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ther Echo Ⅲ

다른 하나의 에코 Ⅲ

CORDIS by 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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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달은 이렇다 할 자랑거리도 두드러진 특색도 없는, 대단치 않은 사람이었다.

본래 노먼은 하나의 세계만 보고 산 사람이었다. 그저 가업을 잇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하지 못했다. 고루하고 진부한 가훈과 부족함 없이 유복한 환경은 그가 다른 것을 바라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비록 평민이라 해도 여느 귀족 부럽지 않게 부유하고 엄격한 가정에서 자란 탓에 재미있는 구석이라고는 없는 아이로 컸다.

판에 박힌 듯한 삶에 균열이 생긴 것은 가문에서 쫓겨난 할아버지와 우연히 마주치고 난 다음이었다. 할아버지는 노먼에게 그가 진정 동경할 수 있는 삶을 찾아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나는 무슨 일을 할 때 행복할까? 그런 고민을 하던 어린 노먼은 샬롯이라는 소녀와 만나게 되었다. 어색했던 스킨십과 저도 모르게 달음박질치던 심장, 설명할 수 없는 메스꺼움. 노먼은 도망치고 말았다. 달콤하고 씁쓸했던 첫사랑의 기억은 말하자면 그런 것이었다.

제국이 마법사를 희생해 코어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뒤로, 노먼은 다시 만날 수 없던 할아버지가 걱정스러웠다. 저 스스로에 대한 불안도 작지 않았으나, 노먼이 알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명확했다. 남부 여관주인의 아들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평민으로서 제국의 관료가 되는 것은 쉽지 않다. 노먼은 황실의 지척에서 정보를 모으기 위한 방법을 강구했고, 자신의 장기인 요리를 살리기로 결정했다. 황실 내의 요리사로 취업하는 것이다. 노먼의 도전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한번 잡은 일은 놓지 않는 성실한 성격 덕에 그는 금방 부주방장 자리까지 올랐다.

소시민 노먼 달은 반란군이니 혁명군이니 하는 이야기를 귀 담아 듣기는 해도, 눈에 띄일 여지 없이 얌전히 숨을 죽이며 살았다. 희생될 사람의 이름에 제가 오르지 않기만을 노심초사하며, 매사 불안에 떨며 지냈다. 유달리 겁이 많던 실력 좋은 요리사를, 황실 주방에서 알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저 머리 조금 좋은 것이 겨우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인 황실 요리사의 귀에, 오를레앙 소후작이 돌아왔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익히 알아도 끌려들기 싫은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캐비어가 없어. 저번에는 트러플이 없어졌는데.”

노먼은 최근 주방의 식료품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을 남들보다 이르게 눈치챘다. 본디 걱정이 많아 매사에 꼼꼼하게 점검하는 탓에, 쓰지도 않은 식재료가 사라진 일이 이상하게 느껴진 것이다. 사용한 적도 없는 식재료가 종적도 없이 없어지다니, 수수께끼 같은 일이었다.

첫 번째는 그저 기분 탓으로 착각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었다. 두 번째까지는 누군가의 실수로 받아들일 법도 했다. 그러나 일이 세 번째가 되고 나니 보통 일이 아니라는 직감이 왔다. 횟수가 반복될수록 이 수상쩍은 도둑이 유달리 비싼 식재료를 알고 훔쳐가는 것처럼 보였다. 노먼은 이 모든 상황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구태여 지적하거나 먼저 말하지 않았다. 제가 이 일의 책임을 괜히 덤터기 쓰게 될까 조심스러웠던 탓이다.

그런데 아뿔싸, 열정적인 주방장이 이 사실을 눈치채고 일을 해결하려 드는 것이 아닌가. 주방장은 도난 사건의 심각성을 노먼이 판단한 것 이상으로 진지하게 여겼다. 황제에게 진상하는 식재료가, 비싸고 귀한 것들만 귀신같이 도난당한 일이니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하필이면 주방장은 이 일을 해결할 책임자로 노먼을 지목했다. 부주방장이면 책임이 작지 않은 자리다. 노먼은 몸에 밴 지독한 근면함 탓에 지목에서 피할 수 없는 인물이 되어버렸다. 이럴 때는 성실한 자신이 밉기도 했다.

그래서 노먼은 조리가 끝난 주방에서 망을 보기로 했다. 어둠이 깔린 밤, 주방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들어왔다. 노먼은 그림자를 주시하다가, 도둑이 움직일 법한 타이밍에 마법을 걸어 움직임을 방해했다. 그러나 도둑은 마법 따위 아랑곳 않겠다는 듯 재빠르게 움직여 식료품 주머니를 가지고 달아났다. 가만히 있으면 꾸지람이나 들을 것이 뻔하다. 마법사씩이나 되는 부주방장이 망을 보고서도 잡아내지 못했다면 져야 할 책임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내키지는 않지만, 움직여야 했다. 노먼은 도둑을 뒤쫓아 주방을 나섰다.

그렇게 소시민 노먼 달은 거대한 시류의 파도에 섞여들게 되었다.


사실 아니스의 해적선에는 이렇다 할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다. 아니스가 해적 생활을 시작한 것이 몇 달도 채 되지 않은 탓에, 해적선에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주지 못했다.

“나름 메테시스의 거점 아닌가? 그럴듯한 이름 하나는 있어야지.”

이반의 제안이었다.

“제국군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라도 이름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에코도 이반의 제안에 동감했다.

“좋은 생각이다. 그래서, 뭐라고 붙이면 좋겠나?”

아니스는 머리띠를 고쳐 묶으며 탁자 위로 손을 뻗었다. 중요하다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다면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이반은 입가에 궐련 한 개비를 꼬나물고 고민에 빠졌고, 에코는 포도주 한 잔을 따라 두고 머리를 기울였다. 알비누스는 버스트의 의수를 손보아주며 생각에 잠겼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놈이니까, 창공Vault of Heaven호라고 부르면 어떻겠냐?”

첫 번째 의견을 내놓은 것은 이반이었다.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에코는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버스트는 너무 거창한 느낌이 아니냐며 지적했다. 그리 뚜렷한 의미가 담기지도 않아 좋은 이름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이렇게 부르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 배는 대륙 전역에 우리의 뜻을 퍼트리는 역할을 하니, 레저넌스Resonance호라고 부릅시다. 제 이름과도 연관지을 수 있고 말입니다.”

에코의 아이디어였다. 이반의 것보다는 반응이 나았다. 아니스는 제법 마음에 든다는 양 손짓했다. 알비누스도 긍정적인 기색을 내비쳤다. 이전의 의견보다 의미가 더해지기는 했지만, 선명하지 못한 감이 있다. 버스트는 더 나은 이름이 없을지 고심하는 모양새였다.

혁명군의 요인들은 저마다 의견 하나씩을 던져놓았지만, 뾰족하게 모이는 답은 없었다. 만장일치가 이뤄지지도 않았고 아주 매력적인 의견이 등장하지도 않았다. 그리 한참을 난맥에 빠져 있을 때, 가장 유력한 해답을 가져온 것은 의외로 버스트였다.

“결정하기 어렵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보기엔… 리베라토르, 해방자Liberator호라는 이름이 어울리겠어요. 저희 목표가 좁게는 오를레앙을 해방하는 거고, 크게는 대륙을 해방하는 것 아닙니까? 그 역할을 생각하면 좋은 이름 같습니다. 이 배로 말하자면 해방의 선봉장이잖아요.”

해방자. 사기꾼의 손아귀에 넘어간 오를레앙 후작령을 해방한 뒤, 이에 그치지 않고 제국 전역에 혁명을 가져올 인도자. 그 역할을 생각한다면 분명히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다.

“해방자? 그거 맘에 드는데? 다들 어때?”

아니스는 화색을 표하며 버스트의 의견에 한 표를 보탰다. 이반도 납득한 낯이었다.

“그거 듣던 중 괜찮은 이름이군요. 해방자호, 혁명의 대업에 걸맞는 작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에코도 그렇게 말을 더했다. 알비누스의 의견까지 모여지자, 마침내 윤곽이 보이는 듯했다. 다섯 사람의 만장일치가 모였다. 시골 농부 데일 테메움이 ‘왜 나만 빼놓고 정했나? 지금 나 따돌리는 건가?’라고 투덜댄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적선, 이제는 메테시스의 모든 기술력이 집약된 비공정의 이름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베른 베카리아 중장은 진지의 연단 위에 섰다. 그 앞으로 수만 명의 제국군이 일사불란하게 사열했다. 란드그리드는 장교들이 선 자리에서 베른을 올려다보았다.

“제군들, 유감스럽게도 총사령관 라디우스 대장께서 반란군의 공격에 큰 부상을 입었다. 대장께서 직무를 원활히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은 제군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본관은 제군들에게 이 자리에서 중대한 발표를 하고자 한다.”

서부와 중앙의 전선에 집결한 제국 야전군은 십수만 명에 달한다. 제국군은 서부 전선 장악에 사활을 걸었다. 이 상황에서 혁명군은 그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공중 폭격이라는 초유의 전술을 들고 나왔다. 사령부 폭격으로 인해 총사령관이 큰 부상을 입었다. 철저한 군율을 갖추었다 해도 제국군의 전술은 육전에 기반해 있다. 손도 닿지 않는 곳에서 포탄을 뿌려대는 비공정의 악명이 제국군의 사기를 흔들어놓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비록 반란군이 우리 군의 전열에 일부 타격을 입히기는 하였으나, 이는 전체 전선을 보았을 때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여전히 보급과 병력은 제국군이 우세하며, 오를레앙 후작령 역시 우리 제국군의 영향력 아래 있다. 서부를 탈환하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일 뿐이다.”

베른의 말이 그리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반이 생각했던 포위망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해방자호 하나만으로는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 한계가 있다. 사령부가 폭격을 당했다 해도, 전선의 전반에서는 여전히 제국군이 우세한 경향이 있었다. 베른은 제국군의 사기를 회복하기 위해 이 사실에 살을 조금 더했다.

“이 상황에서, 제군들은 가장 이상적인 지휘관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 베른 베카리아는 페리스 대장의 공석을 대신하여 임시 야전군 총사령관으로서 총사령관직을 승계하고자 한다. 제국군은 본관의 지도 아래 군율을 견고히 다지고, 전열을 정비하여 서부 아르티시스를 되찾을 것이다.”

임시 총사령관 베른 베카리아 취임. 그것은 공식적으로 야전군의 모든 지휘권이 베른의 손아귀에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병사들은 오히려 무능한 라디우스가 총사령관으로 있는 것보다, 냉혹하고 유능한 지휘관인 베른이 이끄는 것을 환영했다. 물론 일각에서는 배신자 출신이라는 베른의 꼬리표를 문제삼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인사 조치를 발표하겠다. 참모관 란드그리드 레긴을 참모장으로 진급한다. 이는 적의 공세에 대한 명확한 분석과 대응을 제시한 공로에 따른 것이다. 또한 반란군은 기술적 이점을 활용해 제공권을 장악하고자 하므로, 우리 제국군 또한 기술적으로 그들에게 뒤쳐저서는 안 될 것이다. 본관은 제국군의 기술고문으로 프레이야 오를레앙을 기용하고자 한다.”

베른 베카리아가 전권을 장악함에 따라, 베른의 신임을 받는 란드그리드 역시 몸값이 올랐다. 또한 베른은 혁명군의 이점이 알비누스를 위시한 그들의 기술력에 있다고 보았다. 이름 높은 공학자 프레이야를 기술고문으로 기용해 기술력의 격차를 메꾸어보려고 한 것이다. 프레이야가 그의 새로운 법적 성명인 ‘프레이야 오를레앙’으로 공식 석상에서 불린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은 위대하신 여신 아스트라이아와 영광스러운 황제 폐하를 위한 일이다. 제국을 위하여, 경례!”

베른의 외침에 오열을 맞춘 대군이 도열했다. 우렁찬 함성이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석고 인형’, 황실기사 아벨 워커만큼 충직하고 합리적인 장교는 제국군 내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녀석은 진짜 감정이라는 게 없는 것 같아.”

“농담 하나를 이해하질 못하더라니까? 재수 없을 정도로 꽉 막힌 놈이지.”

“뭐, 그만큼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사람도 없지민. 뼈빠지게 힘든 일도 따진 적 한 번이 없어.”

아벨 워커는 빅토리야 티돕프의 북부군, ‘금빛 여명’ 여단을 편성할 때 가장 먼저 자원한 장교였다. 그는 베르마트 협곡 근방에 위치한 작은 마을 칼리고 출신으로, 카르미나 내부에서는 일처리가 직선적이고 거침없다고 평가받는 기사였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실종된 새 자연발현으로 마법을 깨우친 아이로 알려진 적도 있었다.

아벨을 그저 명령에만 충실한 인형 같은 사람으로 보는 이들도 드물지 않았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 평가는 아벨을 충분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아벨 워커는 코어가 소수의 마법사들을 희생해가며 존속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 자신만큼은 제국의 곁에 서겠다고 제 자의로 결정을 내렸다. 목숨을 바쳐 가며 아버지가 제게 보여주고자 했던 세상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단순히 명령을 따르는 인형이 아니라, 그 명령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인간이었다. 빅토리야의 북부군에 자원한 것도 그 자신의 의지로 말미암은 결정이었다.

늦가을의 히베르니스는 시나브로 찾아올 겨울의 단서를 언뜻언뜻 내비치는 듯했다. 곧 있으면 첫눈이 내리기 시작할 것이다. 임시 대령 빅토리야 티돕프는 중요한 작전을 대비하고 있었다. 란드그리드와 엘로이즈의 분석대로라면 안셀의 메테시스 본대는 오를레앙 후작령을 되찾기 위해 서부로 움직이리라. 이들은 험준한 북부의 지세를 이용해 안셀의 부대를 기습하여 각개격파를 성공시키고자 했으며, 그 작전을 위해 빅토리야 티돕프를 임시 대령으로 세워 한 개 여단을 딸려 보냈다. 지휘봉을 잡아본 적 없던 수완 좋은 자선가 빅토리야 티돕프는 제복을 입은 이래 누구도 지적하지 못할 번듯한 군인으로 변모했고, 아벨은 그 휘하의 장교가 되어 북부로 향했다.

“아자라이아, 티돕프가 당신을 찾아.”

아벨은 마법사 하나를 불러 세웠다. 북부 출신의 마법사 아자라이아는 이제 마흔을 넘긴 마법사였다. 눈에 띄지 않는 외모로 은발을 길게 내렸으며, 마법사라는 티를 내는 눈에 띄는 모자와 밋밋한 로브를 썼다. 주특기는 불을 다루는 마법으로, 한때 ‘따스함을 전하는 마법사’라는 이명으로 불렸다. 여단의 지휘관, 임시 대령 빅토리야 티돕프는 아벨에게 말해 그를 데려오게 했다.

17년 전, 빅토리야는 아자라이아와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빅토리야에게 처음으로 마법을 보여주었으며, 따뜻한 몇 점의 빵을 건네주었다. 빅토리야 티돕프는 그 사소한 호의로 말미암아 마법사를 향한 동경을 가졌다. 아자라이아는 아벨 워커의 아버지 윌리엄 워커가 그 딸에게 그러했듯이, 어린 빅토리야에게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운명의 장난으로, 그 짧지 않은 시간이 흘러 빅토리야는 그가 처음으로 동경했던 마법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저를 기억하시나요?”

빅토리야는 그렇게 물었다. 제 휘하의 장교에게 질문하는 지휘관의 물음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잊지 못한 순수한 소녀의 호기심에 가까웠다. 중년의 마법사는 그 물음에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를 만난 적 있으십니까?”

아자라이아는 그렇게 반문했다. 빅토리야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며 조목조목 되물었다. 제가 다섯 살 시절, 티돕프 마을에서 만나지 않았느냐고. 가진 돈 한 푼 없어 보답하지 못했던 제게, 먼 나중에 머리칼이라도 잘라 달라 했었노라고.

아자라이아는 꼬마 빅토리야를 떠올리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기억의 폭포를 한참 거슬러 올라가서야 겨우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나요. 조금은 기억이 나는 것도 같습니다. 그때 그분이셨습니까? 격세지감이군요.”

아자라이아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기억을 상기했다. 그런 일이 있었던 듯도 하지만, 온전히 기억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려웠던 어린 시절 특별히 반짝이는 기억으로 남긴 탓에, 빅토리야 한 사람에게만 유달리 그 의미가 남달랐을 뿐이다. 조금은 더 기억해줬으면 싶었는데, 빅토리야는 저도 모르게 아쉬운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돌아가보도록 하세요.”

빅토리야는 아자라이아를 돌려보냈다. 저를 기억하는지 확인하려던 것이 전부였으니, 그 이상 나눌 이야기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지휘관 막사를 떠나기 전에, 아자라이아는 빅토리야에게 한 마디 남길 말이 있다고 했다.

“무슨 이야기요?”

아자라이아는 듣는 사람이 없는지 막사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귀띔하듯 조심스럽게 전했다.

“...인연이 있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국을 너무 믿지는 마세요. 제가 드릴 말씀은 그뿐입니다.”


시오도르 아비레는 솜씨 좋은 의사인 동시에, 요령 좋은 연기자였다.

“족저근막염이네요. 무리하지 않고 쉬도록 해. 정도가 심해서, 행군 말고 휴식하는 편이 좋겠어요.”

“저체온증 증상을 보이는 병사가 많아. 너무 추운 날씨에 행군해서 그래요.”

“군의관 입장에서 의학적으로 진단하자면, 행군 속도를 늦춰야 돼요. 관절염 환자들이 산더미야.”

시오도르는 가뜩이나 서늘한 날씨에 데일이 무리한 행군을 종용해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진단하며, 부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행군 속도를 늦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국에서는 가장 성공한 것으로 여겨지는 입지전적인 치유계 마법사다. 히메네스 사병 군단은 시오도르의 남다른 지위와 능숙한 설명에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설득에 능란한 순백의 마법사는 한 사람을 제외한 군단의 모든 이들을 속여 넘겼다.

데일이 행군의 페이스를 높인 탓이 없진 않았지만, 근본적으로 시오도르의 진단은 오진이 태반이었다. 시오도르가 관절염과 골절이라고 진단한 경우 상당수는 가벼운 통증에 불과했다. 시오도르가 설명하는 것처럼 실제 부상자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 부상으로 진단할 여지가 조금만 있어도 군의관의 재량으로 제대시키곤 했다.

시오도르가 의사로서 무능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의학에 해박하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시오도르가 구태여 오진을 내리고 행군을 늦출 것을 주장한 이유는 히메네스 군단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히메네스 군단이 서부에서 메테시스와 합류하는 것을 늦춰 적소에 포위가 이뤄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도 시오도르를 의심하지 않았다. 모든 장교와 병사들은 그를 사병을 염려하는 다정한 군의관으로 여겼다.

단 한 사람을 빼고.

“진짜 제대로 진단하고 있는 것 맞나? 내가 보기엔 다 멀쩡해 보이던데. 저번에 발목 골절이라고 제대시킨 놈은 내가 볼 때 잘 걷기만 하더라. 회복 불가능하다는 진단이 맞는 건가?”

데일 테메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감추지 않았다. 이 수상쩍은 군의관이 무슨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 하나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물론 모든 병사들이 시오도르의 말을 믿고 있는 상황에, 제멋대로 고집을 피우며 따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데일은 행군 속도를 줄이고 로네타라는 작은 마을에 숙영지를 만들어 하루를 쉬어 가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로네타는 소도시 콜키릴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본래 로네타보다 큰 콜키릴이 근방 교통의 요지 역할을 했지만, 남부 소탕 작전에서 콜키릴이 제국군의 군홧발을 피하지 못했다. 반면 로네타는 민첩하게 제국의 편을 들어 살아남아 콜키릴의 역할을 대신했다. 데일이 진을 친 언덕은 날이 밝으면 지평선 언저리로 콜키릴의 폐허가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하루를 쉬어가기로 한 탓에 할일 없이 시간이 남아돌았다. 지휘관으로서의 각종 결재와 사무 처리는 공작가 소속의 장교들에게 맡겼다. 데일은 그런 일에는 영 재주가 없었다. 괜히 마음이 쓰인 탓인지, 그저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타고난 남다른 촉 때문이었을지. 콜키릴의 폐허는 자꾸만 데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시골 농부 데일은 신경 쓰이는 것은 확실히 해두고 가야 직성이 풀리는 단순하고 직선적인 사람이었다. 시간도 남아도는 김에, 살피고 와서 나쁠 것도 없겠다. 데일은 말 고삐를 잡고 콜키릴로 달렸다. 말을 달려 도착한 콜키릴의 폐허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처참했다.

포탄을 맞아 반파된 시청은 절반 이상 무너져 내렸다. 그을린 벽에는 총흔이 자욱했다. 철도는 기차도 다니지 못하게 박살난 채였고, 광장의 시계탑에서 떨어져 나간 시계 부분이 바닥에 박혀 있었다. 불타고 부서져 시가지의 본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참상을 보고 나니, 프레이야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제 가족들이 이리 되었다면 저도 가만히 있지는 못했을 테지.

착잡한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유달리 훼손되지 않은 건물 하나가 그의 눈에 띄었다. 그리 큰 건물이 아니라 흘깃 보기에는 눈에 들지 않은 곳이었으나, 가만히 살피자니 유독 망가진 구석이 없어 수상스러워 보였다. 데일은 저도 모르게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시청 옆에 붙은 작은 별채 같은 곳이었다. 프레이야가 쓰던 곳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별채의 문을 열자, 복잡하게 꼬인 한 쌍의 나선형 계단이 아래로, 아래로 이어졌다. 데일은 무언가에 홀린 듯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그의 직감이 이곳에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있으리라 강하게 주장했다.

그리 한참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자물쇠와 쇠사슬로 잠긴 문이 나타났다. 철통 보안이다 그거지. 데일에게 열쇠 따위 있을 리 없다. 시골 농부의 유일한 자랑거리라면 어디 내놓아도 뒤질 것 없는 완력이다. 데일은 손으로 쇠사슬을 풀어헤치고, 발로 걷어차 자물쇠를 박살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안으로 발을 디디자, 데일 테메움은 혁명군의 누구보다 먼저 충격적인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오를레앙 후작저는 을씨년스러운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내가 뭘 해야 한다고? 복잡한 얘기는 질색이야.”

거트루드 준위는 이제 멀끔한 군인의 모습을 갖추긴 했지만, 그보다 아득히 계급이 높은 야전군의 참모장과 존경받는 기술고문 앞에서 격식을 차리지 않았다. 각 잡힌 시늉 하나는 일품이라 해도, 오랜 벗 앞에서 건방지게 버릇을 남 주지는 못한 탓이다.

“이 일이 제게 남은 마지막 일이었으면 좋겠네요.”

죽음을 바라는 황실의 용병 포에니텐시아는 프레이야 이상으로 음울한 인상을 한 여자였다. 하얀 머리칼을 길게 내리고, 색이 다른 한쪽 눈 위로는 안대를 썼다. 주는 식사도 마다한 탓에 매우 깡마른 인상이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제국군의 제복을 입은 적은 없었다.

“이제 작전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작전명은 ‘오퍼레이션 벨레로폰’. 이  작전의 목적은 반란군의 공중함선을 격추하고, 반란군 지휘관 아니스 해레나를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참모장 란드그리드 레긴은 작전 문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작전의 개요를 설명했다. 고저 없는 차가운 어조, 자로 잰 듯 일정한 말과 말 사이의 정확한 간격. 트루디는 거들먹거리는 자세로, 엘로디는 체념한 듯한 낯으로 란드그리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안셀의 반란군 본대와 히메네스 군단은 이반과 적시에 합류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요. 그렇게 된다면 이반은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여기, 오를레앙 후작저에서 승부를 보려고 하겠죠. 에코, 그래요… 그 사람을 여기로 보내기 위해 함선을 지면 가까이로 이동시킬 테고요. 우리의 사정권 안에 들어오게 될 거예요.”

프레이야는 에코라는 이름을 말할 때 긴 뜸을 들였다. 그에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이름이어야 했다. 유일한 엘로이즈는 오를레앙 후작저의 엘로이즈뿐이다. 설령 거짓이라 해도, 프레이야 오를레앙에게는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이었다. 헌데 왜 저도 모르게 힘을 주어 그 이름을 말하게 되었을까.

“그때가 기회입니다. 함선은 하부가 참나무로 되어 있는데, 특히 좌현이 취약해 보이더군요. 강도가 높아 강한 충격을 받으면 이를 분산시키기 못하고 균열이 일어납니다. 선박은 정박할 때 수면 아래로 닻을 내리지요? 우리는 그 반대로, 지면에서 선박을 향해 닻을 날릴 겁니다. 나의 페후가 이를 위해 장치를 만들어두었습니다.”

오를레앙 소후작 엘로이즈는 그렇게 설명했다. 발상의 전환이다. 배가 수면을 향해 닻을 날리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지면에서 배를 향해 포탄을 쏘아 올리듯 닻을 날린다. 닻이 좌현의 판자를 파고들어 구멍을 만들면, 트루디와 엘로디는 닻을 연결한 쇠사슬 위의 판자를 타고 올라 해방자호에 침입한다.

“아니스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를 경호하는 버스트를 떼어 놓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버스트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트루디, 당신밖에 없습니다. 함선 안으로 침투하면 가장 먼저 그를 찾아 아니스와 떨어트려 놓으십시오. 버스트와 아니스가 함께하지 못하게 두어야, 포에니텐시아가 아니스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포에니텐시아, 당신은 선장실을 습격해 아니스를 제거해야 합니다. 해방자호와 아니스가 없다면 반란군은 더 이상 서부에서 힘을 쓰지 못할 겁니다.”

란드그리드는 작전 과정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트루디는 손가락 마디를 딱딱 꺾으며 몸을 풀었다. 간만에 싸움다운 싸움을 해볼 수 있겠군. 엘로디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 벗이었던 이들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 암살자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이다. 제 손으로 쓰러트려야 한다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이 모든 것은 위대한 네시디온 제국과 흔들리지 않을 질서를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란드그리드 레긴과 프레이야 오를레앙의 믿음이었다.


노먼은 객관적으로 그리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굳은 일을 맡아 해온 적도 많았고, 힘과 지구력이 필요한 주방 일을 도맡게 된 후로는 체력도 더 늘었다. 한시가 바쁜 주방에서 재빠르고 정확하게 재료를 손질하고, 무거운 팬을 쥐고 흔드는 일에는 이제 이골이 났다. 황실 주방의 부주방장이라는 그럴듯한 직함이 괜히 생긴 것은 아닌 탓이다. 나름대로 자부심도 생기고 보니, 그에 따른 책임감도 늘었다. 번거로운 일에 휘말리는 것은 내키지 않아도, 무책임한 없는 사람은 아니다. 제 손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센스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내세울 재주는 있는 마법사다. 노먼은 황실 주방까지 넘본 간 큰 도둑을 붙잡기 위해 마법을 써 장벽을 만들었다. 황색 장벽이 도둑의 앞을 가로막았다. 노먼은 아카데미 시절부터 배리어를 만들어내는 마법에 능숙한 편이었으니, 이 정도 응용은 어렵지 않다. 도둑의 발이 그리 빠르지 않다면, 노먼은 충분히 뒤쫓아 붙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도둑은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민첩함으로 재빠르게 노먼의 벽을 뛰어넘어 달아나고 말았다. 아무렇지 않은 양 장벽을 날렵히 넘어서는 모습이 꼭 덫을 뛰어넘는 여우를 연상케 했다. 필시 이 범상치 않은 도둑은 평범한 시정잡배는 아닐 터였다.

복잡한 일에 휘말리는 건 질색이라지만, 부주방장이라는 직함이 걸려 있는 일이다. 이 도둑을 제대로 붙잡지 못하면 요리사로서의 내일은 없다. 노먼은 식재료 배달부들이 쓰는 자전거 하나를 빌려서는 황급히 페달을 밟았다. 중앙을 가로지르는 아실리스 대로에서 보기 드문 추격전이 벌어졌다.

묵직한 주머니를 든 식재료 도둑이 한 발 앞서 거리를 뛰쳐나가면, 자전거에 올라탄 요리사가 다급하게 페달을 밟아 그를 뒤따른다. 매사 조용하고 근엄한 분위기가 깔려 있는 중앙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갑작스런 소란에 거리의 사람들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채 자리를 피했다.

“거기 안 멈추나!”

노먼은 평소에 지르지도 않던 목소리를 높이며 도둑을 뒤쫓았다. 하지만 배짱 좋은 도둑이 말을 들을 리가 만무했다. 호승심이 붙은 탓인지, 노먼을 약올리고 싶었던지 도둑은 잡힐 듯 말 듯한 속도를 맞추며 달아났다. 길을 막아보려 장벽을 다시 만들어도, 도둑은 장벽을 뛰어넘거나 길을 바꾸는 방법을 쓰며 능란하게 빠져나갔다.

추격전은 남부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이어졌다. 쫓는 자가 매섭게 달라붙으면, 쫓기는 자는 질세라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새벽에 시작된 추격전은 해가 중천에 뜨고 다시 저물기 시작하는 저녁까지도 이어졌다. 노먼은 정신없이 도둑을 뒤쫓느라 제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 하루가 다 가도록 도둑을 쫓아가다가, 노먼은 이 재주 좋은 도둑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제서야 노먼은 제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기 익숙한 곳인데? 땅거미가 이미 저문 야밤이었다. 노먼은 발걸음을 멈췄다. 땅거미가 지고도 남은 어두컴컴한 야밤, 머지 않아 노먼의 주변으로 램프와 횃불이 비쳐들었다. 이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의 복장을 보고, 노먼은 인생이란 마음처럼 풀리는 일이 하나 없다고 생각했다.

“제국군을 발견했습니다! 조리병 같습니다!”

한 병사가 노먼의 검은 셰프복을 보고 그렇게 외쳤다. 서부로 이동하던 데일의 히메네스 군단이었다.

우리의 가엾은 노먼은 이마를 짚으며 탄식을 내뱉었다.


오를레앙 후작령이 제국의 편으로 돌아섰다는 소식을 들은 후, 혁명군 메테시스에서 안셀 벨레너스만큼 놀란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제 왼팔로 있던 에코, 즉 엘로이즈 오를레앙이 가문으로 돌아가 제국과의 협력을 선언했다니…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수장으로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티를 내지는 않았어도, 마도공학의 전문가로서 강직하고 균형 있기로 소문난 오를레앙이 당당하게 제국의 편에 섰다는 것만큼 그를 경악하게 만든 일은 없었다. 북부가 고립되어 있던 탓에, 안셀은 그가 사칭자이리라는 확신도 갖지 못했다.

더군다나 오를레앙 후작령은 발전한 산업과 풍요로운 경제력으로 잘 알려진 지역이다. 오를레앙을 제국에게 빼앗긴다면 애써 쌓아놓은 서부에서의 영향력을 모조리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를레앙을 수복하기 위해서는 혁명군의 대규모 작전이 필요하다. 오를레앙 후작령이라는 요지를 두고, 제국군과 혁명군의 대대적인 충돌이 벌어질 것은 예견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때마침 안셀의 휘하에는 얼마 전 그 아래로 찾아와 합류를 자청했던 알비누스가 있었다. 아니스와 버스트라면 분명 이반부터 찾아내 영입하려 할 것이다. 안셀은 이반이 전술의 기술적 실현을 위해 알비누스를 필요로 하리라 판단했다. 급편을 태워 알비누스를 남부로 보낸 뒤, 안셀은 메테시스 본대에 서부로의 진군을 명령했다. 이반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제국군의 대군을 상대하기 위해 메테시스 본대의 도움을 요구할 터였다.

문제는 이동에 불리한 북부의 지형이다. 안셀은 서부로의 이동을 위해 사실상 고립된 상태를 극복해야 했다. 메테시스 본대의 근거지에서 오를레앙 후작령으로 남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베르마트 협곡을 거쳐야 한다. 이곳을 지나치지 않는다면 너무도 먼 거리를 돌아가게 된다. 그는 베르마트 협곡이 매복에 유리한 지형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제국군이라면, 이 지형을 이용해 안셀의 이동을 방해하려 할 것이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적 지휘관이 어느 정도 군사적 안목이 있는 자라면, 길을 내려다보는 절벽 어귀에 미리 진을 치고 그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테다. 매복을 그대로 당해줄 수는 없다. 도착이 조금 늦어지는 것은 감수해야 한다. 안셀은 이를 파훼하기 위해 술책 하나를 동원하기로 했다. 그 작전은 다음과 같았다.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기에, 붙잡아 왔습니다. 신원을 물어보니 윈터스 남작 영애라는군요.”

제국군 병사가 한 여자를 붙잡아 왔다. 빅토리야는 보초를 서던 병사의 보고와 함께, 붙잡힌 웬 귀족 영애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름은 마르시아 윈터스로, 근방의 마을 칼리고의 유지 윈터스 남작의 딸이라 했다. 빅토리야는 안셀에게 진지의 위치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은밀히 매복을 준비하던 참이었다. 진영의 위치를 눈치챈 사람을 그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 빅토리야는 작전이 성공할 때까지 마르시아를 진영에 억류해두기로 했다.

아벨 워커가 마르시아 윈터스를 알아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벨? 어디서 뭐 하러 갔나 했더니… 기사가 된 거야?”

마르시아는 아벨이 어린 시절부터 시중을 들어 온 고향의 남작 영애였다. 마르시아는 아벨을 보고 반갑다는 듯 웃어 보였다. 아벨은 웃음이 어색해, 제 딴에는 애를 쓴 미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마르시아는 아벨에게 진영을 떠나지 않을 테니, 여단의 진지를 둘러보고 싶다고 요청했다. 막사에만 박혀 있는 건 너무 답답하다고, 그리 덧붙이면서. 그 정도라면 큰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 아벨은 그렇게 생각하고 마르시아를 막사에서 잠시 풀어주었다.

마르시아 윈터스가 아자라이아에게 접근한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이반은 머리를 싸맸다. 왜 북부군이고 남부군이고 도착이 지연되고 있는 거지?

제국군은 베른 베카리아의 지휘 아래 전열을 재정비했다. 베른이 해방자호의 공중 폭격에 대응하기 위한 대공 방어 체계를 어느 정도 갖추기 시작해, 이전처럼 효과적인 타격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안셀의 북부군과 남부의 히메네스 군단이 때맞춰 도착해 협공하지 않으면 효과적으로 서부를 수복하기 어렵다. 해방자호의 연료도 무한하지는 않다. 소모전으로 이어진다면 물량이 우세한 제국 측이 승기를 잡을지도 모른다.

이반은 고민에 잠겼다. 해방자호가 강력한 병기라 해도, 만능의 무적함대는 아니다. 적당히 기회를 노리며 지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릴 것인가,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승부를 쳐 결정적인 쐐기를 박아둘 것인가. 지원군의 도착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이반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이반은 메테시스 동지들을 모아두고 현 상황의 문제점을 설명했다.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끼리만이라도 승부를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상황이 어려워지면 저 하나라도 나서겠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책임져야 할 일이니까요.”

에코는 강한 책임감을 드러내며 공세로 나서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오를레앙 후작령의 문제는 누구보다 그가 책임져야 한다. 적의 심장부로 파고들어 승부를 보자는 각오 정도는 되어 있었다.

“아직 시간은 있는 것 같은데. 조금 늦어지기는 해도, 위태로운 상황은 아닌 것 같거든. 데일도 수장께서도 생각이 있겠지, 안 그래?”

아니스는 수세에 한 표를 보탰다. 상황이 그리 늦지는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직 그 정도로 위험한 상황은 아니다. 안셀이고 데일이고 각자의 판단과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한 것이다.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너무 급하게 나설 것도 없죠. 무리하게 나서서 일을 그르치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알비누스는 특유의 여유로운 말투로 아니스의 의견에 동조했다. 공세파와 수세파의 비율은 1:2가 되었다.

“...부족한 의견을 더하자면, 지원군이 말처럼 늦지 않게 올 거라는 보장도 없지 않나요. 일이 생긴 거면 어떻게 하려고요. 우리끼리라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버스트는 공세파에 의견을 더했다. 2:2로, 상황이 팽팽했다. 이반은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한참의 고민 끝에,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아니스는 지휘를 맡아야 하니 해방자호에 남는다. 버스트는 유사시에 아니스를 경호해야 하고, 알비누스는 함선의 상태를 파악해야 하니 아니스와 같이 남도록 하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어.”

그렇게 말하며 이반은 에코를 돌아보았다. 에코는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나와 에코는 오를레앙 후작저로 착륙한다. 우린 담판을 지어야 할 녀석들이 있어. 나는 란드그리드와, 에코는 그 사기꾼 자식, 그리고 프레이야와 승부를 봐야 한다. 지원군이 오든 안 오든 봐야 하는 싸움이다.”

아니스, 버스트, 알비누스 셋은 해방자호에 남아 아니스의 지휘 아래 서부 전선을 유지한다. 이반과 에코는 적진 한복판에 뛰어들어 갬빗을 건다. 지원군이 늦지 않게 도착하리라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반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었다. 난전이 시작된다면, 그 뒤는 전략이 아닌 전술의 싸움이었다.

“좋아, 그렇게 하자고.”

함장 아니스는 이반의 전략에 최종 결재를 내리고, 키를 돌려 해방자호를 지면 가까이로 하강시켰다. 각색의 장미가 핀 오를레앙 후작저의 정원이 가까워졌다. 하늘이 다시 멀어지고 대지가 가까워질 무렵, 에코는 이반을 업어든 채 호쾌하게 뛰어내렸다. 날선 가을 바람이 머리칼 사이로 스쳤다.

싸움은 새로운 장으로 넘어서고 있었다. 변혁의 메아리는 거울 저편에 놓인 또 다른 자신과 직면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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