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비일상의 경계 어딘가에서.

계란, 무염버터, 박력분, 아몬드 가루, 설탕, 꿀, 베이킹파우더, 바닐라 익스트랙, 소금

비일상의 사이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일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과 바꿀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당연하게 여긴 것들이기에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일상이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웃거나, 맛있는 걸 같이 먹거나 하는 그런 일련의 일상들. 그러한 것들을 내게 일깨워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소중하다고 여길까. 그 사람이 있기에 나의 행복이 무너지지 않고 유지된다면 얼마나 애틋하게 여길까.

모든 걸 잃어도 단 하나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이 내게도 있다. 그 사람이 있기에 따뜻한 내일을 기대하게 된다. 너덜너덜해진 몸을 끌어안아 주는 그 사람이 있기에 나는 버틸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집에 돌아가면 나를 반겨주는 사람이 있는 일상. 동경했기에 스스로에겐 과분하다고 여기면서 포기했었다. 내겐 주어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당신의 옆에 살아가며 그 행복을 누린다. 이 얼마나 분에 넘칠 정도의 행운이란 말인가. 릴리앙, 나는 당신에게 늘 고맙다는 말을…….

 ……아, 오븐 다 돌아갔다.

 

“릴리앙, 다 구워졌는데 몇 개 먹을겁ㄴ…….”

 

오븐을 열면 처음 만든 것 치고는 꽤 그럴싸하게 생긴 모양새의 마들렌들이 보인다. 모양이 저렇다고 해서 맛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향이라도 좋아서 다행이다. 폭신하게 구워진 마들렌을 틀에서 꺼내며 묻다가 잠깐 멈칫한다. 소파에 누워 잠들어버린 당신을 본 탓이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나. 처음 만들어보는 거라 원래 시간보다 한참은 더 오래 걸린 게 문제라면 문제였을 것이다. 멋쩍은 듯 어깨를 으쓱이고 마들렌을 식히려 틀에 기울여 세워둔다. 어차피 지금 먹을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한 김 식혀두는 편이 더 맛있을 테니까.

 

오븐이 돌아가는 동안 홀짝거리며 마시던 차가운 녹차가 든 잔을 들고 거실로 걸어간다. 당신이 누워있는 거실의 통창 너머로 따뜻한 오후의 햇빛이 쏟아진다. 은은한 클래식이 흐르는 턴테이블의 볼륨을 낮춘다. 유려하게 흐르던 피아노의 선율이 조금씩 잦아든다. 집 안에 있는 LP판들은 전부 당신이 구해온 것들이었다. 입는 옷부터 좋아하는 것들 대부분이 참 맞지 않는 우리였다. 때로는 서로가 입는 옷들을 보면서 그게 무어냐고 비난조로 이야기하기도 했었지. 돌이켜보니 그런 사소한 대화들이 나의 일상을 지탱해 주었던 것이었다. 그러한 대화들이 있었기에 조금은 숨통이 트일만한 구석을 갖출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한참 그렇게 LP판이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다른 LP판들이 꽂힌 선반을 보려 쭈그린다. 당신이 자는 사이의 턴테이블은 내가 독점해도 되지 않을까. 다소 경쾌한 음이 마음에 들었던 재즈로 노래를 바꾼다. 원래부터 좋아했던 노래는 아니었다. 당신이 알려주고 내가 좋아하게 되었을 뿐인 별것 아닌 이야기가 담긴 노래다.

소파 앞에 놓인 흰 대리석 탁자 위에 녹차가 든 유리컵을 올려놓고 러그 위에 앉는다. 내 안목은 별로니까 당신에게 탁자를 고르라고 말하니,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분명 그리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던 것도 같다. 소파 쪽으로 몸을 돌려 잠든 당신을 바라본다. 오래 낮잠을 자게 되면 분명 밤에 잠이 안 오겠지만, 잠깐의 낮잠은 굳이 깨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늘 긴박하게 살아오던 우리이니 이럴 때만큼은 마음을 놓고 쉬면 되지 않을까. 당신의 휴식을 방해하고자 하는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으니.

소파에 한 쪽 팔을 베고 엎드려 당신을 올려다본다. 긴 속눈썹이 잘 어울리는 화려한 사람이다. 자신과 다르게 흉터 하나 없는 얼굴이 정말 좋았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나의 과거들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알려주는 것 같아서. 물론 당신은 그런 나의 모습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것을 안다. 하지만 릴리앙,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은 그런 것들밖에 없었어.

 

 “……이렇게 그냥 자면 눈부실 것 같은데.”

 

얼굴을 바라보다가 제 손으로 그림자를 만들어준다. 눈은 충분히 가릴 수 있는 그림자가 만들어지고 당신의 표정이 조금은 풀린 듯한 느낌을 받는다. 커튼을 치면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이겠지만 오늘따라 따뜻한 오후의 햇빛을 조금만 더 당신 옆에서 즐기고 싶다. 이기적으로 구는 나를 조금만 용서해 줘. 오늘은 주말. 당신과 내가 무너져가는 폐허 속의 군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소중한 날들이다.

 

……아, 졸음이 쏟아진다. 이대로 나도 그의 옆에서 조금만 잠을 청할까 싶다. 무엇보다 소중한 당신의 곁에서 잠드는 일상을 놓치고 싶지 않아. 눈을 떠도 당신이 있는 삶. 바라 마지않았던 나의 보물과 같은 삶이다.


2주차 주제: 낮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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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함께 노래 듣는 것을 좋아해서 아마 앞으로도 노래들을 조금씩 끼워넣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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