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enchantment
호아킨 프리아스
오랜만에 만나는 리처드 데인은 말쑥한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호아킨은 바지 주머니 근처에 얹은 그의 왼쪽 손에 흘끗 눈길을 주었다. 팔목까지 접어 올린 셔츠 밑으로 다이아몬드가 세팅된 금색 롤렉스 시계가 보였다. 호아킨은 태연한 태도로 그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었다.
“요즘 잘 나가나 봐요? 전보다 좋아 보이네요.”
“그래 보여? 어제도 4시간밖에 못 자서 죽을 맛인데.”
“에이, 엄살은. 리처드는 2시간 자도 쌩쌩하잖아요.”
“그것도 옛날 얘기야. 이러다간 40대에 흰머리가 될지도 모르겠어.”
리처드 데인은 호아킨이 애널리스트로 일하던 시절 그와 친하게 지내던 상사였다. 남 밑에서 일하는 것이 지겹다던 그는 호아킨이 경영대학원에 가기 위해 직장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만의 무역회사를 차렸다. 리처드는 승부사였고 다행히도 그의 도박은 성공한 모양이었다. 메뉴를 뒤적이던 그는 고가의 디너 코스를 망설임없이 주문했다.
“너야말로 얼굴빛이 달라졌는걸. 역시 회사원보단 학생이 좋지?”
“4시간 자는 건 똑같지만요.”
“그래도 돈은 역시 버는 것보단 쓰고 살 때가 더 좋은 법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디캔팅된 와인을 호아킨의 잔에 따랐다. 호아킨은 유리잔을 타고 미끈하게 떨어지는 붉은빛 포도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따지면 또 얼마 안 남았네요. 좋은 시절.”
호아킨의 대학원 생활은 이제 1년 남짓 남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벌어놓은 유예기간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어머니 엘레나는 그의 귀환을 상상보다 더 기대하는 듯 보였다. 그녀는 지난달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전화를 걸어 그가 거주할 아파트 인테리어에 대해 시시콜콜 물어보았다. 리처드는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호아킨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네 인생이야 앞으로가 더 좋은 시절 아니겠어? 루나시타로 돌아가면 네 아버지가 깔아놓은 레드카펫을 그냥 걷기만 하면 될 텐데.”
그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호아킨이 삼십 전후로 루나시타 정계에 데뷔하리란 것은 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 후안이 그랬고 조부인 페드로가 그랬으니까. 루나시타로 돌아가면 그는 입당 절차를 밟은 후 당대변인부터 차근차근, 그러나 남들은 꿈꾸지 못할 속도로, 밟아 올라갈 것이다. 지금까지의 삶은 이례적인 성공 가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력증명서나 다름없었다.
“죽을 상이네. 그렇게 싫어?”
리처드는 애용품인 작은 틴케이스를 호아킨에게 내밀었다. 호아킨은 틴케이스를 열어 하얀 가루를 흡입했다. 익숙한 손짓이었다.
“뭐 싫다고 달라지는 게 있나요.”
그는 얼마 후 관자놀이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신기하단 말이야. 내가 네 입장이었으면 잔뜩 들떠 있었을 것 같은데.”
호아킨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리처드도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뭐, 그럼 이게 마지막 부탁이 될 수도 있겠네."
그는 그렇게 말하며 휴대폰에 사진을 띄워 호아킨에게 보여주었다. 사진에는 서른이 조금 넘어보이는 금발의 여성과 그녀와 꼭 닮은 앳된 청년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누구에요?”
“내 애인.”
“갑자기 애인 자랑?”
“그건 시작하면 끝이 없으니 생략하고.”
그는 검지와 엄지를 이용하여 휴대폰 화면을 확대했다.
“이 친구 말야, 내 애인 동생인데, 이번에 너희 학교에 입학하게 됐어. 애가 똑똑하고 좋은 애긴한데 그 너도 알다시피 MBA는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 네트워킹을 좀만 도와줘.”
“과제도 아니고 네트워킹이요?”
“뭐, 그건 직접 만나보면 알 거야.”
호아킨이 넘겨받은 번호의 주인은 마이클 해밀턴이라는 이름의 26세 청년이었다. 그럭저럭 이름이 알려져 있는 작은 공대를 나와 IT기업에 다니던 그는 기업경영에 흥미를 느끼게 되어 경영대학원에 지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이력서는 확실히 지인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평범했다. 공학도답게 수학 관련 점수가 유난히 높았지만, 그뿐이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제가 프로그래밍 외에는 아는 게 거의 없어서, 모든 게 너무 낯서네요. 혹시 몰라서 지원하긴 했지만, 정말 붙을 줄 몰랐거든요. 호아킨이 아니었다면 지금 엄청 헤매고 있을 거예요. 정말 감사해요.”
마이클은 천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아킨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무는 청년을 가만히 관찰했다. 그는 금빛 머리칼을 포마드로 넘기고 검정색 기성양복을 멀끔하게 차려입었지만 비교적 왜소한 체격에 어려 보이는 인상 때문인지 아버지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어색한 모양새였다.
그의 문제는 명확했지만 어디서부터 짚어야 할지 막막할 정도였다. 리처드가 옛정을 팔아가며 호아킨에게 연락해 온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마이클. 원래 그렇게 겸손한 성격이에요?”
“네?”
“여기 MBA 프로그램은 세계에서 가장 알아주는 프로그램 중 하나에요. 매년 수천명이 지원하지만 문턱도 못 넘는 사람이 대부분이죠. 특히 마이클이 지원한 생산관리 분야 같은 경우엔 전체 합격생 중에서도 2% 밖에 되지 않아요. 그런데도 합격했으면 좀 더 자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어요?”
“어….”
마이클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곧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해요.”
“고맙단 말을 들으려고 한 말이 아니에요. 여기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을 배려해주지 않아요. 자세를 낮추면 짓밟고 올라가려고 할 거예요.”
호아킨은 일부러 조금 단호하게 말했다. 마이클의 태도는 어쩐지 호아킨의 신경을 거스르는 데가 있었다. 상처받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나, 의외로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조언 유념할게요.”
그는 조금 고민하는 듯 하더니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진심이에요. 호아킨이 해준 조언은 전부 도움이 되었는 걸요. 지금 이 조언도 그렇고요.”
마이클의 대답은 지나치게 진솔했다. 그는 조언의 핵심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아킨은 마이클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물론 자신이 마음 쓸 일은 아니었다.
인맥과 출신배경이 씨줄과 날줄을 이루며 촘촘하게 짜인 세계. 개인의 능력은 그 배경 위에 수놓은 자수 장식 같은 것이었다. 그 세계에서 살아남고 싶은 사람은 어떻게든 밑천을 부풀려야 했다. 수탉을 가지고도 공작이라고 뻔뻔하게 우길 수 있는 낯짝을 가진 사람만이 가진 것 없이도 그곳에서 버틸 수 있었다.
학교 게시판에는 매주 다양한 종류의 사교 파티에 대한 안내문이 올라왔다. 정·재계 인사들이 주최하는 사교 파티에 관한 정보는 성적보다 중요한 자산이었다. 그러나 정보가 주어졌다고 해서 모두가 동등하게 파티에 초대받은 것은 아니었다. 자선파티의 최소 참가비에 따라 학생들은 치밀한 계산을 한다. 분수에 맞지 않는 곳에 참가해 봐야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민한 판단은 새로운 신분제를 정교하게 구축했다. 노력하면 섞일 수 있다는 환상을 불어넣어 만든 구태의 모사품을.
투자계의 거물인 E. M. 러브하트가 주최하는 자선파티는 모든 학생의 선망의 대상인 동시에 대부분의 학생이 포기하는 행사였다. 그 행사의 최소 기부금액은 학생들의 평균 월세와 맞먹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소 기부금액이란 어디까지나 파티의 급을 보여주는 척도일 뿐이었다. 그 말을 정말로 적힌 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파티에 참가 해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터였다.
“키노.”
파티장에 들어서자 입구 근처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던 러브하트 대표가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호아킨에게 눈짓을 보낸 뒤 대화를 바로 정리하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덕분에 파티객의 시선이 호아킨에게로 쏠렸다. 그들은 그의 수트 옷깃에 달린 라펠 핀을 가장 먼저 확인했다. 기부에 대한 답례로 주어지는 작은 라펠 핀과 브로치는 기부금액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를 띠었다.
호아킨의 옷깃에는 왕관을 쓴 사자가 달려 있었다. 날카로웠던 파티객의 눈빛은 사자의 눈에 박힌 작은 사파이어를 확인하자 금세 누그러졌다.
“오랜만에 보는군. 그동안 잘 지냈나?”
“저야 늘 잘 지내죠. 에버릿이야 말로 고공행진이던데요. 뉴스 헤드라인에 뜨는 횟수만 보면 톱스타 저리가라겠어요.”
“상황이 다 잘 맞물린 거지. 투자했던 제약회사에서 개발한 신약이 새로운 풍토병에 효과가 있을 거라곤 누가 예상했겠어.”
“하지만 에버릿이 첫 수익 배당금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 뉴스가 안 됐겠지요. 교묘한 수였어요.”
호아킨은 서버에게 건네받은 샴페인으로 목을 축이며 빙긋 웃었다. 그의 짓궂은 도발에 러브하트는 흔쾌히 응했다.
“허, 지금 아동 건강에 대한 내 진심을 의심하는 건가?”
“투자가의 진심은 수익율로 보여준다는 게 E. M. 러브하트의 신조 아녔나요?”
“원래 늙은이가 되면 마음이 약해지는 법이야. 죽을 때가 되면 세상에 대한 애정이 샘솟곤 하지.”
에버릿은 팔꿈치로 호아킨을 장난스럽게 찔렀다. 호아킨은 피식 웃었다.
“그래요. 속아드리죠.”
가볍게 시작한 대화는 곧 다양한 이야기로 뻗어 나갔다. 세계의 정치 상황과 증권전망, 요새 뜨는 투자처, 주변인의 출산과 혼담에 관한 이야기까지. 그의 재킷에 달린 라펠 핀은 그가 원하는 만큼 파티의 주최자를 독점할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사람들은 반쯤 포기한 듯 러브하트에게 관심을 끈 채 각자 자신과 어울리는 파티객을 찾아 흩어졌다.
호아킨이 그만 자리를 뜰지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 호아킨!”
고개를 돌린 곳엔 예상치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하 다행이다. 아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찾아서 다행이에요.”
마이클 해밀턴은 환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다가왔다.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헤어스타일에 치수에 맞지 않는 양복을 입은 그의 옷깃에는 라펠 핀 대신 빨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호아킨은 한 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호아킨?”
호아킨이 대답하지 않자 마이클은 재차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망설이는 사이, 러브하트가 가까이 다가왔다.
러브하트는 마이클의 행색을 유심히 살폈다. 마이클은 자신을 관찰하는 낯선 이를 가만히 마주 보다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당신은!”
러브하트는 마이클의 반응을 무시한 채 호아킨에게 말을 걸었다.
“아는 사람?”
“저희 프로그램 후배예요.”
“흠. 그래?”
그는 무슨 생각인지 호아킨을 지나쳐 마이클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주 정중하고 신사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RBS 소속인가보군요. 이름은?”
“마, 마이클 해밀턴입니다. E. M. 러브하트의 설립자이신 러브하트씨 맞죠? 와. 진짜 만나 뵐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그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횡설수설하다가 여전히 굳은 채 서 있는 호아킨을 바라보았다.
“호아킨은 러브하트씨와 아는 사인가요? 둘이 친해 보이네요.”
“예전에 내가 RF 컴퍼니에 투자를 한 적이 었었는데, 그때 날 설득한 애널리스트였죠. 대담하고 머리가 비상한 친구에요.”
“와. 그렇군요. 호아킨은 역시 대단해요.”
그 말에 호아킨은 머리가 아파 왔다. 러브하트의 입꼬리가 올라간 걸 보니 일부러 이러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선의에 기반한 행동이 아닐 것이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이클은 계속해서 조잘거렸다.
“러브하트씨도요. 만나면 꼭 존경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위해 어마어마한 액수의 배당금을 포기하셨다는 기사를 보고 정말 놀랐거든요. 러브하트씨는 분명 역사에 위인으로 남을 거예요.”
거기까지 들은 호아킨은 더는 참기 힘든 기분이 들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그 연유를 짐작했는지 러브하트는 발길을 돌리는 호아킨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전보다 더 과장된 어조로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장내의 시선이 하나둘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호아킨은 그들을 뒤로한 채 연회장 구석에 위치한 파우더룸으로 향했다. 그는 소파에 앉아 거대한 천정형 팬이 느리게 돌아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재킷 안쪽에 숨겨둔 틴케이스를 열어 코카인을 흡입했다. 눈을 감자 붕 뜨는 기분과 함께 의식을 휘감던 불쾌한 감각이 서서히 흩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쁜 버릇 여전히 못버렸네.”
얼마 후, 러브하트가 파우더룸에 들어왔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자세로 소파에 앉아있던 호아킨은 그를 비스듬히 올려다보았다.
“곧 정계 데뷔한다며. 네 아버지에게 대형 스캔들을 안겨줄 셈이야?”
호아킨은 원래라면 적당히 대꾸하며 넘겼을 그 말에 굳이 토를 달았다.
“에버릿도 여전하네요. 우아하게 한 사람 인생을 나락으로 보내는 솜씨가 일품이에요.”
러브하트는 그 말에 조금 놀랐는지 눈썹을 까닥였다. 그러나 곧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음. 영문을 모르겠는 말을 하는군.”
“급이 안 맞는다고 생각했으면 조용히 내쫓지 그랬어요.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조롱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고지된 기부금액을 낸 손님을 돌려보낼 순 없지 않나.”
“조롱할 의도였다는 건 인정하시는 거네요.”
“그것도 그래. 왜 그렇게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나. 난 저 애에게 기회를 준 거야. 일반대중이 E. M. 러브하트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매일 오는 줄 아나? 이제 이 경험을 어떻게 이용할지는 저 애의 몫이지.”
그 말에 호아킨은 거울 속에 비친 러브하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넥타이를 고치는 그의 표정이 내뱉은 말과 다르게 냉담했다.
그 변명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점은 러브하트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분수에 맞지 않는 파티에 참석한 것도 모자라 눈치 없이 파티의 주최자를 독점한 머저리는 응징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파티에 가든 월플라워가 되고 조별과제에서도 애물단지 취급을 받을 그의 미래가 훤히 그려졌다.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피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조바심이 난 그는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실수를 반복하다가 무리에서 점점 더 소외될 것이다.
러브하트는 마이클의 이름을 물어본 순간, 그 모든 상황을 내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처럼 노회한 사람이 그 사실을 계산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나저나 의외군.”
러브하트는 넥타이핀을 고정하며 호아킨에게 흘끗 눈길을 주었다.
“자네, 원래 남의 일에 참견하는 타입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그는 싱긋 웃으며 호아킨의 어깨를 툭 짚었다.
“뭐. 동정심은 정치인의 좋은 덕목이지. 후안은 좋은 아들을 둬서 기쁘겠어.”
그는 그런 말을 남긴 뒤, 다시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해 런던의 겨울은 이상하리만치 추웠다. 연일 눈이 쏟아지는 탓에 제설작업에 제동이 걸릴 정도였다. 호아킨은 어깨에 쌓인 눈을 털며 학교 본관으로 들어갔다. 중간고사가 막 끝난 시점이라 본관 로비는 학생들로 북적였다. 그들의 시선은 로비 게시판에 붙은 커다란 대자보로 향했다.
호아킨 프리아스.
GPA: 3.95/4.0.
전체순위: 8/432.
그 대자보에서 호아킨의 이름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평점은 지난 학기와 같았지만 등수가 조금 떨어진 걸 보니 이번 시험엔 만점자가 많은 모양이었다. 호아킨은 발걸음을 돌리려다 말고 대자보를 쭉 훑었다.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잘 보이지 않아 사람들의 양해를 구하고 몇 걸음 더 앞으로 다가갔다.
마이클 해밀턴.
GPA: 2.7/4.0.
전체순위: 428/432.
호아킨은 대자보에 나열된 이름과 숫자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자신을 밀치며 들어오는 사람에게 자리를 비켜주며 인파를 빠져나왔다.
그는 이미 며칠 전 마이클의 소식을 들었다. 마이클의 누나인 에밀리 해밀턴이 며칠 전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마이클은 학과장의 권유로 학교 정신과 병동에 입원하게 되었다고 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에밀리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마이클의 룸메이트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보기 너무 불안해서 집안의 날붙이는 전부 치우고 학과장한테 연락을 했다고 해요. 같이 사는 사람이라도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어땠을지….”
호아킨은 본관 앞 분수광장에 앉아 가만히 담배를 태웠다. 그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했다. 런던의 겨울은 오후 4시만 되어도 어스름이 깔렸다. 사위가 어두웠지만, 그에겐 아직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 시절 호아킨은 늘 그랬다. 무엇하나 결핍된 것 없는데도 항상 불안했고, 그저 까닭 없이 피로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꽤 곤란한 기분이었다. 문제가 분명하다면 해결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면 되고, 달성하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에겐 해결하고 싶은 문제도 쟁취하고 싶은 목표도 없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됐다. 시험을 치고 모임에 참가하고 짐을 조금씩 정리하며 귀국 준비를 했다. 그의 일상은 어떤 굴곡과 일탈 없이 매끄럽게 이어졌다. 사실 그는 많은 것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이 드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에겐 끝없는 구멍을 메울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가 쾌락을 탐닉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번 달은 이 이상은 안 팔래요.”
리오나 팍스는 자신의 플랫에 찾아온 호아킨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불쑥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그 일대 부유한 젊은이들의 레크리에이션을 담당하는 중개상이었다. 그녀가 호아킨에게 판매를 거부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문틀에 어깨를 기대며 삐딱하게 말했다.
“당신은 요즘 날 너무 자주 찾아와요. 이 이상 나를 보고 싶어했다간 신세를 망칠 거예요, 루나시타의 왕자님.”
그 말에 호아킨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뒷머리를 가볍게 털었다.
“신세를 망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나를 쓰레기 마약상들이랑 같은 취급하지 말아줄래요? 난 당신들을 극락으로 보내고 싶은거지 재활센터에 보내고 싶은 게 아니거든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호아킨을 빤히 바라보았다. 호아킨이 의문을 띤 얼굴로 마주 보자 그녀는 픽 웃으면서 품에서 수상한 명함을 꺼냈다. 자주색 바탕에 금박으로 호텔 주소가 새겨진 고급스러운 명함이었다.
“정 견디기 힘들다 싶으면 내일 밤 9시에 여기로 와요. 몸을 망가뜨리지 않고도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게요.”
“매춘에는 관심 없어.”
명함을 확인한 호아킨은 눈을 조금 찡그렸다.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이 상상하는 그런 건 아닐 테니.”
리오나의 말은 아리송했다. 그녀가 반강제로 떠넘긴 자주색 명함은 주소 외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미 오랫동안 약에 손을 대고 있는 처지니 우스운 얘기일지도 모르겠으나 호아킨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일탈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의 호아킨은 자신을 불유쾌하게 만들 낯선 경험을 갈망했는지도 모른다. 일상의 리듬과 마찰을 일으킬 불협화음을.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그는 결국 명함에 적힌 호텔방을 찾았다.
그곳은 런던 시내의 작은 부티크 호텔 3층의 평범한 스탠다드룸이었다. 오리엔탈 패턴의 커튼이 드리워진 방에는 코리앤더 향초가 은은하게 타고 있었다. 리오나는 풍성한 적갈색 머리를 늘어뜨린 채 화장대 앞에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호아킨이 다가오자 그녀는 고혹적인 입술을 둥그렇게 말아 올렸다.
“당신이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단 하루도 견디기 힘들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거든요.”
호아킨은 화장대 위에 펼쳐진 브리프 케이스에 눈길을 주었다. 가죽 브리프 케이스 안에 가지런히 수납된 도구들을 보며 호아킨은 리오나의 제안이 무엇일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증권가의 사람들과 일하다 보면 독특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놀라진 않네요.”
호아킨의 시선을 관찰하던 리오나가 조용히 말했다.
“조금 아쉽지만 그것도 좋아요. 당신이 그럴수록 궁금해요. 그 가면 밑의 얼굴이 어떨지.”
호아킨은 빈말로도 고통에서 쾌락을 느끼는 성향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 호기심도 환상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호아킨은 자신이 리오나가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리오나와의 만남은 일주일에 한 번, 세 시간 정도 이어졌다. 그때의 기억은 그다지 선명하지 않다. 익숙한 자유를 제약당하고, 인위적인 가학이 몸을 달궜다. 괴롭고 불쾌했다. 호아킨은 그를 압도하는 그 어떤 감각도 탐닉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매주 그녀를 찾아갔다. 그 시간만큼은 스스로를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의 그 어떤 부분도 그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스스로가 완전한 타인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 그에게 일시적인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그는 그 도피가 조금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어느 날 리오나는 손에 쥐고 있던 크롭을 내려놓으며 긴 한숨을 쉬었다. 고통을 참는 쪽은 호아킨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무척 지쳐 보였다.
“내가 졌어요, 호아킨.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드네요.”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호아킨의 몸을 묶은 매듭을 하나씩 풀어냈다. 완전히 질렸다는 듯 혀를 내두르는 그녀를 보면서 호아킨은 그 관계가 그날 이후로 지속되지 못하리란 예감이 들었다.
“괜찮았는데, 왜.”
“내가 안 괜찮아요. 당신 전혀 즐겁지 않잖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시작도 안 하는 건데. 휴…. 아냐. 내 잘못이지 그래.”
리오나는 매듭을 다 풀어낸 뒤 서랍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녀는 화장대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검은색 필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당신, 혹여라도 나 이후에 다른 파트너를 찾을 생각하지 말아요. 당신에게 필요한 건 체벌이 아니라 카운슬링이야.”
그녀는 핀잔을 주듯 종알거린 뒤 휴대전화의 전원을 켜 밀린 메시지를 확인했다. 엄지로 무심하게 화면을 넘기던 그녀는 곧 흥미가 동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셔츠 매무새를 만지는 호아킨을 향해 가볍게 물었다.
“뭐, 이대로 아쉬우면 술이라도 마시러 갈래요?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이 지금 이 근처 펍에 모여있다네요.”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진 골목길을 걷는 동안 리오나는 만남 이후 처음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자신이 웨스트엔드의 유명 극단에 소속된 조연급 배우이며 현재 <햄릿>의 오필리아역을 맞고 있다고 했다.
호아킨이 초대받은 술자리는 그녀의 극단 동료들이 모인 자리였다. 지하로 난 인더스트리얼 분위기의 펍 안쪽에 네다섯 명의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보아하니 한참 전부터 한바탕 술판을 벌인 모양새였다.
“리오나~!”
그들이 다가서자 이탈리안 악센트의 미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몸을 과장되게 뻗어 리오나에게 비쥬를 신청해왔다. 리오나는 그의 호들갑을 받아준 뒤 소파 끝자리에 걸터앉았다.
“다들 나 없이 마신 거야?”
“연락해도 안 받는 걸 무슨 수로 불러내는데? 보나 마나 또 취미생활 즐기느라 정신없었나 보구만.”
이탈리아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호아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눈썹을 까딱이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청년은 곧 픽 웃으며 눈앞의 맥주잔을 비웠다. 그는 아마도 리오나의 취미생활을 상세히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쪽은 호아킨 프리아스. 내 VIP 고객이자 친구야.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이 친구들은 제 극단 동료들이에요. 차례대로 귀도, 실비아, 로렌스, 나탈리아 그리고 어…. 샤를이 없네?”
“샤를은 잠시 담배를 피러 갔어.”
“아아. 아무튼 인사해요들.”
호아킨은 테이블 모서리에 대충 자리 잡으며 자신을 간단히 소개했다. 그는 제법 친절한 목소리로 사실이긴 하나 피상적인 정보들―가령 몇 년간 애널리스트로 활동하다 지금은 LBS의 경영대학원에 다니고 있다든지, 혹은 본래 루나시타 출신이지만 성인 이후엔 계속 영국에서 생활을 했다든지 하는―을 공유했다. 그러자 좌중이 잠시 조용해졌다. 잠시 후 귀도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청년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당신, 비즈니스맨 같은 말투를 쓰네요. 우리랑 어울리려면 긴장을 좀 푸는 게 좋겠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빈 술잔의 반을 위스키로 채운 뒤 여러 가지 종류의 맥주를 차례로 넣어 스틱으로 휘저었다. 폭탄주를 무식하게 말아대는 그를 보며 리오나가 키득댔다.
“살살해, 귀도. 도련님께 그런 격에 안 맞는 대접을 해야 쓰나.”
귀도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황갈색 폭탄주를 호아킨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곤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과장된 몸짓으로 그에게 건배를 해왔다. 호아킨은 대답 없이 가만히 웃었다. 그리고 넘칠 듯 찰랑거리는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곧 알게 된 일이었지만, 귀도 펠로니는 햄릿역을 맡고 있는 극단의 주연급 남배우 중 한 명이었다. 그가 리오나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로 햄릿의 대사를 읊조리자 좌중이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혼란하고 변덕스러운 언동에 호아킨은 말없이 술을 마시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웬 소란이에요?”
그때 누군가 귀도의 머리칼을 툭 건드리더니 테이블 안쪽으로 향했다. 그는 호아킨의 또래로 보이는, 금발 머리에 화려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였다.
“리오나가 왔어요, 샤를.”
“아아.”
“귀하신 손님과 함께.”
귀도는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뻗어 호아킨을 가리켰다. 호아킨과 샤를은 눈이 조금 길게 마주쳤다. 그는 이 즉흥극 같은 분위기 속에서 그나마 각본에 따라 말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샤를 마르티네즈는 이 극단의 조연출을 맡고 있다고 했다. 극단의 조연출이란 이름만 연출일뿐 실상은 배우들을 달래고 뒤치다꺼리를 하는 자리였다. 그래서인지 샤를이 나타나자 뒤죽박죽 정신없던 분위기가 묘하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시답지 않던 얘기만 하던 사람들은 그들이 올릴 작품에 대한 제법 진지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연출님 말이야. 다 좋은데 가끔은 너무 고지식하신 것 같아. 사실 나는 원작 그대로 가는 거보단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의견을 내도 씨알도 안 먹히더라고.”
“뭐 난 연출님도 이해해. 재해석에 재해석에 또 재해석이 난립하니 이제 같은 극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는 작품이 수두룩하단 말야. 원래 진짜 아름다운 건 가장 순수한 형태로 내버려 둬야 진가를 발휘하는 게 아니겠어.”
리오나와 귀도가 그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호아킨은 말없이 제 몫의 술잔을 비웠다. 사실 호아킨에게 예술이란 아무래도 좋을 주제였다.
“우리 도련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이야기를 무심하게 흘려보내고 있는데 귀도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햄릿> 말이에요. 어떤 공연이 보고 싶나요? 관객입장에서.”
그러자 좌중의 시선이 호아킨에게로 향했다. 짓궂게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호아킨은 그가 일부러 이러고 있음을 직감했다. 어쩌면 호아킨의 얼굴에 드러난 무관심과 냉소가 거슬렸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됐든 전문가인 당신들이 제일 잘 알겠죠.”
“에이, 그건 그거고요. 전 당신의 솔직한 의견이 궁금한데요.”
“솔직한 의견.”
호아킨은 술잔을 만지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별로 듣기 좋은 얘긴 아닐 텐데.”
하지만 그가 그렇게 나올수록 좌중의 기대감이 더욱 고조되는 게 느껴졌다. 적당히 넘어가려 했던 호아킨은 그 분위기를 보고 조금 못된 마음이 들었다. 그는 공을 들여 쌓아 올린 카드탑을 무너뜨리는 기분으로 툭, 날카로운 말을 던졌다.
“전부 의미 없는 얘기라고 생각해요. 어차피 당신들이 무슨 이야기를 한들, 연극은 보는 사람들만 보고 대중적으론 성공하기 힘들어요. 게다가 보는 사람의 다수는 런던을 찾은 관광객이나, 연극관람으로 자신의 교양이 증명된다고 생각하는 속물이겠죠. 그들은 평론가가 대충 좋은 말로 포장해주기만 하면 훌륭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하고 만족할 거예요.”
호아킨은 무례한 말을 늘어놓고도 태연히 술잔을 기울였다. 귀도가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내가 비지니스맨들이 이래서 싫다니까. 세상 모든 걸 물질적인 걸로만 재단하는 사람들이야. 돈, 관객수, 성공. 예술은 그렇게 팍팍한 기준으로 바라볼 게 아니에요. 잘 짜인 극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본질을 비추는 거울 같은 거니까. 아름다움은 인간의 영혼이 말라 죽지 않도록 계속해서 새로운 영감을 제공하죠. 그것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어요.”
“글쎄요.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당신들끼리 정하는 것 아닌가요? 무엇이 연극사에 남을지도 당신들끼리 정하는 거고요.”
호아킨은 빙긋 웃었다.
“학위나 인맥을 통해 아름다움을 결정할 권리를 얻은 사람들이, 대중에게 외면받는 구태의 문화를 누가 더 완벽하게 재현했는지 열을 내며 토론을 하는 것이 과연 인간사에 새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일일까요? 증권가의 사람들이 세계 경제에 기여한다는 말 만큼이나 공허하게 들리는데요.”
거기까지 말했을 때,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샤를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자신 앞에 놓인 글라스를 둥그렇게 돌리면서 말했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군요. 사람들의 시선이 그러하니 극단에 흘러들어오는 돈이 점점 줄어드는 거겠죠.”
그는 턱을 비스듬히 괸 채 호아킨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물빛 눈동자가 이해할 수 없는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래서 비지니스맨의 관점에서 보기엔 어떻습니까. 웨스트엔드의 극장가의 수익률을 높일 묘수라도 있다면 이야기해 주시죠.”
“예술산업은 제 전문분야가 아니라서요. 원하신다면 관련 일을 하는 동료를 소개해 드리죠.”
그 이야기를 끝으로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난감한 얼굴로 뻘쭘하게 앉아있던 리오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볍게 화제를 돌리기 시작했다―그러고 보니 생각났는데, 이번에 우리 극단에 투자하기로 한 회사 사장 말이야 좀 이상한 루머가 있던데 들었어?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화의 흐름을 바꾸는 그녀를 보면서, 호아킨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펍을 나오니 잠시 그치는 듯 했던 눈발이 다시 흩날리고 있었다. 잿빛 담배연기가 사선으로 흰색 눈송이 사이로 유유히 흘렀다.
‘아무래도 돌아가지 않는 게 낫겠지.’
어차피 돌아간다 한들 이미 불청객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은 없었다. 그들은 호아킨이 가면을 벗길 바랐고, 그는 그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다.
호아킨이 만난 많은 사람들은 보기 좋게 꾸며낸 가면을 들춰 맨얼굴을 살피고 싶어했다. 호아킨이 그들의 요구를 적당히 거절해 온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였다. 스스로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혼탁하고 뾰족한 감정들을 타인이 감당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늘의 그가 조금이나마 솔직했던 이유는 자신을 몰아붙이는 귀도의 언행이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귀도의 예술관은 그가 질리도록 보아왔던 세계와 닮은 데가 있었다.
그는 짧아진 담배를 비벼 끄고 한 개비 더 꺼냈다. 이것만 다 피우면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때 샤를 마르티네즈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계단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아직 안 갔군요.”
그렇게 말하는 것 보면 샤를은 호아킨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예감한 모양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호아킨의 담배에도 불을 붙여 주었다.
“불청객도 떠났으니 파티 분위기가 다시 무르익었겠네요.”
“글쎄. 알던 사람들끼리 얘기해 봐야 식상할 뿐이죠. 난 당신이 있을 때가 더 재밌던데요.”
호아킨은 담배 필터를 빠는 샤를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그리 놀랄 것 없습니다. 원래 배우와 연출가의 관점은 좀 다르기 마련이니까. 연출가에겐 흥행이나 투자 유치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니 다른 관점을 들어보는 것도 필요하죠.”
그는 그렇게 말하다가 빙긋 웃었다.
“물론 당신의 말에 그다지 동의한 건 아니지만.”
그것은 조금 짓궂은 말장난처럼 들렸다. 호아킨은 답 없이 웃었다.
“순수 예술이 정말 구태의 모사일 뿐이라고 생각합니까?”
샤를은 잠시 후 재차 물었다. 호아킨이 선호하는 모양의 질문은 아니었지만, 담백한 말투 때문인지 그렇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구태의 모사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향유하는 것이 순수하게 즐거운 사람들도 있겠죠.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호아킨은 에둘러 답했다.
“나는 단지, 자신이 찬양하는 대상이 가지는 권력과 흠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을 선호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와서요.”
그 말을 끝으로 조금 긴 침묵이 찾아왔다. 호아킨은 침묵의 시간 동안 샤를의 시선이 허공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세상에 선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이다.”
얼마 후, 샤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 우리 극의 주인공과 닮았군요.”
TX 제약회사, 신약 아그리파로 상반기 매출 1위…E. M. 러브하트의 안목 재확인되나.
그날 경제지 1면은 비슷비슷한 내용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호아킨은 커피 한잔으로 잠을 깨우며 기사를 하나씩 훑었다. 그가 열다섯이 됐을 때부터 관성적으로 하는 일이었다.
그런 기사 밑에는 예외 없이 같은 연관 기사가 떠있었다.
E. M. 러브하트, 콜카타에서 대규모 자선행사 열어, ‘사람중심적 투자’ 강조, “수익율만 바라보는 투자 관행을 재고해야 할 때.”
호아킨은 제법 인자한 표정으로 자선단체 대표와 손을 마주 잡고 있는 러브하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태블릿 화면을 껐다.
그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후안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가 호아킨에게 따로 전화한 것은 그 해 들어 처음이었다. 그는 짧은 안부 인사와 의무에 가까운 근황 공유 후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한 달 안에 TX 제약회사가 최고점을 찍을 거란 예측이 있더구나.”
호아킨은 그 말을 꺼낸 그의 의중을 알고 있었다.
“지금 일부러 부풀리는 기미가 보이긴 하더군요. 그래도 당분간은 상승세일 거 같고 다음 달 초쯤에 매각하는 게 안전하긴 할 거예요.”
“흠. 너 역시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뭔가 있긴 한가 보지? 알겠다. 참고하마.”
그는 무언가 받아적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사실 내 추천으로 루치아노네도 온 가족이 800만달러가량 묶여 있거든. 신중하게 생각하는 게 좋겠지.”
루치아노 로페즈는 비치사이드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엘레나의 남동생이었다. 호아킨은 대충 맞장구를 쳤다.
“큰돈 넣으셨네요. ‘자영업자’한테 돈이 어디 있느냐고 앓는 소리 하시더니.”
“예전에 스페인에 사둔 땅을 반 이상 팔았더니 그럭저럭 목돈이 생겼나 보더구나. 왜 요새 여기저기 땅값이 많이 올랐잖니. 농지라고 무시할 게 아니지.”
그 말 직후 수화기 너머에서 문소리가 들려왔다. 후안이 사무실 방문을 닫고 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땅보다는 주식이 상속세가 덜 나가니, 얼른 바꿔놓으려던 모양이다. 게다가 너도 알다시피 노동당놈들이 해외 보유자산에 대한 규정을 대폭 강화하겠다고 나오고 있으니, 지금이라도 발을 빼지 않으면 세금으로 죄다 뺏기게 될 거라고 내가 일러줬다.”
마지막 말은 거의 씹어뱉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하늘이 그에게 내린 신성한 권리를 평등이란 이름으로 침해하려 하는 부정한 선동가들에 진심으로 분노했다. 그리고 선동가들이 놀리는 세 치의 혀에 놀아나는 대중을 보며 탄식한다. 전통적으로 하나의연합의 표밭이었던 다운타운 남부에서조차 전 노동당 시장 베레니크 하산의 인기가 고조되자 후안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증오를 드러냈다.
“베레니크 그 여우, 당 조직을 동원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위험하다. 일간지 기자들 몇 명을 크루즈 파티에 여러 번 보내줬는데도 헤드라인에 올릴 스캔들 하나 못 건져오고 있어.”
“그만큼 청렴했나 보죠, 하산 시장.”
“지금 내 앞에서 내 정적을 두둔하는 게냐?”
후안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너무 무리하시지 말란 뜻이에요. 대중적 인기가 탄탄한 정치인을 잘못 건드리면 이쪽만 역풍을 맞으니까요.”
호아킨은 애매한 대답을 흘렸다. 그러나 그 미묘한 태도를 알아채기에 후안의 머릿속은 이미 여러 복잡한 계산으로 꽉 차 있었다.
“역시 네가 빨리 돌아오는 게 좋겠다. 당에 새 얼굴이 필요한 시점이야. 너 정도 인물에 페르소나면 인기를 얻는 건 순식간이겠지.”
후안의 전화는 늘 같은 결론으로 마무리되었다.
테라스로 나가는 전면 창을 열어젖히자 그의 얼굴 위로 오전의 햇빛이 쏟아졌다. 그는 억지로 눈을 떠 그의 눈을 찌르는 쨍한 빛줄기를 견뎌냈다. 그러자 그 뒤로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파란 하늘엔 구름 몇 점이 자리에 멈춘 듯이 붕 떠 있었다.
날이 청명한데도 그곳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태연한 풍경이 목을 조이는 기분이었다.
챙그랑.
그러나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에 호아킨은 눈을 떴다. 샤를이 아일랜드 식탁 근처에 떨어트린 나이프를 줍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나이프 좀 쓸게.”
샤를은 그렇게 말하곤 빵에 잼을 펴 발랐다. 그는 거실 소파에 눕듯이 기대어 손에 든 대본을 훑었다.
호아킨과 샤를 마르티네즈의 만남은 열흘에 한 번 정도 주기적으로 이어졌다. 한 달쯤 지났을 때, 호아킨은 그를 자신의 스튜디오로 초대했다. 그답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그 시절 호아킨은 어쩌면 조금 집착적으로 평소라면 하지 않을 선택들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곧 떠날 집이니까. 굳이 변명하자면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샤를이 그의 집에 드나들 무렵 스튜디오의 한쪽 벽면은 틈틈이 정리해 둔 이삿짐 상자가 쌓여 있었다. 샤를은 그 어수선한 풍경을 흘끗 보고도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호아킨이 그날 이후에도 집에 찾아오는 그를 막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밤에만 짧게 지속했던 만남은 언제부턴가 아침으로, 낮으로 이어졌다. 그 시간 동안 샤를은 주로 거실의 2인용 소파에 누워 대본을 읽었다. 그러다 갑자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대본 끄트머리에 무언가 열심히 적기도 했다.
자신과 전혀 다른 리듬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타인을 보는 것은 조금 신기한 일이었다.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정박자를 만드는 삶에 익숙한 호아킨이 보기에 샤를의 일상은 임프롬투와 같았다. 그의 악상은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닌데도 나름의 선율을 그리며 흘렀다.
“먹으면서 해.”
호아킨은 제 몫보다 조금 많이 만든 펜네 파스타를 접시에 덜어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샤를은 손에 든 책을 소파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바냐 아저씨>. 안톤 체홉의 작품이었다.
“일을 하는 줄 알았는데.”
“일이 잘 안 풀리면 쉬어가는 게 나아. 매달리고 있어 봐야 딱히 해결되는 것도 없잖아?”
호아킨이 책의 표지를 가만히 응시하자 샤를은 포크를 입에 가져가다 말고 말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야. 생각을 환기하고 싶을 때 보면 도움이 돼.”
“의외로 취향이 클래식하네. 현대 실험극 같은 걸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거 무슨 의미야?”
호아킨은 빙긋 웃었다.
“그냥. 내가 고전을 별로 안 좋아하잖아.”
“안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치곤 문외한은 아닌 것 같은데.”
“뭐 웬만큼 알려진 극이라면 어떤 대사가 몇 막 몇 장에 있는지 정도는 얘기할 수 있지. 그래서 싫은 거지만.”
호아킨이 좋아하지 않는 많은 것들은 그의 일부분이었다. 좋아하지 않는 것이 일부분이 된 것인지 일부분이 되었기에 좋아하지 않는 것인지 분명치 않았다.
호아킨은 아일랜드 스툴에 걸터앉아 식사를 마저 끝냈다. 샤를은 턱을 괸 자세로 그 모습을 조금 길게 바라보았다. 호아킨은 그 시선을 알면서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세레브랴코프는 언젠가는 바냐를 찾아왔겠지. 바냐가 원치 않더라도 그의 방문을 막을 방법은 없었을 거야. 결국은 시간문제였던 거지.”
샤를은 불현 듯 그렇게 말했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호아킨이 앉은 스툴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래도 그는 결국 깨어진 파편 위를 걸으며 살아가겠지.”
샤를은 오전의 전화 내용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 방에는 그의 삶의 파편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샤를 마르티네즈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호아킨은 웃었다. 그는 <바냐 아저씨>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소냐의 첫마디를 기억하고 있었다―하지만 어쩌겠어요, 살아야죠! 삼촌, 우린 살아야 해요. 길고도 긴 낮과 밤을 끝까지 살아가요. 우리는 운명이 우리에게 부과한 짐을 참을성 있게 견뎌야 해요.
그러나 호아킨은 세레브랴코프일 수는 있어도 바냐는 아니었다. 그의 삶의 시작부터 정해진 궤도였다. 그러므로 그는 사실 환멸을 말할 자격이 없었다. 그것이 그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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