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이라도 좋아
다리를 달달달 떨면서 말하는 꼴이 죄 지은 개같았다. 하지만 눈은 꽤 반항적이다. 상호는 롯데리아 쟁반 위로 마주 쥔 희찬의 손 두 개를 쳐다봤다.
“내도 니 똑똑한 거 안다.”
아는데 왜 말을 안 듣지? 상호는 이 협상 테이블의 모든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앞에 앉은 마르고 마른 정희찬. 무슨, 계획을 세우자는데 범죄의 수준이고…… 왜 하필 나를 불러다가 말하는 거며……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정희찬이 만드는 달달달, 진동을 모르는 척 하며 감자튀김을 집어 먹었다. 그래서 뭐가 뭐라는 거냐.
“관두면 된다이가. 알면.”
“아 그런 건 안 돼….”
“그럼 다른 사람 찾아 봐, 내는 착하게 살고 싶다.”
“이것도 크게 보면 좋은 일이거든. 시야를 넓혀 봐라, 좀.”
“야.”
“와.”
“니 뭐…… 내랑 친해?”
“…….”
“간다. 곧 과외라.”
“그럼 내일 찾아갈게.”
상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묵직한 책가방을 챙겨 들었다.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있는 희찬을 내려다보며 “쫓아 오지 마라.” 경고한 뒤 롯데리아를 빠져나왔다. 짜증나는 애다. 시간 낭비. 햄버거와 감자튀김 때문에 속이 느끼했다.
거짓말이라도 좋아
그렇게 경고했으나 다음날에도 희찬은 상호의 반을 찾아왔다. 교실 뒷문 모서리에 착 달라붙어서 흘끗흘끗 쳐다보는 게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어서 읽던 책을 내려두고 일어났다. 쭈뼛대면서도 인사 하나는 또 꼬박했다.
“안녕.”
“오지 마라 했잖아….”
“생각해 봤나?”
“생각이고 나발이고 가. 니 교실 멀지 않나?”
“다음 쉬는 시간에 또 오께. 생각해 봐라.”
“……이제 수업시간인데. 수업 들을 끼다.”
“아무튼.”
아 길막 하지 마. 뒤에 서 있는 상호와 희찬을 향해 질타가 날아들었다. 상호는 슬쩍 옆으로 비켜 섰고 희찬은 째려 봤다.
“…올 거면 점심 시간에 와라.”
“헐, 응.”
“아니 여기 말고 우유창고.”
“어. 알았디.”
그제야 희찬이 떠났다. 상호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책을 집어들었다. 양자역학…… 아인슈타인의 발견…… 한편 아주 기본적인 논리인 아이작 뉴턴의…… 그리고 4원소 중 하나인 불……
불.
눈앞에 불꽃이 상상 되어 떠올랐다. 그래, 어제 정희찬의 논지는 결국 불이었다. 불을 내잔다. 정신이 나간 건가?
어제 희찬은 감자튀김으로 건물 모양을 만들더니 케찹을 쭉 짰다. 그리고 케찹이 불이라고 생각해 보랬다. 상호는 뭔 불이냐고 물었다. 불을 내자. 여길 태우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상호가 곧바로 일어나 떠나려고 하자 희찬이 손목을 붙잡고 매달렸다. 아니, 야 니도…… 미안. 아무튼 니도 여기…… 안 좋아하는 거는 맞잖아. 함부로 말해서 미안. 상호는 손목을 감은 희찬의 힘이 생각보다 세고, 위로 올려다보는 눈이 꽤나 진심이라 도망칠 타이밍을 놓친 거였다. 너도 여기 안 좋아하잖아. 그 말이 사실이기도 했다.
희찬이 태우자고 한 건 동네에서 꽤 유명한 사이비 종교의 건물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저 기피하고 말 곳이었다. 희찬이 거기를 태우자고 한 이유는 생각보다 더 단순했다.
니 거기 왜 태우려고 하는데?
어…… 내 좋다카는 아가 하나 있는데.
간다.
아니 들어 봐. 암튼 걔가 거기에 다닌다.
근데?
니네 부모님도 여기 다닌다이가.
…니 뭐 하는데?
미안타. 아무튼, 태워버리자고.
내가 잘못 들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니가 씨불이는 말들이 전혀 이어지지를 않거든.
거길 태우면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누가?
누구든……
자유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기상호. 7번 풀어 보라니까.”
선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호는 어, 네, 하고 일어나 교탁으로 나갔다. 딴 생각 하지 마라. 선생의 잔소리 뒤로 들리는 왜 저래, 하는 소리들. 상호는 분필을 들고 7번 문제를 쳐다봤다.
점심시간, 희찬과 우유창고 앞에서 만났다. 희찬은 대충 입은 교복의 단추를 잠그며 다가왔다.
“아까 무슨 수업이었냐?”
“물리.”
“맞나.”
“니 셔츠에 뭐 묻었다.”
“어? 아… 이따 빨아야겠네.”
“니가 아니라 세탁기가 빨겠지.”
상호는 굳이 이런 말을 했다. 사실을 짚고 싶었고 아는데 모른다고 하기가 싫었다. 상대가 마음에 안 들어서였나.
“내 손빨래 하는데?”
“뭐?”
“아니 아무튼. 생각 해봤나?”
상호가 틀렸다. 그제야 상호는 희찬의 차림새가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다리지 않은 셔츠. 길이가 맞지 않는 바지. 제대로 지워지지 않은 얼룩 같은 것이.
“생각 안 해 봤나?”
“…어. 안 했다.”
“정말로 할 생각 없나?”
“없어.”
“…그럼 내가 했던 말 비밀로 해줄 수 있냐.”
“니 내 공부 잘 하는 거 우째 알았는데?”
갑자기? 희찬이 코를 찡긋했다. 니 방송실 가서 상 자주 받는다이가.
알면서 모르는 척 할 수는 없었다. 정희찬은 마음에 안 드니까 더더욱. 차림새가 왜 이럴까. 학대당하나. 혼자 사나. 조손가정인가.
“니는 니한테 득 되는 일도 아인데 그런 일을 왜 하자카는데? 그것도 내랑.”
“그냥 느껴진다이가, 니가 얼마나… 이 동네를 벗어나고 싶어하는지? 그래 아득바득 공부하는데….”
“니 얘기나 해. 내 얘기 안 궁금하니까.”
“어… 내는 그런 계산이 좀 느려서 신경 안 쓴다. 득이 되든 말든… 좋으면 좋은 거고….”
말끝을 흐리는 희찬 앞에서 상호는 목덜미를 여러 번 긁었다. 얼룩진 희찬의 셔츠가 바람에 아주 초라하게 흔들렸다.
“……생각해 보께.”
“진짜?”
“안 들키는 건 어려우니까 생각만….”
“믿고 있는다? 생각만이라도 해도. 내는 진짜 머리가 안 굴러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데….”
“태우자는 생각은 니가 한 거 아냐?”
“하긴 했지. 없애기 제일 쉬운 방법 같으니까.”
예비 종이 울렸다. 교실이 먼 희찬이 먼저 빠르게 움직였다. 상호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보며 복도를 걸었다.
들키지 않고 불을 내는 방법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그걸 어떻게 도와달라는 거야. 하지만 도와주어야 할 것 같았다. 동기가 동정심일 것만 같아서 애써 모르는 척 했다.
상호는 도서관 구석 자리에 앉아 교과서와 온갖 과학 서적을 펼쳐놨다. 희찬도 같은 테이블의 먼 곳에 앉아서 도움이 될까도 모르겠는 학습 만화를 읽었다. 상호는 화학식들을 여러 가지 생각해 보며 정수리를 부여잡았다. 희찬은 보아하니 교과서 앞장을 뜯어온 것 같은 종이에 뭐라뭐라 끼적이고 있었다. 교실로 돌아갈 때는 뭐 좀 소득이 있었느냐 물었는데 희찬은 조금 생각해 보고 말해준다 했다. 딱히 똑똑해 보이는 애는 아닌데 뭘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지, 상호는 또 불쌍해서 말하지 않았다.
사이비 단체는 매주 두 번 집합했다. 상호의 과외는 딱 그 요일에 있었다. 상호가 요청했기 때문이다. 대학생인 과외 선생님은 상호에게 이 문제집 저 문제집에서 가져온 문제들을 풀도록 시간을 주고 자기는 핸드폰 게임을 했다. 상호가 문제를 풀면 채점을 해줬다.
“모르는 거 있나?”
“아… 아뇨.”
“찍은 거 있으면 말하고.”
“없었어요.”
“그래? 그럼 다음 거 풀자.”
과외 선생은 개꿀이라고 생각했겠지. 이만한 게 없다고. 게으른 선생이라도 상호는 옆에 있는 것이 나았다. 휑한 집에 혼자 있는 것보다는, 있으나마나 하더라도 어쨌든 과외 선생이라도 있는 게 나았다.
부모님은 집합된 요일에는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상호가 더 어렸을 때도 그랬다. 상호는 부모님께 가지 말라고 했고, 부모님은 그럼 너도 가자고 했다. 상호는 싫다고 했다. 놀러 가는 거야? 아니야. 그럼 뭐 하러 가는데? 기도하러 가지. 집에서 해. 그건 안 돼.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어린 상호는 차선책을 찾기로 했다. 다행히 상호는 제법 머리가 잘 굴러가는 아이였으므로 혼자 있지 않을 방법을 찾아냈다. 방문교사들을 계속 불러내는 거였다. 초등학생 때는 구몬을 했고, 중학생이 될 때는 학원에 다녀와서 심야 과외를 했다. 고등학생이 된 후론 야자를 하고 필요하지 않은 과목의 과외를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부모님은 전재산을 사이비에 갖다 바치지는 않았다. 아직은.
중학생 때, 과외 선생이 하루 빠지는 바람에 집에 혼자 남은 적이 있었다. 상호는 밤 열한 시까지 혼자 있다가, 텔레비전을 껐다. 집이 너무 조용했다.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다가 운동화를 신고 사이비 집회가 열리는 건물 앞을 서성였다. 집회는 새벽 한 시가 넘어서 끝났다. 건물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개중에는 상호만한 아이들도 있었다. 상호는 부모님이 나왔을 때 달려가 안기지 못했다. 부모님이 어쩐지 충만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었다. 배신감이 들었다. 그 안에 희찬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 애는 마지못해 부모를 따라 거기로 들어갔을 테다. 상호는 주먹을 쥐었다. 따라가든, 지금처럼 혼자 있든. 상호는 같은 크기의 틈을 가졌을 것이다.
부모님은 집회에 가는 날 저녁에는 역 앞에서 전단지나 간식 같은 것을 돌렸다. 상호가 혼자 문제집을 풀고 학습지를 풀고 있었을 때. 동네 애들은 그런 사실을 다 알았다. 이거 돌리는 사람들 중에 너희 엄마아빠있다며. 학원에서는 아이들이 상호를 향해 말했다. 그렇게 치면 옆 반 누구네 엄마아빠도 저기 다니는데. 누구네 할머니도 저기 열성 신도인데. 상호만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은, 상호가 공부를 잘해서였다. 상호가 상을 받으면 학부모회에 불려가는 상호의 부모님, 경시대회에 나가면 같이 가야 하는 상호의 부모님, 그리고 함께 가는 다른 아이들의 부모님. 너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상호는 공부를 관둘 수 없었다. 혼자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공부뿐이었다. 상호는 매일 부족함을 느꼈다. 게임은 마지막 스테이지가 있고, 운동은 시간 제한이 있다. 상호에게 제한이 없는 것이라곤 외로움과 공부뿐이었다.
희찬은 흐물대는 종이에 졸라맨을 그려 내밀었다. 도서관 구석 테이블에서였다. 상호가 눈썹을 올리며 ‘이게 뭔데?’하고 입으로 말했다. 희찬은 종이 귀퉁이에 못난 글씨로 적었다.
이러면 불이 난다데.
어디서? 상호가 다시 묻자 희찬은 옆에 둔 만화책을 쿡 집었다. <위기탈출 넘버원>. 상호는 제 앞에 놓인 화학책과 소방관련 책, 화재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에세이를 흘겨봤다.
열심히 적던 화학식을 내려두고 구깃한 종이의 내용을 읽었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다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상호는 본인이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광신도의 아들이 집회 장소로 가는 게 그렇게 이상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준비물 중 하나가 지금의 상호가 구하기는 어려운 등유였다. 혹은 연탄이 필요했다. ……이거 진짜 불을 낼 것 같잖아. 갑자기 불안감이 훅 끼쳤다.
상호는 희찬을 도서관에서 데리고 나와 우유창고로 끌고 갔다. 끌려 나오는 몸이 가벼웠다.
“진짜 한다고?”
“하지 마까?”
“…등유를 어디서 구하는데. 아님 연탄을.”
“우리 집에 있는데.”
“뭐?”
“있다고, 내한테.”
희찬이 말을 마치고 입을 앙 다물었다. 상호는 희찬의 손목을 풀어줬다. 희찬이 얌전히 손목을 돌렸다.
“근데 와 화를 내는데?”
“……화 안 냈다. 돌아가자.”
“표정이 안 좋은데.”
“가자. 수업 끝나면 니네 집 가서 등유 그거 있나 좀 보고.”
“있다니까? 많다. ……그럼 니 야자 째게?”
“그딴 게 대체 집에 왜 많은 건데…….”
“야자 쨀 거냐고요오.”
상호도 희찬도 대답하지 않고 우유창고 앞을 벗어났다. 야자 째는 거 맞지? 다시 한번 묻는 희찬의 목소리는 조금 들뜬 것도 같았다. 왜 들떴지, 걘.
상호는 수업시간에 희찬이 보여줬던 내용을 되새겼다. 그리고 다리를 떨었다. 옆자리에 앉은 아이가 다리 존나 떨어 미친, 하고 말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희찬의 말대로 상호는 조금 화가 났을지도 몰랐다. 흥분보다는 분노 쪽에 확실히 가까웠다. <위기탈출 넘버원>. 그리고 상호의 앞에 놓였던 <화학분자>, <기초화학>, <산소의 두 얼굴>… 상호는 손바닥에 얼굴을 두세 번 문댔다. 이렇게 하면 불이 난대요. 희찬 나름의 고뇌가 담긴 그 방법에 상호는 패배한 기분이었다.
거길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없애고 싶었다, 본인의 외로움을 더해서. 희찬이 ‘불을 내자’고 말했던 순간 이후로 그 생각이 상호의 무의식에 콱 박혀 들었던 거다. 상호는 계속 혼자였으니까, 이런 일도 혼자가 나았다.
질투다. 모순이다. 정희찬이 방법을 찾아냈다는 것에 대한 질투. 혼자인 게 싫었지만 결국 혼자가 편해져 버린 모순. 상호의 다리 떨림은 뒤에서 날아든 안내문 뭉치에 멈췄다.
상호는 처음으로 애들과 싸웠다. 조곤조곤 다 받아쳤다. 사과할 것도 사과했다. 다리 떨어서 미안하다고. 그런데 그것말고도 뭐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남자애는 상호에게 쌍욕을 했고 부모님 욕을 했다. 상호는 다 들었다. 손이 날아들고 발이 날아들어서 피하거나, 막거나, 맞았다. 쓰러지지 않아서 지지도 않았다. 괜히 얼굴만 시뻘개진 애가 상호의 발로 침을 뱉었다. 재수 없는 새끼.
상호는……
그게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특히 더.
기분이 계속 불편한 채로, 교문에서 희찬을 기다렸다. 오늘이 딱 집회 날이어서 과외 선생에게 미리 말해두었기에 문제될 건 없었다. 아니, 있겠지만 없을 거라 생각했다. 운동장을 희찬이 건너오고 있는 게 보였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희찬을 쳐다봤다. 누군가 희찬에게 말을 걸었고 희찬은 아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오래 기다렸나? 오늘 청소가 늦게 끝나가……. 아니 니 얼굴색이 와 이라노.”
“쟤냐?”
“어? …아. 엉.”
“니는 쟤 안 좋아하제?”
“……티났나?”
“어, 존나. 가자.”
“그짝 아니고 여기.”
희찬의 집은 아파트 단지, 빌라 단지와 떨어져 있었다. 언덕 중간에 있는 낡고 작은 주택이었다. 초록색 대문이 녹슬어서 문 아래로 녹물 떨어진 자국이 그대로였다. 상호가 실례합니다, 하고 발을 들이자 희찬은 지금 아무도 없어요, 하고 대답했다. 희찬은 가방을 평상에 대충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가 밥이라도 먹겠느냐며 물었으나 상호는 작은 마당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봤다. 관리가 안 된 흙밭 위에 깨진 벽돌 같은 게 놓여 있었다. 빨랫줄에 수건 세 개가 널렸고, 현관 문턱에는 희찬의 것으로 보이는 슬리퍼와 운동화가 놓여 있었다.
“니 여서 혼자 사나?”
“응. 밥 안 묵나?”
“필요 없다.”
“들어 와, 내는 밥 먹을 거라.”
희찬이 다시 쏙 들어갔다.
반찬은 편의점 김치, 즉석 밥, 도시락 김. 작은 모니터로 희찬이 축구를 틀었다. 상호는 희찬과 축구를 보며 희찬의 쩝쩝 대는 소리를 들었다.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말걸. 더 철저하게 모른 척 할걸. 불 내기 전에 태평하게 밥이나 먹고 있는 얘를 내가 왜 동정했지.
“언제부터 혼자 살았는데?”
“중학생 때부터. 가끔 온다.”
“누가?”
“아빠나 엄마가. 곧 또 오겠지.”
쩝쩝쩝쩝. 상호는 혼자 있을 때 공부를 했고 희찬은 혼자 있을 때 쩝쩝대며 축구를 봤다. 그게 상호는 미안했다. 미안해 해서 더 미안해졌고,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는 걸로 회개했다.
희찬이 말한 등유는 보일러용이었다. 빈 페트병에 등유를 옮겨 담으며 희찬이 말했다. 혼자 살아가 기름이 맨날 남아 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혼자 있으면 시간이 조각나서 남았어.
둘은 건물 앞으로 걸어갔다. 급하게 굴지 않았다. 건물 안에서 마이크 소리가 흘러 나왔다. 상호는 속으로 비가 오길 빌었으나 하늘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희찬은 등유를 건네주며 상호 너만 들어가도 괜찮느냐 몇 번 물었지만 상호는 괜찮으니까 기다리라고, 도망치지 말라고 당부했다.
상호는 등유를 들고 건물로 들어가 부모님을 찾았다. 부모님은 맨 앞 줄에 있었기에 다가갈 수 없었다. 이따 불이 날 테니까 지금 빨리 나가라고 말해야 하는데. 와중에 아까 희찬과 이야기를 나누던 여자애가 어두운 표정으로 복도를 지나가길래 “도망쳐”라고 속삭여줬다. 그 여자애는 뭐냐며 파드득 떨어졌다.
사람들이 많이 움직이는 타이밍에 맞춰, 씨씨티비 눈에 띄지 않도록 움직였다. 희찬이 보여줬던 대로 화장실 바닥에 기름을 뿌렸고, 남은 방울은 환풍기로 이어지는 전선에 털어냈다. 이러면 화장실 호스가 터져도 누전이 되겠지. 근데 그러면 부모님은 죽을까? 그러면 난 영원히 혼자가 되나?
불이 날까? 정말?
사실 불 같은 거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상호는 희찬이 적은 종이의 마지막 단계까지 해놓고 빠르게 건물을 빠져나갔다. 심장이 머리 전체로 뛰는 것 같았다. 쓰여 있던 시간은 5분 뒤였다.
기다리고 있던 희찬에게 가서 어깨를 잡고 허리 숙여 숨을 몰아 쉬었다.
“야, 야 기상호.”
“다 했다.”
“괘않나?”
“모르, 모르겠는데…….”
“크게 숨 쉬어라.”
“걔한테, 니 좋아하는, 애한테는 도망, 도망치라고 했다.”
“……만났나?”
“야, 근데 걔, 니 좋아한다는 거… 거짓말, 아냐?”
그렇게 말하자 희찬이 상호의 팔을 잡았다. 상호가 고개를 들자 입술을 말아 문 희찬이 보였다.
“…니가 왜 좋다는데?”
“잘생겼다카든데.”
“그거 말곤?”
“글쎄….”
“그러니까, 거짓말 아냐?”
“아닐 것 같은데… 거짓말은.”
야 근데 좀 일어나 봐. 희찬이 상호의 어깨를 받치며 부축하려 들었다. 상호는 그런 희찬을 가볍게 밀쳐내고 괜찮다고 말했다. 사실 괜찮은 것은 없었다. 상호가 심호흡했다. 늦지 않았다. 119를 부르자. 그때, 희찬이 말했다.
“거짓말이면 안 돼?”
“뭐가?”
“내 좋다는 말이 거짓말이면 안 되냐고.”
“…거짓말이 뭐든 좋은 건 아니잖아.”
“그래도 믿고 싶은데 우짜는데.”
“니는 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내는 그냥…… 아무나 내를 좀 좋아해주면 좋겠는데.”
희찬이 그렇게 말했다. 상호는 교복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잠금을 해제했다. 다이얼을 켜고 119 숫자를 눌렀다. 그 순간 건물에서 펑, 터지는 소리가 났다. 상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 화르륵 타오르는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마주 선 희찬은 여전히 눈을 꼭 감은 채로 귀를 감싸 쥐고 말했다.
“누구든 내를 필요로 해줬으면 좋겠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하지만 정희찬, 세상은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로 가득 차 있어. 거짓 말고 사실을 봐. 거짓된 신을 쫓아 아들이 외롭다는 사실을 몰랐던 나의 부모님처럼. 결국 나는 정말 혼자가 된 것처럼. 사실 네가 필요했던 건…… 같이 축구 봐 줄 나였던 것처럼.
상호는 희찬의 꼭 감은 두 눈을 보며 휴대폰을 꽉 쥐었다. 열기가 드러난 목덜미와 귀를 데웠다. 그것만이 사실이었다.
https://youtu.be/pR_30o2yMVI?si=LfUTe8b-p9DSoJW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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