젬스티

유산


버틀러 가의 로비에는 커다란 나무 조각상이 있다. 가주의 모양을 따라 만든 조각상. 1800년. '그 날' 여왕에게 받은 것이라 했던가. 그 조각상의 모습은 마치 저주처럼 모든 가주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200년 동안 대물림 되어온 형상. 항상 반으로 넘긴 머리, 섬세하게 빛나는 안경, 단정한 정장. 흐트러짐 하나 없는 완고한 모습. 그것은 버틀러라는 이름으로 이어져온 가주가 갖춰야할 모습의 이상향이자 본질 그 자체였다. 아버지의 모습이자 조부, 그 위로 이어진 많은 남자들의 모습. 그리고 그 앞으로 서있는 제임스 S. 버틀러의 모습. 그들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제임스는 그 모습이 되어야할 의무가 있었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버틀러라는 이름을 받은 순간부터 정해진 '약속'이었다.


하프시코드는 아버지에게 배웠다. 음악이란 것은, '클래식'이란 것의 근본은 본디 번거롭고 절차가 많아 하나의 종교와도 같은 것이라며. 음 하나 내는 것도, 곡을 원하는대로 표현하는 것도, 조율 하는 것도 원하는대로 되지 않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는 것까지가 예술이라며. 어린 제임스는 여느 아이가 그렇듯 아버지가 만든 세계관 속에서 자유로웠다. 그의 사소한 취향-가령 미식이라던지, 토르소, 비극-은 그의 부모가 만들어둔 토양을 기반 삼아 성장했고, 그는 가히 이름에 걸맞는 청소년으로 자랐다. 명석한 두뇌, 다정다감한 성격, 부드러운 목소리. 그림으로 그린 듯한 모범생이었던 제임스는 아버지가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건 배우고 싶어하는 순종적인 아들이었다.

"제임스. 오늘은 재단 아이들이 연주하는 자리가 있으니 함께하면 좋겠구나."

"연주자로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가 원한다면 그리 해도 되겠지. 피아노만 치던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되겠어."

'나보단 아버지의 연주가 더 도움이 될텐데.'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 시절엔 아이들은 연주를 시키고, 어른들은 듣기만하는 비대칭을 이상하다 여길 수도 없었으니. 그저 아버지께서 자신의 연주실력을 인정해주었다, 그리 생각하기만했다. 단언컨데, 제 싱거운 끄덕임 하나로 몇 주 간 연습한 아이의 마지막 자리를 빼앗을 것이란 계산을 하지 않은 채였다. '아버지가 원하신다면'. 어려운 것도 아니니 못할 것도 없다. 그리 생각했다.

하프시코드 앞으로 앉고, 가장 좋아하는 바흐의 골든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며 손을 풀었다. 위 아래로 나뉜 건반. 특유의 생생한 음을 뜯는 가벼운 타건. 이따금씩 느껴지는 현의 미약한 떨림을 충분하다 여겼다. 아무리 세게 타건을 눌러도 음폭은 정해져 있었고, 아무리 섬세히 손을 놀려도 음의 크기는 변하지 않았다. 그 시절 제임스는 하프시코드를 단단히 기댈 버팀목이라 생각했다. 실수를 해도 드러나지 않고, 그것을 알아차릴만한 사람은 근처에 없었으니. 작은 실수, 작은 부주의로 나무라는 이 하나 없이 플렉트럼이 가둔 온실 안에서 잠잠히 성장했다.

"하프시코드만 연주하는 이유가 있어?"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 이따금 성악. 다양한 악기와 장르를 연주하는 아이들이 모인 대기실을 아버지 몰래 구경 나왔을 때,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아이가 물었다. 그 때 무어라 답했더라…. 아무래도,

"내 아버지를 닮은 악기라 제일 정이 가."

그리 대답했던 것 같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비유야. 내 아버지는 하프시코드의 음색처럼 기복이 없으신 분이거든. 한결같고, 쾌활하시지만 고즈넉한 분이시지."

아이는 오묘한 표정-지금 돌이켜 생각한다면 입이 바깥쪽으로 돌아갔던 것 같다-으로 '그래?' 답했고, 우리의 대화는 그 즈음에서 끝났다. 하프시코드의 조율이 끝났으니 연주를 해도 좋다며, 대기실로 어찌 알고 찾아온 아버지의 목소리 탓에. 제임스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대기실을 나섰고, 어쩐지 오늘은 좋은 연주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자분자분하게 말했다. 그때 문이 닫힐 때 들린 훌쩍거림을 아버지께 물었다면 어땠을까, 미련을 가지는 것은 영 고쳐지지 않는다.

"아드님 연주는 갈수록 화려해지십니다."

"누구 아들인데요, 그럼."

변주곡이란 이름에 맞게, 골든베르크 변주곡의 총 길이는 한 시간을 훌쩍 넘는다. 아무리 예술을 즐기는 제임스라 할지라도 완주하기엔 체력이 부족한 탓에 본인이 좋아하는 악곡을 열 곡 내외로 추려 연주했다. 악장에 맞춰 윗단을 연결했다 분리하고, 상체를 멜로디에 맞춰 흔들어가며 연주하면 화려한 음색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그리곤 이어지는 당연한 박수 갈채. 하프시코드는 제임스이자 버틀러였고, 그의 아버지였다. 단 한 번도 멀어질 것이라 생각치 않은, 그의 토양.

연주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서 한 아이를 만났다. 교복도 입지 않았고, 점심시간 도중에 교사 내를 어찌 들어온 것인지 제 이름을 불러세웠다. 제임스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고작,

"그런 줄 몰랐어, 미안해."

…가 전부였다. 아이는 당연히 분노했다. 동시에 제임스는 당황스러웠다. 제 미안하다 한 마디에 고갤 끄덕이지 않은 사람은 그리 흔치 않거나, 흐릿한 기억에 없었던 것 같았기에. 아이는 제 사정을 이야기 했다. 오랜시간 연주회를 준비했으나 제임스의 변덕으로 인해 그 자리를 빼앗겼다고. 본인의 자리에 제임스가 침범했다고. '너의 자리'가 아니었다고.

"그 연주회에서 다른 사람 눈에 들었다면 내가 하프시코드를 그만두지 않았어도 되었을 거야."

"왜 그만둬, 좋아하는 거 아냐? 오래 준비했다면서."

아이는 태평하니 이유를 묻는 제임스의 질문에 눈시울을 붉혔고, 제임스의 인생의 궤적을 크게 바꿀 한 마디를 외쳤다.

"버틀러는 장학생을 연주회에 한 번 세우는 게 목적인 재단이니까! 네가 연주한 탓에 난 그 기회를 잃었다고!"

그 외침 뒤로 훌쩍이는 아이를 달래려 제임스는 팔을 벌렸다. 유순한 인상으로 한 발 다가갔지만, 아이는 그대로 등을 돌려 교사를 뛰쳐나갔다. 저렇게 달리다 넘어지면 다칠텐데. 누구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변명도 못할테고. 바래다 주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제임스는 오후 수업을 위해 교실로 돌아갔다. 수업 중엔 집중할 수 있었지만, 쉬는 시간엔 영 그 아이의 눈물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교 후엔 곧바로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 저 대신 원래 연주를 하려던 아이, 기억하시나요?"

"그런 걸 왜 묻니?"

사람의 악의란 것을 직면하지 못하고 자란 제임스는 순진하게도 제 아버지에게 모든 일을 고했다. 원래 연주를 하려했던 아이가 자리에 서지 못해 많이 속상해하더라고. 그 아이를 위한 연주 자리를 만들어 보답해주면 제 마음이 흡족하겠노라고. 그리고 앞으로는 다른 아이의 자리를 밀어내며까진 연주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흡족한 눈으로 말했다.

"사려깊구나."

"그리고 아버지."

"그래."

"역사 시간에 아일랜드의 근대사를 배웠는데요…."

그 뒤로 하프시코드를 닫았다. 이미 성장해버린 눈. 귀. 머리.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시선으로 그림을 바라보고, 악곡을 듣고, 책을 읽는다. 벗어날 수 없는 심미안. 온전히 제것이라 믿었던 판단력, 지식, 모든 능력은 아버지의 것이었으며 동시의 버틀러의 것이었다. 다정했던 나의 아버지, 사랑한 친지들, 대대로 이어져온 이 집마저도 얼굴 가죽을 한꺼풀 벗겨내면 검은 까마귀였다. 버틀러의 인장 한가운데 은빛으로 자리한 까마귀. 마찬가지로 자신마저도 벗어날 수 없는 까마귀의 자손이었다.

하프시코드를 닫고, 음악과 어떻게든 가장 먼 학문을 가까이 하며 살겠노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길거리에서 들리는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 노랫소리는 제임스를 괴롭게 했다.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 사랑했던 것들을 다시 누리고 싶다는 생각. 한 번도 이별할 것이라 생각해본 적 없었던 것과의 격리. 세상 어느 곳에도 그 끔찍하니 사랑스러운 아버지의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생각했다. 까마귀 둥지에서 벗어나려 트리니티 칼리지로 향했다. '직업만은 부끄럽지 않은 것을 가져라, 그리하면 뭘 하든 상관치 않겠다'던 아버지의 마지막 말은 집사의 전화로 영영 마지막 말이 되었다.

"아버님의 건강이 심상치 않으니 한 주 정도는 여유를 내시고 돌아오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아일랜드 동부로 향하는 기찻길 위에서, 몇 번이고 아버지가 제 얼굴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길, 또 한편으론 마지막 말로나마 '후회한다' 한 마디 듣기를 바랐다. 기차역에 내려 마중 나온 세단에 앉자마자 비보를 들었다. 갑작스레 다가온 우연. 의미없는 우연은 아름답지 않다. 세상의 이치가 아름답게 흘러가지 않는 것을 제임스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혼란스러웠던 것은, 그토록 사랑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다행이다' 무심코 생각해버린 자신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새롭게 몸담근 학문에 나쁘지 않은 성과를 내고, 흥미를 붙여 과거와는 괴리된 삶을 충만히도 살았다. 연말마다 버틀러 재단의 연주회에 자리를 빛내는 것도 잊지 않았으나, 이만치 자랐으니 까마귀 울음소리를 내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아졌다. 얼마간 더 지나니 하프시코드를 내려다보고, 사랑했던 곡을 연주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만은 않았다. 더블린 자택에 하프시코드 한 대를 두고, 죄라도 짓는 기분으로 연주했다. 화려한 음색에 취하고나면 죄악감이 몰려왔지만 그것을 외면하자 이전보단 나았다. 연주자의 역량을 무시하는 하프시코드란 본래부터 '체념의 악기'였으므로, 연주를 거듭할수록 해방감과 동시에 응어리가 쌓였다. 내뱉으려 연주하고 다시금 쌓이길 반복했다.

그리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버틀러 재단의 연말 연주회가 끝난 피곤한 귀경길. 제임스는 맞은 편에 앉은 붉은 머리의 여자에게 시선을 두었다. 누군가 바라보는 것도 모른 채 이어폰을 끼고 노트북을 두드리는 여자. 스물 남짓 되었을까? 노트북 불빛이 눈에 부셔 반짝이는 모습이 불에 홀린 나방같았다. 꿈에 홀리는 사람과 꼭 그 빛이 비슷하지. 가벼운 타자로 키보드 위를 두드리는 경쾌한 모습, 작게 달각거리는 소리를 내는 자판, 선로 위를 달리느라 진동에 맞춰 흔들리는 상체.

가만 숨죽여 그녀의 타자가 끝나길 기다리니 더블린까진 순식간이었다. 기차의 안내음이 나오고도 노트북에서 얼굴을 떼지 못하는 그녀의 어깨를 짧게 두드렸다.

"종착역입니다. 이제 내리셔야죠."

"어머, 벌써요?"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이어폰을 경쾌하게 뺀 여자는 전형적인 아일랜드인의 외형을 하고 있었다. 붉고 자신있게 구불거리는 중장발, 쾌활한 성정, 녹색 눈에 주근깨. 단촐한 코트와 서류가방 뿐인 제 짐과 달리 여자는 캐리어며 백팩, 어지러운 전선까지 정리하며 발걸음을 늦췄다. 제임스는 짐을 내려놓고, 우선 어지럽게 바닥을 덮은 전선부터 주워 둘둘 감았다. '고마워요' 한 마디에 시선을 맞추자, 여자는 반듯한 이를 드러내며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었다. 문예창작과를 들어온 건 좋았는데 부모님의 반대가 심하다, 그러니 졸업하기 전에 가능한 많은 글을 쓰고 싶다, 오늘은 기숙사 첫날인데 룸메이트를 구해 더블린 시내에서 지냈다면 더 좋았겠다던지. 정중한 미소를 지으며 정리한 케이블을 건네자 그녀는 불쑥 맨손을 내밀었다.

"메리 고드윈이에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로비 한가운데 자리한 이 조각을 볼 때, 언젠가 이 모습에 걸맞도록 자라리라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올려다본 조각상은 그리 크지 않았고, 마음만 먹는다면 태워버리는 것도 제임스의 자유였다. 이제 버틀러가의 가주는 제임스가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끝내버린다면 이 이야기는 아름답지 않아진다. 비극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원대한 복수, 그리고 완벽한 실패이다.

입에 담배를 물고선 불을 붙인다. 이따금 예민해진 신경을 달래기 위해 이것에 불을 붙였으나, 지금은 그 용도가 다르다. 조각상이 단단히 발을 붙이고 선 단상 위로 오른다. 어쩜 저주란 이름에 알맞도록 그 키마저 똑같다. 혹 '여왕은 대물림을 끝낼 나를 염두에 두고 이 조각을 선물한지도 모르겠다', 실없이 생각했다. 차라리 그렇다면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텐데. 버틀러라는 이름에 과분한 완벽한 이야기. 아무것도 담지 못하는 눈을 들여다본다. 반짝이는 것이 버틀러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입에 문 독한 담배를 한 손에 쥔다. 그 얼굴에 침이라도 뱉듯이 연무를 뿜어내곤, 그대로 한 눈에 담배를 지저 꺼버린다. 조각상은 비명도 없다.

고요한 와중에 커다란 대문이 신음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린다. 붉은 머리의 여인이 로비로 들어온다. 새카만 저택에 들어오는 진저. 주근깨와 녹색 눈이 반짝이는 메리.

"제임스, 오늘 당신 본가를 가자고 해놓고 이게 무슨…."

제임스는 조각상과 나눠 발을 디딘 곳에서 내려가지 않는다. 손을 내밀어, 조각상과 정확히 같은 모습을 한 채로 메리에게 부탁한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한 손에 담배를 든 메리에게 말한다.

"당신 것도 이리 줘. 이 조각상을 완성할 때가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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