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더게3/승천아스타브]레갈리아(regalia)

승천 아스타리온x타브(체형1 시스젠더 여성)/엔딩~에필로그 사이의 시점

발더스 게이트 3 by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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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더 브레인의 침략을 막고 재건이 시작된 뒤로 한 달. 사교계에서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감히 무시 못 할 영향력을 발휘하던 카사도어 자르가 돌연 병환으로 몸져누웠다는 소문이 돌았다. 일리시드에게 공격받아 백치가 되었다느니 건물 잔해에 깔려 신체가 불구가 되었다느니 다양한 추측이 돌았으나, 곧 새로운 인물의 등장으로 일축되었다.

 

그는 오랜 시간 부친의 명을 받아 타국에서 가문의 사업을 이끌다가 폐허가 된 고향으로 귀환하였다는 자르 가문의 후계자였다. 후계자는 자신을 알현하고자 입궐한 상류층에게 자신을 아스타리온 자르라고 소개했다.

 

부친과는 무엇 하나 닮은 외모였으나 사교계는 그를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혹자는 자르 가문의 새 주인이 카사도어와 권력을 다퉜고 끝내 승리하여 부친을 구금한 게 아니냐고 추측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철두철미한 카사도어가 가독(家督)을 사업 때문이라고 할지언정 선보이지 않았겠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두 터무니없는 헛소리로 치부하고 무시했다. 그로 인해 결국 자르 가문의 불화는 신문에 단 한 줄조차 실리지 않고 재가 되어 흩어졌다.

 

동시에 발더스 게이트 상부 도시의 사교계는 불미스러운 헛소문을 하루라도 빨리 잠재우고자, 황폐하고 음울한 현실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축복인 양 새로운 명사(名士)를 열렬히 환영했다.

 

아스타리온 자르는 가문의 영예를 빛낼 줄 아는 사람이었고, 훌륭한 부친보다 자비로웠으며, 도시의 재건을 위해 기꺼이 보물과 재산을 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상부 도시는 하부보다 피해가 극심했던 데 비해 빠른 속도로 사치스러운 일상을 되찾아 갔다. 그러나 아스타리온 자르를 우러러보는 시선에는 비단 그가 베푼 은혜에 대한 감사만이 존재하지 않았다.

 

은사에 진주를 으깨어 담비 털 붓으로 바른 듯한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천사가 봉인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착각할 만큼 순결한 대리석을 조각해 완성한 양 오만하고 우아한 이목구비. 그리고 흰 비둘기의 가슴에 날카롭게 벼린 단검을 꽂아 흘러내린 피로 응고된 양 투명하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눈동자.

 

고귀하고 엄숙한 가문에 부친보다도 더욱더 걸맞다며 사교계에서 은밀한 평을 받은 후계자는 아직 혼처가 정해지지 않은 영애와 영식은 물론, 귀부인과 그녀의 부군까지도 뜻 모를 열병에 시달리게 했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도 상부 도시 사교계에서 화두가 된 관심사는 아스타리온 자르의 혼인 여부였다.

 

마치 자신에게 쏠린 관심에 호응이라도 하듯 아스타리온 자르는 하루가 다르게 궁전을 새롭게 단장하고 연회를 개최하였다. 절대자에게서 살아남았다는 안도, 그러나 풍요롭고 안락했던 과거로 더는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은 그의 가장무도회에 열광토록 유도했다.

 

참담한 현실과 동떨어져 달콤하고도 아름다운 낙원. 그야말로 한여름 밤의 싱그럽고도 형형한 꿈결과 같은 연회장에서 초대객은 모두 미리 입이라도 맞춘 듯 그의 빈 옆자리를 주시했다. 가장무도회라고 하나 가면 뒤에 은밀히 숨긴 신분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하물며 주최자의 아름다운 외모는 일부러 조명을 어둑하게 했을지언정 홀로 형형했다.

 

엘더 브레인의 침략 이후 항만이 봉쇄되어 우단과 같은 값비싼 옷감은커녕 실과 단추조차 수입되지 않은 참담한 현실을 비웃듯 그는 궁전을 그대로 덧댄 양 늘 고급스러운 비단 재킷을 입었다. 검은색 비단에 금사와 홍사로 화려하게 수를 놓은 재킷은 어느덧 그의 연회에 참여한 귀족에게 암묵적인 규칙을 하나 세우게 했다.

 

검은색과 붉은색은 오로지 아스타리온 자르에게만 허락되었다고.

 

그런고로 아스타리온 자르가 주최자인 가장무도회에서는 초대객 모두가 검은색과 붉은색이 들어간 정장을 선택하지 않았다. 이러한 규칙은 아스타리온 자르가 참석한 연회에서도 마찬가지였으나, 그는 초대받기보다는 자신이 선별해 초대하길 선호하였으므로 그나마 숨통이 트일 수 있었다.

 

“폐하!”

 

아스타리온 자르는 늘 언제나 그러하듯 거룩하고도 사치스러운 차림이었다. 그는 황금과 진주, 그리고 루비로 장식한 왕관을 쓰고 최고급 벨벳에 백여우 모피를 덧대어 두른 망토를 두른 채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그가 기거하는 궁전의 가장 지고한 자였기에, 누군가 아부를 늘어놓으며 덧붙인 경칭은 곧이어 흡사 합창처럼 연회장을 떠들썩하게 했다.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나 혹 혼사를 약조한 가문이 있으실까요?”

 

앞다투어 아스타리온 자르의 관심을 끌고자 누구나 할 것 없이 높이던 목청이 언뜻 수줍으면서도 간드러진 어조의 질문에서 잦아들었다. 각기 다른 분장을 한 손님은 고개만 슬쩍 돌리거나 시선만 흘끔거리며 어느새 인파를 헤치고 그와 지척에 선 검은 머리의 영애를 주시했다. 아스타리온 자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영애는 아스타리온 자르보다 훨씬 왜소하고 가녀렸다. 뭇 성인 남성의 반도 되지 않을 체구였건만 우악스럽게 인파를 헤치고 파고든 듯 옷매무새가 다소 엉망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첫 목적을 달성했으니 개의치 않다는 양 옷매무새를 자연스럽게 정리하곤 그에게 무릎 굽혀 절했다.

 

아스타리온 자르는 인사를 받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내쫓으라는 손짓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들고 있던 황금잔을 곁에 서 있던 시종에게 내려놓았을 뿐이었다. 의중을 감히 읽을 수는 없으나 그가 변덕일지언정 그녀에게 관심을 드러냈다는데 모든 초대객이 숨을 죽였다.

 

“영광된 국가를 다스리시는 만큼 폐하를 보필할 동반자가 있으셔야 하지 않겠어요? 황송하게도 폐하의 은혜를 받아 매번 이렇게 뜻깊은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늘 영광이 가득하시면서도 곁에 마땅히 계셔야 하는 분이 없으셔서 감히 여쭤보았어요. 태양이 있다면 당연히 달이 함께여야 하는데…….”

 

영애는 제 탐스러운 브루넷을 돋보이게 하려는 양, 아니면 자신이라면 기꺼이 아스타리온 자르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는지, 감히 붉은 바탕에 금사로 장미를 수놓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드레스와 머리 장식만큼은 당돌하기 짝이 없는 영애조차도 감히 규칙을 어길 수 없는지 흰 공단에 은사가 달의 공전을 찬연하게 묘사하였다.

 

태양과 달을 들먹이며 에둘러 묻기는 하였으나 모든 초대객은 그녀의 의중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자신이라면 자르 가문의 새로운 주인 곁에 서 있기에 마땅한 자격이 있지 않으냐고. 가면 아래 얼굴이 반 이상 가려져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확신에 찬 낭랑한 음성은 고작해야 약관을 겨우 넘겼으리라 예상케 했다.

 

맹랑한 발언이었으나 아스타리온 자르는 무례하다고 역성을 들기는커녕 눈썹 한 번 찡그리지 않으며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검은 머리 영애가 입을 다물자마자 적막이 가라앉은 좌중에는 연주 소리만이 물안개처럼 자욱하게 가라앉을 뿐이었다.

 

잠시간 뒤 아스타리온 자르가 눈이 마주치자 뺨을 붉히면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영애를 보고 입술 끝을 미미하게 올리며 조소를 흘렸다. 짧은 미소였으나 더할 나위 없이 자비로운 용서였다. 검은 머리 영애가 억눌린 탄성을 흘렸다. 아…….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음에도 그녀에게 허락된 희열은 추종자를 부추기에 충분했다.

 

“자르……, 아니, 폐하! 소신에게 과년한 여식이 하나 있는데!”

“제 차남이라면 분명 폐하의 영광을 여러 문명이 스러진 이후에도 결코 쇠퇴하지 않게 할 겁니다!”

“저, 저는 어떻습니까! 당신에게 제 부와 명예……! 네, 원하신다면 영혼 또한 모조리 바칠 수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이 검은 머리 영애를 밀치고 한 발짝 다가서며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나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아우성과 뒤섞여 파묻혔다. 그리하여 고상하고 찬란하던 연회는 어느새 아비규환으로 바뀌었다.

 

아스타리온 자르를 둘러싼 가장무도회의 초대객은 각자의 신분을 숨긴 가면을 우악스럽게 붙들고 서로를 헐뜯었다. 옷가지를 우악스럽게 뜯으며 넝마로 만들거나 손톱을 세워 뺨을 긁었고 개중에는 손찌검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몸싸움이 거칠어져 멀찍이 서 있던 초대객 몇이 겁에 질려 물러설 때조차 그 누구도 아스타리온 자르의 발치에 침범하지 않았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오롯이 성역인 것처럼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순간에서도 그에게 닿지 않고자 온몸을 으스러뜨렸다.

 

아스타리온 자르는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아수라장을 검은 머리 영애에게 그러하였듯 경비를 불러 저지하거나 무례를 지적하며 축객령을 내리지도 않았다. 그는 분명 초대객과 나란히 서 있었으나 드높은 옥좌에 앉아 하찮은 미물을 업신여기듯 관망할 뿐이었다.

 

다만 더욱더 난장판이 되는 연회장을 느른하게 둘러보는 붉은 눈동자에는 일그러진 쾌락과 같은 멸시가 서슴없이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의중을 알지 못했다. 상대방의 머리채를 잡는 와중에도 일순 눈이 마주치면 마른침을 삼키곤 홀린 듯 넋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주최자가 어떤 저지도 없자 소란스러운 난투는 점점 더 몸집을 불려 나갔다. 사람들이 싸움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아스타리온 자르에게 다가가 아부를 늘어놓으려다가 멱살이 잡히길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지루하군. 시끄럽고 난잡해.’

 

그리고 아스타리온은 슬슬 자신의 사소하고도 알량한 관심에 흥미가 떨어지는 중이었다. 누구도 썩 눈에 차지 않지만, 반세기 정도 그럭저럭 부려 먹을 놈이 있지 않을까 싶어 부러 방치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영 허탕이었다. 그는 혀를 차며 연회장 구석에서 기척을 내지 않고 주인의 명령만을 기다리는 시종장에게 눈짓했다. 이대로 내쫓고 앞으로 영영 궁전에 발을 딛게 하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하나같이 좀비보다도 쓸모가 없어. 재건이 한창인 지금 영향력을 뻗기에 적기라 신혼조차 즐기지 않고 긴히 왕림해 줬건만.’

 

아스타리온은 시종이 눈치껏 다가와 자신에게 바친 황금잔을 집어 들며 미간을 모았다. 황금잔에는 응고되지 않은 신선한 피가 잔잔히 파동쳤다. 조금 전 시종장이 주인공의 불편한 심기를 읽고 서둘러 대령하도록 지시한 듯했다. 코웃음을 치며 잔을 들이켜던 아스타리온은 혀에 일순 닿았다가 식도로 흐르는 피에 눈썹을 찡그렸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하고, 늘 곁에 두고도 갈망하고야 마는 극상의 맛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발더스 게이트가 재건되든 말든 궁전의 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내 사랑을 서로의 품에서 십여 년 정도 탐했을 텐데. 십 년. 고작 십 년이니 찰나와 같겠지만.’

 

시종장이 아스타리온에게 묵례하며 연회장 밖 병사를 부르려던 찰나, 아스타리온 자르의 한 줌뿐인 관심이라도 얻고자 난동을 부렸던 초대객이 일체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끔찍한 최면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사람처럼 넋이 나간 얼굴로 입을 벌린 채 연회장 단상의 악단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적막만이 남은 연회장에 낭랑한 노랫소리가 현을 퉁기며 잔잔히 번졌다. 그간 오로지 아스타리온 자르만이 독점했던 류트 연주였다.

 

아스타리온은 황금잔에 남은 피를 단번에 들이켜 여전히 곁을 지키는 시종에게 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세이렌의 가락에 홀린 뱃사람처럼 우뚝 서서 고개만 내민 초대객 사이로 발을 디뎠다. 일부러 기척을 내는 은혜조차 베풀지 않았으나, 모두가 단상으로 향하는 아스타리온 자르에게 기꺼이 비켜섰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일렬로 서서 허리를 깊게 숙이며 절하는 모습은 마치 대관식을 연상케 했다.

 

‘늘 언제나 그러하듯 아름답군.’

 

단상 한가운데에는 검은 면사포를 늘어뜨린 백금 왕관을 쓴 여자가 앉아 있었다. 콧잔등까지 면사포를 덮은 데다가 사위마저 어두웠으나 그녀를 샅샅이 훑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종족도 신분도 하물며 타고난 외모조차도 밤과 같은 어둠이 자욱한 연회장에서도 여자는 찬란한 정오의 햇볕 아래에 있는 성싶었다. 아스타리온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흐드러지게 만개한 여름 장미, 새큼한 과즙을 터트리는 베르가모트, 그리고 농염하고도 달콤한 석류 향이 뒤엉켜 그를 이끌었다. 이조차도 어느덧 눈이 마주치자 현을 어루만지던 손을 떨구며 미소 짓는 여자를 위해 아스타리온이 손수 조합한 향이었다.

 

면사포 아래 하나로 땋아내려 늘어뜨린 엷은 금발은 진주가 알알이 매달려 반짝였고, 아스타리온을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다는 양 응시하는 은회색 눈동자는 달과 같이 영롱했다. 그는 여자에게로 손을 뻗어 면사포를 느릿하게 걷어 올렸다. 등 뒤로 탄식을 늘어놓거나 딸꾹질하는 등 멍청한 헛소리가 들렸다. 부러 자신만 감상하도록 경계했건만 기어코 엿본 치가 있는 모양이었다.

 

“쯧.”

“아스타리온.”

 

면사포를 사뿐히 얹은 손을 거두려는데 쓴웃음이 섞인 음성이 아스타리온을 저지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곧이어 아스타리온이 혹시라도 자신을 뿌리칠까 두려워하듯 제 면사포를 들친 손을 붙들어 뺨을 부볐다. 그제야 그는 제 삿된 영혼을 채우는 포만감에 만족스러운 실소를 터트렸다. 아무렴, 신이라고 할지언정 눈앞의 여자를 자신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었다.

 

아스타리온은 일순 전율이 흐를 만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왕관을 쓴 정수리로부터 발끝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늘어뜨린 치맛자락까지 훑었다. 여자는 자르 궁전의 초대객에게는 암묵적으로 허락되지 않은 검은색 바탕의 온몸에 밀착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상복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맨살이 드러나지 않은 드레스는 턱 아래까지 레이스 달린 옷깃이 감싸며, 금가루를 섞은 홍실로 박쥐를 닮은 용과 장미 무늬가 그녀를 옭아매듯 수놓아 있었다. 자신이 앞서 연회장으로 떠나기 전, 기진맥진하게 침대에 누워 있던 여자에게 입고 나오라며 지시한 복식이었다.

 

“그래, 내 사랑. 다정하기도 하지.”

 

분명 여자를 이루는 모든 것은 하나같이 아스타리온의 손을 거쳤다. 그는 뺨을 감싸던 손을 움직여 턱을 거머쥐듯 잡아 올렸다. 입술에 닿은 검지로 짧은 숨이 닿았다가 흩어지고 너울지던 어둠에 숨었던 여자가 환하게 빛났다. 그리고 초대객 모두가 아스타리온의 총애를 독차지한 여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히익……!”

 

왕관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면사포마저 단상 바닥에 가라앉았을 때, 겁도 없이 동반자를 운운하던 검은 머리 영애가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아스타리온과 마주 보는 미인이 그에게 어떤 존재인지 뒤늦게 알아차린 듯,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실언을 내뱉었는지 깨달았다는 듯 새파랗게 질린 채. 그 순간 가장무도회에 참석한 모두가 여자의 호칭을 입안에서 굴렸다.

 

‘자르 부인.’

아스타리온은 눈살을 찌푸리며 인파 사이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주저앉아 덜덜 떠는 영애를 노시했다. 주제도 모르고 교만하게도 자신의 옆자리를 욕망했다. 만에 하나 제 사랑이 인기척을 내면서까지 말리지 않았더라면 철부지는 그대로 그의 총애를 꿈꾼 다른 초대객과 함께 제 스폰의 하룻밤 먹이로 내동댕이쳐졌을 터였다.

 

검은 머리 영애는 아예 눈치가 없지는 않은지 아스타리온 자르가 고개를 돌리자 제 신분이 드러나든 말든 가면을 벗어던지고 연회장에서 도망쳤다. 그는 영애가 덜덜 떠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무거운 치맛자락을 움켜쥐었을 때 어떤 감흥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관심을 돌리고자, 이미 권력에 눈먼 천치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건만 초조하게 입맞춤을 조르는 아내의 귓불을 매만질 뿐이었다.

 

아스타리온, 그 자신에게 모든 것을 쥐여준 불멸의 사랑. 자신이 온 세상을 영원히 걷히지 않을 밤으로 모조리 삼키는 순간까지 영원토록 함께할 단 하나뿐인 배우자이자 오른팔. 가장 총애하는 스폰. 평화로운 지배자, 라는 뜻을 가진 이름조차도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발더스 게이트의 영웅.

 

우둔하게도 한없이 다정해 에메랄드 마을에서 만난 티플링 난민을 이후로도 빠짐없이 구했으면서, 영웅은 그를 위해 7천 명의 생명을 외면했다. 한낮 스폰이 복수를 마치고 뱀파이어 초월체가 되도록 참담한 학살을 묵인했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일그러지기는 했으나 끝내 선하기를 택했다. 마지막 싸움에서조차 네더 스톤으로 엘더 브레인을 조종해 옥좌에 오를 수 있었음에도 기어코 파괴를 명령했다. 이후 그녀는 자신이 이륙한 평화에 아스타리온이 훼방이라도 두려고 하면 지금처럼 은근히 제 부군을 말렸다.

 

모순되게도 아스타리온은 그조차 싫지 않았다. 눈앞의 여자는 자신이 영생을 선물하기 이전부터 완벽했다. 함께 여행하며 때때로 분통을 터트렸던, 가혹하게도 올곧은 행동거지조차도 아스타리온이 사랑하고야 마는 여자의 일부였다.

 

“우리 어여쁜 부인, 이래서야 우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데까지 수천 번의 문명이 무너져야 할 것 같구려.”

 

아스타리온이 허리를 숙이며 그녀에게조차 가까스로 들릴 듯 말 듯 작은 비아냥을 섞어 속삭였다. 그는 눈을 새치름하게 홉뜨고는 손을 뻗어 제 양 뺨을 감싸는 아내와 마주하며 실없이 웃었다. 이조차도 귀여울 뿐이었다. 아스타리온은 초조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영원히 제 것이었고, 기꺼이 자신에게 속박되었다.

 

어차피 두 사람에게 허락된 시간은 무한했다. 고작해야 오백 년만 지나도 발더스 게이트의 영웅과 함께했던 동료는 그 누구도 남지 않을 터였다. 마지막 친구가 숨을 거두고 슬픔에 잠긴다면 그때 승천 의식을 치를 때처럼 설득한다면, 아스타리온의 사랑스러운 배우자는 또다시 부군이 저지를 악행을 모른 척하리라는 오만한 확신이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여자의 턱을 거머잡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곧장 제 뺨을 감싸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모은 뒤 입을 맞췄다. 더는 맥박이 뛰지 않은 손바닥은 싸늘했으나 여전히 보드라웠다. 당장에라도 송곳니를 세워 소매 아래로 숨은 팔목을 박아넣고 싶었으나 그는 애써 충동을 가라앉혔다.

 

그는 제 사랑과 마지막 밤을 보냈을 적처럼 손목을 부드럽게 굽히며 손등에 입을 맞췄다. 몇 번이고 밤을 서로의 품에서 지새웠음에도 수줍게 몸을 떨던 여자는 그제야 안도한 듯 입꼬리를 곡선을 그리며 누그러뜨렸다. 아스타리온은 손목을 잡아 곧장 자신에게로 당겼다.

 

여자는 늘 그러하듯 온순했다. 그녀는 아스타리온이 조종하는 대로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 제 팔을 둘러 안았다. 고작해야 남편에게 파고들어 몸을 숨기듯 기대는 모습이었으나 마치 서로에게 갈급하게 흘레붙는 양 착각하게 하는 야릇한 긴장이 풍겼다. 이윽고 여자가 고개를 뒤젖히며 레이스 옷깃에 가려진 목덜미를 드러냈다. 옷깃 아래로 그가 영원을 약속하며 남긴 상흔이 보였다.

 

“하……!”

 

아스타리온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앙큼한 도발이었다. 그가 이미 가장무도회와 초대객을 벌하는 데 모든 흥미를 잃었음을 눈치챘음에도, 아내는 기어코 제게 눈을 떼지 말라고 졸랐다. 그를 향한 은밀한 질투와 독점욕……, 그리고 연정이 더 이상 뛰지 않은 심장을 들끓게 했다.

 

아스타리온은 더는 햇볕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눈동자를 보거들랑 지난 이백 년간 자신에게 허락된 달빛을 떠올렸다. 태양을 영접하지 못하고 어둠을 떠도는 괴물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빛이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 달빛을 닮은 여자는 아스타리온 자르를 완성하는 레갈리아(regalia)였다.

 

아스타리온이 곧장 입을 반만 벌려도 그대로 집어삼킬 수 있을 만큼 작은 입술을 훑고 빨았다. 여자의 잇새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흘렀다. 그가 곧장 그녀의 둔부를 거세게 움켜쥐자 입술이 엉키는 가운데 만개하듯 벌어졌다. 아스타리온은 오랜 시간 갈급한 사람처럼 그녀를 더욱더 제게로 당기며 신음조차 더는 자신이 아니면 들을 수 없도록 혀를 사납게 옭아맸다. 그러자 여자는 앙큼하게도 기꺼이 굴종을 받아들이겠다는 양 아랫배를 비볐다.

 

‘역시나 이 몸에 질릴 순간은 절대 오지 않을 듯하군.’

 

당장에라도 가장무도회를 파한 뒤 온통 자신이 고른 장신구와 드레스로 치장한 여자를 침대에 눕히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오랜 시간 발더스 게이트의 영웅가 영영 잊힐 때까지 궁전 깊숙이에 숨기고 가두고 싶었다. 그러나 아스타리온은 제 사랑이 자신을 완벽하게 만드는 만큼 그녀 또한 마찬가지여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스타리온은 여자의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녀에게 숨을 불어넣었다. 여자가 영면에서 깨어나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듯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그녀는 온 세상에 오로지 자신의 부군만이 존재한다는 양 아스타리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무엇 하나 흡족하지 않을 수 없는 순종이었다.

 

그는 여자에게서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 그녀의 발치에서 나동그라진 왕관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여자가 무릎을 굽히며 고개를 수그리자 왕관을 씌우며 등을 돌렸다. 자신의 사랑은 찬란하고 따사로운 빛 아래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였을 때 가장 황홀했다. 그렇기에 아스타리온은 기꺼이 미물이나 다름없는 필멸자에게 그녀를 칭송할 수 있는 아량을 베풀기로 마음먹었다.

 

“친애하는 여러분. 가장무도회기는 하나 이 자리를 빌려 긴히 소개할 사람이 있소. 영원토록 내 옆자리를 채울 하나뿐인 배우자, 나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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