바닥도 썩 괜찮은 잠자리로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눈이 자꾸만 감기려 했으니까……. 거의 잠들 뻔하던 그의 눈을 뜨이게 한 건 익숙한 목소리였다.

“응? 뭐해, 거기서.”

1303호의 시선이 이상하리만치 높았다. 그제야 1304호는 자신이 허리를 반쯤 굽히고 있었다는 걸 자각하고 몸을 바로 했다. 뜨끔한 흉통이 지나갔다. 새삼스럽게 심장이 크게 뛰었다. 어쩐지 부끄러운 모습을 들킨 것 같았다.

“……뭡니까?”

피차 인사라고 할 만한 첫마디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1303호는 손에 든 커피를 쪽 빨아들였다. 한 번 마시고도 넉넉히 남은 수제 아메리카노가 모락모락 김을 피워 올렸다. 자기도 모르게 1304호는 그걸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얼른 고개를 돌리며 말을 꺼냈다.

“이 시간에 웬 커핍니까?”
“받은 건데?”
“…….”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으나, 편의점 불빛 방향을 등지고 있었던 탓에 맞은편에 선 이는 미처 보지 못했다. 고개를 기울인 그가 툭 내뱉었다.

“왜, 좀 줘?”
“내가 무슨 거지로 보입니까?”

쾅! 사납게 구겨진 우유갑이 편의점 앞의 쓰레기통 속으로 나가떨어졌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1303호가 눈을 끔뻑였다. 오늘따라 앙칼지다느니 하는 농담을 늘어놓을 수도 있었지만, 이번엔 그러는 대신 흰 전등 불빛을 비껴 받은 옆얼굴을 훑어보았다. 얼굴빛이 유달리 창백해 보이는 게 비단 그 빛 때문만은 아닌 듯했던 까닭이다. 관자놀이에는 이 추운 날씨에도 식은땀을 흘린 흔적이 남아 있었고, 입매는 무언가 견디고 있는 듯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비록 병증에는 문외한일지언정 고통의 신호는 그에게 익숙했다. 짧고 둔탁한 사고의 과정 끝에, 그는 그 고통을 외면하기로 결정했다. 자신이 신경 써야 할 일도 아니거니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보지 않은 척 너스레를 떨었다.

“데려다 줄까?”

추근덕거리는 친구 컨셉이라고나 할까. 두 사람의 집으로 가는 길은 거의 일치했으므로 사실 물어보나 마나 한 이야기였다. 또 저 낑깡은 새빨개져서 바락바락 소리나 지르겠지. 그 꼴을 놀려줄 심산으로, 그는 눈높이를 맞추고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눈에 보인 반응은 예상과 사뭇 달랐다. 움찔 뻗다가 떨어지는 손, 고민이 담긴 멍한 시선. 그리고…….

“…….”
“데려다 줘?”
“……무슨 헛소립니까? 바로 옆집인데.”

한발 늦은 성화에 힘이 없었다. 상태가 나쁜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옆집이면 데려다 주면 안 돼?”
“꺼져요.”

솜방망이 같은 주먹이 그의 어깨를 쳤고, 1304호는 성큼성큼 길을 앞질러 먼저 오피스텔 방향으로 사라져버렸다. ……흠. 남겨진 이는 무심한 감탄사와 함께 주머니에 빈손을 꽂아 넣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놓아주는 게 현명한 판단인 듯싶었기에, 뒤를 따라 걷는 걸음은 한층 느려진 채였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예상한 대로 돌아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제 집으로 귀가하지 못했다. 1304호 현관까지 불과 너덧 걸음 남겨두고 복도 바닥에 엎어져 있는 집 주인 탓이었다. 도어락은 켜져 있지만 문은 열려 있지 않았다. 반쯤 비운 아메리카노를 들고서, 그는 1303호와 1304호 현관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런 데 사람이 쓰러져 있으면 아무리 그라도 곤란했다. 그렇다 해서 집 안에 들이는 것 역시 곤란하고. 그러면 남는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느릿하게 결론을 지은 그는 몸을 숙여 쓰러진 사람의 품을 뒤졌다. 마른 갈비뼈의 굴곡이 거친 손끝에 닿았다.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배와…… 참, 이게 아니지. 그는 자연스럽게 가방으로 손을 옮겼다. 여는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위장약, 향수, 필요 없는 것들을 대충 휘저어 밀어내고 귀중품이 들어 있을 법한 안쪽 주머니를 뒤졌다. 과연 차가운 열쇠고리가 걸렸다. 꺼내보니 차 키와 작은 인식 카드가 달려 있었다. 카드에는 빛나는 도어락과 같은 모양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손가락에 걸고, 가방을 제 어깨에 둘러멘 채 널브러진 사람을 안아 들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리고, 그는 일전에 와본 적 있는 현관 안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땐 몰랐는데, 사람이 없이 빈 집은 평수에 비해 기묘하게 넓었다. 직관적인 감상은 그랬다. 문을 닫고 들어와 들고 있던 몸뚱이를 내려놓으면서, 그는 깨달았다. 집이 넓은 것이 아니라 공간을 차지하는 물건이 없는 거라고. 사람이 사는 ‘집’이라면 으레 두는 화분이나 책장, 이런저런 집기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한두 벌 걸려 있는 옷가지는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다려져 누가 입는 거라기보단 차라리 전시해 둔 것처럼 보였다. 결벽적으로 정리된 그 방 안에서 금방 들어온 두 사람, 그리고 그에 의해 흐트러진 침대만이 겨우 생명을 띠고 있었다.

그는 이불을 대강 덮어놓고 눈에 보이는 여닫이들을 손 닿는 대로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사람이 쓰러졌을 땐 물수건을 얹어두면 된다고 소설 따위에서 읽은 적이 있기에, 적당히 적실 만한 손수건을 찾기 위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헛수고란 걸 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열어볼 만한 장도 몇 개 없거니와 그 대부분은 먼지 한 톨조차 없이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화장실 선반까지 뒤져서야 새하얗고 보드라운 수건을 몇 장 찾아냈다. 물수건으로 쓰기엔 좀 커 보이지만 별수 없었다. 세면대에서 엉성하게 짜 온 물수건이 핏기 없는 이마에 얹히자, 넘친 물기가 방울져 머리카락 사이로 흘렀다. 이 이상 무얼 해야 할지 아는 게 없는 까닭에, 그는 그 옆에 앉아 커피나 마저 마시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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