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애플
고교에유에 유부속성을 곁들인
2022.04.08
"입에 안 맞아?"
맞은 편에서 스테이크 나이프를 놀리는 메리가 물었다. 제 접시 위로 놓인 것은 겉면을 빠르게 불에 스치기만 했을 뿐에 가까운 레어 스테이크. 그리고 곁들여진 파인애플이다.
"입 안이 자꾸 헐어서. 조금 불편하네."
"익혀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파인애플을 한 쪽으로 밀어두고선 그것이 닿지 않은 부분을 조심스레 썰어 입에 담았다. 자극적이지 않은 재료 본연의 맛. 씹을 때마다 입 안을 가득 채우는 육고기의 피 맛이 이따금씩 씹히는 향긋한 로즈마리와 통후추와 조화롭게 섞인다. 그리곤 혀가 아릴 정도로 단 파인애플의 맛이 그것을 전부 지워버린다. 함께 조리한 탓인지 파인애플의 단맛과 산은 고기 전체에 배어있었고, 결국 그 산에 쉬이 입이 헐어버린 제임스는 몇 입 더 하다 식기를 내려두었다. 허기를 채우려는 듯 고기와 어울리는 레드 와인으로 입술을 축였고, 쉬이 취하지 않았다.
자분자분한 말소리가 테이블을 적적하지 않게 채웠다. 식사에 참여하지 않는다하여 메리는 자신의 끼니를 거르지 않았고, 제임스는 그것에 속상해하지 않았다. 입에 맞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어 다행이다, 다른 메뉴를 시킨다면 더욱 좋겠다. 다음엔 무얼 주문해볼까, 그저 그리 생각할 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까만 세단에 몸을 실으며 말한다.
"당신 입에 맞는 거 같던데, 새로 찾은 다이닝치곤 괜찮았나봐."
"응, 다음엔 너도 다른 거 시켜서 먹어봐. 난 마음에 들어."
제임스는 고갤 끄덕이고, 메리의 어깨에 머리를 가볍게 기댔다. 꼿꼿히 앉으라면 그럴 수도 있었지만 마음 편히 기댈 수 있는 곳이 있음에도 그걸 마다하는 이가 몇이나 되리. 제임스는 제 버팀목을 외면하지 않았다. 운전할 필요 없는 자동차는 당연하단 듯이 밤을 달려 본가로 향했고, 둘만을 위한 집은 불이 꺼지는 일 없이 두 사람을 기다렸다. 한 집, 한 침대에 눈을 감지만 서로를 곁에 둘 뿐 손을 대지 않는다. 그것에 아쉬워하지도 않는다.
"그럼 저녁에 봐."
"오늘도 수고?"
잠옷을 갈아입지 않은 메리가 한 손에 머그잔을 들고 인사한다. '다녀올게' 한 마디 하며 꼭 포옹을 하면 안는 둥 마는 둥 어깨에 머리를 한 번 기대고 만다. 1층에서 기사의 호출이 오면 발걸음이 바빠진다. 제임스는 근교의 사립학교로 출근한다. 복장 규정은 없으나 선생이란 자리에 걸맞게 계절에 따라 그 두께가 달라지는 정장을 교복대신 입으며 출근했다. 출근길은 언제나 하늘이 새파랗다. 괜스레 그 푸른 물이 든 하늘과 나무, 길과 건물을 바라보며 세단의 뒷자리로 느릿하게 기댄다.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꼭 풍경을 사각으로 잘라 깜빡임마다 모양을 바꾸는 유화같다. 우습기도하지, 자연의 아름다움을 따라 만든 창작물을 그 원본을 칭찬하는 데에 쓰는 꼴이라니. 모순적이지 않나. 자연보단 인공이 아름답다, 뭐 그런? 실없이 맴도는 생각을 머릿속으로만 돌리며 권태로이 움직이는 작품을 눈에 담는다. 변하지 않는 풍경 끝엔 꼭 붉은 벽돌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미소지으며 말한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식사라도 하고 들어가세요."
새삼스레 현찰을 건네진 않는다. 비서쯤 되는 자리면 품위유지용으로 개인 카드를 하나 더 제공하니까. 그저 반듯하게 웃으며 뒤통수만 보이는 운전석에 인사하곤 차에서 내린다. 퉁, 하는 문소리와 함께 고요한 엔진 소리를 내며 까만 자동차가 교정을 빠져나간다. 한 손엔 서류가방을 들고 계단을 오른다. 교무실에 들러 도서관의 열쇠를 가지고 책상이 양 옆으로 즐비한 복도를 걷는다. 아침의 교무실은 꼭 커피향이 난다.
대리석 바닥 위를 걷는 발소리는 어수선한 말소리보다 또렷하다. 누군가는 넓은 구둣발, 누군가는 좁고 예리한 하이힐, 단정한 메리제인 슈즈. 그 소리를 들으며 바닥을 보고 걸었다. 그렇게 바닥을 보며 걷다보면 한 구두와 마주친다. 제비꽃을 우린 찻물에 우유를 한 스푼 넣은 색의 하이힐. 시선을 올려 눈을 마주하면 새카맣다.
"실례했습니다."
매캐한 담배냄새. 그녀의 주변으론 안개라도 두른 듯 떠나지 않는 타바코의 향이 남아있었다. 아이들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는 향이다. 향수나 탈취제 정도 구비해두면 좋을텐데. 혹 방금 피우고 돌아온 참인데 마주친 것일까? 아니, 그렇다기엔 잔향이 너무 옅지. 담배냄새를 완전히 가리는 것보단 본래의 향이었던 것처럼 어우러지게 하는 쪽이….
"볼일 있어요?"
실례한다는 말과 달리 우뚝 서선 앞길을 가로막는 제임스를 향해 미스티가 묻는다. 제임스는 그제서야 한 발 비켜 길을 내어주고, 그대로 길을 걷는 미스티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타박거리는 발소리가 마치 연못에 물이 떨어지는 그것과 닮아있다. 코끝에 이끼낀 호수의 향이 스쳐간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오로지 홀로 존재하는 향.
'수련 정도면 적당하겠네.'
도서관은 교사와 교무실이 자리한 본관에서 5분 정도 걸어야 닿는 거리의 별관으로 자리하고 있다. 많은 학교 중 이 곳을 고른 이유 중 하나였다. 본관과 분리되어있고, 도서관 창문으론 가까이 자리한 산과 나무가 보이고, 그 햇살이 열람실과 카운터에는 닿지만 책장에는 닿지 않는 섬세한 설계. 수업 시간에는 교사들도 이 곳으로 선뜻 발걸음하는 일이 없어 점심 시간을 제외하고는 고즈넉하다못해 적적했다. 짐을 풀고, 창가를 젖은 천으로 쓸며 창문을 연다. 밤중 서가에서 뿜어져나온 종이냄새가 빠져나가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사람을 맞으려면 필요한 작업이었다. 잉크냄새를 좋아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
초봄에 어울리도록 산들거리는 바람이 뺨을 어루만지고, 창틀에 채 이파리를 맺지 못한 나뭇가지가 따닥이는 소리가 울린다. 창틀을 훔치고, 옅게 노란 빛을 내는 단면을 보면 그제서야 꽃이 피고 꽃가루가 흩날릴 계절이란 것을 실감하게 된다. 도서관을 나선다. 남자 화장실 끄트머리에 자리한 세면대에서 걸레를 빨고, 걸렛물에 젖은 손을 다시 한 번 닦는 것으로 아침 업무를 마친다. 사서교사의 일이란 그리 빠듯한 것도 없고, 예측하지 못할 것도 없고, 격정적일 것도 없다.
짤랑, 하는 문소리와 함께 도서관으로 들어선다. 아침부터 도서관을 찾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다. 열람실이 자리하고 있으나 개인 면학실, 그러니까 개인 공부를 위한 독서실은 제 1 별관이 아닌 2관이기도 하고, 고등학교의 도서관이란 으레 상징적인 장소에 불과했으니까. 혹 이 아침부터 도서관을 방문하는 이가 있다한들, 대부분 반납기한을 잊거나 착각해 하루 이틀 정도 지나 버려 연체가 될까 걱정스런 마음에 도서관을 찾은 학생 정도다. 그러니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서선, 멍청히 어울리지 않는 향수를 몸에 두른 그를 바라본 일이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란 거다.
"대출이요?"
문을 열다 말고 멀뚱히 서있는 제임스에게 다소 신경질적인 투로 말한다. 미스티 스콜세시. 다시 그다.
"죄송합니다, 아침 청소를 하고 잠시 자릴 비웠거든요."
저를 향하는 시선이 멋쩍어 한 손에 쥔 걸레를 몸 뒤로 슬쩍 숨겼다. 근처 북트레이에 얹고서는 카운터로 잰걸음으로 걸어간다. 살짝 성능이 뒤떨어지는 본체의 전원을 켜고선 테이블을 손으로 두드렸다. 오늘따라 부팅이 느리다.
"책 빌리려 오셨습니까?"
"네, 잡지나 읽을까하고요."
미스티가 한 손에 든 패션 잡지를 카운터 위로 얹었다. 열린 창문 틈으로 인 바람이 낱장을 팔랑거리며 넘겼고, 그 속엔 매니쉬한 차림의 여성이 도도한 포즈로 제임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서서 그 종이를 내려다보는 것은 자신임에도 그 당당함에 하대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검은 수트에 허리엔 가로로 봉재가 뜯겨있는 과감한 디자인. 그것을 보며 말한다.
"간행지는 대출이 안 됩니다."
"왜요?"
"표지에 바코드가 없기도 하고, 간행물은 관 내에서 읽는 게 원칙이라 말입니다."
내용을 읽기도 전에 넘어가는 잡지를 한 손으로 눌러 움직임을 멈췄다. 이미 넘어간 페이지를 되돌려 표지를 미스티가 읽을 수 있도록 끄트머리를 꾹 누른다. 표지엔 까만 머리칼의 여성이 같은 색으로 입술을 칠하고, 모자로 눈을 가린 채 서있었다. 8090 프랑스의 런웨이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차림이었지만 마찬가지로 모던하다.
"그럼 읽고 가는 수밖에 없네요."
미스티는 한 손을 뻗어 제임스가 누르고 있는 잡지의 끄트머리를 집었다. 시선이 잠시간 맞고, 제임스가 그것을 놓자 이내 떨어진다. 또각이는 구둣발소리를 따라 시선을 두면 한참이고 조용하던 컴퓨터에서 알림음이 뜬다. 간단하게 프로그램에 로그인하고, 다시 걸레를 들어 창틀에 반듯하게 걸쳐둔다. 이 시간대면 원래 청소를 마치고 고즈넉한 정적을 즐기며 원두커피 한 잔 내렸을 시간인지라 유독 원두향이 절실해진다.
"스콜세시 선생님."
"… …?"
"커피 한 잔 하시겠습니까?"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