젬스티

자유로운 망령

유령은 그 누구의 입에도 오르지 않음으로서 자유로워진다.

2022.04.12.

근황 :: 자유로운 망령

제임스는 신분이 무의미한 망령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낮의 삶을 그리 탐하지 않는 이유는 오히려 유령이 되었다는 점에 있다. 본인의 정체성은 흐릿해졌다. 버틀러라는 이름은 그를 따라다니지 않으며, 그를 괴롭게 했던 아버지의 유언도 ‘작품이 되었기 때문’이라며 회피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심야에만 진행하는 하프시코드 연주회로 그 자아실현이랄 것을 이뤘달까. 제임스는 이따금씩 연주회를 열어 무대에 장막(帳幕)을 치고, 신분을 숨긴 채 연주를 한다. 어떤 시선도 느끼지 않고, 어떤 이름도 없이 원했던 연주를 한다. 오히려 죽음으로서 육신의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된 망령처럼, 그는 현재의 삶에 나름 만족하고 있다. 어쩌면 더욱.


버틀러는 영국의 정신을 이어받아 언제나 가톨릭을 섬겼다. 부자는 베풀어야하고, 거지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거나, 선한 삶을 살아 아버지 하나님의 눈에 미쁘게 들어 천국으로 올리워진다고. 어린 시절 제임스의 말랑한 머릿속에 단단히, 뿌리 깊게 자리잡은 그것이었다. '선하게 살아야한다', '남을 사랑해야한다'. 자신은 낮출수록 높어지는 것이며.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남들의 발 밑으로 밟히는 자. 그러니 누군가 자신을 낮추려한다면 상냥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제일로 알았다.

그러나 선은 간단하지 않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에게, 벗어날 수 없는 족쇄를 찬 인간에게 선이란 최선을 다해 제자리에 머물되 너무 앞서 나가도 안 되고, 너무 뒤쳐지는 일도 있어서는 안되는 중용이 필요이기 때문이다. 유능하되 과하게 잘나선 안 되고, 겸손하되 가지지도 못한 아픔을 제 것인 양 여겨선 안 된다. 그런 가름침 속에서 양육된 제임스에게 '내세'는 본인의 양심에 따라 진실로 '선'하게 살았는지 심판받을 하나의 공간이었다.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선 사소한 절차가 하나 필요했고, 제임스는 그것을 또래 아이들보다 덜 두려워하며 자랐다. 호기심으로 개구리를 죽인 적은 없지만 죽은 개구리도 양심의 심판을 받을까 궁금해했다. 물론 동물은 인간의 도구임으로 내세의 자리따위 없다는 아버지의 말을 들은 뒤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 궁금해했다. 정말로 나와같이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이들을 위한 자리가 없을까? 그런 곳은 천국이라 부르기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이런 저런 증명될 수 없는 가설에도 불구하고 제임스가 내세를 향한 호기심에서 고개를 돌리게 된 계기는 마지막 물음의 답을 들은 순간이었다.

'그럼 신을 믿지 않는 자는 어떻게 되나요?'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지.'

'어떤 안식도 없이요?'

'기회는 살아있는 동안에 한해 주어지는 거란다, 제임스.'

그때의 거북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뒤론 목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학업을 쉴 적이면 필사하곤 했던 빌립보서도 다시 펼쳐보지 않게 되었다. 예베 시간엔 속으로 한 마디 한 마디 설교에 반박하고, 찬송을 부르는 일이 더이상 즐겁지 않았으며, 주기도문을 잊게 되었다. 정확히는, 따라 외는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입술 근육에 달라붙은 그것이 쉬이 나왔지만, 더이상 제임스의 곁에 주기도문을 외는 사람은 남지 않았으므로, 사장된 기억이 된 것이다. 분명 죽었지만 누군가 곁에서 그 생사를 확인시켜주지 않는다면 죽음조차 불명확한 추측이 되는 기억. 직면하고 싶지만 두려워 섣불리 외울 수 없는 것. 그럼에도 온전히 심어져 자란 토양에서 분갈이가 되었는지 알 수 없는 것.

신을 믿지 않는 자는 지옥에 간다. 그러나 인간을 믿는 자는 현재에 산다. 제임스는 직면할 수 없는 과거의 두려움과 꺼림칙한 것들을 잠시 갈색의 옷장 한구석에 잠궈 숨겨두고, 현재를 살았다. 앞도 뒤도 바라보면 옴짝달싹할 수 없어질 것만 같아 꼭 오늘만을 살았다.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늘 사라진다해도 미련따위 가지지 않는 삶을 살리라 다짐했다. 다음날 슬프게도 꿈에서 눈을 뜨지 못하게 된다한들 아쉬워하지 말자. 다만 내일 전하지 못할 말을 오늘 하며 살자.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도움이 필요해보이시는군요.'

'나랑 결혼해.'

'잊지마세요, 선한 사람은 그 고민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입니다.'

'… ….'

물론 다짐한대로 사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모든' 말을 전하진 못했다. 하고싶은 일만 하며 살 수는 없는 거니 당연하다.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이 된다면 더 많은 것을 행할 수 있으리라. 사람은 오로지 사람으로 말미암아 치유될 수 있으며, 그 관계가 세상의 모든 것이다. 그러니 단 하나도 잃고 싶지 않다. 손 안에 쥐어 영원히 빛나는 나만의 별로 가둬두고 싶다. 

… ….

그럼에도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라 앉히는 것까지가 성숙의 단계이니 열심히 감춘다. 미성숙한 어떤 부분을 들키지 않도록. 저도 모르는 새에 찍힌 사진에 담긴 낯선 모습따위 하나 남기지 않으리라. 어느 순간에 관측해도 동일한 모습. 변함과 이면이 없는 사람이 되리라. 예상치 못한 속내와 일탈, 믿을 수 없는 어떤 가면도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 살 것이다. 알면 알수록 허울뿐이었던 그와 달리.

그러니 신을 믿지 않는다. 내세도 믿지 않는다. 살면서 저지른 선과 악의 업은 자연스레 돌아오지 않는다. 신의 섭리, 운명이랄 것은 존재하지 않기에 그렇다. 그러니 제게 벌을 줘야할 일이 있다면 스스로 준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돕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지 않는다. 인간만이 인간을 돕는다.

절반 가량 태운 담배를 손가락 안에서 굴리다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단정한 구둣발로 그것을 짓이기며 불씨를 꺼트리자 왼손에 채워진 시계가 눈에 들어온다. 은빛의 시침이 공연 시간을 가리킨다. 초라하게 구겨진 담배꽁초를 내려다보며 침묵하다, 그대로 뒤를 돌아걷는다.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래서 버틀러가는 대가 끊긴 거야?"

"글쎄, 메리한테 재단을 넘겼다는 거 같던데.."

"재단도 넘기고선 뭘 하려고?"

"낸들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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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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