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아킨 프리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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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아킨 프리아스

부웅

부우우웅

휴대폰 진동소리가 좁은 차 안에 울려 퍼진다. 호아킨은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의 상태화면을 곁눈으로 확인했다. 엘레나 프리아스는 오늘만 다섯 번째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호아킨이 전화를 끊은 것도 그것으로 다섯 번째다.

“뭐야. 누구길래 그렇게 계속 끊어?”

시끄러운 락 음악 사이로 제이컵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난 섞인 목소리에 호아킨도 적당히 대꾸했다.

“전 애인.”

“와. 냉정해.”

“네가 지나치게 로맨티스트인 거야.”

“연애가 끝났으니 사람으로서도 볼 일이 없다 이거야? 네가 차가운 거야, 키노.”

“쓸데없는 소리 말고 앞을 보시죠. 신호 바뀌었어.”

제이컵의 검은 세단은 올드하버로 향하는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는 며칠 전부터 사촌이 주최하는 브런치 파티에 같이 가자고 채근했고 그 결과 호아킨은 아침부터 그의 차 조수석에 앉게 되었다.

드레스룸에서 입을 옷을 고르던 호아킨은 자신이 이런 종류의 파티에 초대 받은지 꽤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는 대가족 중심의 안온하고 낙천적인 사고관을 가진 사람을 잘 견디지 못하는 편이었다.

호아킨이 초대에 응한 이유는 상대가 제이컵이기 때문이었다. 제이컵 존슨은 호아킨이 살면서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크루즈 쉽 도박장에서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 평가는 한 번도 달라지지 않았다.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 블러핑 대결이 무색하게 칩을 싹 다 털려버린 제이컵은 오픈 데크에 나와 담배를 피던 호아킨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주먹이라도 날아오려나 생각한 찰나, 제이컵은 예상치 못한 말들을 쏟아냈다.

“와, 그쪽 대체 뭐예요? 어떻게 이런 플레이를 하지? 포커한 지 얼마나 됐어요?”

그의 목소리엔 어떤 불순한 의도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호아킨은 사람이 그렇게 잘 닦인 유리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는 솔직하고 호쾌하게 속 안에 있는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제이컵은 질문이 많았다. 나이나 거주지 같은 기본적인 신상정보를 물어볼 뿐 아니라, 의견을 제시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연유를 알고 싶어 했다. ‘왜?’ 아마 그것이 그날 그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일 것이다. 원래라면 압도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의 저돌적인 태도에 호아킨은 순순히 어울려 주었다. 돌이켜 보면 호아킨 역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는 그의 사고방식에 호기심을 느꼈던 것 같다.

제이컵이 나가는 모임이라면 자신이 겪어온 고루한 자리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그것이 호아킨이 그의 끈질긴 초대를 수락한 이유였다. 그리고 호아킨의 기대는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버튼업 드레스 셔츠와 베이지색 정장 바지를 입고 나타난 호아킨을 보며 제이컵은 폭소를 터트렸다.

“우리 오늘 상견례 가는 거였어?”

제이컵은 회색 후드티에 플립플랍을 질질 끌며 다가왔다. 호아킨은 제이컵을 위아래로 훑었다.

“가족 모임이라며.”

“가족 모임이니까?”

두 사람의 대화가 공회전을 했다. 그들 사이에 자주 있는 일이었다. 출신 배경의 문제는 아니었다. 제이컵은 무역회사 총수의 증손으로서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왔다. 그런데도 호아킨은 제이컵의 세계를 낯설게 느꼈다.

 

그들의 목적지는 올드하버 외곽의 2층짜리 멘션 하우스였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터키색 지붕은 정원에 심은 아름드리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다.

“제이크, 왔어?”

“앤디!”

제이컵은 마중 나온 금발의 남자를 두 팔 벌려 껴안았다. 앤디라고 불린 남자는 삼십 대 중반 정도 되어 보였고, 제이컵과 마찬가지로 잠옷만 겨우 벗어난 차림이었다. 그는 키가 제법 컸지만 깡마른 몸과 구부정한 자세 때문인지 제이컵의 품에 파묻히듯 안겼다.

“못 본새 덩치가 더 좋아진 거 같다. 요즘은 개발자도 힘겨루기로 뽑나 보지?”

“형이 마른 거라고! 밥은 제대로 챙겨 먹는 거야?”

“네가 한 살짜리 애 키워봐라. 살이 안 빠지고 살 수 있나.”

제이컵의 품에서 벗어난 앤드류는 한 발짝 물러서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호아킨의 옷차림에 조금 길게 머물렀다.

“남자친구?”

그러자 제이컵은 질색을 했다.

“아 무슨 소리야! 난 뭐 친구도 없는 줄 알아?”

“설마. 너무 많아서 탈인 거 잘 알지.”

그는 대충 대꾸하며 호아킨에게 악수를 청했다.

“앤드류 존슨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름이?”

“호아킨 프리아스입니다.”

“프리아스? 하나의연합의?”

예상한 반응에 호아킨은 애매하게 웃었다.

“프리아스가 루나시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은 아니죠.”

“오… 제이크 네가 웬일이냐. 유력인 친구를 다 사귀고.”

“아 왜. 키노는 그냥 키노야.”

제이컵은 투덜대듯 말했다. 호아킨은 문득 제이컵이 그 많은 질문을 하는 동안 ‘프리아스’에 관해서는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이컵은 노란색 체크 무늬 벽지로 둘러싸인 홀을 가로질렀다. 현관문을 닫고 두 사람을 뒤따라 오던 앤드류는 호아킨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 안나에겐 다른 이름을 대는 게 좋을 거예요. 프리아스 대표의 열렬한 지지자거든요.”

안나 존슨-라로사를 마주한 호아킨은 앤드류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아이보리색 쉬폰 원피스를 입고, 컬이 들어간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세팅한 여자는 한눈에 봐도 이 저택의 안주인으로 보였다. 정원과 주방, 거실을 분주하게 오가던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님에게로 다가왔다.

“제이크! 딱 맞춰 왔네. 안 그래도 이제 막 카나페가 준비된 참이야. 이 분은 전에 말한 네 친구?”

“응. 키노야. 내 친구.”

제이크는 마침표를 찍듯 단호하게 말했다. 안나는 정신이 없는지 그 사실을 눈치챈 것 같진 않았다.

“반가워요 키노. 난 제이크의 사촌 안나에요. 오늘의 호스트죠.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 말해 주세요. 아 그리고, 애들을 소개해 줄게요. 에반! 제이슨! 손님이 오셨으니 인사해야지.”

조금 높은 톤의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하는 그녀는 호아킨이 가장 익숙하게 봐온 유형이었다. 그녀는 그 집안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상류층의 사회적 문법을 완벽히 구사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침부터 고생하며 차려 입혔을 멜빵바지에 보타이를 한 아이들과 인사를 하고 나니, 등 뒤에서 세면대 물소리가 들렸다. 얼마 후 화장실 문이 열리고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젊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

호아킨은 표정 관리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그 여자를 보고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은 색조로 눈과 입술을 짙게 칠한 여자는 입술에 은색 피어싱을 달고 있었다. 민소매 밑으로 드러난 화려한 타투와 스터드가 박힌 가죽 부츠, 그리고 피쉬넷 스타킹 역시 눈에 띄었다.

물론 그런 옷차림이 놀라울 건 없었다. 호아킨은 단지 공들인 플릭업 머리를 한 사람과 입술 피어싱에 고딕 타투를 한 사람이 같은 공간에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풍경을 예상하지 못했다. 여자는 호아킨을 슬쩍 쳐다보더니 안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주방에 뭐 도와줄 건 없어?”

“물론. 준비는 다 끝냈으니 손님은 편히 쉬세요. 아, 키노. 얘는 에스더. 내 사촌 동생이에요. 제이크보단 두 살 많고 요즘 주가를 올리고 있는 마케팅 전문가예요.”

“그렇습니다. 제가 부역한 덕분에 루나시타의 자본주의는 오늘도 건재하죠.”

“에스더!”

“아니,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에스더는 어깨를 으쓱한 뒤 호아킨을 향해 말했다.

“내 애인 소개해 줄게요. 지금 아마 테이블 세팅 중일 거예요.”

에스더는 호아킨을 정원으로 통하는 폴딩도어로 안내했다. 빛이 쏟아지는 작은 정원에는 분홍색 장미가 만개해 있었고, 플로랄 패턴의 테이블보 위에 금색 식기가 잘 연출된 사진처럼 놓여 있었다.

에스더는 냅킨을 정리하는 금발머리 여자에게 짧게 키스했다. 그들의 머리칼이 따뜻한 봄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등 뒤로 아이들의 짓궂은 웃음소리가 들렸고 목이 늘어난 라운드 셔츠를 입은 남자가 미모사를 홀짝이며 정원으로 걸어들어왔다. 앤디! 벌써 마시면 어떡해! 안나의 다정한 잔소리가 배경음악처럼 잔잔하게 흘렀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들고나온 나무 쟁반에는 화사한 색감의 카나페가 놓여 있었다.

이곳이 제이컵의 집(home)이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호아킨은 그와 자신이 평행선을 그리는 이유를 비로소 이해했다.

 

미모사와 잔잔한 음악에 파티의 분위기가 편안하게 무르익을 즈음, 에스더는 선탠 데크에 나른하게 누워있는 앤드류를 쿡 찌르며 말했다.

“앤디, 이거 봐. 나 전에 베레니크랑 셀피도 찍었다? 신기하지.”

휴대폰 화면에는 무지개 뱃지를 단 베레니크와 에스더가 함께 브이를 그리며 웃고 있었다.

“오. 언제 찍은 거야?”

“얼마 전에 퀴어 퍼레이드에 왔길래 내가 찍어달라고 졸랐지. 운이 좋았어. 내 뒤로 줄이 광장 두 바퀴는 돌고도 남겠더라고.”

“확실히 하산 시장이 젊은 층에서 인기가 좋긴 한 가보네.”

앤드류는 성실하면서도 무심한 목소리로 답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안나는 조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하산 시장도 다 거품이야. 세금을 거두고 뿌린 거 말고는 별로 한 것도 없는데.”

“그걸 보통 복지 정책이라고 하지 않아?”

“내가 말했잖니, 에스더. 복지도 다 허상이라고. 가만히 앉아서 세금 올리는 거야 누가 못할까.”

두 사람의 대화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자 앤드류는 아이들과 놀아주겠다는 핑계를 대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에스더는 앤드류 대신 데크에 걸터앉으며 시니컬하게 받아쳤다.

“뭐, 대중교통 한 번 안 타고 치안 걱정 없는 동네에 살면야 다 허상으로 보이겠지.”

“그러는 너도 경비가 있는 아파트에 살면서 승용차로 출퇴근 하고 있잖니.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세금만 올리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별로라는 거야.”

호아킨은 두 사람의 대화에 불꽃이 튀자 이상하게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인데도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그는 마치 중력에 승복한 사람처럼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산의 토지세 공약 때문에 걱정하시나 보군요.”

그러자 안나가 눈에 띄게 반색했다.

“맞아요! 솔직히 걱정 된다구요. 저희집이 넉넉한 것처럼 보여도 자산의 대부분이 땅에 묶여 있거든요. 저희 남편이 군인이긴 해도, 아시다시피 군인은 명예직이지 돈을 많이 버는 건 아니잖아요. 소득은 똑같은데 세금만 계속 나가니….”

안나가 뱉은 한숨에는 익숙한 근심이 담겨 있었다. 그 진의를 의심하진 않는다. 그것은 평생 유리화원에서 살아온 가정주부에게 허락된 가장 중요하고 진지한 고민일 것이다. 호아킨은 문득 꺼진 휴대전화로 발신을 시도하고 있을 엘레나를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호아킨은 에스더가 떠난 자리에 제이컵이 와 앉을 때까지, 안나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었다.

안나와 호아킨이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을 발견한 제이컵은 조카들과 버블건을 쏘다 말고 제 자리에 못 박혀 서 있었다. 도통 진중할 줄 모르던 그의 눈빛이 자못 심각해졌다. 그의 표정은 ‘이해안됨’과 ‘어이없음’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저기… 누구세요?”

안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제이컵은 곧장 입을 열었다.

“누구긴. 네 친구 키노지.”

“아닌 거 같은데. 제 친구 잡아먹은 거죠? 제 친구 돌려주세요.”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내가 정치인 아들인 거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

호아킨은 그렇게 말하며 제 앞에 놓인 술을 단숨에 비웠다. 문득 담배 생각이 났으나 호스트가 정성스럽게 준비했을 테이블보에 담배 냄새를 배게 할 순 없었다.

제이컵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아주 짧은 침묵 후에 그는 툭 던지듯 말했다.

“네가 수습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안 싸웠을걸.”

확실히 제이컵은 보기보다 예리한 데가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정곡을 찔러왔다.

안나는 상류층 아가씨긴 해도 프리아스가 아니었다. 그녀가 프리아스와 조금이라도 닮아 있었다면 오늘의 파티는 처음부터 성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호아킨은 어쩌면 안나와 에스더의 마찰이 불편하다고 느낀 것은 자신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아킨은 어쩔 수 없는 프리아스의 사람이었다.

 


제이컵은 드레스룸의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훑어 보았다. 고급 양복이 영 감당이 안 되는 모양이었지만 얼굴과 체격이 받쳐주니 그럭저럭 잘 어울렸다.

그는 드레스룸 구석에 처박혀있던 보석상자를 꺼내는 호아킨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보석상자에는 넥타이핀이나 커프링크스 같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장신구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호아킨은 그 중 사파이어가 박힌 커프링크스를 골라 셔츠 소매를 단정하게 고정했다. 그 모습을 본 제이컵이 또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와. 키노 사실 킹스맨 아냐? 그 단추에서 마취침이 발사되는 건 아니지?”

“고작 커프링크스로 그렇게 들뜬 거야?”

“하지만 좀 비밀요원 같잖아. 들뜨지 않는 게 이상하다구.”

두 사람이 그렇게 제대로 치장하는 것은 그날 있을 저녁 모임 때문이었다. 호아킨은 몇 달 만에 처음으로 가족들을 다시 만날 예정이었다. 그들은 아마 호아킨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약혼 상대로 건장한 남성을 데려오리라곤 생각도 못 한 채.

처음엔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전화를 무시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돌려보내면 언젠가는 수그러들겠거니 했다. 그러나 프리아스 부부는 끈질겼다. 그들은 호아킨과 상의 없이 맞선 자리를 만들고 산첼을 통해 그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최소한 마음에 드는 여자라도 생기면 생각이 바뀌겠지-그런 고루한 기대를 하는 모양이었다.

산첼은 프리아스 가문의 체면을 들먹으며 호아킨을 회유했다. 체면 따위 호아킨에게 아무래도 좋을 문제였기에, 별로 좋은 전략은 아니었다. 그러나 호아킨은 그가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명예가 실추됐다고 생각할 상대방이 신경 쓰여 몇 번 나가주었다. 그러자 프리아스 부부의 억지는 더 심해졌다.

개중에는 분명 좋은 사람도 있었다. 여자로 그를 붙잡아두겠다는 엘레나의 마음은 진심이었는지, 마지막에는 호아킨이 한눈에 호감을 느낄 만한 여성을 골라왔다. 프릴카라 원피스 위로 밀짚색 머리를 차분하게 늘어뜨린 채 조곤조곤 고민거리를 털어놓는 그녀를 보며, 호아킨은 그곳이 햇살이 좋은 노천카페나 자주 가는 펍이었다면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괜찮은 상대를 만날수록 이 촌극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확신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의 고민을 옆에서 지켜보던 제이컵은 호아킨이라면 절대 생각하지 못할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아예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버리는 게 어때? 그러면 그만 포기하시지 않을까?”

평소라면 농담이라 생각하고 넘겼을 한 마디에 왜 그렇게 진지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두 사람은 맞춤 양복을 입고 비치사이드로 향하는 리무진 택시에 올라타고 있었다.

 

프리아스의 멘션은 비치사이드 해변의 별장가에서 조금 떨어진 프라이빗 비치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수목이 우거진 해안도로를 지나면 멘션으로 빠지는 샛길이 나타났고, 그로부터 조금 더 들어가야 멘션으로 향하는 대문이 보였다.

리무진은 멘션의 앞뜰을 장식한 분수대를 지나 현관문 앞에서 멈추었다. 차에서 내리자 마중 나온 사용인이 호아킨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리곤 떠나가는 리무진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저…. 약혼 상대는 어디에….”

“여기 내 옆에 있잖아.”

“아……. 그러시군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제이컵을 돌아보며 사용인은 가만히 눈동자만 굴렸다. 제이컵은 능청스럽게 악수를 청하고 공들여 꾸며낸 신분을 신나게 뽐냈다―프랑스 기반 주류회사의 막내아들 쟈크스 얀센. 여름 휴가로 루나시타에서 요트를 타던 중 루나시타 보수당 대표의 아들과 사랑에 빠짐. 과연 그들의 운명적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호아킨은 제이컵이 휴대폰에 적어놓은 메모를 생각하며 내심 웃었다.

사용인은 두 사람을 호아킨이 쓰던 침실로 안내했다. 안내하는 자의 발걸음이라기엔 지나치게 빨라서, 호아킨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읽을 수 있다.

“도련님.”

사용인은 서둘러 문을 닫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의 사생활은 존중합니다. 저는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장 제 여동생도 작년에 여자친구와 결혼했고요…. 하와이에서 식을 치렀는데 참 아름다웠죠….”

평소엔 일절 입 밖에 내지 않던 가족 이야기를 횡설수설 늘어놓는 걸 보니 그는 안 그런 척해도 많이 당황한 것 같았다. 호아킨은 베드사이드 소파에 걸터앉으며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을 정말로 나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도련님을 위해 드리는 말씀이니까요.”

사용인은 조심스럽게 지금이라도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와 식사 자리에만 참석시키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결혼 압박은 상류층에서 흔히 있는 일이어서 그런 자리만 전문으로 나가는 아르바이트가 꽤 성행하는 모양이었다. 사용인은 그런 인력을 전문적으로 주선하는 사람을 알고 있다며, 믿을만한 사람이니 안심해도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호아킨이 대꾸하기도 전에, 제이컵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당신, 우리 자기를 존중한다면서 전혀 존중하고 있지 않잖아.”

“얀센씨. 당신의 가족은 자유로운 분위기였을지 몰라도 이 집엔 이 집만의 히스토리가 있습니다. 그걸 무시하고 강행하면 어떤 후탈이 일어날……?”

사용인은 이야기를 하다말고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제이컵은 다짜고짜 호아킨의 뒷머리를 붙잡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호아킨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 아무튼. 한 번만 더 생각해보십시오. 두 분이서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키스가 끝나지 않자 사용인은 성급히 방을 나섰다. 제이컵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와. 너희 집 진짜 엉망(fucked-up)이구나.”

그 한마디는 거의 탄성처럼 들렸다. 그는 곧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내가 오늘 이 집안을 제대로 한 번 엎어주겠어.”

호아킨은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다 좋은데 키스는 하지 마라.”

제이컵은 눈썹을 까닥였다.

“왜. 다들 좋아하던데. 지금껏 어떤 키스를 해온 거야, 키노.”

“그런 문제겠냐.”

호아킨은 대충 대꾸하며 방안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방은 그가 떠난 지 십 년 가까이 되었는데도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체리나무로 맞춘 가구들과 금실을 수놓은 아이보리색 커튼. 액자에 넣어 걸어둔 상장들과 찬장에 진열된 트로피. 그리고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이어지는 가족사진.

호아킨은 어쩌면 그 방이 영원히 그렇게 박제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 저택의 장식품이 되어버린 프리아스의 사람들처럼.

 

“산첼은 내일모레 기말시험이 있어서 오늘은 도무지 힘들겠다고 하더구나. 그래도 네가 그토록 마음에 들어 하는 상대라 하니 앞으로 볼 일이 자주 있겠지.”

엘레나는 못 본 새 많이 수척해 있었다. 호아킨과 연락이 닿지 않는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는 게 과장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후안의 어머니가 물려주셨다는 진주 머리핀으로 머리를 올리고 평소 아끼던 에이라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특별한 날에만 꺼내던 머리핀을 선뜻 하고 온 걸 보면 큰 기대를 하는 듯 했다.

기대가 깨진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런 비슷한 상상을 할 때면 부채감이 가슴을 짓누르던 시절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엘레나는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그녀에게 익숙한 삶의 문법대로 사랑하는 자식을 열과 성을 다해 키웠을 뿐이다. 누군가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호아킨 자신이었다. 그 어떤 신념도 삶의 목적도 없이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선언한 사람이 이해받을 리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몇 분 뒤 다가올 일을 상상해도 마음에 동요가 일지 않았다. 기대를 덜어내면 감정도 가벼워진다. 호아킨은 엘레나 역시 언젠가 그 사실을 깨닫길 바랐다.

“어머니도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그는 엘레나의 손을 놓으며 다이닝룸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자신만만했던 것치곤 긴장한 듯 허리를 꼿꼿이 세운 제이컵이 눈에 들어왔다. 호아킨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테이블의 상석 자리를 바라보았다. 후안은 핏빛 와인이 든 유리잔의 스템을 만지며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곧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함부로 깨트릴 수 없는 무거운 정적이 깔렸다.

예상외로 식사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전채요리가 나오는 동안 제이컵은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여 열심히 떠들었다. 엘레나는 샐러드를 옮겨 담다가 집게를 떨어트리는 등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를 했지만, 의외로 친절하게 제이컵의 너스레를 받아주었다. 확실히 유력 정치인 아내의 관록이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후안의 신호가 떨어지기 전까지 사회적 매뉴얼을 철저하게 따르려는 모양이었다.

후안은 그들이 방안으로 들어온 후 줄곧 같은 자세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엘레나와 사용인이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음식이나 술도 일절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엘레나는 매끄러운 사교술로 상황을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하려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코스가 전채에서 메인디쉬로 넘어가기 위해선 후안의 협조가 필요했다.

“여보. 음식이 입맛에 안 맞아요? 다른 걸로 내오라고 할까요?”

다시 한번 채근해도 반응이 없자 엘레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역시 당신이 좋아하는 어니언 수프를 내오라고 해야겠어요. 어제 과음해서 속이 아직 안 풀린 걸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그녀가 사용인을 부르기 위해 팔을 들었을 때였다.

쨍그랑.

호아킨은 고개를 들어 하얀 식탁보에 붉은 자국이 번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후안이 후려친 와인 글라스가 식탁을 빙그르르 돌다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당신이야말로 음식이 입에 잘도 들어가는군. 자식이 호모새끼라는데.”

후안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바닥에 흩어진 유리조각을 보란 듯이 밟으며 다이닝룸 바깥으로 사라졌다.

호아킨은 남은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한 것을 느꼈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잔을 만졌다. 둘 중 누구의 얼굴도 쳐다볼 기분이 아니었다.

“제가 가볼게요.”

그는 곧 짧게 한숨을 쉬고 방을 나섰다.

 

다이닝룸에서부터 후안의 서재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데도 끝이 없는 미로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그 저택 어디에 있든 후안의 방으로 가는 길은 까마득하기만 했다. 호아킨은 저택 복도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기억의 잔상을 차근차근 밟았다. 그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이루는 기억이 그곳에 조각조각 펼쳐져 있었다.

서재의 방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호아킨은 문틈이 만들어내는 긴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아마도 연출된 장면일 것이다. 후안은 호아킨이 자신을 따라오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후안은 노련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알았다. 그것은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 자식들의 성정이 어떤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에 맞게 훈육했다. 야망이 크고 자존심이 센 산첼에겐 무시와 차별로 순응을 가르쳤고, 재능은 있지만 의욕이 부족한 호아킨에겐 노골적인 편애로 부채감을 안겨주었다. 그의 안배에 의해 프리아스의 사람들은 각자 걸맞은 자리에 들어갔고 균형을 이루며 살아왔다.

“돌아오는 월요일에 당장 입당하거라. 그럼 오늘 일은 전부 없던 걸로 해주마.”

호아킨이 방 안에 들어서자,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잠시 후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방황하는 거겠지. 네가 지금까지 내 말을 한 번도 거역하지 않은 게 특이한 일이라 생각한다. 내 친구 자식들도 마약에 도박에 맨날 사고만 치고 다녀서 수습하느라 골머리 좀 썩었지.”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방문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과 눈을 마주하지 않는 자식을 위아래로 가만히 훑었다.

“고생 안 시킨 자식일수록 진짜 속은 어떨지 모르는 거라던데. 남자애인 이라니, 깜짝 놀라긴 했다. 그래도 설마 네가 그렇게 경솔하진 않을 거라 믿는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그 말에 호아킨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후안이 그가 예상했던 시나리오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금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 집에서 생활할 때만 해도 그에게 후안은 한없이 멀고 어려운 존재였다. 그는 호아킨이 어떻게 행동하든 늘 몇 수 앞에서 상황을 관조하고 있었다. 호아킨은 자신이 그의 머릿속을 이렇게 훤히 들여다볼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왜 웃지? 내 말이 우습나?”

후안이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 호아킨은 후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버지.”

그는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돌아가지 않아요.”

그러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아주 짧은 정적.

짝!

따귀를 때리는 소리와 동시에 방문이 덜컥 열렸다.

“키노!”

제이컵이 별안간 서재로 뛰쳐 들어왔다. 아마 방 밖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호아킨은 휘청거리는 몸을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 그러자 후안의 팔이 다시 올라갔다. 호아킨은 제이컵이 후안에게 달려들려 한다는 걸 눈치챘다.

“제이크.”

호아킨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제이컵을 제지했다.

“지금은 나가 있을래? 난 괜찮으니까.”

그 말에 발소리가 멈추었다. 제이컵은 고민하는 듯 보였지만 호아킨은 그가 결국 물러설 것을 알았다.

얼마 후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호아킨은 다시 고개를 들어 후안을 쳐다보았다. 새빨갛게 물든 그의 얼굴은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후안 프리아스에게 지금의 이 상황은 감당할 수 없는 모욕일 것이다.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감정에 휘둘리는 건 그에게 죽기보다 치욕스러운 일일 것이므로.

“분이 풀리실 때까지 때리세요, 아버지. 맞아드리죠.”

호아킨은 묘한 만족감에 미소지었다.

“하지만 전 돌아가지 않아요.”

 

집으로 향하는 리무진 안에서 제이컵은 유난히 조용했다. 처음에는 호아킨이 자신을 말린 것에 속이 상한 줄 알았지만, 그보다는 상황에 압도당한 것 같기도 했다. 차가 센트럴 시티에 들어섰을 때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얼마 후 제이컵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제목없음>으로 표시된 메시지엔 동영상이 첨부되어 있었다.

“키노. 나중에 이걸로 고소해.”

휴대폰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호아킨은 웃음을 터트렸다.

“루나시타 최고의 전담 변호사를 둔 후안 프리아스를 상대로?”

“나 진지해, 키노.”

호아킨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차창을 내리고 밤바람을 맞았다. 아직 선선한 바람이 상처로 달아오른 얼굴을 식혔다.

“고마워, 제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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