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신만이 그들을
팁차
* 2020. 08. 23 ~ 2020. 09. 03 동안 세 편에 걸쳐 연재되었던 단편입니다.
* 작가노트 설정 O
리차드는 별로 웃지 않는다. 그것이 스티비가 아폴로니아로 온 이후 알게 된 것 중 가장 놀라운 사실이었다. 생각해보면 써니보이의 당선 축하파티가 있던 그날에도 리차드는 연기할 때를 제외하고는 영 웃지 않았다. 그럼에도 스티비는 왜 그를 웃음이 많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는가. 아마 모두 과거의 잔상일 것이다. 스티비는 이제 신문팔이 소년이 아니다. 리차드에게 그는 마피아였던 사람일 뿐이다. 어린 리차드도 마피아에게는 그렇게 웃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리차드는 오스카와 함께 있을 때면 간간히 미소정도는 지었다. 스티비가 기억하는 것처럼 활짝 소리내어 웃지는 않았지만 입가에 머물러있는 건 분명 완연한 기쁨이었다. 오스카가 농담이라도 던지면 그는 웃음을 참으려는듯 입술을 말아물기도 했다.
하지만 스티비와 단 둘이 있을 때 리차드는 입꼬리를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차라리 경멸하는 표정이라도 지으면 좋으련만,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정말 무표정에 가까워서 스티비는 필요한 말조차 건네지 못해 후에 리차드에게 한 소리를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같이 산 지 세 달이 넘어가서 그런가, 확실히 리차드는 처음보다는 경계심이 많이 누그러진듯 했지만 여전히 스티비는 그에게 선뜻 다가갈 수 없었다. 오히려 총이 있었을 때가 더 쉬웠던 것 같았다.
“리차드가 워낙 낯을 많이 가려서 그래.”
처음에 나 걔 웃는거 반 년 만에 봤잖아. 술잔을 마른수건으로 닦으면서 오스카가 말했다. 스티비는 물이 담긴 컵을 만지작거렸다. 놀라운 사실 한 가지 더. 리차드는 영업시간을 제외하고는 밖으로 나도는 시간이 더 많았다. 장 보는 것은 오스카 담당이었는데 요즘따라 도맡아서 한다고 했고, 의상과 소품은 원래 모두 직접 보고 골라온다고 했다. 영감을 얻어야한다나 뭐라나. 덕분에 스티비는 리차드보다는 오스카와 단 둘이 남을 때가 더 많았다. 오스카의 놀라운 친화력으로 스티비는 그에게 신문팔이 시절의 아폴로니아 이야기는 빼고, 써니보이와 처음 만났던 그날까지 몽땅 털어놓았다. 오스카는 그때 술에 취해있었지만, 뭐 어쨌든.
물론 둘만 남아있으면 말하는 쪽은 주로 오스카였다. 오스카가 말이 많다기보다는 스티비가 말하지 않는 쪽에 가까웠다. 오스카는 항상 손님들 이야기나 들어주기 바쁘다며, 스티비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을 꽤 좋아했다. 스티비는 대부분 질문에 대답하거나 아주 가끔 질문을 했다. 스티비는 질문을 할 때마다 큰 용기를 내야했다. 갑작스럽게 그들의 삶에 끼어든 그가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는 것만 같아서. 감히 자신이 하지 말아야할 말들을 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스티비는 결국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에게서 평생 이 질문의 답을 얻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리차드는, 원래 그렇게 안 웃어? 리차드는, 까지 꺼내고 스티비는 자신의 심장이 미친듯이 쿵쾅대는 걸 느꼈다. 다행히 오스카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웃는 건 내 담당이야.”
새삼 스티비는 이곳이 바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무대에서는 그렇게나 활짝 웃던 리차드는 무대에서 내려오기만 하면 표정이 싹 변했다고 했다. 덕분에 손님에게 맞을 뻔했던 걸 내가 대신……. 스티비는 그 이후로 듣지 않았다. 당장 그가 목격한 것만 해도 두 번이 넘었다. 걔는 원래 대답도 안해. 알잖아! 말도 안듣고. 오스카가 술잔을 찬장에 겹치면서 계속 종알댔다. 스티비는 오스카가 술잔을 놓치는 상상을 했다. 술잔을 놓치는 순간 리차드가 들어오고, 리차드의 목소리를 유리 깨지는 소리로 덮어버리는 그런.
네 말은 잘 듣던데. 대신 스티비는 물을 삼켰다. 리차드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스티비가 활짝 웃는 리차드를 보지 못한 건 아니었다. 스티비가 충동적으로 아폴로니아를 사왔을 때. 그때 그는 우리 셋 다 무일푼 거지가 된 거 같다고 말하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급기야 리차드는 스티비 품에 안기기까지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깨동무를 한 거였지만 어쨌든 스티비는 그를 끌어안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억울한 건 그때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전혀 안난다는 것이었다. 기억은 자신이 리차드를 끌어안고있던 그 순간이 아니라 리차드가 자신의 품을 떠난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오스카는 스티비를 양 팔로 꽉 끌어안고 방방 뛴다. 스티비는 리차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우는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스티비의 표정이 굳는다. 리차드가 뒤를 돌아 스티비와 그를 끌어안고 있는 오스카를 바라본다. 아, 아니다. 그는 웃고있다. 아주 활짝. 스티비는 웃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 순간, 리차드와 눈이 마주친다.
스티비는 웃을 수 없다. 눈앞에 그날의 일이 떠오른다. 리차드가 그에게 실탄을 든 총을 겨누고, 자신이 그 총을 빼앗아 다시 들이밀고, 대답을 종용했던 그 순간. 아, 네 이름을 이런 식으로 처음 부르고 싶진 않았는데. 그때 자신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의 표정과 같지 않기를 스티비는 기도한다. 리차드가 이 표정을 보고 그때를 떠올리지 않기를. 오스카는 스티비를 꽉 끌어안은 채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리차드의 웃음 소리가 회전축 너머로 들려온다. 다행이다. 스티비는 생각한다.
스티비가 아폴로니아에 살게 된 첫 일주일은 그 오스카가 눈치를 볼 정도로 둘이 서먹했다. 스티비는 리차드의 눈치를 봤고, 리차드는 그런 스티비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스티비의 방이 될 곳을 치워주었고 매일 그의 몫까지 음식을 만들었다. 그래, 이정도면 되었다. 스티비는 생각했다. 그가 영영 자신에게 웃어주는 일이 없더라도… 괜찮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 안에 있으니까 괜찮을 것이다. 스티비는 바라보는 것에 익숙했다. 하지만 리차드는 언제나 그에게 헛된 환상을 주었다. 전에도, 지금도.
영업 준비를 하면서 스티비가 말했다. 전구가 깜빡거려서 바꾸려고. 오스카는 그 방이 워낙 창고로 오래 쓴 방이라 그런지 냄새도 날 거라 말했다. 어쩐지, 하고 스티비가 피식 웃었다. 향초라도 주겠다며 오스카가 덧붙였다. 그날 새벽, 멍하니 앉아있는 스티비의 방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스티비는 오스카, 하면서 문을 열었다가 뚱한 얼굴로 서있는 리차드를 보고 너무 놀라 멈춰섰다. 리차드가 손에 든 전구를 흔들었다. 문을 가로막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스티비가 엉거주춤 옆으로 비켜섰다.
전구를 놓고 나갈 것이라는 스티비의 예상과 달리, 리차드는 전구 밑으로 의자를 끌어왔다. 어, 하고 스티비가 말할 틈도 없이 리차드가 신발을 벗고 의자 위로 올라섰다. 스위치 좀 꺼줘. 스티비는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리차드는 이미 전구를 다 갈고 의자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 스위치를 달각거리면서도 그는 내내 말이 없었다. 스티비는 리차드의 옆모습조차 볼 수 없었다. 너무 어두웠어서, 그리고 너무 밝아서. 먼 눈이 빛에 익숙해질즈음 그는 리차드가 방 밖으로 나갔음을 알았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다. 전구! 리차드의 뒷모습에 대고 스티비가 소리쳤다. 리차드가 멈춰섰다.
“전구, 고마워.”
그냥 그게 다였다. 리차드는 멈춰선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스티비는 길어지는 정적에 괜히 숨을 한 번 삼켰다.
“그래.”
그게 끝이었다. 리차드는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갔다. 스티비는 한참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방문을 닫았다. 전구는 너무 밝았다. 정말 눈이 멀어버린 건 아닐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눈을 감을 수는 없었다. 눈을 감으면 어둠이 리차드의 눈물 고인 눈동자가 되었다. 하지만, 모든 건 익숙해질 것이다. 그는 곧 이 전구가 뿜는 하얗고 밝은 빛에도 익숙해질 것이었다. 그는 바라보는 것에 익숙하니까.
어떤 습관들은 영원히 남는다. 영원히 남기에 습관이라 부르는 걸지도 모르지만. 스티비의 습관은 마피아라기에는 너무 인간적이라 써니보이는 말한 적 있었다. 스팁, 상대방의 얼굴을 쓰다듬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니야. 그가 써니보이 밑으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써니보이는 적어도 스티비 앞에서는 자신을 꽤 자주 드러냈다. 그는 자주 웃었고, 가끔 울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때마다 스티비는, 자신의 손을 그의 얼굴에 갖다댔다. 처음에 써니보이는 웃었고, 마지막으로 써니보이는 표정을 굳히고 그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그날 써니보이는 그 손에 처음으로 총을 쥐어주었다.
그때 총을 들고있는 게 다행이었다. 스티비는 하마터면 리차드의 얼굴에 손을 뻗을 뻔한다. 먼저 총을 들이민게 누군데, 나를 쏘려던 게 누군데. 리차드의 눈에는 눈물이 차오르고 있다. 빛이 반사된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빛은 스티비를 향하고 있다. 리차드가 가져온 전구의 빛을 닮은 그 눈빛.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스티비는 전구를 볼 때마다 그 날을 떠올릴 것이었다. 전구는 이제 더 이상 깜빡이지 않았다. 스티비는 그 빛을 피하지 않는다. 단단하고 곧은, 술에 취해 있을 때도 같았던 그 눈빛. 대답하자, 오스카가 뒤에서 속삭인다. 리차드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린다. 지금의 스티비처럼 그는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있다. 모든 것들은 넘치도록 주면 안 돼. 써니보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넘치는 순간 흔적이 남거든.
하지만 써니보이, 어떤 것들은 항상 흘러 넘치기 마련이에요. 그리고 그것들은 영영 지울 수 없고요…….
“대답해!”
그는 총이 자신의 표정을 가리고 있길 바란다. 아니면, 적어도 눈물만은 흘리고 있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
스티비는 그대로 아폴로니아를 뛰쳐나온다. 하지만 리차드의 목소리가 발목을 잡아오는 것만 같다. 그는 겨우 옆 골목으로 들어간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입김이 골목 안쪽에 머물러 있다가 흩어진다. 스티비는 고개를 들어, 골목 사이로 직사각형의 하늘을 바라본다. 나에게 허락된 하늘은 이정도다. 그래야만 한다.
오스카가 바닥까지 닦았는데도 리차드는 들어오지 않았다. 스티비가 자꾸 문 쪽을 바라보는 걸 눈치챘는지 그가 금방 돌아올 거야, 라고 말했다. 그래, 물론 리차드는 금방 돌아올 것이다. 리차드는 단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으니까. 스티비는 오스카가 분장실로 들어간 틈을 타 아폴로니아를 빠져나왔다. 자신이 겨우 도망쳤던 그 골목. 그 골목은 리차드가 자주 담배를 피우는 골목이기도 했다. 그 직사각형의 하늘에 허락을 구하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뭐해?”
스티비가 골목으로 향하는 순간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봉지를 품에 안은 리차드가 있었다.
“어, 담배, 피려고.”
담배라는 말을 하자마자 리차드의 표정이 구겨졌다. 스티비는 그가 피우는 것의 절반도 피지 않을 텐데, 리차드는 오스카가 술을 들고 있을 때만큼이나 스티비가 담배를 들고 있는 걸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처럼 굴었다. 스티비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이 자신을 샅샅이 훑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스티비는 눈을 감지 않으려 노력했다. 리차드는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몇 번 짓씹더니 빨리 들어와라, 하고 말하고 아폴로니아 안으로 들어갔다.
스티비는 주머니를 더듬었다. 테이블 위에 담뱃갑을 두고온 게 떠올랐다. 느껴지는 건 총일 것이다. 그는 허리에 손을 짚고 괜히 구두 앞코를 바닥에 툭툭 쳤다. 대충 시간을 때우다가 들어가면 될 것이다. 스티비는 거리를 둘러보았다. 지나치게 날씨가 좋았다. 손에 총도 들고 있지 않은 스티비를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냥 산책할 거라 말할걸. 스티비가 발걸음을 떼는 순간 뒤에서 그를 붙잡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담배를 핀다는 애가 담배를 두고 가?”
오스카였다. ……떨어진 줄 알고 사러가려고 했어. 뭐하러 그래. 그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담배를 하나 쏙 빼갔다. 스티비는 가끔 오스카에게서 써니보이의 옛날 모습을 보았다. 그때의 써니보이는 진심은 아니어도 능글맞게 웃을 줄 알았다. 스티비는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오스카가 연기를 내뿜는 것을 바라보았다. 스티비가 자신의 과거를 모두 털어놓은 그날 그는 피짜맨 이야기를 하다가 실수로 써니보이의 이름을 꺼냈다. 리차드는 이미 뻗어있었고, 스티비는 오스카가 술에 취해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걸 보고 안심했다. 리차드는 술에 취하면 아무 이야기도 기억하지 못하니까. 스티비는 그걸 안다. 하지만 오스카는 술에 취해있어도 모든 이야기를 기억한다. 스티비는 그걸 모른다.
“아, 담배. 리차드가 찾아줬어.”
“……그래.”
그날 영업은 무난무난하게 끝이 났다. 아가씨와 피짜맨은 사랑을 속삭였으며, 스티비는 둘 사이에서 지팡이를 내리치거나 들어올렸다. 떨어지려는 아가씨를 피짜맨이 붙잡았고 스티비는 무대 뒤편에서 커튼콜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술을 마셨고, 셋은 술을 날랐고, 바닥을 치웠고, 의자를 정리했다. 손님들이 모두 빠져나가자 오스카는 재빨리 방으로 들어갔고 리차드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요즘 새로운 작품을 시작했다고 했다. 스티비는 주방에서 뒷정리를 하다 엎드려 졸고 있는 리차드의 어깨 위에 담요를 덮어주고 방으로 들어갔다.
스티비가 눈을 떴을 때 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는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물컵을 찾으려 책상 위를 더듬거리다 작고 가벼운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평소같으면 그냥 아침에 주웠을 텐데 어쩐지 지금 주워야만 할 것 같았다. 그는 결국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을 다시 더듬었다. 무언가의 정체는 쉽게 밝혀졌다. 리차드가 찾아주고 오스카가 건네줬던 담뱃갑. 그는 시계를 힐끗 보았다. 겨우 두 시간 밖에 지나있지 않았다. 스티비는 담뱃갑을 낚아채듯 줍고 밖으로 나섰다.
리차드는 테이블에 없었다. 종이와 연필 몇 개만 나동그라져 있었을 뿐이었다. 자러 올라갔나보다, 스티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골목으로 나섰다. 가로등도 드문드문 켜진 동트기 직전의 새벽. 아폴로니아 간판만이 등대처럼 홀로 빛나고 있는 멀베리 스트릿. 스티비는 습관처럼 한숨을 내쉬고 걸음을 옮겼다가 바로 허리춤 속으로 잽싸게 손을 옮겼다. 골목에 누군가가 있었다. 이 야심한 새벽에, 누가 그와 같은 하늘을 공유하려 한단 말인가. 스티비의 머릿 속으로 몇 명이 지나갔다. 어쩌면, 어쩌면 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보체티 패밀리의 누군가일지도 몰랐다. 그는 숨을 멈추고 시야가 닿지 않는 곳으로 몸을 숨겼다. 누군지는 몰라도 일단 쏴봐야한다. 총을 쓰지 않은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장전. 그리고 그는 총을 들이밀기 직전에서야 골목에 앉아있는 커다란 인영이 담요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리차드라는 걸 알아차렸다.
맥이 탁 풀렸다. 스티비는 총을 다시 허리춤에 넣었다. 분명 소리가 들렸는데도 리차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스티비는 그가 잠든 게 아닌가 생각했다.
“리차드?”
어둠이 슬슬 리차드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스티비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 눈을 깜빡일수록 그가 더 선명하게 들어왔다. 리차드는 힙플라스크를 손에 쥐고 있었다. 스티비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빼앗아들었다. 그는 순순히 술을 놓아주었다. 스티비는 자신이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리차드는 스티비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안 마셨어.”
스티비가 힙 플라스크를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소리도 없이 묵직한 것이 정말로 마신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고서는 리차드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뭐해, 안자고. 이 두 마디가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들어가자. 이게 더 어려운 것 같았다. 스티비는 결국 침묵을 택했다. 그는 가만히 리차드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리차드가 고개를 든 건 그때였다. 스티비가 그의 머리에 입맞추고 싶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순간. 둘의 시선이 맞닿은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 신이시여.
우리는 언제랄 것도 없이 그 날의 일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른 날, 너는 나를 왜 쏘려고 했을까. 스티비는 몇 번 생각했었다. 생각할 때마다 답은 아주 간단하게 돌아왔다. 내가, 네 세계를 빼앗으려고 했으니까. 그러면…… 그러면 지금은? 나는 여기에 있잖아. 나는 여기에 있고 너는 내 전구도 갈아줬는데…….
리차드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어떠한 징조도 없이, 오로지 그의 위로만 비가 내리는 것처럼.
“왜, 왜 울어.”
스티비가 당황하는 티를 못 숨기고 바로 주저앉았다. 눈높이가 같아지자 리차드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너는 뭘 바라보고 있는 걸까. 리차드는 항상 스티비와 같은 걸 바라보고 있던 적이 없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도 리차드는 언제나 그 너머의 것을 보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면 너는 내 눈 너머에서 뭘 보고 있었을까, 그때는? 그리고 지금은.
“악몽을 꿔서.”
리차드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이번에 뻗은 손에 총은 없었다. 스티비의 손은 너무나도 쉽게 리차드의 뺨에 닿았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뜨겁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의 손이 차가운 것인지도 몰랐다. 리차드는 그의 손이 뺨에 닿자 크게 움찔했지만,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곧 그의 손에 얼굴을 기댔다. 여전히 스티비를 바라보지는 않았지만.
굳은 건 스티비 쪽이었다. 스티비는 리차드의 이름을 처음 내뱉던 그날처럼 손을 뻗자마자 후회했다. 리차드는 분명 불쾌해할 것이고, 당장 얼굴에 주먹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리차드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단지 스티비의 손에 기대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꿈.”
리차드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눈을 굴려 스티비를 바라보았다. 그래, 스티비는 그 눈을 알았다. 절대 너에게 대답같은 건 해주지 않겠다는 눈. 차라리 너의 눈을 멀게 해버리겠다는 그 빛. 스티비는 다시 울지 않으려고 노력해야했다. 이번에는 총도 없다. 그의 표정을 가릴 수 있는 건 그의 무릎 위에 있는 나머지 한 손뿐이다.
“그때 내가 너를 쏴버리는 꿈.”
리차드는 진실을 말해도 진심을 말하진 않는다. 그러니 그는 죽어도 총을 들고 있던 네 표정이 문득문득 떠오른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네 표정이 어땠는지, 그걸 보면서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이다. 신은 언제나 침묵하는 존재니 네가 그걸 알게 되는 건 영원이 지난 후의 일일 것이다.
“그리고 너도 나를 쏴. 울면서.”
리차드가 스티비의 손을 떼어냈다. 스티비는 차라리 자신도 눈물을 흘렸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울지 못했다. 이것 역시 써니보이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눈물만은 흘리면 안돼. 그게 넘치더라도. 넘치는 것은 언제나 흔적을 남긴다. 스티비에게는, 표정이 남았다. 리차드가 앉아있는 스티비를 지나쳐 아폴로니아로 들어갔다. 스티비는 가로등이 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리차드는 점심이 다 되어가도록 일어나지 않았다. 스티비는 그때까지 맨정신으로 깨어있었다. 비가 오는 소리가 들리자 입구를 등지고 엎드려버렸다. 얼마 되지 않아 깨어난 오스카는 스티비를 흔들어놓고선 막상 그가 고개를 들자 비명을 질렀다. 술이 덜 깬 손님인 줄 알았다나 뭐라나. 계속 이러고 있었던 거야? 스티비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카는 그의 앞에 물이 든 잔을 내려놓고 아무래도 걱정된다며 리차드를 보러 갔다. 스티비는 그런 오스카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어지러운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새벽은 꿈이었을까.
뒤따라붙는 오스카의 잔소리를 떼어내려고 하는 듯 리차드는 손을 휘적이면서 걸어 나왔다. 스티비는 괜히 물컵을 바라보았다. 리차드가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너 어제 밤새 여기 있었다며? 리차드가 물컵을 휙 가져가며 물었다. 스티비가 몸을 움찔 떨었다. 리차드가 뭘 그런 걸 갖고 놀랐냐는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너 공연은 할 수 있겠냐? 스티비는 순간 짜증이 확 치밀어오르는 걸 느꼈다. 니… 몸이나 챙겨. 스티비가 일어서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투덜거리는 리차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스카가 아침을 가지고 나와 셋이 한 테이블에 둘러앉고, 리차드가 남은 술의 개수를 묻고, 오스카가 새 작품에 대해 묻고, 리차드가 짜증을 내고, 스티비가 그릇을 한데 모아 설거지를 할 때까지 리차드는 다른 말이 없었다. 스티비는 이따금 리차드 너머의 테이블을 흘끗흘끗 보았다. 종이와 연필이 어질러진 그 테이블. 새벽은 꿈이었을까. 적어도 리차드에게는 그런 모양인 거 같았다.
스티비는 그 뒤로 몇 번 더 새벽의 골목에서 리차드를 보았다. 리차드는 자신이 덮어줬던 담요를 두르고 힙 플라스크를 손에 든 채로 골목에 앉아있었다. 그는 스티비를 보았고, 또 울었다. 스티비는 또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가끔은 낮에 꺼내지 못한 말도 했다. 어느날 스티비가 물었다. 왜 모른 척했어? 리차드는 답하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 다음 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게 두 번 더 반복되고 나서야 스티비는 모른 척하고 있던 건 자신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리차드는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술에 취했기 때문일까? 그는 술에 취해서 한 말은 기억도 못 하니까. 하지만 이건 술의 문제가 아니다. 기억의 문제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오스카는 모든 걸 알고 있다. 그는 어쩌면 오스카가 술에 잘 취하지 않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스티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니까, 오스카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스티비가 리차드의 얼굴에 손을 뻗는 것도 그가 알까. 스티비가 닦고 있는 컵과 마른 수건 사이에서 나는 메마른 소리만이 아폴로니아 바를 채웠다. 아폴로니아의 점심은 대개 그런 식이었다. 오스카의 목소리와 유리와 수건의 마찰만이 존재했다. 가끔 그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것이 총이라는 착각이 들었다.
“그래도 요즘엔 안 그랬는데.”
이러다 다 닳겠다. 오스카가 스티비의 손에서 컵을 쏙 빼갔다. 수건과 유리 중 먼저 닳는 건 무엇일까. 술은 안돼. 스티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오스카가 아무것도 없는 컵을 입에 물고서 웃었다. 보조개가 깊게 파였다. 알아, 리차드가 안된댔어.
리차드는 써니보이를 닮았지만 써니보이는 오스카를 닮았다. 말 한마디로 스티비를 죽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스카의 말은 때때로 총알처럼 빙글빙글 회전하면서 속을 엉망으로 만들고 그대로 빠져나왔다. 스티비가 자신을 외딴 섬처럼 느끼는 순간은 달리 특별하지 않았다. 이처럼 결국 그가 써니보이를 떠올리게 되는 순간들이 그를 외롭게 만들었다. 언젠가 스티비가 아폴로니아를 떠나게 된다면, 아니 어쩌면 그들이 아폴로니아를 떠나게 된다면 그건 리차드의 입에서가 아닌 오스카의 입에서 나온 말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리차드가 그랬잖아.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오스카는 리차드가 어쩌다 한 번은 기억하는 거 같다고 말했다. 그래도 아예 다 잊는 건 아닌 것 같다고. 그는 그 이후로 별말을 하지 않았다. 스티비도 굳이 묻지 않았다. 스티비는 그날 새벽 리차드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나가지 않았다. 잠들지 못한 것은 똑같았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빗소리가 그의 목소리를 뺏어가기라도 한 듯 오늘따라 오스카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자꾸 스티비를 힐끔힐끔 살피는 걸 보니 피곤한 기색이 완연한 그의 휴식을 자신이 방해하고 있다고 짐짓 결론내린 모양이었다. 리차드는 어제의 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스티비는 그를 등졌고, 오스카는 스티비의 옆에 앉았다. 스티비는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잡지를 앞으로 끌고 왔다. 아주 오랜만에 그들은 같은 곳에서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스카는 스티비를 따라 잡지를 뒤적이다 그가 런던의 패션 트렌드를 이야기하고 있는 기사를 삼십 분째 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런던 가본 적 있어, 스티비?”
스티비가 화들짝 놀라면서 오스카를 쳐다보았다. 그는 애초에 그 기사를 읽지도 않았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냥, 런던이었으니까. 그게 전부였다.
“아, 니.”
그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오스카의 표정에서 흥미가 싹 걷히는 걸 보고 스티비가 급하게 덧붙였다.
“언젠가 갈지도 몰라.”
그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었을 말이었다. 패밀리에게만 굳이 꺼내 드는 극적인 안부 같은 것. 갑자기 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마피아의 은밀하지 않은 신호. 리차드가 스티비의 말을 알아들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건 아주 흔해빠진 복선이었으니까. 런던에 간다고? 오스카가 놀란 투로 되물었다. 응, 런던.
“왜 런던에 가는데?”
“만날 사람이 있어.”
이건 마피아의 은어가 아니다. 리차드도 그걸 알았다. 그는 뒤를 돌았다. 오스카는 웃고 있었다. 스티비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리차드는 요즘 아폴로니아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얼마 전 완성한 신작의 연습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스티비는 나름 열심이었으나 리차드가 보기에는 영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나가는 대신 연습을 도왔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리차드는 가끔 스티비의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웃었다.
스티비는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너는 왜 그 새벽에 거기에 나와 있냐고, 하필 내가 둘러준 담요를 두르고 나와 있었냐고. 그러니까, 너는 괜찮냐고. 스티비는 요 며칠간 나가지 않았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보다 기억하는 것이 더 불행이다. 어쩌다 한 번 기억한다는 그 새벽 속에 자신이 있지 않길 바랐다.
리차드의 새벽 외출에 관해 스티비는 질문을 해놓고 또다시 후회했지만 오스카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잊어버린 것 같았다. 모른척해 주는 걸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오스카는 이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느 시점에 무엇을 말해야하는지 아주 잘 아는 배우였으므로. 스티비, 집중하고 있는 거 맞아? 스티비는 자신이 리차드의 찌푸린 미간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웃고 있었는데. 스티비가 시선을 그의 입술 끝으로 옮긴 순간 오스카가 소리쳤다.
“스티비, 널 찾는데?”
아침부터 울린 전화 열에 아홉은 전날 손님이었다. 어제 상대한 손님들을 헤아리며 스티비가 전화를 받아들었다. 오스카가 전화를 건네주고 뒤를 돌았다.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티비가 아폴로니아 입구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스팁! 어디가! 오스카가 급하게 그 뒤를 따라갔다. 리차드는 한발 늦게 그들을 쫓았다. 밖으로 나서자마자 오스카가 우뚝 서있는 바람에 리차드는 하마터면 그의 등에 얼굴을 부딪칠 뻔했다. 뭐야, 라고 소리치려는 찰나 그는 스티비가 오스카의 앞에 서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스티비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 너머를.
“써니보이.”
스티비가 중얼거렸다. 햇빛을 녹인 것 같은 눈부신 금발, 그러니 그대로 쳐다보고 있으면 눈이 멀어버리고 말 그런 색. 써니보이가 스티비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흔한 색이 아닌데. 그는 리차드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예? 리차드는 이것이 자신이 낼 수 있는 제일 얼빠진 소리라고 생각했다. 써니보이는 슬쩍 웃으면서 코트에 넣고 있던 오른손을 빼 들었다.
“안녕, 스팁.”
오스카가 먼저 뒤를 돌아 리차드를 데리고 들어갔다. 스티비의 숨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오는 거 같다고 리차드는 생각했다.
소란스러운 아폴로니아 바 안으로 그는 조용히 스며들었다. 저녁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어둑어둑한 아폴로니아 근처 골목에서 써니보이는 스티비를 배웅해주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오늘 공연. 못하게 됐을 거 아냐. 스티비는 그에게 브루클린 브릿지의 전설은 끝났다고 말하지 못했다. 분명 스티비는 써니보이에게 새로운 공연을 준비 중이라고, 보러 와주면 기쁠 거라고 말하는 상상을 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스카는 바빠 보였다. 스티비가 말 없이 오스카 옆으로 다가가 그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오스카는 그를 보자마자 눈썹을 한껏 내리면서 말했다.
“안 오는 줄 알았어.”
“내가 왜 안 와.”
그는 대꾸 대신 헤헤 웃었다. 스티비는 겨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아폴로니아를 훑으며 말했다.
“리차드는?”
오스카가 다시 울상을 지었다.
“술 마셨어.”
“술을 마셨다고?”
리차드는 써니보이와 그가 그렇게 떠나자마자 술을 찾았다고 했다. 그것도 평소에는, 아니 아예 손도 대본 적 없는 판매용 술을 마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업이 시작하기도 전에 일찌감치 뻗었다고 했다. 공연도 당연히 올리지 못했다. 사람들한테는 아프다고 해뒀어. 스티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써니보이가 미안하다고 말했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두 사람은 그럭저럭 영업을 잘 끝마쳤다. 이정도면 잘 마무리했다. 마지막 의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오스카가 말했다. 스티비는 오늘 새벽 리차드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그들의 마무리는 언제나 리차드의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 직사각형 하늘 아래의 새벽을 마무리 짓는 것도 언제나 리차드였다. 리차드가 일어서면, 스티비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그대로 고개를 위로 들어 희미하게 빛나는 아폴로니아 간판의 불이 꺼질 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가 아폴로니아로 들어와서 아침까지 앉아있곤 했다.
오늘도 별다를 건 없을 것이다. 스티비는 그의 곁으로 가면서 자신이 나오지 않았던 새벽의 그를 상상했다. 그러다가 그는 리차드가 어깨에 담요를 두르지 않았다는 걸 발견했다. 하필 스티비도 자켓을 걸치지 않고 나왔다. 그는 추위를 타지 않는 편이었으므로. 리차드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었던가? 하지만 그는 리차드의 숨이 흩어지는 풍경을 본 적이 없었다. 네가 정말 살아있긴 한 걸까. 리차드의 옆에 앉으면서 스티비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스티비는 늦게 들어와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려고 했었다. 이것이 하나의 연극이라면 막을 여는 것은 언제나 그였으므로. 그러나 이 정적을 깬 건 느릿하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떠나지 마.”
어쩌면 환상은 자신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잡을 수 없는 것이다. 스티비는 그가 이 새벽을 기억하지 않기를 저도 모르게 빌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모든 걸 기억하기를 바랐다. 처음부터 전부 다.
“어딜 떠나는데?”
“아폴로니아.”
“뭐?”
스티비가 리차드를 바라보았다. 리차드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는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써니보이는 위험을 경고해주려 왔다. 조심해, 걱정 마. 이 두 마디를 해주려고 그는 아침부터 아폴로니아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건…… 걱정 마.”
스티비가 할 수 있는 건 이 말이 전부였다. 써니보이가 그랬듯이. 하하, 리차드가 김빠진 것처럼 소리내어 웃더니 뭐라 웅얼거렸다.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모든 게 대본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었다. 그는 겨우 대본의 대사를 떠올린다. 그의 대사는 침묵이다. 하필 오늘은 달도 밝지 않다.
그들은 한참을 아무 말도 없이 있었다. 스티비는 많은 대사를 건너뛰어 그가 바로 퇴장하는 장면으로 넘어가기로 한다. 결말은 리차드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그는 일어선다. 아주 천천히, 리차드가 기억하지 못하도록.
“스티비.”
스티비가 우뚝 멈추어 섰다. 그는 몇 번이나 더 내 심장을 떨어뜨리려고 하는 걸까. 어쩌면 실험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집트 사람들의 사후 세계처럼, 언제의 심장이 더 무거운가 알아보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죄는 쌓일 수밖에 없으니까.
“난 아무 데도 안 가.”
“갈 거잖아.”
하, 하고 스티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렴풋하게 술 냄새가 나는 거 같기도 했다. 정말, 정말 그가 오늘을 기억하지 않기를. 그가 여전히 술에 취해 있기를. 그는 이제 이 골목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연극은 끝났다. 조명을 끄는 건 자신이다. 조명을 꺼도 금빛 아지랑이는 남겠지만.
“됐어, 넌 기억도 못 할 거……”
“네가 할 거잖아.”
동시에 떨어진 모든 것은 같은 순간에 땅에 닿는다. 그것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짊어진 심장이든지 간에, 우리의 심장은 함께 박살날 것이다.
스티비가 다시 뒤를 돌았다. 리차드는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신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왜 너에게 그와 같은 눈동자를 주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누가 이 심장을 그토록 무겁게 만들었겠는가.
“네가 기억할 거잖아.”
써니보이, 이게 왜 죄인가요. 그걸 죄라고 부르기 때문이야. 누가 이걸 죄라고 부르기 시작했죠? 글쎄, 아마 빛이 있으라고 말한 사람이겠지. 빛? 그래, 우리를 태울 빛.
“기억해, 오늘을.”
우리는 오늘을 영원히 잊을 것이다. 신조차 오늘을 기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신만이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므로.
“대답해.”
아폴로니아의 불이 꺼졌다. 리차드는 그가 자신의 말을 거역할 수 없음을 알까.
“……그래.”
스티비가 말했다. 곧 해가 뜰 것이다. 그는 방의 불을 켜놓고 왔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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