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시힐데] 그 밤.


* 블배 160화대 스포일러 약간 포함

* 망상날조 다수. 캐붕 다수.

* 커플링 써놨는데 커플링 요소 미약함.

키시스는 테이블에 고개를 박은 채 들 생각이 없어 보이는 백의 기사단장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느냐 묻는다면, 힐데베르트가 워낙 유명한 말술이라기에 매실주에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같은 짓궂은 호기심 때문이라 하겠다. 그의 표정이 영 떨떠름 하였으나 위치상 힐데는 키시스의 잔을 거절할 수 없었다. 키시스는 그걸 아주 잘 이용해 먹었다. 자신의 앞에 놓인 매실주는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채 힐데의 잔만 꾹꾹 눌러 담아 채우던 것도 몇 번이었다. 세계수의 애정이 담겨있을, 그 특유의 금색 눈동자가 흐물흐물 풀리기 시작하더니, 매실주 한 병이 다 비워질 즈음에야 쿵,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고개가 떨어졌다. 턱을 괸 채 그 꼴을 보던 키시스가 작게 허,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도 몇 잔 들이키기야 했으나 흐느적대는 힐데보다는 한결 나은 수준이였다. 고로 인사불성이 된 단장을 이대로 본인 방까지 옮기는 것도 크게 무리는 아니였다만……. 굳이 그 아래에 있는 기사들에게 그의 못난 꼴 –키시스가 원인이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을 보일 필요는 없지 않겠나. 그건 나름의 배려이기도 했고, 매번 자신의 앞에서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던 이가 풀어진 모습이 흥미로운 것도 한 몫했다. 그냥 여기서 재울까? 호화롭다면 호화로운 축에 속하는 침실에 놓인 침대는 건장한 성인이 세 명이 누워 자빠져도 남을만큼 넓었다. 하지만 키시스는 그런 침대를 크게 선호하진 않았다. 남은 일을 핑계로 방에 비치된 소파에서 잠을 청한 것이 대다수일만큼. 그러니 취한 기사단장을 저 침대에 눕혀 재운다고 해도 자신의 잠자리가 불편해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터다. 물론, 내일 아침의 힐데베르트는 극도로 불편해지겠지. 그 역시 자신이 신경쓸바는 아니였다. 힐데가 들으면 또 예의 그 떨떠름한 표정이나 지을 게 뻔한 생각을 늘어두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곤 아직까지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있는 그의 어깨를 쥐었다. 짧게 으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투정이라도 부리는 것인지. 참 혼자 보기엔 아까운 광경이라 생각하며 입을 떼었다.

"힐데베르트, 일어나."

이대로 일어나지 못하면 그냥 들고 가야겠다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도, 힐데는 의자를 드르륵 밀어내며 결코 느리지 않은 몸짓으로 일어났다. 휘청대는 몸만 아니였다면 그새 술이 깬 거라 착각할 뻔했다. 풀려있는 금색 눈이 맹하게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서있는데도 그 몸이 연신 휘청휘청 댔다. 그 꼴을 지켜보며 팔짱을 낀 키시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웃었다.

"침대까진 갈 수 있겠지."

"예에……."

대답은 즉각적으로 나왔다. 말꼬리가 한참 늘어지기야 했지만. 힐데는 그대로 몸을 느릿느릿 돌려 침대로 향했다. 저대로 바닥의 카펫을 잘못 밟고 자빠지는 건 아닌지. 아쉽게도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힐데가 넓직한 침대 위로 저항없이 늘어졌다. 정말 말 그대로 위에 '늘어진' 것이라 침대 밖으로는 다리가 그대로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손이 많이 간다. 키시스는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풀어내곤 침대로 다가갔다. 그의 몸을 안아들었다가 바르게 눕힌다. 비죽비죽 솟은 머리카락이 시트 위로 흘러내렸다. 새삼스러운 감상이었으나, 긴 머리가 썩 잘 어울리는 이였다. 흐드러진 머리카락 위로 자신도 모르게 손을 옮겼다. 하얗고 단단한 손가락 사이로 은색 실같은 머리카락이 얽혀들었다. 그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몇 번 눈을 깜빡였다.

"나도 취한 건가……."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타고 오른 손이 짙은 피부에 번진 열기를 훑었다. 달아오른 뺨은 평균의 체온보다 더 뜨거웠다. 색색 숨을 내뱉을 때마다 술내음이 풍겼다. 그 숨에도 취하는 기분이 들어서, 키시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은색에 가까운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그의 시야를 긋고 흐드러졌다. 숨이 닿을 듯한 거리였다. 자신의 머리카락이 거슬리지만 않았다면 고개를 더 숙일 뻔했다.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군. 키시스는 몸을 바르게 세우며 흘러내린 긴 머리를 어깨 뒤로 쓸어넘겼다. 자신이 처할 뻔했던 상황은 모르는 채로 태평하게 골아 떨어진 이를 한 번 바라보다 익숙하게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발.

힐데베르트가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떠올린 단어였다. 가끔 심심풀이로 보는 소설들에는 간혹 그런 문장이 떠오르곤 했다.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였다.' 같은. 정말 완벽하게 자신의 상황을 대변해주는 문장이 아닌가. 차라리 완벽하게 '낯선' 천장인 게 더 나을 뻔했다. 그야 그렇지. 여긴 '그' 황자의 방이였으니까. 황자라 불리는 것을 끔찍히도 싫어하는 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애써 어제 일을 더듬었다. 자신에게 매실주를 꾸역꾸역 퍼먹이는 키시스의 잔을 거절할 방도는 없었다. 매실주를 약 한 병 가량을 비우고 난 이후의 기억이 뚝 끊겨있었다. 직후 고개를 쳐박은 건지 가까워진 테이블과 이마를 때리는 미약한 통증만이 기억났다. 어제 사고치진 않았겠지? 멍하게 기억을 더듬으며 제 목을 더듬었다. 다행히 목은 멀쩡히 붙어있는 걸 보아하니 큰 사고는 안 친 모양이다. 아니, 애초에 날 이렇게 인사불성으로 만든 건 그 놈 잘못이지 않나? 그리 생각하며 상체를 느리게 일으켰다. 어디 바닥에 대충 눕혀둔 줄 알았는데, …… 미친. 여기 침대잖아. 이 인간 날 자기 침대에 재우고 어디 간거야? 나 설마 그 인간이랑 한 침대에서 잔 건가?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가정을 치워내며 비척비척 침대 아래로 발을 디뎠다. 머리가 어지럽다……. 차라리 아무도 없을 때가 기회다. 몇 걸음 옮기려던 찰나, 소파 쪽에서 미약한 기척이 느껴졌다. 키시스의 방에 허락도 없이 침입할 간 큰 자는 없다. 그럼 본인일 가능성이 큰데……. 문쪽으로 향하던 걸음이 소파 쪽으로 향했다. 소파 등받이를 짚은 채 고개를 너머로 슬쩍 내밀었다. 그리곤 눈을 감은 채 얌전히 잠들어있는 이의 얼굴을 보고 입을 작게 벌렸다. 아니, 왜 침대를 놔두고 여기서 자는 거냐. …… 나 때문인가? 미약한 죄책감과 기묘한 기분을 억누르며 그를 깨우기 위해 손을 뻗었다. 정말 자신 때문이라면 난 이제 일어났으니 침대에서 자라고 한마디 할 생각이었다.

"키시, 억."

갑자기 잡혀 당겨지지만 않았다면 그랬겠지. 순식간에 시야가 확 뒤집혔다. 정신을 차렸을 땐 그의 선명한 자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이 덜 깬듯 몇 번 깜빡이던 눈동자가 기묘한 빛으로 물들었다.

"뭐야?"

그건 이쪽에서 묻고 싶은 건데. 애써 말을 삼켰으나 표정에서 드러난 모양이었다. 비죽 웃은 남자가 얼얼할만큼 거세게 잡힌 제 손목을 놓으며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자신도 소파에 눕혀졌던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왜 소파에서 주무십니까?"

"난 원래 여기서 자."

나 때문이 아니였군. '저 일어났으니 이제 침대에서 주무십쇼.' 하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흐트러진 머리를 느리게 쓸어올린 키시스가 구태여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입을 떼었다.

"깼으면 이만 가봐."

"…… 예, 신세졌습니다."

"신세는 무슨."

그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체 하며 소파에서 후다닥 내려와 인사하곤 문쪽으로 향했다. 어쩐지 뒤로 따라붙는 시선이 조금은 미묘하다고 생각하면서. …… 별 말 없었으니 나 사고 친 건 없는 거겠지? 애써 불안감을 떨쳐내며 걸음을 게으르게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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