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ther Echo Ⅱ

다른 하나의 에코 Ⅱ

CORDIS by 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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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미나 야전군 사령부는 만족스러운 축배를 들고 있었다. 야전군 부사령관 베른 베카리아 중장은 군모를 고쳐 쓰며 부하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제군들, 그간 반란군이 우세를 점하던 서부 전선에서 만족스러운 소식이 있다. 얼마 전 남부 소탕 작전으로 우리 황실군이 남부를 장악한 이래, 반란군이 준동하던 서부는 골칫덩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 오를레앙 후작가가 황실군에 협력할 것을 선언하지 않았나. 그들의 사병과 인망, 재력은 서부 장악의 유용한 발판이 될 수 있다. 곧 있으면 서부 전역도 우리 손아귀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야전군 총사령관 라디우스 페리스 대장은 부사령관의 선언에 박수를 보냈다. 그는 황제의 친척으로 몇 차례의 군사적 공적으로 인해 총사령관 자리에 추대된 인물이었지만, 그리 뛰어난 인물은 못 된 탓에 군의 실질적인 지휘권은 베른에게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어 일선 장교들이 총사령관에 연이어 베른의 장중한 설명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베른이 짧은 축사를 마치고 막사를 나설 때, 한 젊은 장교가 베른의 앞을 가로막았다.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를 늘어뜨린 여성으로, 엄격하고 완강한 인상으로 알려져 있었다. 참모관 란드그리드 레긴이었다.

“부사령관님, 아까 말씀하셨던 연설은 잘 들었습니다.”

“그래, 좋다. 그래서 무슨 용건이지?”

“다름이 아니라, 이번 작전과 관련해 부사령관 각하께 개인적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란드그리드는 베른에게 자신이 예측하고 있는 바를 담담하게 설명했다. 베른은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란드그리드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오를레앙이 제국에 협력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각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오를레앙 후작가는 그간 반란군에 협조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베른은 란드그리드의 말에 약간 놀랐다. 오를레앙이 그간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속으로는 혁명군을 후원하고 있었다는 것이 란드그리드의 설명이었다. 란드그리드는 고급 장교들도 쉽게 알 수 없는 정보를 어디선가 알아채 온 것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그 점이 아닙니다. 오를레앙 후작가라는 중요한 후원자를, 오를레앙 후작령이라는 요지를 빼앗겼을 테니, 반란군은 이를 수복하려고 할 겁니다. 서부 전선에서 우리 제국군을 축출하기 위해서. 각하께서도 예측하고 계시듯, 서부 전선에서의 공세를 통해서 말입니다.”

혁명군이 거점으로 삼고 있는 지역은 크게 북부 히베르니스와 서부 아르티시스다. 동부는 전통적으로 귀족들의 영지였으니 제국의 영향력이 강하고, 남부 지역은 얼마 전의 초토화 작전으로 혁명군이 주둔하고 있을 법한 도시들은 모두 잿더미가 됐다. 기껏해야 중립을 표방하고 있는-그것은 중립이라기보다 기행에 가까웠다-히메네스 가문이 남부에 유일하게나마 남은 번듯한 세력이었다.

북부에서는 혁명군 수장 안셀의 활약으로 혁명군의 기세가 여전하지만, 서부 아르티시스의 유지인 오를레앙 가문이 제국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따라서 서부에 대한 혁명군의 우세는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 이를 수복하기 위해서 서부에 대한 공세를 강화할 것이라는 게 란드그리드의 분석이었다.

“그 점은 본관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점이다. 그래서, 제안하고자 하는 바가 뭔가?”

“적들은 제국군이 상상도 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공세를 펼 겁니다. 따라서, 이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많은 전력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요구하는 내용을 따라주셔야만 합니다. 이건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지성이 제국을 지키기 위해 제안하는 유일하고도 가장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가장 먼저… 제가 여기 두 사람을 찾아주십시오.”


“진짜 그렇게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건가?”

데일은 다소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고 하는데, 믿어는 봐야지 않겠습니까.”

버스트는 묵묵하게 데일의 표정에 화답했다.

“성공한다니까. 내가 확실히 장담할 수 있다. 뭐, 실패하면 실패하는 거고. 여기 맞지? 잘못 온 거면…”

이반은 허공에 탁한 숨을 내뱉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눈앞에는 동부의 한 연구소 겸 저택이 있었다. 명패에는 호레이샤 집안의 이름이 유려한 글씨체로 새겨졌다.

호레이샤 가문은 지난 70여 년 동안 마도공학을 주로 연구해 온 가문이었다. 특히 알비누스의 조모인 앨러타 호레이샤의 대에서 마법과 가업을 접목하기 시작하며 학계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마도공학을 중심으로 한 호레이샤 집안의 연구 전통은 학계에서도 여전한 인정을 받고 있었다.

“기계 좀 만질 줄 아는 기술자가 필요하거든,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서 말이다.”

해적선을 지켜야 하는 아니스와,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아니스에게 돌아간 에코를 제외한 세 사람. 알비누스를 만나러 온 데일, 버스트, 이반은 저택의 사용인으로부터 불행한 소식을 전해들었다. 알비누스가 불과 얼마 전부터 장기 출장을 명목으로 자리를 비웠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데일이 제 머리를 헤집으며 퉁명스레 내뱉었다.

“얼어죽을…”

이반은 바닥을 구르는 돌멩이를 툭 걷어차며 쓴소리를 뱉었다.

“...말 좀 예쁘게 하면 안 되겠습니까.”

버스트는 약간 한심하다는 듯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사용인에게 호레이샤의 가주 부부와 만날 수 없겠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들이라면 알비누스의 행방을 알 거라는 심산에서였다.

“아, 두 분은 시간이 되실 거예요. 지금 가능하신지 여쭤보고 올게요.”

그렇게 세 사람이 한참을 기다린 뒤에, 사용인은 도로 내려와 호레이샤 가문의 가주와 대면할 수 있다는 승낙을 세 사람에게 알려주었다. 바닥에 쭈그려 있던 데일은 먼지를 털어내며 몸을 일으켰고, 젊은 나이에도 관절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들리던 이반은 버스트의 부축을 받아 일어날 수 있었다.

알현실은 소박하지만 고풍스러운 저택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었다. 암갈색 의자가 테이블을 따라 죽 늘어서 있었고, 마호가니로 된 벽시계가 딸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상아 장식을 세공해 만든 알람시계는 아담한 은촛대와 함께 선반을 꾸미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에게 썩 어울리는 공간은 아니었다.

“알비누스를 찾고 있다고 들었어요. 무슨 용건이죠?”

알비누스의 어머니, 호레이샤 가문의 온화한 가주는 세 사람에게 알비누스를 찾는 이유를 물었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잠시 고민하더니, 호레이샤의 가주가 제국에 협력할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가주님께 특별히 부탁합니다. 호레이샤 영식, 즉 알비누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오를레앙이 제국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상황에서, 서부의 전황을 바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기밀이지만, 메테시스가 그의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가주는 가볍게 웃더니, 그들에게 미처 예측하지 못한 희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애는 이미 혁명군에 가담하겠다고 나섰어요. 나랑 남편에게만 몰래 알려주고, 연구소에는 출장을 가겠다고 얘기해 둔 거죠. 아마 북부로 갔을 텐데…”

이반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부인.”


엘로이즈는 침실의 탁자 위에 넓은 지도를 펼쳐두었다. 네시디온 전역이 그려진 지도 위에는 몇 개의 말과 깃발이 놓여 있었다. 프레이야는 엘로이즈가 펼쳐놓은 지도 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황실군 지휘관 페리스 대장은 총지휘관으로서는 역량이 부족한 인물이에요. 잘 쳐줘야 황제의 후광을 업고 총사령관 자리를 꿰어 찬 사람이죠. 그는 반란군의 움직임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요.”

프레이야는 제국군의 지휘관에 대해 그리 평했다. 엘로이즈는 지도 위로 말판을 배치했다. 검은색과 금색이 섞인 말들은 카르미나를 상징하는 기물이었고, 붉은색과 흰색이 섞인 말들은 메테시스를 상징하는 기물이었다. 엘로이즈의 시선은 네시디온의 서쪽에 멈췄다. 서부 아르티시스, 기술과 학문이 발달한 제국 산업의 중심지.

“오를레앙이 제국의 편을 들기로 한 이상, 향후 서부는 전쟁의 중심으로 그 중요성이 떠오를 겁니다. 메테시스는 서부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가진 병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을 테고요. 이곳은 격전지가 되겠죠.”

엘로이즈는 붉은 말 몇 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엘로이즈의 손에 붙잡힌 메테시스의 말들이 떠올랐다.

“당신이 생각하고 있듯이, 이반은 우리 제국군이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전략을 가져올 겁니다. 그 뛰어난 베른 베카리아조차 쉽게 짐작하지 못하는 계획일 텐데, 한낱 라디우스 따위가 이반의 전략을 따라잡을 수 있을 리 없죠.”

엘로이즈는 다른 손으로 북쪽에 있는 말을 짚었다. 가장 큰 붉은 말이 그곳에 있었다.

“내가 짐작하건데, 이반은 분명 북부에 있는 안셀의 병력과 함께 제국군을 포위하려고 할 겁니다. 제국군이 그를 상대하기 위해서 서부에 병력을 집중시키면, 이를 이용해 서부와 북부의 포위를 완성하겠다는 심산이겠죠. 아마도 남쪽에서는 히메네스 공작가에 구원군을 요청할 테고요. 포위를 통해 제국군을 동쪽으로 후퇴시켜 오를레앙 후작령을 탈환하고 우리와 승부를 보려는 겁니다.”

엘로이즈는 그렇게 분석했다. 프레이야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이반은 제국군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오를레앙 후작령 탈환과 서부 장악을 목표로 하는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할 것이다. 제국군은 이를 막아내기 위해 병력을 집중시켜야 한다. 제국군이 이반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서부와 중앙 일대에 전력을 집중하면, 때 맞추어 안셀의 북부군과 히메네스 공작가의 구원군이 이반과 함께 삼면 포위를 완성한다. 이반의 계획은 이렇다.

“그러면, 이걸 막아내야 하지 않겠나요? 이반은 무시할 수 없는 전략가예요. 성공하게 내버려두기라도 한다면 제국군은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프레이야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엘로이즈는 제가 짚은 붉은 기물을 천천히 움직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중앙의 병력은 오히려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북부입니다.”

각개격파를 당하지 않고 적재적소에 포위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일사불란한 지휘와 통신이 필수적이다. 손발이 하나라도 흐트러지면 계획에 틈이 생길 수 있다. 더군다나 지휘부에 타격을 가한다면 포위 섬멸은 각개격파로 둔갑해버리고 말 것이다. 붉은 기물은 북부의 산지를 움직이며 서부 방향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엘로이즈는 어느 순간 말의 움직임을 멈췄다.

“히베르니스에서 아르티시스로 내려오기 위해서는 베르마트 협곡을 지나야 합니다. 험준하고 비좁은 지형 탓에 대규모 병력이 이동하기 어려운 지역이죠. 메테시스는 이곳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곳에 매복군을 주둔시켜야겠네요. 북부 지리에 익숙한 자에게 지휘를 맡겨, 별동대를 꾸리게 하죠. 적임자는 그 사람밖에 없겠어요.”

프레이야의 대답에 엘로이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그 사람에게 제안을 전해둔 참입니다. 그 사람의 충성심을 확인해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늦어지는 건지 모르겠군요. 분명 이반과 데일, 버스트를 동부로 보냈을 텐데.”

에코는 선장실의 소파에 앉아 단안경을 고쳐 썼다.

“애들도 다 생각이 있겠지. 그 녀석이 제국군 손을 들어주러 간 게 아니고서야. 이반이 그러길, 우리 계획에는 분명 그 녀석이 필요하다고 했지? 없으면 뭐, 망하는 거지.”

아니스는 지독한 농담을 던지며 말을 되받았다.

그때 누군가 선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익숙한 노크 소리였다. 아니스는 고개를 돌렸고, 에코는 소파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장실의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났다.

지팡이를 짚는 소리가 났다. 안광 없이 검은 눈, 반짝이는 한 쌍의 안경알. 여명처럼 새하얀 머리칼을 보기 좋게 밀어 올린 남자는 그들 못지 않은 장신이었다.

“당신이 왜 여기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네요. 반갑지 않으십니까?”

남자는 태연하게 웃으며 그리 대꾸했다. 능청맞은 면모는 그들에게도 그리 익숙치 않은 것이었다. 자택에서만 두문불출하며 학계에 파란을 가져올 정도로 획기적인 논문과 저작을 펴낸 탁월한 공학자, 그러나 저택 바깥을 나서지 않은 탓에 수수께끼에 싸여 있던 인물. 조모를 잃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알비누스 호레이샤는 한눈에 달라진 모습으로 그들 앞에 서 있었다.

“너, 그 알비누스가 맞아?”

아니스는 의아스러운 낯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그들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알비누스 호레이샤는 이처럼 능청스럽고도 심지 곧은 사람이 아니었던 탓이다.

“맞습니다, 저를 뭘로 보시고. 그때의 제가 아닙니다. 그보다도, 엘로이즈가 두 명이나 있다니, 이게 어떻게 된 거죠? 그것부터 설명을 해주셔야겠는데. 아, 상황 설명부터 해드리는 편이 좋겠군요.”

불과 한두 달 전, 알비누스는 출장 연구를 명목으로 저택을 나섰다. 3년 동안 저택 바깥을 나서지 않던 그가 연구소를 나선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은 사용인들이 없었다. 가주 부부만 알비누스의 결단을 알고 있었다. 알비누스는 행적을 숨기고 즉시 히베르니스의 안셀 벨레너스를 찾았다.

‘알비누스, 아니스가 자네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을 거야. 미라빌리스로 향하게, 가서 아니스의 배를 찾아가.’

안셀은 알비누스에게 그렇게 말해두었다. 종횡무진 미라빌리스를 누비는 아니스의 배를 찾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메테시스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수장께서는 제가 해야 할 일이 꼭 있을 거라고 하시던데, 그게 대체 뭡니까?”

알비누스는 그렇게 말하며 각종 장비가 담긴 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들에게는 바로 그게 필요했다.

“이반이 말하길, 너를 꼭 찾아야 한다던데. 네가 없으면 작전이 안 된다나. 자료가 좀 필요할 텐데, 내가 아는 선에서 긁어 모았다. 내가 조선업에서는 한 가닥 하지.”

아니스는 그렇게 말하며 한 무더기의 자료를 탁자 위에 꺼내 놓았다. 각종 설계도와 도안, 장부과 논문들이 가득했다. 아니스 역시 손재주로는 뛰어난 편에 속했지만, 그의 능력으로는 계획을 추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우린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당신이 아니면 해낼 수 없습니다. 이반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계획을 설명하겠습니다. 작전은…”

에코는 이반이 입안한 계획을 알비누스에 설명했다. 알비누스는 어이없다는 듯한 낯을 하고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가 있으면, 그게 될 거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믿어주신 김에, 한번 해보죠. 못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내 생각에, 알비누스는 먼저 녀석들과 합류했을 가능성이 있다. 혁명군에 가담하기 위해 집을 나왔다 하니, 카르미나 놈들에게 협력했을 거라는 걱정은 버려두는 편이 좋겠어. 다행인 얘기지.”

이반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데일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서, 우린 뭘 하면 되는데? 알비누스를 찾겠다고 왔더니, 건진 것도 없잖나.”

버스트는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는데, 그들 중 두드러지게 큰 체구 탓에 말을 꺼내지 않아도 유달리 존재감이 남달랐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일단 알비누스는 먼저 합류했다고 보는 편이 좋겠다. 잘 된 일이지. 에코는 그 사기꾼이랑 한 판 승부를 봐야 하니 논외로 치고, 우리 작전이 수틀리면 아니스가 위험해질 수 있다. 수장이 오기 전까지 우리 작전의 최고 지휘관은 아니스야. 녀석을 지킬 사람이 필요하다.”

이반은 그렇게 말하며 버스트를 가리켰다. 버스트는 단순하긴 해도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았다.

“나와 버스트는 아니스의 함선으로 돌아갈 거다. 나는 전략을 세우고 지시해야 하고, 버스트는 아니스를 호위해야 되거든. 그리고 데일, 너는 따로 맡길 임무가 하나 있다.”

“너희는 왜 맨날 나보고 이래라저래라 하나? 그래서, 뭔데?”

데일의 짧은 불평에도 이반은 아랑곳않고 명령을 내렸다.

“우리의 목표는 제공권을 잡는 거다. 우리 시대에 공중전이라는 개념은 미비해. 내가 알비누스가 필요하다고 했던 것도 바로 그래서고. 하늘을 장악하고 나면, 제국 놈들은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온 전력을 집중할 거다. 그때 제국군을 포위하기 위한 구원군의 역할이 필요하다.”

제공권? 공중전? 갑자기 그 얘기는 또 왜 하는 건가? 데일과 버스트는 의아스럽다는 듯한 낯을 감추지 않았다. 감자 캐던 농부와 외팔이 용병은 힘 쓰는 일로는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 장정들이라지만, 전략에 있어서만큼은 뭇 참모들보다 한 수 아래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탓이다.

“그리고 전투의 기본은 포위전이지. 내 공세를 막기 위해 놈들이 모든 전력을 집중했을 때, 수장의 붉은 군대가 북쪽에서 치고 들어올 거야.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놈들을 동쪽으로 완전히 몰아내려면, 후미를 책임져 줄 지원군이 있는 편이 좋아. 우리의 작전은 포위 전략이다.”

이반의 계획은 엘로이즈와 프레이야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제국군이 병력을 오를레앙 후작령이 위치한 중앙과 서부의 경계 부근에 집중시키면, 북쪽에서는 수장 안셀이 이끄는 메테시스의 본대가, 남쪽에서는 히메네스 공작가의 우군이 제국군을 감싸듯이 삼면에서 포위한다. 이렇게 된다면 제국군은 오를레앙 후작령을 토해내고 동쪽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다.

“남부에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세력은 하나뿐이야. 히메네스 공작가의 지원을 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도 사람을 보내야 해. 네가 이니랑 얘기를 해줘야겠다. 그 애는 오풀렌티스에 오래 있었으니, 말이 잘 통하지 않겠나?”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히메네스 공작가의 풋풋한 어린 가주에게 승낙을 받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그게 나라고?”

이반은 협력을 요청하기 위해 공작가에 보낼 사절로 시골 농부를 점찍은 것이다.


바야흐로 날씨가 시나브로 선선해질 무렵. 길가에는 자연스레 낙엽이 쌓이고, 바람은 냉기를 머금기 시작한다. 참호와 간이 흉벽, 목책을 두른 군용 진지 주변을 제국군 말단 병사 두 사람이 순찰하고 있었다. 평소와 그리 다를 것도 없어, 그들은 하잘것없는 농담이나 나누며 시간을 떼우는 중이었다.

“저기, 독수리 보이냐?”

병사 하나가 하늘을 올려보았다. 하늘 멀리 저 편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날아오고 있었다. 양편으로 날개를 펼치고, 커다란 머리를 내놓은 채 호방하게 하늘을 가르며 유영한다. 그러나 검은 형체는 날개를 퍼덕거리지도, 부리를 흔들지도 않았다.

“독수리 맞냐?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배 같은 것이…”

검은 형체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들은 제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믿지 못했다. 전쟁사상 단 한번도 존재했던 적 없는 병기가 그들의 눈앞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아니스의 항법술, 이반 레베데프의 지성, 호레이샤의 기술력이 폭발적인 화학반응을 일으켜 만들어낸 사상 최대의 병기.

현대 마도공학의 정수, 거대한 함선이 엔진에서 불을 뿜으며 창공을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었다.

“카르미나 이것들아! 맛 좀 봐라!”

아니스가 선수의 갑판 위에 서서 호탕하게 외쳤다. 함선의 측면에서 묵직한 포탄이 지상을 향해 우박처럼 쏟아졌다. 알비누스는 함선의 동력부 이상을 점검하고 기름칠을 했다. 에코는 포탄의 사거리가 민간인을 타격하지 않도록 카르미나 사령부를 조준하는 역할을 맡았다. 버스트는 묵직한 포탄을 종잇장 들듯이 한 손가락으로 들고 내리며 능숙하게 화포의 포신을 장전했다. 이반은 까마득한 상공에서 적진을 굽어보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카르미나 야전군 총사령관 라디우스 페리스는 재앙을 맞닥뜨린 것처럼 기겁했다. 날아다니는 배라니? 그것도 화포를 우박처럼 쏟아내는 함선이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 그는 이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만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제대로 된 지휘와 대응을 내리지 못했다.

“부대의 편제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군율을 유지시키게. 사거리가 닿는 화포들은 함선을 조준시키고, 사거리가 닿지 않는 화포는 무리해서 쏘아 화약을 낭비하지 않도록 해. 진지에는 대공 방어망을 더해 두고, 막사애는 철판으로 된 지붕을 만들어 피해를 줄이도록 해.”

실질적인 지휘관은 베른 베카리아가 도맡고 있었다. 초유의 공중전은 그로서도 경험해본 바가 없던 일이지만,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을 다했다.

“부사령관 각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참모관 란드그리드 레긴은 베른을 긴급하게 불러냈다. 적들은 사령부를 집중적으로 타격할 것이다. 가장 유능하고 믿을 수 있는 상관 베른을 사령부에서 미리 빼낼 필요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긴급한 안건 몇 가지를 그에게 요구해야 했다.

베른이 란드그리드의 요청을 받고 사령부를 빠져나와 있었을 때, 아니스의 함선에서 날아온 포탄이 카르미나 사령부를 타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제대로 상황도 파악하지 못하던 라디우스 페리스는 포탄에 무너진 진지에 깔려 큰 부상을 입고 중태에 빠졌다. 베른은 도무지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 겨우 분을 삭혀야 했으나, 란드그리드에게 이 모든 것은 예상 범위 내였다.


그 와중에 베른을 곤란하게 했던 것은 병력 분할 요청이었다.

“부사령관 각하, 빅토리야 티돕프를 장교로 기용하시고, 휘하로 한 개 여단을 편성해주셔야 합니다.”

참모관 란드그리드 레긴의 요청이었다. 무슨 말이 되는 소리란 말인가? 한 개 여단은 장성급은 되어야 지휘할 수 있다. 군 경험도 전무한 일개 민간인에게 부대를 맡기라니, 베른의 입장에서는 하늘에서 함선이 날아온다는 이야기보다 더 황당무계한 소리였다.

1년 전 카르미나에 합류했던 란드그리드 레긴은 마법을 다루는 희귀한 인재라는 점, 제국의 기술적 발전에 기여한 공학자라는 점으로 그 공로를 인정받아 베른 베카리아의 신임 아래 참모관으로 발탁된 바 있었다. 아버지 흐레이드 레긴이 혁명군을 도왔다는 소문이 있지만, 이제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그는 제국이라는 거대한 질서는 시계장치와 같은 정교한 매커니즘으로 작동하는 기능적 실재라 여겼으며, 제국이라는 거대한 질서가 유지되어야 대륙은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제국군의 일선에서 그 명석함을 드러내며 여러 차례 카르미나의 전략에 기여해 왔다.

“들으신 말씀이 맞습니다. 빅토리야 티돕프의 휘하로 한 개 여단을 편성해 주십시오. 마법을 다룰 줄 아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장교로 기용하여 부대를 편성해야 합니다. 이는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지성이 제시하는 전략입니다.”

란드그리드는 재차 자신의 주장을 강조했다. 빅토리야 티돕프는 그저 북부의 잘 알려진 자선 사업가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배운 것이라고는 아카데미 경력이 전부일 뿐더러, 군 경력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민간인이다. 왜 그런 자에게 군대를 맡긴단 말인가? 그것도 중요한 작전을? 상식적인 관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반란군은 우리 카르미나의 영향력을 서부에서 일소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비공정을 앞세워 서쪽에서 강한 공세를 퍼부으면서, 북부에서 안셀의 본대를, 남부에서 히메네스 공작가의 우군을 끌어와 오를레앙 후작령을 토해내게 만들 심산입니다.”

오를레앙 후작령은 중앙과 서부를 잇는 요지이자, 부유한 경제력과 각광받는 기술력, 풍부한 자원을 자랑하는 땅이다. 이 전쟁에서 두 진영 모두 손에 쥐어야 하는 군사적 요충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그래서, 그게 빅토리야 티돕프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가?”

베른은 여전히 란드그리드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반이 포위 전략을 기획하고 있다는 것과 빅토리야 티돕프를 장교로 기용하라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 이야기란 말인가?

“반란군이 기획하고 있는 포위 전략을 무너트리려면, 포위가 완성되기 전에 이들 각각을 각개격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 중 가장 취약하고, 핵심적인 측면이 북부의 본대라 생각합니다.”

오를레앙 후작령이라는 요지를 되찾기 위해, 안셀 벨레너스가 본대를 이끌고 서부로 남하한다. 이 사실은 카르미나에게도 중요한 기회가 될 수 있다. 북부의 산지는 대군을 이동하기에 험준하고, 이동 중에는 군대의 약점을 노출하기 더욱 쉽다. 잘만 하면 적의 최고 지휘관을 노릴 수 있는 기회다.

“이 일을 맡길 수 있는 적임자는 그뿐입니다.”

수천을 충분히 이끌 수 있을 만큼의 인망, 마법을 다룰 줄 아는 탁월한 능력, 안셀 벨레너스의 전략을 읽을 수 있을 만큼 그와 가까웠으며 영민한 인물. 북부에서 나고 자라며 북부의 험준한 지리에 해박하다는 점은 특히 중요한 이유였다. 엘로이즈, 프레이야, 란드그리드 모두 이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빅토리야를 내정한 바 있었다.

“...알겠다. 빅토리야 티돕프를 임시 대령으로 기용하고, 한 개 여단을 편성하여 히베르니스로 발령한다.”

희망을 전하던 여명의 전도사는 그 본인의 의사와는 별개로, 그렇게 제 스승을 향한 검을 쥐어야 했다.


낯익은 손님이 오를레앙 후작저를 찾았다. 후작 이본느 오를레앙은 그들의 만남을 막지 않았다.

붉은 머리를 내린 여자가 후작저 응접실로 들어섰다. 갖춰 입은 옷가지는 흐트러진 구석 하나 없는 정갈한 제복이었다. 그는 금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맞은편에는 소후작과 그 아내가 앉아 있었다.

엘로이즈와 프레이야는 마치 유일한 벗이라도 되는 양 란드그리드를 환영했다. 투철한 신념과 명석한 두뇌를 가진 란드그리드는 누구보다 두 사람의 전략을 가장 잘 아는 참모였다. 그는 두 사람의 전략이 베른을 통해 제국군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가교 역할을 톡톡이 해내고 있었다.

“사령관 각하께는 우리가 이야기한 내용을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빅토리야 휘하로 1개 여단이 편성될 겁니다. 베르마트 협곡에 주둔하면, 안셀의 본대를 습격하기에는 충분합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베른을 부사령관이 아니라 사령관으로 칭했다. 라디우스 페리스가 군을 지휘할 수 없는 상황이니, 사령관직을 베른이 이어받을 것은 뻔한 이야기였다.

엘로이즈와 프레이야는 란드그리드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란드그리드, 두 사람의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엘로이즈는 담담하게 되물었다. 아니스의 비공정을 공략하기 위해 ‘두 사람’은 반드시 필요했다. 안셀을 제거하고, 이어 아니스를 제거한다면 메테시스에 이렇다 할 지휘관은 남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 점을 이미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거트루드 준위의 신병은 확보했습니다. 미라빌리스 해군에 복무하고 있었더군요. 포에니텐시아의 경우에는… 황실의 명의를 빌려 베른 베카리아가 고용하는 일종의 용병이라고 봐야겠지요.”

트루디는 2년 전부터 황실군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직함은 거트루드 준위. 준사관이라는 그의 직급은 병력을 지휘하기보다 홀몸으로 전장에 나서 적을 휩쓰는 백병전에 능하다는 이유로 정해진 특수한 계급이었다. 남부 소탕 작전에서도 그의 전공은 빛을 발했다.

포에니텐시아는 엘로디 리즈의 다른 이름이다. 제 어머니를 해치고 십수 명의 목숨을 빼앗아 간 마녀. 베른 베카리아는 마법사를 관리하는 특수 시설에 사형을 기다리며 감금되어 있던 그에게 계승을 통한 사형을 조건으로 용병 계약을 제안했다. 이후 포에니텐시아는 혁명군의 요인을 제거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로를 쌓았다.

“이 작전에는 그들 두 사람이 필요해요. 분명히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거예요.”

프레이야는 그렇게 말하며 자료를 살폈다. 그가 파악할 수 있는 선에서 아니스의 비공정을 분석한 것이었다. 제국군에서 알비누스의 기술력을 따라잡을 수 있을 만한 인재는 프레이야뿐이었다.

“선박 좌현의 하부가 취약해보이더군요. 참나무로 만든 모양인데, 참나무는 강도가 단단해 충격을 분산하는 능력이 떨어지죠. 강한 충격을 주면 균열을 일으킬 수 있겠어요.”

프레이야는 아니스의 함선이 가진 약점을 그렇게 분석해냈다.

“비공정도 무적은 아니라는 얘기군요. 하지만 히메네스가 메테시스를 지지하기 위해 일어난다면 남부의 주도권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란드그리드는 매사 완벽을 추구했다. 안셀의 북부군을 빅토리야로 막아서고, 아니스의 비공정에 약점을 꿰뚫는다면 적들의 전략을 무력화할 수 있다. 하지만 이반이 히메네스를 전장으로 끌고 나오는 데 성공한다면 완벽한 계획이 흐트러질 가능성이 있다. 란드그리드는 그 점까지 지적한 것이다.

“그럴 줄 알고 사람 하나를 심어 두었습니다. 연기 하나는 뛰어난 사람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엘로이즈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는 언제나 한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험준한 산자락은 굽이치는 협곡에 둘러싸여 있었다. 무성한 침엽수림이 산자락을 따라 나 있었으나, 고도가 높은 곳에서는 그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다. 깎아지른 능선이 까마득한 구름 어귀를 가로질렀다. 가을 바람은 뼈를 시리게 할 만큼 날선 냉기를 머금었으나, 북부인들은 겨우내의 동풍에 미치지 못한다고 헛웃음쳤으리라.

빅토리야 티돕프는 절벽 위의 고지대에 진을 쳤다. 엘로이즈와 란드그리드가 미리 일러준 그대로였다. 엄혹한 기후와 궂은 지형에도 병사들은 지치는 기색 없었다. 북부에서 나고 자란 이들을 많이 뽑은 터라, 이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비좁은 길은 깎아지른 두 절벽 사이로 나 있었다. 안셀의 본대는 절벽 아래의 길을 따라 이동할 터였다. 빅토리야가 진을 친 절벽 위에서는 그들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었다. 기습을 하기에 이보다 용이한 위치는 없었다. 빅토리야의 병력은 한 개 여단에 불과하지만, 좁은 길을 따라 이동하는 안셀의 병력을 그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기습할 수 있다면 병력의 차이는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는다.

부대의 사기도 충천했다. 빅토리야 티돕프의 다른 이명은 ‘금빛 여명’이었다. 그는 타고난 수완과 비할 데 없는 인품으로 북부의 발전에 기여한 영웅적인 자선가로 비춰졌다. 북부 출신이 많은 그의 부대에서는 그를 존경하는 이들이 많았다. 급조된 부대라 해도 이처럼 기세가 견고할 수 있던 데에는 그러한 영향도 있던 것이다.

그러나 빅토리야 본인은 그리 상황을 낙관할 수 없었다.

‘빅토리야, 우리에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여신 아스트라이아의 이름 아래 제국의 안녕을 지켜야 합니다. 나는 당신이 반란군의 총포에 티돕프가 무너지는 일을 바라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엘로이즈는 빅토리야를 찾아와 그렇게 말했다. 3년 전, 안셀의 기획을 모두 알게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로 미루어 본다면 엘로이즈와 빅토리야는 섞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불과 얼마 전 엘로이즈는 오를레앙 후작저로 돌아와 제국의 편에 설 것을 천명했다. 뒤이어 저를 찾아와 티돕프 마을을 들먹이며 카르미나와 함께하라 제안했다. 그 아래에 ‘황실의 편을 들지 않으면 티돕프 마을은 어찌 될지 모른다’는 은근한 저의가 깔려 있던 탓에, 빅토리야는 내키지 않아도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빅토리야는 작전에 앞서 인원을 다시 점검했다. 장교들의 신상은 어떠한지, 유용한 인력은 누가 있는지 파악해둘 필요가 있었다. 보육원 아이들의 이름과 성격을 외워두던 버릇은 이럴 때 쓸만했다. 그리 자료를 뒤적이던 중, 빅토리야는 한 마법사의 신상에서 저도 모르게 손을 멈췄다.

북부 출신의 마법사라기에 우선 부대에 편성해달라 하고 보니, 너무 평범한 인상인 탓에 눈에 밟히지 않아 신상을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빅토리야는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빅토리야는 병사들에게 그를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은발을 길게 기른 중년의 마법사 한 사람이 빅토리야를 찾아와 섰다. 불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고 했던가, 분명 어린 시절 그를 만났었다. 나이가 들었다 해도 인상은 그대로였다. 빅토리야는 제가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인지 다시 의심했다.

어렸던 빅토리야에게 마법사에 대한 동경을 심어준 사람, 빅토리야가 누구보다 동경했던 마법사.


‘순백의 마법사’ 시오도르 아비레는 철저히 생존주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에서 시작해, 면식도 없던 다른 사람의 거죽을 빼앗은 채로 살아왔다. 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좋게 말하자면 손익을 재어볼 줄 아는 현실적인 실리주의자지만, 나쁘게 말하면 자기보신에 목을 매는 이기적인 속물이다. 몇 권의 책 말고는 이렇게 할 벗도 내세울 수 없었던 빈민가의 어린아이는 이제 신진 의료계 마법사로서 한 명성을 떨칠 수 있는 자리에 올랐다. 비록 쉴 틈 없이 바쁘다고는 하지만. 제국의 신분질서가 마냥 폐쇄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데, 이처럼 입지전적인 인물도 없다.

그러나 배경도 없이 성공한 벼락부자만큼 기득권에 편입되고 싶어하는 이는 드물다. 비천한 출신은 성공 신화의 가장 큰 콤플렉스가 된다. 반란군이 새로운 질서를 세우게 된다면, 자신이 애써 얻은 이 모든 것들을 제대로 보장해줄 수 있을 리가 없다. 시오도르는 자신이 얻어낸 모든 성취를 오직 제국만이 온전히 지켜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기득권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서 태어난 아이는, 그 탓에 당당히 기득권의 일원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었다. 자신의 생존과 성공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제국뿐이었다. 그것이 ‘순백의 마법사’가 그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제국의 개’라는 멸칭으로 불리는 이유였다. 시오도르는 제국의 명령이라면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든, 인정받기 위해서든, 그저 성공을 위해서든. 엘로이즈는 바로 그 점을 파고들었다.

“히메네스 공작가에 들어가십시오. 공작가는 비록 지금은 중립을 표방하고 있지만, 기회가 온다면 반란군의 편에 붙을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반란군의 편에 붙는다면 우리는 당신을 통해 반란군의 심장에서 모든 정보와 전략을 틀어쥘 수 있습니다. 시오도르, 당신의 연기력이 빛을 발할 때가 왔습니다.”

엘로이즈는 그렇게 말하며 시오도르를 미라빌리스로 보냈다.

“당연하지! 이렇게 반짝이는데? 네 꿈을 마음껏 펼쳐봐!”

시오도르가 히메네스 공작가에서 일하겠다고 했을 때, 이니에스타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를 받아들였다. 시오도르 입장에서도 반은 진심이었다. 공작가의 후원은 누구라도 탐낼 법한 자리니까. 이니에스타가 워낙 사람을 잘 믿는 편인 탓도, 시오도르의 연기가 뛰어난 탓도 있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이에 시비를 걸지 않았다. 시오도르는 제 연기가 먹혀들어갔다고 생각하며 숨을 돌렸다.

히메네스 공작가의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데일이 남부에 도착했을 때, 꾸밈 없는 동부 남자 데일 테메움은 ‘끔찍히 가증스러운’ 옛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나?”

시오도르는 데일을 속여넘기기 위해 적당히 둘러넘길 말을 내놓아야만 했다.

“그야… 공작가는 돈을 많이 주니까요.”

솔직히, 이건 진심이었다.

데일은 얼굴 위로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완벽한 연기를 오직 그만이 의심했다.

여하간, 해야할 일이 급선무였던 탓에 데일은 시오도르에게 많은 신경을 쓰지는 못했다. 데일은 특유의 투박하고 진솔한 어조로 이니에스타를 설득(?)했다. 데일 테메움이 누군가를 설득하는 이 우스운 상황은, 시오도르가 보기에 아마 상대가 이니에스타가 아니었다면 설득은 커녕 오히려 좋던 의견을 돌리게 만들었을 정도로 끔찍하게만 비춰진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변은 없었다. 공작가의 젊은 가주는 흔쾌히 혁명군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반은 데일의 거칠고 직설적인 화법이 오히려 이니에스타의 흥미를 끌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해 그를 보냈고, 이 판단은 적중했다. 이니에스타는 시오도르를 포함해 적지 않은 수의 구원군을 꾸려 서부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미심쩍고 의뭉스러운 동료만 얻게 된 데일은, 그렇게 다시 서부를 향해 철로 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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