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은 최악으로 돌아간다

To. 메르

52Hz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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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틀렸다.

유찬은 건강한 몸 때문에 나약한 정신이 됐다. 타고난 몸이 튼튼해 아무리 굴러도 피곤해지지 않는 탓에 새벽이면 밀려오는 생각들을 하나도 피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 불현듯 날아드는 생각치고 무해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불안은 유찬이 어둠을 싫어하게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밤마다 잠을 설치는 때가 있었고, 생각이 너무 깊어 결국 몸까지 무너지는 때가 있었다. 이젠 무뎌졌다고 생각된 것들이 다시금 그를 수몰시킨 건 온전히 자신의 탓이었다.


Q. 인어는 왜 물거품이 되었을까.

A. 세계가 인어를 사랑해 주지 않아서.

메르가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유찬은 혼자서 천장 무늬를 다 그릴 정도로 날을 샜다. 처음 그린 것은 파도. 그다음은 고래. 또 다음은 조개…. 바다에 데리고 간 것은 큰 실수였다는 생각을 기점으로 꼬리에 꼬리를 문 상념이 며칠을 이어졌다. 제 일은 회피하는 사람이 자격 없이 남 일 부추긴 것이 화근이겠다. 사람을 바꿨으면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 아래 여러 대책을 떠올렸으나 무엇 하나도 ‘책임진다'는 말의 무게를 오롯이 담지 못했다. 그동안 책임이란 단어를 안일하게 대해온 것이 아닌가. 하기야 그는 제게 맡겨졌던 직책조차도 남몰래 버거워하는 사람이었다. 자격 미달의 책임자와 불안정한 실무자. 최악의 조합이다. 그렇게 자기반성까지 끝내고 나면 새겨 넣은 조개 무늬를 끝과 끝이 만나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Q. 인어는 왜 물거품이 되었을까.

A. 세계가 인어를 사랑해 주지 않아서.


세계는 인어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

라고 단호하게 말해주고 싶어도 그를 뒷받침해 줄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세계는 정말로 인어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 아닐 텐데….

멀쩡하게 보이기 위해 밥 잘 먹는 척, 잠 잘 자는 척, 근심 없는 척해가며 부지런히 메르의 병실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해봤자 군의관을 붙잡아 메르의 상태 물어보는 것이 전부라서 얼굴은 보지 못했다. 마주 보고 할 말을 아직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했지만, 실상은 용기 부족이었다. 책임진다는 마음으로 아무것도 책임지지 못한 채 열병을 앓는 메르를 볼 용기 말이다.

하나의 문제에 과하게 사로잡히는 것은 버릇. 그래도 멀쩡하게 사는 것은 특기. 이틀 밤을 새우고 겨우 잠든 날, 하필이면 소식이 들렸다. 소식을 듣자마자 군 병원으로 향했지만 깨어난 메르는 병상에 없었다. 대체 어디 간 거야. 걱정을 뒤로하고 머지않아 메르가 나타났다.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자른 상태로.

숨이 턱 막혔다. 열병을 앓은 시간 동안 메르는 자신이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변했다. 초라하게나마 찾아놓은 답들이 전부 모래처럼 부서져 내렸다. 아무런 대책 없이 이루어진 만남. 최악이다. 또다시 원점.

Q. 인어는 왜 물거품이 되었을까.

A. 세계가 인어를 사랑해 주지 않아서.

“메르.”

자신을 지나치기 전 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대본을 상실한 입은 나오는 대로 뱉었다.

“그날 무리했던 것 때문에 많이 아팠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괜찮습니까.”

사람이 절박해지면 무엇이든 붙잡게 된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에 대해 검토할 새 없이 나오게 되곤 한다.

“괜찮다면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세계는 인어를 사랑한다. 그 말 한마디에 담을 수 있는 진정성을 찾아서.

“아쿠아리움이라고….”

그 답은 며칠 밤을 새워 내린 답 중 최악의 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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