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토우] 끝나지 않을 이야기

리퀘

적폐캐해주의 기사왕자 환생물 양너드


“왕자님,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여기는 위험하니, 제게 맡기시고 어서 안전한 곳으로 가세요.”

“하지만 그러면….”

“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금방 뒤따라가겠습니다.”

 

시노노메 아키토는 여전히 찝찝한 꿈을 꾸었다. 조각난 것처럼 장면만 보여주니, 자세한 상황을 알지도 못했을뿐더러 자기가 모시는 주군의 얼굴을 보려 할 때면 잠에서 깨어났다. 남들에게 이야기하면 또 그 꿈을 꾼 거냐는 반응이었다. 누구는 소설도 쓸 거면 좀 더 스토리를 짜고 쓰라며 웃기도 했다. 주마다 두세 번씩은 꿈을 꾸니 이러는 것도 쉽지 않을 거다. 최근에 꾼 꿈은 아키토가 칼을 들고, 뒤에 있는 주군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물리고 옆에 있는 병사에게 “왕자님을 잘 부탁한다.”라고 말하고는 검을 들고 적과 대치하는 것이었다. 꿈에서의 아키토는 지금보다 더 나이가 있어 보였다. 순백의 제복과 허리춤에 있는 검집. 그는 남고생이 아닌 판타지 소설에서나 볼법한 기사의 모습이었다. 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는진 알 수 없었다.

꿈의 정체도 알지 못하고 찝찝함을 뒤로한 채, 아키토는 양치질하기 위해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명종 소리도 못 듣고 푹 잔 게 얼마 만이던가. 뒤에 까치집이 지어진 건 신경 밖이었는지 아키토는 칫솔 위에 치약을 쭉 짠 뒤 거품을 내기 시작했다. 칫솔이 치아에 닿으면서 경쾌한 소리를 낼 때마다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게 느껴졌다. 항상 맞이하는 아침이었으나, 오늘은 꿈이 더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 반란을 저지하려던 걸까.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을 장면도 맞춰보면 왕자님이라 부르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근데 본다고 뭔가 달라지나. 아키토는 교복을 입고, 입에 식빵을 욱여넣은 채로 문밖을 나섰다.

이른 아침부터 거리에는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나 서류가 든 가방을 들고 피곤한 얼굴로 걸어가는 직장인들의 행진이었다. 가는 길에 친구를 만나 교실까지 같이 가자며 웃는 이들과 쪽지 시험공부는 조금이라도 했냐고 묻는 아이들까지. 교복은 달랐지만, 학생들 사는 거 다 비슷한 모양이었다. (물론 아키토는 공부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학교에 도착한 아키토는 가방을 내려놓기 위해 교실로 가던 중,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는 토우야를 보았다. 얼핏 표지를 보니 오늘은 추리소설을 읽는 모양이었다. 매번 점심을 먹으러 갈 때마다 봐서 낯설지는 않았다. 도서실에서 책을 읽거나, 정리하는 것처럼 보이던 조용한 아이. 앞머리는 답답하지도 않은지 계속 저 길이에, 안경을 쓰고 있어 약간 음침한 인상이기도 했다. 어쩐지 눈에 밟히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같은 학교임에도 마주칠 일이 없어 말도 별로 나눠보지 않았지만, 제법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는 왜 토우야를 볼 때마다 기시감이 드는지 알지 못했다. 어딘가에서도 마주친 게 아닌데. 아키토는 “또….”하며 교실로 들어갔다.

 

1교시는 수학이었다. 누가 시간표를 짜는 건지. 실로 원망스러웠다. 첫 교시부터 지루한 시간인 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시간표를 확인한 아이가 오늘이 세상에서 제일 싫은 날이라며 사물함에서 수학책을 들고 왔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수학 선생님은 항상 교과서를 들고 출석을 부르기 전, 목을 가다듬는 버릇이 있었다. 아키토는 이번에도 제 이름을 부른 걸 확인하고는 10분도 지나지 않아 책상에 고개를 떨어트렸다. 나이가 있는지 이제는 저런 모습이 익숙했던 그는 분필을 들어 수식을 적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질 즈음, 아키토는 잠에 빠져들었다. 컴컴한 어둠 속을 가르는 빛에서는 아까 보았던 장면이 그대로 이어졌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느낌에 아키토는 자기가 무의식중에 몰입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다시 기사의 시점으로 돌아온 그는 누군가가 조종하는 것처럼 팔을 뻗었다. 왜 몸이 멋대로 움직여서 앞에 있는 적을 베는지 알지 못했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거라곤 왕자를 데리고 가는 이가 저들은 반란을 일으킨 은혜도 모르는 놈들이라고 칭했다는 것. 왕자는 아키토가 걱정되는지 흘끔흘끔 쳐다보았고, 그를 인솔하는 병사는 여기에 있으면 휘말릴 수 있다며 걸음을 재촉했다. 상황을 보니, 왕정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모양이다.

아키토는 능숙하게 적의 검을 받아내며 싸웠다. 괜히 옆에서 부단장의 자리에 오른 게 아니라고 한 게 아니었다.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힘이 팔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는 일념하에서 아키토는 바닥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굳건히 지탱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혼자서 많은 적을 막는 건 무리였는지 볼에는 생채기가 났고, 제복에는 피가 묻어나왔다. 베어도, 베어도 끝이 나지 않는 싸움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는지 아키토는 거칠게 숨을 쉬었어도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적도 포기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는지 양보 없는 싸움은 지속됐다. 같은 백성끼리 싸워야 한다는 건 서로가 가진 목표와 신념이 다름을 의미했다. 아키토가 혼자라는 걸 안 반란군은 좀 더 머리를 쓰기로 했다. 뒤는 무방비하니, 기습한다면 아키토도 쓰러질 테고, 왕국이 무너지는 건 금방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한 명을 미끼로 앞세워 기사가 뒤를 신경 쓰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건 아키토도 마찬가지였는지 적과 대치하는 와중에도 기습하는 건 아닌지, 왕자는 제대로 피신했는지 확인하려 뒤를 보곤 했다. 죽어도 목숨을 보전하려는 게 아니라 왕자를 지키다가 죽었으니, 불명예는 피할 터였다.

 

적의 기습을 막지 못한 건 아키토도 마찬가지였는지 무언가에 베여 등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놀란 아키토는 잠에서 깨어나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아직 수업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선생님은 금속 재질의 안경을 한 번 올리더니 “시노노메 군,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어디 몸이 불편한 데라도?”라며 서 있는 그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아프거나 화장실이 급하면 얼마든지 손 들어요. 여긴 초등학교가 아니라, 아무도 시노노메 군을 놀리지 않으니까요.” 아키토가 돌발행동을 한 것에 아이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학교에서도 꿈을 꾸다니. 아키토는 머쓱한 건지 애먼 뒷머리만 매만졌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아이들은 아침을 안 먹었는데 수업까지 들은 자기를 칭찬해 주겠다며 매점에 갔다 온다는 말과 함께 전투적으로 돌변했다. 그 모습은 가히 적진을 뚫고 나가는 비장한 얼굴의 병사와도 같았다. 아키토는 같이 매점 가겠냐는 무리의 제안을 거절했다. 무엇보다 토우야를 볼 때마다 드는 기시감의 원인을 찾고 싶었다. 신경을 끌래야 끌 수가 없었다. 꿈을 꿀 때마다 점점 선명해지는 모습. 처음에는 실루엣으로만 보인다고 할 정도로 사람의 모습이 흐릿하여 목소리로만 상황과 인물을 구분할 수 있었으나, 이번엔 아니었다. 반란군의 모습이 어땠는지 말하라면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뚜렷했다. 왜 갑자기 꿈에서 본 것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건지, 집에서만 꾸던 꿈을 왜 학교에서까지 꾸는지. 옆반에서 책을 읽는 그를 보면서 기시감이 드는 것까지.

아키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토우야의 교실로 향했다. 우선 말이라도 붙여봐야 기시감의 근원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쉬는 시간 교실은 떠들썩했다. 공부하는 아이들은 귀마개를 끼고 집중하는 듯했고, 뒤에서는 불량아다운 복장의 아이들이 축구공을 튀기며 게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토우야는 책상 구석에 미리 수업자료를 놓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앞에 누가 왔는지도 모르는지 책에만 몰두했다. 주변 상황이 안 보이는 건가. 아키토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아오야기,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단순히 이름을 부르는 것뿐인데도 사시나무 떨듯 떠는 토우야의 모습은 상황을 모르는 누가 보면 아키토가 겁을 준 것처럼 보였다. “무, 무슨 일이야? 시노노메…….” 읽던 책도 내려놓은 그는 아키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가히 토끼가 육식동물 앞에서 살기 위해 궁리를 펼치는 듯했다.

토우야는 소문대로 조용하고 소심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꿈결에서 들려온 것 같은……. 아키토는 겁에 질린 그에게 진정하라며 겁주려고 온 게 아니라고 단지 물어볼 게 있어서 들린 거라며 간략하게 용건을 말했다.

“우리, 어디서 본 게 아니냐고…? 글쎄…….”

“뭐, 거리에서 지나쳤다거나 그런 기억은 없고?”

“……나는 시노노메를 처음 보는걸.”

“미안, 아까 했던 말은 잊어줘.”

토우야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아니라며 고개를 책상 쪽으로 숙였다. 쉬는 시간도 곧 끝나가니 여기서 더 불편하게 하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아키토는 “수고해라.”라는 말을 남기고는 교실로 돌아갔다. 어디 갔다 왔냐는 친구의 말에 아키토는 잠깐 화장실에 다녀왔다며 사물함에서 교과서를 꺼내 책상에 올려놨다.

 

종이 울리는 것도 모른 채, 책상에 턱을 괴고 생각하던 아키토는 아까의 대화를 떠올렸다. 분명 만난 적이 없음에도 마주친 것 같단 느낌이 들었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누군가가 생각날 것도 같았다. 예전에 꾸었던 꿈 중, 다급하게 “아키토!” 하며 아키토를 잡으려는 듯 손을 뻗으며 이름을 부르던 순백의 옷을 입은 남성. 비록 흐릿한 모습으로 보였지만 토우야와 나눈 대화로 확실하게 떠올렸다. 자기가 “왕자님.”이라 부르던 남성과 토우야의 목소리가 똑같았다. 이렇게까지 목소리가 같을 수 있나. 3분 뒤, 앞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분주하게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의 교실에 들어온 과학 선생님은 어수선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얼굴을 살짝 찡그린 채로 아이들이 다 앉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빈자리가 없는 걸 확인하고는 반장에게 오늘 진도가 어디냐고 물어봤다. 반장은 112쪽을 설명하다가 말았다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교과서 112쪽을 피라고 손으로 교탁을 내리쳤다. 교과서가 넘어가는 소리와 손에서 책을 놓쳐 둔탁한 소리가 나는 교실은 아까보단 다소 정돈된 모습이었다.

그는 분필을 들고 칠판에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설명까지 겸하느라 아이들은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랴, 칠판에 있는 글자를 적으랴 정신이 없었다. 어느새 흰색과 분홍색으로 꾸며진 칠판은 아이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들은 손에 필기구를 들고, 노트에 선생님의 필기를 따라 적었다. 그는 아이들이 집중하는 걸 보는가 싶더니, 쓰면서 자기 이야기를 들으라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공부하면서 경직된 모습을 보였기에 그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수업에 더 집중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며,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5분에서 10분 정도 가끔 과학자들의 이야기나, 이론이 나오게 된 배경 등등 비록 흥미를 느끼는 대상이 다를 수도 있지만, 너희들이 과학이라는 과목이 조금이나마 즐거웠으면 좋겠다며 필기하는 시간에 이런 일화를 들려주는 게 좋겠다며 듣든 안 듣던 자유라고 말했었다. 그는 아이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딱딱하게 설명만 늘어놓는 게 아닌 이해가 될 정도로 재밌게 풀어주었다. 그래서 수업이 싫거나, 과학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은 그 시간을 즐기기도 했다.

 

아키토는 수업에 집중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오늘의 주제는 아까 있었던 일과 접목한다면 단서가 나올 것 같았다. 향기나 맛으로 잊었던 추억을 되살린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을 거라며, 인간의 목소리는 우리가 말하면서 자주 듣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만큼 빨리 잊는 것도 목소리라며 며칠만 안 들어도 목소리 까먹겠다는 비유를 들어보지 않았냐며 아이들의 호응을 유도했다.

아이들은 어디 더 해보라는 얼굴로 선생님이 말하기를 기다렸고, 그는 어쩔 수 없단 듯이 말을 이어갔다. 요즘은 기술이 발전하여 전화기를 통해 목소리를 듣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때는 녹음을 해둔 거로만 의지할 수밖에 없다며, 인간의 기억력은 절대적이지 않고, 가까운 사람의 목소리가 흐릿해질수록 그 사람의 얼굴이 어땠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 것. 다시 떠올리는 계기가 아니면 사람이 가지고 있던 추억은 금방 깊은 곳으로 잠겨 나도 모르는 새에 잊을 수 있지만 상기하면 할수록 씁쓸함이 남는 것 같다며 자기가 맡은 과목과 어울리지 않게 감상적이지 않냐고 웃었다.

“선생님 차라리 때려치우고 시인이나 소설가 하세요! 어울린다.”

“녀석들, 벌써부터 사람 띄우는 법만 배웠구나.”

“에이~ 기분 좋으라고 띄우는 게 아니라 진심인 거죠! 저 선생님이 소설가로 전향하면 1호팬 될 자신 있습니다. 내가 바로 저분한테 배웠다~ 스승님이다. 하면서 자랑할지 누가 알아요.”

1호팬이 되겠단 아이의 말에 교실은 웃음으로 가득 찼다. 평소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그의 귀에 또렷하게 들려온 말은 목소리가 사람의 머릿속에서 희미해질수록 상대방의 얼굴도, 말투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키토가 꿈결 속 왕자의 모습이 기억나지 않았던 것도 선생님이 해준 것과 연관이 있지는 않았을까. 복잡함으로 정리되지 않고, 의도하진 않았어도 얽히는 느낌에 다음 말이 들리지 않았다.

“아키토, 네가 힘들지 않았으면 해. 우린 사랑하는 사이잖아.”

왕자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는 것 같았다. 어렴풋한 시야 속에서 유일하게 왕자의 존재를 알 수 있던 건 아키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왕자의 얼굴이 행복했는지, 울고 있었는지. 기사의 마지막에는 보이지 않던 표정. 단 한 가지 알 수 있던 건 그가 호위하는 병사들과 함께 멀쩡하게 살아서 몸을 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추측에 의존하는 부분이었어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기사인 아키토가 걸리는 지점은 사랑하는 왕자의 곁에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옆 반은 세계사 시간이었다. 세계사 선생님의 국가를 구분할 수 없는 지도 탓인지 말의 템포가 빠른 탓인지. 아이들은 수업을 듣는 내내 졸지 않았다. 조금만 정신이 흐려져도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없었고, 내용을 놓치면 이빨이 빠진 아이처럼 노트가 듬성듬성 빈칸으로 가득 차 있었다. 토우야는 선생님의 말씀에 집중하며 그가 하는 말도 기억하려는 모양새였다. 필기하던 중, 국어 선생님께서는 “너희들은 사극이나 옛날 문학 같은 거 많이 보거나 읽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약간 촌스럽고 유치한 전개긴 했어도 워낙에 예쁘고 멋진 배우들이 나오는 데다가 역사를 좀 안다면 그게 과장된 것이라 하여도 연기에 몰입하기 마련이었다. 아이들은 요즘 나오는 사극이 이렇다더라 하며 이야기를 토해냈다. 선생님은 이마를 짚으며 자기가 괜한 소리를 꺼냈다며 옆 반은 수업하니까 방해되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라 주의를 주었다.

토우야는 텔레비전을 자주 보진 않았지만, 점심시간에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는지라 책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원래도 책 읽는 걸 좋아했던지라 책이 가득 꽂혀있는 책장을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가을에는 독서 행사가 많이 있어 바쁘기도 하고, 사람을 상대해야 해서 정신이 어질어질할 때도 있지만 바쁜 게 끝나고 나면, 혼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 좋았다. 공부하거나 책을 자주 읽는 아이 외에 찾아오지 않는 도서관은 토우야의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장소였다.

평소 미스테리 소설을 읽는 그였으나, 최근에 토우야의 눈에 띈 작품이 있었다. 집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책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이름 없는 책. ‘이런 책이 도서관에 있었나? 왜 여태 못 봤지.’ 토우야는 적당히 빈 곳에 책을 넣으려던 중, 계속 책으로 시선이 향해 있었다. 표지도 없었지만 왜인지 그걸 읽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 하교 방송이 울리기 전까진 시간이 있으니까 조금만 읽어볼까….”

토우야는 석양을 뒤로 하고 책상에 앉아 표지를 넘겼다. 책 가장 앞부분에는 어디선가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너에게. 라는 글씨가 잉크로 적혀 있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려던 게 잘못해서 학교 도서관으로 온 걸까. 토우야는 책장을 옆으로 넘겼다.

 

소설에는 두 인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기사와 왕자. 그들의 첫 만남으로 추정되는 문단을 읽었을 즈음, 토우야의 가슴이 먹먹해져 오기 시작했다. 도입부는 화단 언저리에 피어난 들꽃을 주고 이름을 나눈 것으로 시작했다. 다른 왕족과는 다르게 순수함을 가지고 있던 막내 왕자는 제게 들꽃을 건네준 오렌지빛 머리카락의 아이를 보고 환하게 웃고 있었단 묘사였다. 남들은 왕족이 무슨 경박한 행동이냐며 주의를 주었으나 행복해서 웃었고, 마음이 편해져서 웃었다. 다른 이들에게 수도 없이 많은 꽃을 받았지만, 그가 준 꽃은 남들이 봤을 땐 초라하고, 볼품없을지 몰라도 왕자에게는 화려한 장미나, 향이 강한 꽃보다도 그에게 받은 들꽃이 더 좋았다는 독백이 적혀 있었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느낌에 토우야는 계속 집중해서 읽어보기로 했다.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토우야를 가득 채우는 건 아무도 없는 도서실의 적막함이나 차가운 공기가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왔을지 모르는 그리움이 소설을 읽을 때마다 들었고, 소설 속 왕자는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다. 성격이며, 말투며 자기와 비슷한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기사와 왕자는 그 후로도 만남을 이어갔다. 밤에는 이슬을 맞으며 몰래 정원에서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면, 아침에는 기사가 수련하는 걸 구경하기도 했다. 때로는 일탈이랍시고 왕이 없는 틈을 타 성 밖으로 나가 백성들이 사는 걸 구경하거나, 시장에서 먹을 걸 먹기도 했다. 모습을 감추기 위해 천을 뒤집어써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어도 그걸 감수할 정도로 둘이 있는 시간은 즐겁고, 소중했다. 기사는 세상을 모르는 왕자를 대신해 익숙하게 주머니에서 금화를 건네주었고, 상인은 화덕에 빵을 넣고 구웠다. 장작이 타는 소리와 커다란 쇠달구지. 작은 유리창 너머로 빵이 부풀어 가는 게 신기한 왕자는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화덕에 갓 구워진 빵은 성에서 먹는 것과는 달랐다. 겉이 약간 탔으나 설탕을 많이 넣은 건지 달콤했다. 건강을 우선으로 한 식단과 고기가 들어간 음식도 독이 들어있진 않을지 걱정하면서 먹어야 했고, 간식 역시 요리사가 해주는 것만 먹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왕족으로 태어났어야 한다고 한탄했지만, 토우야에게는 넓은 새장 같았다. 꽃이 가득 피어있는 정원과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 사람들의 칭송 속에서 자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답답한 공간에서 그의 유일한 행복은 기사와 함께 대화를 나누거나,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시장에서 사 먹은 빵은 입천장이 델 정도로 뜨거웠다. 기사는 천천히 먹으라며 왕자를 보며 행복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일탈은 갈수록 대범해졌다. 성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것과 직접 내려가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왕자는 기사의 손을 잡고 나가는 게 당연했고, 기사는 그를 지키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신분의 차이가 당연하다는 것이지 둘의 감정이 그렇다는 건 아니었다. 왕자는 기사가 보여준 넓은 세상이 좋았다. 둘도 모르는 사이에 신분을 넘어 가까이 있기만 해도 심장이 뛰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죄악은 아니다. 신분을 초월하여 이루어진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다. 방에 드나드는 횟수가 많아지고, 같이 잠을 잘 때면 예전과 같은 감정이 아니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부러 말하지 않은 건 왕자가 자기 신분을 이용하여 기사에게 감정을 강요하는 건 아닐까…하는 두려움이었다. 숨기란다고 숨겨지는 게 감정이었다면 벌써 숨겨졌을 것이었다. 숨바꼭질하는 아이들과 술래 같았다. 술래는 숨은 대상을 찾아야 하고, 숨는 대상은 술래에게 들키지 않도록 주변을 이용하여 위장하거나 몸을 웅크려야 했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기사가 얼굴이 빨개지면서 도망을 갔다는 일화나 이제야 처음으로 누구를 좋아하면서 세상을 다 산 것 같은 묘사는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마지막에는 마음을 확인하고, 기사의 왕자님을 연모한다는 말에 왕자의 뺨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란 말이 흐릿하게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보통 소설은 사람들이 상상하기 쉽게 정보를 던져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목소리나 말투는 어떻다든지, 옷차림은 어떤지부터 이목구비 묘사까지. 글은 직관적이지 않다는 걸 독자의 상상력에 맡기기에 정보가 적으면 인물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토우야가 읽고 있던 소설에도 기사와 왕자가 한 일은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으나, 기사의 외관적인 묘사는 머리카락이나 옷차림 외에는 없었다. 얼굴이 어땠는지,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 목소리는 어떤 느낌이라던가 눈동자의 색은 어땠는지. 왕자를 볼 때 표정은 어땠는지 외에는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 토우야는 더 읽고 싶었지만, 곧 하교 방송이 울릴 시간이었다. 학교 문이 잠기면 곤란했기에 토우야는 급하게 책을 가방에 집어넣고는 학교 밖으로 나왔다.

 

땅거미가 지면서 토우야를 따라다니던 그림자가 길어졌다. 멀리서는 귀가할 시간임을 알리는 종소리와 방송부 아이가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입니다.라는 목소리가 울렸다. 하늘과 지면은 다홍빛으로 물들어 후에는 어둠이 짙게 깔리려는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면 씻고, 복습하고, 남는 시간에 아까 읽던 책이라도 읽어야겠다.’ 뒤에 전개될 내용이 궁금해졌으나 우선은 집에 돌아가는 게 급선무였다. 책에 집중한 나머지, 평소보다 귀가 시간이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토우야는 집에 돌아와 밥을 먹었다. 바깥이 어둑어둑해질수록 하루가 무사하게 지나갔구나 싶었다. 오늘 아키토가 말을 건 게 당혹스럽긴 했어도 나쁜 아이라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 ‘그냥 소문만 그럴싸하게 포장된 거구나.’ 토우야는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를 아키토를 떠올렸다. 정말 옷깃만 스친 정도인데 기억에 없다거나, 거리나 시내 교차로에서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를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토우야는 밥을 먹은 뒤, 씻고 방에 들어가기 전 타이밍 좋게 집으로 들어온 아버지를 배웅했다. 아버지는 토우야의 인사를 받고 서재로 향하는 듯했고, 토우야도 방에 올라왔다. 오늘 배운 부분을 다시 한번 복습하고는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아까 읽다가 끊긴 부분이 눈에 어른거렸다. 얼른 읽고 싶었지만, 배를 채우는 건 다른 문제였다. 먹어야 할 건 먹어야 했기에 뒤에 있을 내용을 상상하는 데 그쳤다.

토우야는 누가 책을 읽을 시간을 뺏은 것도 아님에도 바로 표시해 둔 부분부터 읽기 시작했다. 뒤는 예상한 대로 기사와 왕자의 사랑 이야기였다. 행운을 불러준다는 네잎클로버를 찾기 위해 풀밭에서 몇 시간을 찾아 헤맨 것, 손이 흙으로 범벅이 될 정도로 찾았지만, 이제는 돌아가야겠다 싶던 때, 기사는 “찾았습니다, 왕자님.” 하며 커다란 네잎클로버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어렵게 찾은 걸 줄 필요가 없다고 왕자가 놀란 토끼 눈으로 봐도, 기사는 왕자님께서 찾던 것이니 드리는 게 맞는 거라며 내밀었다.

시장에서 왕자가 마음에 들어 하던 빵을 먹은 것과 밤에 잠들기 전, 입술을 맞대고 왕자가 잘 때까지 기다려준 것, 왕자의 기상 시간에 맞추어 침대 옆에 옷을 가지런히 개켜둔 것. 기사가 왕자를 위해 한 행동은 자잘했으나, 애정이 담겨 있었다. 가끔 문을 열다가 왕자가 옷을 갈아입는 걸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붉어진 귓가를 본 게 시야에 담겼다거나 눈을 감으면 기사의 입술이 제 이마와 콧잔등, 뺨, 입술에 닿았다는 이야기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모두가 동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하여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결말일 거로 생각했다.

 

행복의 시간이 길어질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불행은 빠르게 찾아왔다. 왕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 사람은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나타나면서 왕정은 붕괴하는 게 맞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한 국가의 왕의 말이 절대적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다며 새가 자력으로 알을 깨고 나오듯 이제는 모두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꿈에서 나오자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예전이라면 왕의 말이 절대적이었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전부 법이라고 믿었던 때도 있었다. 불안한 왕권을 유지하려고 세금을 무리하게 걷은 게 아니었음에도 귀족의 향락과 사치로 인해 왕실에 대한 신뢰는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혁명군은 거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벽보에 왕권 타도! 라고 적힌 종이를 붙였다. 사람들은 한데 모여 글자를 보며 이게 무슨 뜻일까? 하며 글씨 밑에 크게 그려진 그림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문자를 모르는 평민들은 당연히 무슨 뜻인지 이해했을 리가 만무했고, 그나마 학식이 있는 사람이 “이제는 왕이 하는 말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이 왕의 입을 빌려 말을 전한다는 건 시대착오적인 말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스스로 물체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수 있듯이 왕의 지배하에 살면 안 된다는 의미가 담긴 것입니다.”라며 혁명군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했다.

왕에게 순종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현 체제가 불만인 사람도 분명 존재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살 수는 없듯 반발심을 가진 사람을 주축으로 성에 쳐들어가자는 말이 있었다. 밖에서 왕정에 대해 불만이 오간다는 건 왕자도 어렴풋이 들어 알고 있었다. 기사는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왕자를 지켜야 하는 위치였다. 자국민들끼리 목숨을 버리고,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은 크게 번져가기 시작했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불씨처럼 거세게 번져가는 기세에 왕실은 항상 긴장감 속에 놓였다.

이를 가만히 듣고 있지 않던 신하들은 혁명군의 주범을 축출하여 엄벌을 줘야만 사람들이 반역을 꾀하지 않을 거라며 왕을 구슬렸다. 언젠가 사라질 갈대 같은 권력마저도 뺏길까 두려운 겁쟁이들은 자기의 말을 우선으로 들어줄 왕에게 엄벌을 촉구하였다. 결국 그들도 바람 앞에 흔들리는 등불과도 같은 목숨을 보존하고자 왕을 재촉하는 게 아니던가. 사랑하는 백성들의 손에 잡혀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것보다 싹을 제거하는 게 낫다는 신하들의 말은 혁명군에게는 살려 달라는 구걸과도 같았다. 혁명군은 이를 들어주지 않을 거란 걸 모르면서 빌빌 기는 게 우스웠다.

 

끝을 고하는 시간은 어찌도 애달프던지. 왕실 병사들은 혁명군과 최후의 최후로 맞섰으나 최전선까지 무너지고, 성문은 불타기 시작했다. 하인을 비롯하여 신하들은 자기도 죽을까 두려워 재산만 챙긴 채로 다른 나라로 망명했다. 밖이 소란스러워도 나가지 말라는 기사의 말에 왕자는 알고 있었다. 자기가 여기서 잡히면 분명히 죽을 것이고, 만약 살아난다고 해도 볼모로 잡혀 그저 형식적인 마지막 왕실의 증거로서 남겨둘 거라는 것. 혁명군의 손아귀에서 꼭두각시처럼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다가 마지막엔 누명을 쓰고 처형을 당할 거라는 걸. 왕실이 무너지는 순간과 최후는 책과 역사서를 읽어서 알 수 있었다. 기사는 왕자의 방문을 지키던 병사 두 명에게 아직도 자리에 있느냐 물었다. 둘은 “무슨 일입니까?”라며 문을 열었다. 기사가 그들에게 내린 마지막 명령은 꼭 왕자님을 데리고 무사히 탈출하란 것이었다. 머지않아 혁명군이 이곳까지 들이닥칠 것이고, 자기가 시간을 벌 테니 뒷문으로 도망치라는 말이었다. 왕자 덕에 뒷문의 위치를 알고 있던 기사는 왕자에게 “금방 뒤따라갈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는 말과 함께 왕실의 문양이 새겨진 검을 빼 높이 들었다. 왕과 왕비는 혁명군에게 목숨을 잃었거나, 이용 가치를 위해 어딘가에 잡혀있을 거라는 생각에 왕자는 마지막으로 “아키토!” 하며 손을 뻗었다. 병사들의 재촉 끝에 뒷문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는 있었지만, 뒤를 돌아보자, 왕자의 눈에 보인 풍경은 처참했다. 가끔 놀러 갔을 시장도 이제는 갈 수 없었으며, 이미 연기가 나는 성과 사람들의 함성. 역사에서는 혁명군의 승리로 끝맺을 반역은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작이자 혁명이라며 전해 내려올 터였다. 문이 닫히면서 결의를 다진 기사의 눈빛은 아직도 기억한다며 왕자가 탈출하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졸지에 도망자가 된 왕자는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왕자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먼 나라로 도피했다. 만일 망국의 왕자라는 게 알려지면 지금 있던 곳에서도 쫓겨날 수 있었기에 근처가 아닌 소문이 닿지 않는 곳까지 도망쳤다. 머리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많이 길었고 정돈된 머리카락은 이마를 덮을 정도였다. 기사가 살아있을 거란 믿음으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채로 주머니에서 나온 이미 말라비틀어진 네잎클로버를 보던 왕자는 소중하게 주머니에 넣으며 앞으로의 기약을 고대할 것이며, 기사가 만약 이걸 본다면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올 거라는 말을 끝으로 잉크를 쏟은 건지 제대로 내용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멀쩡한 페이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던 토우야는 마지막 장을 보고 멈칫했다. 기사와 왕자는 만나서 사랑했다는 것. 하지만 다른 글씨로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이 이야기는 바람을 타고,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나는 들은 사실을 바탕으로 허구적으로 각색한 것이다. 그들이 진짜 만났을지는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못 만났을 수도 있다는 것. 적어도 누군가의 바람을 이루어 주고자, 멋대로 결말을 쓴 점 양해 바란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토우야는 책을 덮고는 아까 보았던 이야기를 더듬었다. 그의 뇌리를 스치는 장면은 왕자가 “아키토!” 하며 부르는 장면이었다. 어째서 기사의 이름이 옆 반의 시노노메와 똑같은 걸까. 책을 읽으면서 남 같지 않다고 느낀 건 어쩌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전생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전생은 사람들이 지금의 삶 이전에 다른 삶을 살았을 거로 추측하는 것들이었다. 정말로 토우야의 전생이 책에 나오는 왕자라면 아키토는 그를 지키던 기사였을까.

전생은 누구나 흥미로운 주제였다. 과연 그게 진짜인지 진실의 유무는 가리지 않은 채, 인간의 즐거움이라고만 보았다. 자기가 전생을 봤다는 텔레비전 내용은 사기꾼이라고만 느꼈는데. 아키토는 정말로 전생이란 게 존재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사람들이 최면 요법으로 자기는 전생에 어떤 사람이었고, 어떻게 죽었고 까지를 늘어놓는다고 하여도 신빙성이 있다고까지 느끼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연출 정도로만 그쳤기에 아키토는 자기가 겪고 있는 현상이 이해되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잠에 들기 전, 아키토는 갑작스레 무언가가 저를 끌어당기는 느낌에 이마를 짚었다. 흐릿하던 왕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졌고, 자기가 본 왕자는 아까 옆 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토우야와 똑같다고 할 정도로 닮았다. 하얀 피부와 얼굴에 있는 눈물점까지. 모든 것이 아오야기 토우야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눈을 뜬 아키토는 시계를 보았다. 아직 새벽 네 시 반을 알리고 있는 시계는 아키토가 이르게 잠에서 깼다는 걸 알려주었다. 왜 하필 꿈을…. 아키토는 차라리 잘 됐다며 일단 일어나 있자며 몸을 일으키던 중 왕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기를 보던 왕자. 그는 토우야와 생김새도, 목소리도 같았다. 다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서술자의 입장에서 말하면, 토우야를 보며 그리워하던 건 전생의 아키토가 사랑하는 왕자님의 곁으로 이끌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아키토는 오늘도 조깅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항상 달리던 코스였는데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인지 땀은 흘려도 상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평소보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옆 반에서 책을 읽던 토우야를 본 아키토는 “이따 점심에 시간 있으면 같이 밥이라도 먹자. 우리 교실로 와, 기다릴게.”란 말을 남기고는 제 반으로 들어갔다. 토우야 반 아이들은 아키토를 보며 괜히 얌전한 애를 괴롭히는 거 아니냐, 돈을 뜯으려고 그러는 게 아니냐며 자기들끼리 보이는 대로 평가했다. 어제도 말을 잠깐 나눴음에도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건지 토우야는 또 한 번 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리는 걸 느꼈다. 그러나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해를 가할 것 같지도 않았다.

 

점심시간이 울리는 종에 토우야는 일어나 아키토의 반으로 걸어갔다. 아키토는 그가 오는 걸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밥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하자며 장소라도 옮기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비닐봉투에서 샌드위치를 꺼냈다. 토우야는 도시락이 있었지만, 말할 기회를 놓친 건지 그가 건넨 샌드위치를 받았다. 봉지만 매만지던 걸 본 아키토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샌드위치 좋아해? 싫어하면 다른 거로 바꿔주고.”

“아, 아냐… 괜찮아. 고마워, 시노노메……. 잘 먹을게.”

“괜찮으면 다른 곳에서 말할까? 너 편한 곳 있어?”

“……도서실.”

도서실에서 먹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토우야가 그렇다니까 거기서 이야기하는 게 맞겠다 싶었는지 아키토는 그를 따라갔다. 아무도 없는 도서실은 조용했다. 어차피 모두가 교실이나 다른 장소에서 도시락을 먹기에 토우야는 “바쁜 때가 아니면 오는 사람이 없으니까 편하게 말해도 돼…. 근데, 시노노메. 무슨 일로 부른 거야…?”

아키토는 몇 번 말을 나눈 사이도 아니고, 친하지도 않은데 이런 걸 말했다간 앞에 있는 토우야가 이상하게 여길까 봐 어제 보았던 일을 말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못 믿을 수도 있겠지만…으로 운을 뗐다. 토우야는 아키토의 말을 가만히 듣더니, 어제 자기도 비슷한 내용의 책을 읽었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이 온전히 돌아왔다고 할 수도 없지만, 토우야가 책을 읽었던 걸 말하는 것과 아키토가 꾸었던 꿈은 다른 부분이 있어도 그대로였다. 아키토가 말하지 못한 부분은 토우야가 망국의 왕자가 된 것과 살았을지 어땠을지 모른다는 것. 책에서 둘이 행복하게 이어진 것과는 달리 아키토는 목숨을 잃었다는 것. 진짜 역사는 다르게 써진 것 같다며 토우야는 조심스럽게 자기 의견을 말했다.

“……시노노메가 꾼 꿈과는 다르게 내가 본 책은 마지막에는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결말을 썼던 걸지도 몰라. 말, 말해줘서 고마워. 시노노메가 아니었다면 나는 말도 못 했을 거야….”

“고마운 것도 많다. 뭐, 나도 네가 들어주지 않았으면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 하지도 않았을걸.”

“응… 시노노메.”

“이름으로 불러.”

도서실에서 샌드위치를 먹던 둘은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친해지거나, 허락하면 이름을 부르는 게 일반적임에도 왜 이리 낯간지러운 건지. 꿈틀거리는 것이 전생의 기억이었든, 사랑했던 감정이었든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은 친해지는 게 중요했다. 통성명을 했어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빵의 맛은 어땠는지, 지금은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밥이 목으로 잘 넘어가고 있는지 이 어색함을 타파할 구멍이 나오지는 않을지 아키토도, 토우야도 알지 못했다.

 

전생에 관련된 해프닝이 끝났어도 둘은 만남을 이어갔다. 점심시간에는 같이 만나 밥을 먹었고, 같이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학생들은 둘이 친하게 지내는 걸 신기한 얼굴로 보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엉켜있던 운명의 실이 풀린 건지 자석처럼 이끌린 둘은 붙어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소심한 토우야를 위해 일부러 사람이 없는 곳에서 밥을 먹거나, 도서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교실로 돌아가기도 했다.

방과 후에는 같이 교실에 남아 공부를 하거나(시험이 다가오면 일방적으로 토우야가 아키토를 가르치는 것에 가까웠다.) 쪽지 시험을 대비하기도 했다. 물론 공부라는 게 좋아서 하는 학생들은 없었기에 아키토의 표정이 좋지 않을 때도 있었다. 가끔은 공부 대신 토우야가 좋아하던 게임센터로 가, 크레인 뽑기나 동전을 넣고 하는 아케이드 게임을 하기도 했다. 신기록을 세우며 즐거워하는 토우야의 얼굴을 본 아키토는 미소를 지었고, 토우야는 책에서 본 기사의 얼굴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혼자 마음에 담아둔 채로 말을 아꼈다.

연락하는 횟수도 잦아지면서 토우야는 아키토의 연락을 기다렸다. 아키토도 토우야가 기다리지 않도록 밤에는 한 시간이 넘게 전화 통화를 하다가 잘 시간이 되면 침대에 눕기도 했다. 토우야는 아키토의 행동이 싫지 않았다. 단순히 소심하고, 혼자 있는 자기를 동정심에 챙겨주는 게 아닌 그의 모든 행동에는 배려가 밑바탕이 되어 있었다. 책에 나온 기사처럼 멋지단 생각을 하기도 했으나, 기사와 왕자가 아키토와 자기의 전생이 맞다면 과거의 사람에게 현재의 아키토를 투영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과거의 아키토는 과거로, 현재의 아키토는 아오야기 토우야를 봐주는 시노노메 아키토로 족했다.

 

예상치 못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평화로운 하루였다. 수업 잘 들으라는 말을 하며 각자의 반으로 헤어지고, 점심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토우야가 있는 반으로 찾아가 같이 밥을 먹던 중 도서실에서 눈이 마주친 둘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입을 맞추는…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기겁했을 일을 벌인 것이었다. 감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나, 둘이 눈을 마주침과 동시에 행동에 이끌려 버렸단 사실에 둘은 멀찍이 떨어져 아까 있었던 일을 머리에서 지우려 노력했다.

“미안, 토우야.”

“아, 아, 아니야… 아키토.”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버린 토우야는 아키토가 있는 쪽을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목소리로만 상태를 전달했다. 아키토도 민망한 상황을 넘겨보려고 했지만, 고등학생들이 연애에 능숙한 것도 아니었다. 천천히 다가가려고 했으나, 의도가 이상하게 되어버린 풋풋한 연애담이라고… 넘어갈까. 우선은 고백하고, 사소한 애정표현에 익숙해지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지만.

 

그리하여 기사와 왕자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행복이 깨지지 않도록 노력했답니다. 동화의 해피엔딩은 항상 아름다워야만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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