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토우] 부재의 밤

이젠 문을 닫고 자지 않으면 감기 걸리기 좋은 날씨였다. 따뜻한 날과 밖에 서 있는 것만으로 기운이 빠질 정도로 더웠던 날이 지나고, 이제 아침은 6도 정도로 떨어졌다. 바깥 날씨로 시간이 흘렀음을 깨달았다는 건 옆에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차가운 공기가 방을 메웠으나, 토우야는 이불을 꼭 덮은 후 아직 울리지 않은 검은색 알람 시계를 쳐다보았다. 값이 비싸고 싸고를 떠나서 토우야에게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면 있는 물건이었다. 동거가 확정됐을 때 100엔 숍에서 처음으로 산 물건이자 매일 아키토가 조깅을 나가기 전, 잠에 든 토우야를 위해 끄고 나갔던 시계기도 했다.

귀를 울릴 정도로 큰 소리가 들리면 토우야는 이불을 덮고 몸을 뒤척였다. 잠을 확실하게 깬다는 광고는 완전 거짓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키토는 토우야가 깨지 않도록 알람을 끈 뒤, 조심스레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는 마지막으로 토우야가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하고 자주 가던 코스로 조깅하고 돌아오곤 했다. 100엔밖에 안 하는 것 치고는 제대로 시계 노릇을 한다며 아키토는 중얼거렸던 게 가까이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은 왜일까. 이젠 새벽에 자명종이 울리지도 않을 것이고, 굳이 자명종의 타이머를 맞출 필요도 없었다. 휴대전화로 시간만 맞추면 알아서 되는 시대에서 아날로그를 고집한 건 두 사람의 고집이었다.

짐을 풀고, 같은 시간을 보낸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을 행복이었다. 금요일 저녁이 되면 같이 소파에 앉아 손을 잡고 영화 채널에서 영화 한 편을 보고, 주말에는 답지않게 늦잠을 자서 해가 중천에 걸렸을 때 일어나기도 했다.

같이 산 침대는 둘이 눕기엔 약간 좁아 고개를 돌리면 아키토의 얼굴이 보였다. 조금이라도 틈을 만들려면 붙어서 자야 했으나, 이에 대해 불평불만은 늘어놓지 않았다. 아키토가 토우야를 끌어안으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몸을 밀착하자, 귀를 대면 같은 박자로 뛰는 심장 소리와 숨이 오르내리는 게 느껴졌다. 콧김 때문에 간지럽지는 않을까 싶어 아키토는 토우야의 뒷머리에 자기 오른손을 대고는 감쌌다. 서로의 체온이 전해지면 잘 자라는 말도 잊을 정도로 금방 잠에 빠졌다.

 

무심결에 왼쪽 팔을 뻗어도 푹 꺼지는 매트리스의 감촉. 사람이 있어야 하는 공간은 비어있었다. 옆자리를 확인하고 고개를 돌린 토우야는 이제 베개가 하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혼자 쓰는 침대가 이리도 넓단 걸 느낀 것도 오랜만이었다. 온기가 없이 차가워진 침대 커버는 토우야가 손대고 있던 부분만 조금 따뜻해질 뿐이었다.

지금이 몇 시지. 알람 시계를 들어 확인하자, 오전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원래라면 이쯤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을 채비를 하고 있을 터였다. 시계에서는 째깍, 째깍. 초침 소리만이 들렸다. 고요함 속에서 초침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려올 수밖에 없었다. 물건을 둬도 빈자리는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게다가 눈을 뜨면 잘 잤냐며 끌어안던 체온도, 이제 잠에서 깨야 하지 않겠냐며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손길도, 더는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일어나서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창문을 닫으려 창틀을 잡았다. 시체처럼 누워 무기력하게 있는 것보단 나았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보아 어젯밤에 환기하고 닫고 잔다는 걸 깜빡한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길어지고, 참새가 전깃줄에 앉아 지저귀는 소리를 듣던 것도 잠시, 그는 창밖의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씨와 전봇대 사이를 굴러다니는 낙엽은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찬 공기를 한 번 크게 들이마신 토우야는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토우야는 욕실로 들어가기 전, 커피라도 한 잔 내리기로 했다. 어차피 마실 사람은 자기밖에 없음에도. 예전에 가전제품 매장에서 구했던 커피머신은 어제도 썼는지 깨끗하게 닦아져 있었다. 그는 식기세척기에서 머그잔을 가져와 커피가 나오는 부분에 대고, 싱크대 근처에 있던 서랍을 열어 캡슐을 집어 들어 커피머신에 집어넣었다. 갈색의 액체가 머그잔을 채웠다. 토우야는 잔을 들어 소파에 앉아 그것을 홀짝였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라도 볼지 싶어 리모컨을 들었지만, 왜인지 볼 기분이 들지 않았다.

조용한 거실에서 커피 홀짝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바닥이 드러날 즈음, 그는 설거지통에 잔을 넣고는 욕실에 들어갔다. 반쯤 닳아버린 칫솔과 주황색과 파란색 플라스틱으로 된 물컵, 절반 가량 남은 샴푸와 바디워시의 양, 수증기로 덮이지 않은 거울과 천장은 토우야 이외에는 사용한 흔적이 없음을 보여줬다. 샤워기로 물을 튼 뒤, 온도조절을 하고 샴푸를 묻혀 머리를 감고, 양치질하며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내고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려도 바깥은 조용했다. 원래라면 식기끼리 부딪치며 내는 소리와 가스레인지가 켜지는 소리, 재료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가 들려야 했다.

 

아키토가 남기고 간 자리는 토우야에게 크게 와 닿았다. 부엌으로 가 식탁을 보자, 아침마다 해주던 아침밥이 보이지 않았다. 식탁 위에 올려진 밥상 위는 아키토가 그간 얼마나 노력하였는지를 볼 수 있었다. 잘 익은 흰 쌀밥과 삼 일에 한 번씩 바뀌는 메뉴, 커피를 좋아하는 토우야를 위해 머그잔에 내린 블랙커피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모두가 익숙했어야 할 식탁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해 먹어야겠다 싶어 그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토우야가 혼자 있는 날이 염려되어 전날에 미리 만들어 둔 반찬통에는 아키토의 글씨로 <굶지 말고 반찬 해 놨으니까 혼자 있는 날에 꼭 챙겨 먹어, 토우야.>라고 적힌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었다. 3층 탑을 세운 반찬통에는 감자볶음, 양념이 잘 버무려진 밀키트로 만든 닭갈비 등등 전자레인지로 돌려먹으면 되는 것 위주로 담겨 있었다.

토우야는 냉장고에서 문을 닫아달라는 경고음이 날 때까지 그의 글씨가 적힌 포스트잇만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이런다고 달라지는 게 하나도 없었다. 미련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작은 흔적이라도 붙잡고 있는 것 외에는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에게 남아있는 건 몇 시간이 지나도,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와 이제는 하나 더 놓을 필요가 없어진 그릇과 식기뿐이었다.

제 몸 하나 편해지자고 반찬통을 꺼낼 순 없었다. 이것마저 먹어버리면 아키토의 흔적이 아예 없어지는 거나 다름없었다. 빈속에 먹은 커피 때문일까, 아니면 인정하면 닥쳐올 두려움 때문일까. 제대로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울렁였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고, 가슴은 답답해졌다. 손이 떨리고 위에서부터 흔들어 대는 느낌에 토우야는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닫혀있던 변기 커버를 끝까지 올리고, 그는 속을 비워냈다. 아까 먹었던 커피 탓에 위액과 섞여 나온 토사물은 연갈색을 띠고 있었다. 속에 있던 걸 털어낸 것뿐인데도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토우야는 한동안 화장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못했다. 인정하고 싶지만 인정할 수 없는 한 점의 상실이었다.

 

약 삼 십여 분이 흘렀을 때였다. 토우야는 속이 진정되자, 물을 내렸다. 손을 비누로 깨끗하게 씻고, 아키토가 남기고 간 흔적을 먹어 치울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반찬을 새로 해야 했다. 그가 만들었던 것과 비스름하게 만들지 싶어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냈다. 싱싱한 채소와 아직 자리를 채우고 있는 달걀, 절반 이상 남아있는 깡통에 담긴 햄과 잘 깎인 감자, 밥솥에는 절반 정도 밥이 남아있었다. 이 정도면 아키토가 해줬던 감자볶음과 볶음밥 정도는 만들 수 있었다. 그가 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할 수 있을 거라며 의자 위에 걸린 앞치마의 끈을 질끈 동여맸다.

우선 양파와 감자를 자르는 것부터 시작했다. 당근도 넣으면 좋다고는 하나, 아키토가 싫어하는 음식이라 굳이 넣을 필요가 없어 둘의 식탁에는 당근이 빠져 있었다. 토우야가 싫어하는 오징어 역시 식탁에 올라오지 않았다. 서로를 배려한다는 건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부러 싫다는 음식을 넣어 기분 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억지로 먹여선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토우야는 양파가 있을까 싶어 다시 한번 냉장고를 열어 확인했다. 이젠 반찬통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에 있을까 싶어 항상 채소를 넣어두는 칸을 열어보자, 반 정도 남은 양파가 랩에 잘 싸여 있었다.

그는 랩을 조심스럽게 벗겨내고는 도마에 양파를 썰기 시작했다. 알싸한 향이 올라와 눈물이 맺힌 토우야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고는 마저 썰었다. 써는 데만 급급해 모양새는 그다지 예쁘지 않았다. 그래도 썰었단 것에 의의를 둬야겠지. 지옥 같은 양파 썰기가 끝나고, 감자에 싹이 나진 않았는지 확인하던 그는 만질만질한 감자를 하나 들었다. 잘 깎여 있어 칼로 깎을 수고는 덜었다. 우선 도마에 올려 직사각형의 형태가 되도록 썰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썰어야 하는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대부분 음식은 아키토가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하는 걸 보면 일정한 두께로 썰어서 만드는 것 같던데. 그는 어깨너머로 보던 걸 떠올려 투박하나, 감자채를 만들었다. 다행스럽게도 햄은 부드러워서 감자보단 쉽게 썰려 두께가 일정했다. 재료를 한곳에 잘 모아둔 토우야는 이제 볶아야 한다며 잘 씻어둔 프라이팬을 꺼냈다.

팬에 넉넉히 식용유를 두르고, 불판 위에 올리자, 쇠가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가스레인지는 키기 무섭게 불이 올라왔다. 기름은 물과 달리 끓는 게 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는 아키토의 말이 떠올랐다. 온도계가 있으면 확인하기 쉬우니 감을 잡기 어렵다면 써 보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토우야는 아키토가 조언해 준 대로 온도계를 가져와 온도를 확인하고는 양파를 넣어 볶다가 감자를 넣었다. 커다란 주걱으로 젓다 보니 이상한 게 있었다. 분명 아키토가 만들 때는 감자가 팬에 눌어붙지 않았는데 토우야가 한 건 서서히 눌어붙기 시작하는 거였다. 감자 전분을 씻어내는 걸 깜빡한 것이었다. 결국 밑은 다 타고, 햄은 미리 넣어 부서져서 젓가락질하는 거로도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으며, 반은 익고 반은 익지 않아서 좋지 않은 식감, 소금과 후추로 간만 맞춘 텁텁해진 감자볶음이 완성됐다.

 

괜히 머쓱해진 토우야는 숟가락을 들어 밥과 감자볶음을 입에 넣었다. 나름 이건 성공할 수 있다고 만든 볶음밥 역시 탄 맛이 입에 감돌았다. 쌀 역시 제대로 볶지 않아서 차갑게 식어 있었고, 어떤 곳은 간이 되어 있지만 어떤 곳은 간이 제대로 배어있지 않았다. 누구나 기본적으로 할 수 있다는 된장국도 소금이 왕창 들어가 한 모금 들이켜는 것만으로도 뱉어내고 싶을 정도로 짰다.

가장 답이 없는 건 설거지통에 들어간 녀석들이었다. 커피야 익숙하게 내리던 거니 그렇다 치지만, 감자와 쌀이 눌어붙은 프라이팬을 닦아내는 건 일이었다. 불이 안 난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아키토가 해준 맛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수저를 내려놨다. 음식물 쓰레기가 되면 곤란해서 어떻게든 먹어야 했겠으나, 성공했으면 모를까. 거하게 실패하여 먹는 보람도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앞에서 맛있게 먹으라며 웃어주던 사람이 없으니, 더 먹고 싶단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꾸역꾸역 입에 집어넣어야만 했다. 아키토가 해준 맛을 느끼면 어느새 반찬을 다 먹어버릴 것 같았다. 비어버린 반찬통을 본다면 무너질 것 같았다. 차라리 썩더라도 이대로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쨌든 비운 식기와 눌어붙은 프라이팬을 정리하다 보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정신이 없었지만 놓을 수는 없었다. 오늘 처음 한 말은 잠깐 쉬자.였다.

억지로 먹은 바람에 속이 얹힌 건지 토우야는 수시로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다. 밥알과 아직 소화되지 않은 감자와 햄, 양파 등이 섞인 토사물을 내리고는 민트 향이 나는 치약으로 양치하고는 물로 입을 헹구고 나와 침대에 누워서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으나, 남아있는 걸 먹으면 또 속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킬 게 분명했다. 바깥에선 전봇대 아래에서 누군가가 통화하는 목소리와 배달하는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고, 어두워진 하늘만이 다사다난한 하루를 위로했다. 위로라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눈을 감아도 달라지는 거 하나 없는 하루에 토우야는 눈을 떠 비척비척 몸을 움직였다. 늘 반복되는 날과 차가워진 침대 옆, 창문을 닫아도 영 따뜻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방, 항상 마시던 블랙커피로 아침을 시작하는 것, 반찬과 국은 만들어도 변한 게 없었다. 변한 게 있다면 역시….

설령 성공했다 한들 그것도 비워내는 바람에 토우야는 날이 다르게 수척해졌다. 툭 치면 쓰러질 것 같다, 가련한 여주인공이란 수식어가 어울리는 듯했다. 잘 부쳐진 계란말이와 꼬들꼬들하게 지어진 밥이어도 아키토의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옛날의 추억이 그를 깊은 바닥으로 잠기게 했다. 숨도 쉬지 못하는 빛이 통하지도 않는 곳에서 잠겨 죽는 기분이었다. 주변이 본다면 걱정의 목소리로 괜찮냐고 물었겠으나, 토우야의 귀에 그들의 걱정 어린 말이 들릴 리는 없었지만, 폐를 끼치는 것도 사양이었다.

 

소파에 앉으려다가 실수로 튼 텔레비전에서는 MC가 “오늘은 가을꽃이 예쁘게 피었습니다. 날도 선선하니 기분 전환으로 좋아하는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나가 보시는 게 어떨까요?”라며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기분에 나가라니 다른 사람이었으면 장난하는 거냐고 성을 냈겠으나, 토우야는 채널을 돌리지도 않고, 그녀가 한 말을 듣고 있었다. 사람들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옷차림을 하고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인터뷰 요청에도 응하는 이들은 항상 집에 있어서 조금 걸었더니 기분이 좋아졌다며 손가락으로 브이 사인을 그렸다.

그러고 보니, 바깥에 나가지 않은 지 얼마나 됐지. 식재료도 떨어져서 근처로 장을 보러 가야 한다는 마음에 그는 옷을 입기 위해 텔레비전을 끄고, 서랍장을 열었다. 나갈 일이 없어 잘 개켜진 빨래는 아직도 섬유유연제 향이 남아있었다. 아키토가 잘 어울린다고 했던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서 빗으로 머리를 빗은 그는 문을 열었다. 쇠로 된 문고리를 잡자 무척이나 차가웠다. 열쇠로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자, 눈 부신 햇살에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손바닥으로 가려도 틈 사이로 빛은 새어들었다.

 

거리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큰 교차로를 걸어가는데도 인파에 밀리기 십상이었다. 사람들을 기다리느라 시계를 보는 이도 있었고, 아이들은 친구들과 한데 모여 어디로 갈 건지 신이 난 얼굴이었다. 템포가 빠른 음악과 가을에 걸맞게 발라드나 이별 가사가 주를 이루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토우야는 다 먹어가는 식재료가 무엇인지 머릿속으로 정리하다가 익숙한 음색에 멈췄다. 평소 아키토가 자주 듣던 아티스트의 음악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옮긴 곳은 평소 쇼핑하던 옷가게, 팬케이크와 커피를 자주 먹으러 갔던 카페였다. 장을 보러 나갔다는 목적은 이미 방향을 잃은 지 오래였다. 어디를 가도 아키토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토우야는 사무치는 그리움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건 아니었지만, 늪은 보란 듯이 그를 끌어들였다. 계속해서 따라다니는 추억이란 이름의 그림자가 토우야의 곁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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