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 매터
쿵쿵대는 잔음이 문밖에서 긁듯이 튕겨져 남자의 귀로 들어온다.
… 이례적이다. 누군가가 문을 이렇게나 거칠게 두들긴 것은 남자의 전성기 시절 이후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땅히 그럴 사람도 없고. 척은 힘겹게 일어나 몸을 휠체어에 싣고, 바퀴를 다라락 굴리며 현관으로 도래한다. 그리고 쿵쿵대는 소리는 여전하다. 또 독촉하는 이들의 호통이나 들을 생각을 하니 그다지 유쾌하지 않군. 척은 허공에 짜증을 뱉으며 문고리를 잡고 신경질적으로 뒤로 뺐다.
덜그럭하는 소리를 내며 열린 녹슨 문 앞에는 통지서를 내밀러 온 인간 말종이 아닌 그레이가 오도카니 서 있었다. 녀석은 어딘가 아픈 듯이 팔꿈치 안쪽을 한손으로 가리고, 달달 떨리는 손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또 그 뱀 새끼 짓이겠지. 이제는 익숙해질만도 한데 척은 여전히 분노가 차오르는 듯했다. 참을성을 긁는 데에는 바이런만한 악질이 없다.
“… 추우니 어서 들어오게.”
척은 우선 그레이를 위해 문을 턱 잡고 휠체어를 도록 뒤로 굴렸다. 들어오란 듯이 남은 손으론 낡아빠진 소파를 가리키면서 ㅡ 늘 환대했던 식으로. 그레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빠른 걸음으로 소파를 향하더니 비틀거리며 앉았다. 척은 느릿하게 바퀴를 굴려 그레이의 앞에 서더니, 소매를 걷어 양쪽 팔을 확인한다. 뱀이 문 듯이 드문드문 난 둥근 상처가 소매에 가려진 팔 전반에 즐비하다. 오늘은 약물 실험이 과하군. 척은 이를 꽈악 물고 입술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오늘도 그놈 짓인 게지?”
알면서 묻는다. 그레이는 조용히 끄덕이다가 척의 엄지가 짓누른 환부가 아팠는지 핏, 피육, 하며 얕은 신음을 낸다. 척은 앓듯이 끄응거리다 찬장 위에 둔 오래된 구급 상자를 다시금 꺼내어 와서 소독부터 찬찬히 해 댄다.
“피윳 … 피용.”
“알아, 아네. 아파도 조금만 참게….”
“피 … 요잉.”
‘놈도 비슷한 뉘앙스로 강행했을 터.’
척은 문득 든 생각에 약을 쏟는다. 그레이는 깜짝 놀라 팔을 빼어낸다. 척이 들고 있던 붉은 상처약의 액상이 피처럼 바닥에 줄줄 스민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휠체어를 다시금 굴린다. 나서려는 그레이에게 가만히 있으라더니, 이내 천 조각으로 된 걸레를 가져와 상체를 힘겹게 숙여 닦아낸다.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야. 음식을 쏟은 것보다야 훨배 낫네. 약은 새로 구비할 때가 되었으니 오히려 잘 된 거겠지.
사태를 수습하고서야 붕대를 감는 단계로 넘어갔다. 척은 팔에 힘을 꽈악 주고 붕대를 칭칭 감는다. 그레이는 잠깐씩 눈을 끔뻑이며 치료를 가만 받는다. 물론, 이것들이 무슨 소용인지는 그조차도 모른다.
“피유….”
“지금 한숨 쉬는 겐가? 푸헤헤.”
척이 애써 웃는다. 그나저나 점심은 먹었나? 그레이에게 척이 물었다. 그레이가 잠시 생각하던 찰나 몸에서 꾸르륵거리며 신호를 보낸다. 파하학, 배가 많이 고픈 모양이구만. 척은 웃으며 주방으로 간다. 그레이는 옅게 웃으며 낡아빠진 소파에 털썩 눕는다. 나쁘지 않네요, 이런 거. 같은 감상이겠지.
“어떤 게 좋나? 포카치아, 아니면 알리오 올리오? 리코타치즈 롤라티니?”
“피…피요이잉.”
그래, 그럼 오늘은 나물 포카치아로 하지. 척은 콧노래를 부르며 능숙하게 요리를 한다. 부엌에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흘러오는 맛있고 포근한 냄새에 그레이는 어쩔 도리를 모르고 아이처럼 소파에서 옅게 뒹군다. 척은 밀가루와 올리브 오일, 소금과 이스트를 한데 넣고 뒤섞어 놓은 ㅡ 발효가 알맞게 된 반죽을 넓게 펴내고 구멍을 뚫곤 나물을 토핑해 오븐에 넣었다. 치즈는 덤이고. 오븐이 맛있는 냄새를 풍기자 만족스럽단 표정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레이를 흐뭇하게 쳐다볼 뿐이다.
“자아 ㅡ 다 됐네. 함께 먹지.”
척은 싸구려 포도주를 들고 오더니 딱 한 잔 분량을 따라내고 병을 버렸다. 이제 이것도 다 마셨군. 미안하지만 자네 몫은 없네. 그레이는 괜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닌가보군. 그럼….
척은 포도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포카치아를 대강 잘라 그레이의 접시 위에 올리고, 남은 것들 중 조그만 조각을 제 접시에 얹어 두었다. 맛보게. 난 객관적 평가를 듣는 걸 아주 좋아하지. 그레이는 배고픔에 허덕대다 먹어보란 말이 떨어지자마자 푸짐하게 한 입을 베어물었다. 보드랍고 쫄깃하고 따뜻한 빵의 감촉과, 매캐한 스모키 치즈, 거기에 어우러지는 청렴한 나물의 맛. 척과 대비되도록 다채로운 맛이었지만, 말로 형용하기엔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피용거리는 것밖에 없었다.
“피윳…표잉!”
“맛있다는 걸로 알겠네, 헤헤.”
배고팠던 둘은 허겁지겁 포카치아를 먹어치웠다. 한때 차가웠던 몸이 가정식의 온기로 온화해진다. 둘은 그렇게 가만히 소파에 앉아 나오지 않는 구식 텔레비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막상 왔는데 더 내어줄 게 없어 미안하네.”
“피용, 피요잉.”
“…괜찮다는 게야? 착하기는. 더 요구해도 되는데, 자네는.”
“…… 피유.”
“… …”
둘 사이에 잠깐 적막이 흐른다. 물론 그럴 수 없는 걸 아네. 내 개인적인 소망이야. 자네가 색채를 가졌으면 하는 아둔한 그런 소망 말일세. 척은 가만 보다 제 머플러를 풀어 그레이의 휑한 목에 둘렀다. 이렇게 말일세. 색 있는 자네도 마냥 못나진 않았거든. 그레이는 알 수 없었지만 이해했다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척은 그런 그레이를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그 즈음에, 문 바깥에는 손님 하나가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띵동 ㅡ 하는 불길한 소리가 둘의 귀를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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