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엘

기간제 희망

현대 고등학생 AU / 엘뤼카노

*사망 소재 주의(괜찮습니다 유령으로 돌아왔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대강 마무리지었습니다. 더 이어 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러프퀄리티입니다 죄송합니다……


장마가 시작될 즈음, 벚꽃이 만개할 때 죽어 사라졌던 학생이 귀신이 되어 돌아왔다는 소문이 전교를 휩쓸었다. 이제 슬슬 기말고사도 끝났겠다, 전환기 프로그램만을 코앞에 두고 학급 분위기가 어수선해질 무렵이었다.

"그거 들었어? 구관에……."

"에이, 설마. 귀신이 어딨다고 그래."

"정말이야. 5반에 내 친구가 봤댔어. 또 2학년 중에서도……."

비가 쏟아지지는 않지만,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공기에는 물비린내가 짙게 배어 있었다. 오유월 즈음에는 비가 오면 산뜻한 흙 내음이 퍼졌는데, 이제 그런 시절도 끝이다. 아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낡은 선풍기가 탈탈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묻힐 즈음에서야 학생들의 세부 특기사항을 작성하던 선생님이 한 마디를 던진다. 얘들아, 수능 준비 안 하니? 너희 이제 수능이, 어디 보자……. 한 120일은 남았나? 그 말에 아이들은 아아, 쌔앰. 저희 7모 본 지 꼴랑 이틀 됐는데, 사흘 전에 기말 끝났는데, 하고 불평 불만을 뱉으면서도 싹 조용해지고 만다. 고등학교 3학년에게 있어 수능이란 단어는 꼭 그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는 법이었다.

엘뤼엔은 그제서야 이어폰의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해제했다. 끼고만 있어도 물에 잠긴 듯 온 세상이 먹먹하게만 느껴져 그리 선호하지는 않음에도 이렇듯 이 기능이 필요한 기능이 더러 생기고는 했다. 하지만 엘뤼엔은 기껏 펼쳐 둔 문학 지문을 읽으면서도 그 내용이 뇌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다른 생각이 자꾸만 비집고 들어오는 탓이었다.

왜 항상 귀신 이야기는 학교의 구관에서부터 시작하는가. 실상 거의 버려진, 학교에서 가장 낡은 부분이라 그런 걸까. 그리고 왜 하필 소문의 대상이 그였을까. 가장 최근에 죽은 학생이라, 써먹기가 쉬워서? 그리고 혹여 그 소문이 진짜라면, 그는 왜 하필 구관을 제가 머무는 곳으로 정한 걸까. 학생들이 떠드는 것처럼 귀신이 구관에서 나타나는 건 클리셰고 그걸 지키는 게 미덕이라서?

엘뤼엔은 어려운 문제는 잘 풀어도 죽은 사람의 속내만큼은 알지 못했다. 귀찮음 많은 담임에 의해 3월 2일부터 고정되어버린 좌석. 엘뤼엔의 옆자리에는 2개월 반 동안 사람 대신 국화꽃만이 놓여 있다.

*

결국 엘뤼엔은 점심 시간에 직접 구관에 가 보기로 했다. 사실 구관이라 해봤자 신축 건물이 들어선 지 고작 2년이라 생활감도 꽤 묻어있었고 여전히 이동 수업 시간이면 이곳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도 많았다. 조금 더 거슬러 가자면 엘뤼엔이 1학년이었을 시절의 학급도 바로 이 구관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비록 얼마 전부터는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에 알아서 수업만 듣고 죄다 튀어버리기 바빴지만. 그 귀신이 되어 돌아왔다는 학생을 아는 사람은 아는 사람대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대로 그를 피해다녔다. 그렇다면 자신은 왜 이곳으로 향했는가.

"……."

…글쎄.

그러나 명확한 것은 엘뤼엔은 반드시 그 소문의 실체를 밝혀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다는 것이다. 입시를 위해서라도 그랬다. 귀신의 정체를 몰랐을 때는 괜찮았는데, 알고 나니 괜히 눈에 밟히고 하루 종일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다.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까지 애틋한 사이는 아니었을 텐데, 우리가.

그렇다면 지금의 감정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단순히 그가 귀신으로 돌아왔다는 소문을 접했기 때문에 싱숭생숭해진 건가. 죽음이라는 소재가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고등학생들에게는 꽤나 자극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소재라 더욱 그렇게 느끼는 건가……. 전부 의미 없는 생각 뿐이었다.

구관을 교실로 사용했던 마지막 세대인 엘뤼엔의 학년이 졸업하게 되는 이번 겨울, 학교는 이 구관을 통채로 리모델링한다고 했다. 그렇게 보자니 낯설면서도 눈에 익은 복도가 새삼스레 보였다. 1학년 때 한 학기만 사용했던 건물일 텐데도 반 년 후면 사라지는 곳이라 그런가 출처 모를 그리움이 느껴진다. 엘뤼엔은 잠자코 계단을 올라, 3층에 위치한 구 1학년 6반 교실로 향했다. 큰 이유는 없었다. 그저 가장 익숙한 곳이 그곳이기 때문이다.

"……."

소문이 돌기 전까지만 해도 구관은 은근 아이들이 몰리는 곳이었다. 조용하고 왠지 모를 차분한 분위기에 점심 시간이며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은 이곳을 찾았다. 신관에 비해 이곳은 선생님의 발길이 덜 닿기 때문이기도 했다. 엘뤼엔에게는 다행이라 해야 할지, 말했듯 지금에서야 옛 말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없는 것에 만족하며 엘뤼엔은 익숙한 반 문을 열어젖혔다. 이동 수업에 사용되지 않는 교실인지, 어째 별로 달라진 것도 없다. 해봤자 문의 경첩이 조금 느슨해진 것 정도일까…….

그리고 엘뤼엔은 기어이 마주하고 말았다.

마치 그게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카노스."

"안녕, 엘뤼엔."

투둑, 툭. 투둑.

얇았던 빗줄기가 점점 굵어져 간다. 그 소문 속 귀신의 정체, 카노스는 그저 웃고 있을 뿐이다. 창문을 죄 열어젖혀 나무 재질의 책상은 젖어만 가는데 카노스는 하나도 젖지 않은 기색으로 웃는다. 기억 속의 카노스와 그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듯하다. 어쩌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두 달 반은 떠나간 사람을 잊기에는 한참 부족한 시간이었고, 아마 이 귀신은 카노스가 맞을 것이므로.

"나 보고 싶었어?"

"……."

엘뤼엔은 그 말에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평소였다면 했겠냐, 고 부러 날을 세워 말했을 것을. 그 말에 그래? 하면서 떠나가기라도 했다가는 그대로 만나지 못할 사람이라 그런 건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허공을 통통 튀어오는 모습이 얄밉기 짝이 없다. 원래도 엘뤼엔보다 키가 컸던 것이 공중에 떠 있으니 그 간격이 더 커졌다. 카노스는 아무 말도 못하고 인상만 찌푸리는 엘뤼엔을 보고 갸웃하다가 주술적 행위라도 하듯 그 주위를 빙빙 돌았다.

"…설마 진짜로? 이야, 이거 영광인걸. 너도 그럴 줄은 몰랐어."

"너……. 하. 아니,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사실 엘뤼엔은…….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정말 신경이 너무 쓰여서 거짓이라는 사실만 확인하고 돌아갈 셈이었다. 그들의 1학년 때의 학급에 찾아가 보니 그곳에 진짜로 그가 있었다, 는 건 애당초 상정한 시나리오도 아니란 말이다... 더불어 엘뤼엔은 유령 따위를 믿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그의 이성이 매우 견고하다는 것 뿐이었다.

"어쩌다가 이 꼴이 됐지?"

"응? 어어, 이거... 음, 그냥. 죽는구나... 싶었는데 어느 순간에 이렇게 되어있던데? 난 순간 전부 꿈인 줄 알았는데, 묘하게 몸이 반투명해졌길래, 아, 꿈은 아니구나. 싶었지."

스스로의 죽음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 아닌가.

엘뤼엔은 미간을 좁혔다. 카노스는 그의 죽음이 일으켰던 파장 같은 건 모르겠다는 듯 천진하게 굴었다. 늘 그렇게 매사를 능구렁이처럼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 건 알았다만, 본인의 죽음까지 그리 대할 줄은 몰랐다. 혹은 스스로의 죽음이기에 그리 가벼워질 수 있는 건가. 그리고 동시에 엘뤼엔은 이런 면에서는 카노스와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만져본 카노스의 손은 시체의 것처럼 차가웠고, 닿고 있으나 닿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반투명한 젤라틴을 만지는 듯한 기분이다. 그에 카노스가 시선을 눈치챘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뺐다. 자기,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만지면 부끄러워, 하는 소리는 덤이었다. 헛소리도 이만한 헛소리가 없다.

"그럼 이제는 너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곳에 계속 남아있을 건가? 지박령처럼?"

"어, 아마 그건 아닐 거야."

걱정 마,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거야. 망령이 머무르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태평한 목소리에 이유 없이 열이 솟구친다. 카노스가 죽은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카노스는 이제는 커튼이 휘날리는 창문 너머를 빤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 장마가 끝나면 나는 사라져."

괜찮잖아, 그치? 난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 사실 이곳에 나타난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고. 다들 날 피해서 구관에 잘 오지 않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너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카노스의 목소리가 궃은 빗줄기 소리에 반쯤 묻혀 흐리게 들렸다. 엘뤼엔은 원인 모를 허탈함에 기어이 눈가를 찡그리고 만다.

오랜 장마의 시작.

기간제 재회의 시작이었다.

*

점심 시간과 방과 후면 엘뤼엔은 1학년 6반 교실이었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노스는 언제나 그곳에 앉아있었다. 어떤 날은 창문을 열고 비를 맞을 수도 없으면서 그를 즐기거나, 책상을 이어붙여 뒹굴거리기도 하고, 1학년 때 담요를 놓고 간 친구의 것을 훔쳐 허공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기도 했다. 그는 유령 주제에 살아있는 고등학교 3학년생들보다 활력이 넘쳐 보였다. 그런 카노스를 두고 엘뤼엔은 특별히 애틋하다고 할 만한 짓을 하지 않았다. 평소 점심 시간에 야자실에 들르는 것마냥 문제집을 챙겨, 카노스를 구경하며 문제를 풀 뿐이었다.

"엘뤼엔은 정말 하나도 안 변했네."

"두 달 반 동안 사람이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도 좀 웃기지 않나? 그리고 고3이니까."

"그런가? 냐하하. 그런 점을 좋아하는 거지만. 잘 변하지도 않고, 성실하고."

엘뤼엔이 펜을 놀리던 손을 잠시간 멈추고는, 멍하니 카노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잠시 갸웃하던 카노스도 엘뤼엔을 보고서야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정말 그냥 친구 사이에 지나지 않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그들은 하필이면…….

곧이어 카노스가 손을 내젓고 애써 유쾌함을 위시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그냥 잊어줘, 알았지?"

"뭘 말이냐."

"모든 걸."

우리의 관계와 감정 같은 것들을. 그리고 나의 존재까지도, 널 위해서.

토막난 단어 조각들이 엘뤼엔의 귀에 박혔다. 그 사실이 못내 불쾌했으나,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엘뤼엔은 또다시 답지 않게 굳고 말았다.

죽은 사람을 여전히 잊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비참하고 슬픈 일인가.

하물며 그 사람이, 애틋하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일기예보에서는 이례적인 장마 기간이 찾아왔다고 떠들고 있었다. 비는 이 주 내내 그치지 않고 내릴 예정이었다. 반 아이들은 축축한 공기에 불만을 가졌고, 고온다습한 환경에 장마 전선은 언제쯤 지나가냐며 불평했다. 그러나 엘뤼엔은 생각한다. 완전히 접고 이별하기에는 그 시간이 너무 짧다고.

하늘이 뚫린 듯 세차게 비가 들이친다. 보다 못한 엘뤼엔이 정적 속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휘날리던 커튼이 잠잠해졌음에도 카노스는 여전히 이질적이게만 느껴졌다.

"잊으라는 말을 참 쉽게도 하는군."

"말했잖아, 널 위해서라니까."

"시끄러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야. 먼저 훌쩍 가버린 놈이 잘도 말을 얹는군."

"……."

결국 이 주제에서 카노스가 엘뤼엔을 이길 수는 없었다. 엘뤼엔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아예 미적분 교재는 덮고 생명과학 1을 꺼냈다. 암기라도 하겠다는 요량이었다. 그리고 남는 한 손으로는 습관처럼 카노스의 손을 잡았다. 여전히 그 손에는 온기가 없다. 잡힌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카노스가 한숨처럼 말을 잇고 만다.

"차라리 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말 걸 그랬어."

"…뭐?"

"그거 알아? 나와 친분이 있었던 사람 중에서 날 본 사람은 너밖에 없어. 내가 그들만은 열심히 피해다녔거든. 뭐, 걔들도 날 피해다녔겠지만."

"……."

"하지만 엘뤼엔. 너는 조금 달랐잖아. 우리는, 그래. 어쨌든 서로를 사랑했고, 나는 너무 갑작스레 죽었으니까. 그리고 너는 심지가 굳은 애니까 꽤 깔끔하게 이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네가 나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길 바랐어."

그런데 막상 만나 보니까... 이제는 잘 모르겠는걸. 어쩌면 좋지.

엘뤼엔은 이제 기꺼워해야 하는 것인지, 기막혀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원래 빼앗겼다 다시 되찾은 것에 대한 애착은 강하게 자리하는 법이었다. 엘뤼엔이라고 그리 예외가 되지는 못했다. 아무리 그 끝을 알고 있어도 본능적인 감정은 어쩔 수가 없다. 원래 가장 잔인한 고문이 희망 고문이라고 하지 않던가……. 차라리 정말 구관에 오지 않는 게 맞았을까. 카노스의 말대로 만나지 않았다면 정말 모든 걸 깔끔하게 잊을 수 있었을까?

그 모습을 보던 카노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어느 새 점심시간의 막바지를 알리는 예비종이 쳤다. 지금 당장 출발해도 신관 5층까지 올라가려면 꽤 빠듯할 것이다.

"내가 뭔가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전부 내 욕심이겠지."

"…카노스."

"들어가 봐, 엘뤼엔. 아무리 전환기 프로그램이라도 수업에 참석은 해야 하잖아? 천하의 모범생 엘뤼엔이 수업 시간에 지각이라도 했다가는 내일 점심시간 때까지 수군거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을 걸."

"……7교시가 끝난 후에 다시 오겠다."

카노스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유령이니만큼 당연한 일이지만, 유독 그는 웃기만 하면 그 이질적인 신비성이 부각되었다. 엘뤼엔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구관을 빠져나갔다.

여전히 비는 끝도 모르고 쏟아지고 있었다. 우습게도, 엘뤼엔은 그 사실에 그나마 위안을 받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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