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선체, 희미하게 일렁이는 파도 소리. 그는 퀴퀴한 냄새가 나는 나무 바닥에서 눈을 떴다. 서재 내의 공간이 제한적이라 한들 내 구태여 이런 데를 찾아 잠을 청했을 리 없거늘, 머릿속으로 뇐 그는 문득 깨달았다. 그 오랜 시간을 거쳐 엔트로피의 수복이 완료되었다. 영겁과 같은 시간을 지나 기어이 미치지 않은 자신은 까마득한 과거, 아니. 이것을 무엇
비일상의 사이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일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과 바꿀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당연하게 여긴 것들이기에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일상이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웃거나, 맛있는 걸 같이 먹거나 하는 그런 일련의 일상들. 그러한 것들을 내게 일깨워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소중하다고 여길까. 그 사람이 있기에 나
팡, 팡. 햇볕에 잘 마른 이불이 펴지는 소리가 났다. 내일도 화창한 날씨가 오후 내내 지속되겠습니다. 어제 들었던 일기예보의 내용대로 햇볕이 따스해 기분 좋은 하루였다. 토오야는 포근한 햇살 냄새가 나는 이불을 접고 접어 집 안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자신의 어린 동생인 호노카가 티비를 보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12시 반. 점심도 잔뜩
카타가와 호리는 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반쯤 죽어 있다는 말은 즉 나머지 반, 살아 있다는 사실이 혼재함 또한 의미했다. 장례식장에서 하면 안 되는 일 1위는 부활이라더니, 이 세상이 거대한 식장이라면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베어 가르는 날이, 꿰뚫는 총탄이 그리도 공포스러웠다
그날은 추운 겨울날이었다. 남자는 시린 날씨에 오늘따라 유난히 붉어진 손을 계속 쓸어내리면서, 적당히 한기를 떨쳐내기 위해 가게에 들어섰다. 가게에는 간판에 고급스러운 금빛 글씨들로 장식했고, 내용을 읽기도 전에 가게 안에는 커피 특유의 향이 이곳이 카페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제야 메뉴판에 시선을 향했다. ‘에스프레소’, ’도피오‘, ‘마끼야또’
그와 그가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기계는 섭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단다, 또 그런 소리나 하는구만. 이미 두 잔을 준비해 가져왔음에도 살갑다고 하기 어려운 농이 둘 사이에 오갔다. 한 잔은 투명한 녹빛, 다른 한 잔은 불투명한 흑색. 자네라면 카페인은 몸에 좋지 않단다, 같은 말을 할 줄 알았는데. 말하며 그
프랑스 파리 지부의 릴리앙 블랑샤르 님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나는 그동안 바쁘게 지내왔습니다. 새로운 곳에서 터를 잡는 걸 안 해본 것도 아닌데 늘 새로운 어려움이 생겨나는군요. 언제쯤이면 익숙해질 수 있을까요. 이곳은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겨울이 다가와도 눈은 내릴 수도 없는 날씨들입니다. 내가 살기에는 정말 안 맞는
"몰랐어요? 형이 커피 좋아하는거." 호노카는 그 말을 듣고 건네려던 카드를 든 채 멍하니 눈을 깜빡일 수 밖에 없었다. 10년. 형을 알고 지낸지 자그마치 10년이다.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는데. 맞은 편 커피숍 직원의 한마디에 그 자신이 깨져버렸다. '내 앞에선 한 번도 마신 적 없잖아? 애초에...' 달그락, 얼음이 녹는 소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