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ther Echo Ⅰ

다른 하나의 에코 Ⅰ

CORDIS by 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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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는 하나의 거울과 같아서, 잔상이라는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거울 속의 자신은 원래와 꼭 닮았으나 온전히 같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거울이 사물의 외면과 내면을 온전히 뒤집은 채 비추기 때문이다. 메아리 역시 그러한데, 메아리는 가장 마지막 소리만을 반사하기에 원래 있었던 그대로의 상을 그려내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온전한 부분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의 일부만을 그려낸, 혹은 본래의 모습을 뒤집어 그려낸 거울상에 더욱 매력을 느끼기 쉽다. 오히려 거짓이 가장 진실 같을 때가 있는데, 그것은 괴로운 현실보다도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취합해 낸 거짓이 더욱 설득력있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만들어진 메아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낙엽은 마치 가라앉는 나룻배처럼 하늘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이제 완전히 붉은 옷을 갈아입은 신록의 정원은 겨울을 날 채비를 시작한 참이었다. 선선한 추풍에 길게 흘러내린 머리칼이 쪽빛 파도처럼 흔들렸다. 오를레앙의 저택에서는 낯익은 구둣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 오를레앙 후작가의 막내딸 엘리제는 정원에서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사용인이 수학 공부를 하라며 엘리제를 부르러 정원으로 나왔을 때, 그들은 정원의 대문 앞에 선 두 사람의 실루엣을 볼 수 있었다. 한쪽은 푸른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여자였고, 다른 쪽은 구불거리는 검은 머리를 기른 여자였다. 사용인은 푸른 머리의 여자가 누구인지 모르지 않았다. 오를레앙 가문의 큰딸 엘로이즈였다.

사용인은 대문을 열고 두 사람을 맞이했다. 사용인은 가주께 안내하겠노라고 이야기했고, 엘로이즈와 프레이야는 사용인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엘로이즈가 정원으로 걸음을 옮기자 엘리제는 뛰쳐나가 누이의 품에 안겼다.

“저택은 오랜만에 돌아왔지요. 그동안 얼굴을 오래 보지 못했습니다. 아, 이쪽은 어머님께도 소개드리겠지만… 앞으로 나와 인연을 함께하게 될 사람입니다.”

엘로이즈는 엘리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 곁의 프레이야를 소개했다. 침울한 인상의 여인은 엘리제를 향해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는데, 엘리제는 그 웃음에서 퍽 위화감을 느꼈다. 그들은 곧 사용인의 안내 아래 저택의 현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엘리제가 제 방으로 돌아가자, 사용인은 저택의 응접실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응접실에는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중년의 여성과 유순하고 준수한 외모의 중년 남성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태도와 복장으로 보아 집안에서 가장 지체가 높은 이들로 보였다.

“요즘 활동이 바쁜 것으로 안다. 아이들도 가르치고 있다고 들었는데, 저번에 보내준 자금은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그보다, 그 여자는 누구냐?”

이본느 오를레앙, 저택의 주인이자 오를레앙의 가주인 중년의 여인이 물었다. 엘로이즈는 특유의 온후한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의 말에 답했다.

“앞으로 제 곁을 함께할 사람입니다. 생각이 깊고 현명한 사람이니, 어머니께서도 걱정할 것 없으실 겁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려준 사람이기도 해서, 꼭 소개드리고 싶었습니다.”

엘로이즈는 그렇게 말하며 프레이야를 제 옆자리에 앉혔다. 프레이야는 대답이 없었다. 이본느는 엘로이즈가 자신의 짝이라며 데려온 음울한 인상의 여인이 썩 탐탁지 않았다. 신분이나 출신 때문은 아니었다. 내로라하는 귀족들의 정치판에서 후작가를 일군 노련한 가주의 직감이 미심쩍은 촉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금은 더 이상 보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앞으로는 활동의 방향을 바꿀 예정입니다.”

“바꾼다면, 어떻게 말이냐? 앞으로는 외곽에서 더 활동하지 않겠다는 거고?”

엘로이즈는 능숙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로이즈의 콧등에는 베인 흉터가 보이지 않았다.

“예, 그전까지의 노선은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바깥에서 생활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나니, 이상만이 답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본느는 딸의 도발적인 대답에 놀랐다. 가문을 박차고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던 이가 새장으로 도로 돌아와 갇히기를 자처하는 셈이 아닌가.

“저는 앞으로 가문으로 돌아와 소후작으로 활동할 생각입니다.”


‘오를레앙 소후작, 가문으로 귀환! 오를레앙 후작위의 적법한 계승자 천명!’

에코는 의자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신문을 펼쳤다. 땋아 내린 해수빛의 머리칼이 등받이 위로 흘러내렸다. 서부와 가까운 외곽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은 그 기사는 오늘자 델레시스 일보에서 중요하게 다룬 가십이었다. 에코는 손끝에 침을 묻혀 가며 신문의 뒷장을 펼쳤다.

‘오를레앙 후작가는 그간 가문을 떠나 있었던 오를레앙 소후작 엘로이즈 F. 오를레앙(23세)가 후작가로 돌아와 가문과의 앙금을 풀었다고 설명했다… 가문에서 제명된 것으로 알려졌던 오를레앙 소후작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공식적으로 후작위의 계승자 지위가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푸른 머리의 혁명가는 테이블 위로 팔을 뻗어 한 잔의 포도주를 들이켰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기사였다. 에코는 그 기사를 다시 읽고, 한 차례 더 반복해서 읽었다. 활자가 잘못 인쇄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델레시스 일보가 황색지라는 비판을 받는다 해도, 이렇게 근거없는 이야기를 실을 정도로 형편이 나쁘진 않을 터였다.

‘가주 이본느 오를레앙은 가문으로 되돌아 온 엘로이즈 F. 오를레앙을 용서했다고 설명했으며, 후작위 계승 논란의 경우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항간에서 추측이 오갔던 오를레앙 후작위의 지위는 안정적으로 후계자 엘로이즈 F. 오를레앙에게 승계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오를레앙 후작가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에코는 신문을 접어 품 안으로 넣었다. 바짝 구겨 바닥으로 던지지 않은 것은 20년을 귀족으로 산 그에게 밴 일말의 품위라면 품위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기사란 말인가? 가짜 뉴스라고 생각하는 편이 가장 타당성이 있었겠지만,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한 가주 이본느 오를레앙의 사진이 거짓 뉴스가 아님을 역설했다.

그러니까, 그 엘로이즈 F. 오를레앙은 여기 있다. 피델리아 오를레앙의 손녀이자 이본느 오를레앙과 세르주 오를레앙의 장녀. 그는 과거 오를레앙 후작가의 소후작이었으나, 황실이 개최한 중앙의 무도회에 참석한 이후 공식적인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잠적했다. 외곽 델레시스 지역에서 혁명군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엘로이즈는 에코Echo라는 새로운 이름을 쓰며 비밀리에 오를레앙 후작가의 지원을 받아 혁명 활동을 이어 나갔다.

따라서 엘로이즈 F. 오를레앙을 자칭하고 있는 사람은 진짜가 아닌 사기꾼일 수밖에 없다. 진짜 엘로이즈는 델레시스의 크로노 마을에 있으니, 어지간히 배짱 좋은 사기꾼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을 꾸밀 수 없다. 가주 이본느 오를레앙이 만만치 않은 눈썰미를 지닌 까다롭고 노련한 사람임을, 딸인 에코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사기꾼은 이본느를 대체 어떻게 속여넘긴 것이란 말인가?

에코는 이 일의 진위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엘로이즈를 자처하는 사기꾼의 정체는 누구이며, 그는 어떻게 속일 수 없는 이들을 속여 넘겼고, 그 목적은 무엇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은 에코의 성미에도 맞지 않았을 뿐더러, 혁명 활동에도 지장을 줄 심산이 컸다. 이 문제를 확실히 해두지 않는다면 실타래는 더욱 얽혀만 갈 것이다.

에코는 탁자 위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던져졌으니, 이를 풀어나갈 수밖에 없다.

방문이 닫혔고, 에코는 걸음을 옮겼다. 또 하나의 메아리가 울려퍼졌다.


익숙한 손님이 보육원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금빛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다부진 체구의 여성으로, 길러줄 부모 없는 보육원의 아이들에게는 대모 같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을바람에 딱인 코트 차림이었는데, 양손에는 큼직한 선물 바구니가 들렸다. 아이들은 버선발로 나서서 낯익은 손님의 주위를 둘러쌌다. 반절만한 어린아이부터 어깨까지 자란 소년까지 빠지는 사람 하나 없었다.

“비키, 오랜만이에요! 엄청 기다렸거든요.”

맑은 눈의 소녀가 빅토리야의 옷깃을 붙잡으며 화사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무슨 선물이에요? 비키가 사줬던 곰인형한테 이름을 붙였는데, 미샤라고 하기로 했어요!”

장난기 가득한 다른 아이는 웃음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보육원 귀퉁이에 기댄 곰인형을 가리켰다.

“얘네 투정 너무 들어주지 마세요. 저번에 보내줬던 난방 장치 말인데, 비싼 거였잖아요.”

성숙한 인상의 소년은 보육원의 아이들 중에서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빅토리야의 선물 바구니를 노려보았지만, 빅토리야는 도리어 소년에게 선물 바구니 하나를 건네주었다.

빅토리야 티돕프는 북부 히베르니스에서 발 넓은 자선 활동으로 이름 있는 사람이었다. 본래 북부 히베르니스 출신이었던 그는 북부와 외곽 지역 사람들이 겨우내 추위에 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발상 아래 마도공학 난방 장치를 개량하는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중요한 사실은 빅토리야가 사업의 과실을 혼자서 누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빅토리야 티돕프는 사업으로 벌어들인 수익의 상당한 지분을 북부와 외곽의 고아, 빈민들에게 자선하면서, 직접 제 발로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마도공학 장치를 제 손으로 설치해주곤 했다. 델레시스 일보에서 찾아온 기자가 아낌없는 자선에 대한 이유를 묻자, “우리를 이 땅에 내려보내주신 아스트라이아 여신님의 축복과 그 뜻이 널리 퍼졌으면 합니다.” 라고 대답한 것은 유명한 일화였다. 그렇게 자수성가한 사업가였던 빅토리야의 자선은 제국 전역으로 유명해졌다. 

빅토리야는 아이들에게 선물 바구니를 나눠주고,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해 난방 장치를 손봐준 후에도 곧장 보육원을 나서지 못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제가 크면 ‘비키’처럼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빅토리야는 온화하고 다정한 표정으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한참의 장래희망 발표식 다음에서야, 보육원 선생은 미안하다는 첨언과 함께 빅토리야를 보육원 바깥으로 배웅했다.

보육원을 나선 빅토리야는 보육원 맞은편 벽에 기댄 익숙한 실루엣을 찾을 수 있었다. 푸른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지체 높은 귀족 가문의 영애였다.

“오랜만입니다, 빅토리야.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당신이 여기에 있을 것 같아서, 직접 찾아왔습니다. 사람을 보내는 것보다는 내가 직접 오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빅토리야는 곧장 표정을 바꾸지 못한 채 엘로이즈를 마주보았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았을 때, 그들의 대화는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 엘로이즈. 오랜만이야. 그때 이후로 처음 보는 건가? 나는 잘 지냈어, 너는 잘 지내는지 모르겠네. 신문에서 봤어. 가문으로 돌아왔다고 했던가.”

엘로이즈의 얼굴에는 흔쾌한 미소가 은은하게 감돌았다. 그의 대답은 빅토리야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쉽게 떠올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나 또한 무탈히 지냈습니다. 내 소식을 들은 모양이군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진솔한 화법을 선호하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니, 본론을 먼저 이야기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본론이라고 하면… 무슨 얘긴데.”

빅토리야는 엘로이즈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엘로이즈는 부드럽고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당신에게 특별히 전할 제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버스트는 선장실 탁자의 지도 위로 의수를 내리치듯 내려놓았다. 아니스는 진중한 표정으로 에코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에코는 제 말에 틀린 것 하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그대로입니다. 저를 사칭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스와 버스트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오를레앙 후작저로 돌아왔다던 엘로이즈가, 지금 그들의 앞에 있는 에코와 다른 사람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오를레앙 후작저는 가짜 엘로이즈에게 점령당한 것이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여러분 외에 찾아보기 어려워, 여의치 않게 이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정부의 감시를 피해 망망대해를 떠도는 함선이니, 바깥에서 대화를 들을 염려도 없을 테고 말입니다.”

에코가 설명을 이어가자, 아니스는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해적선의 선장이다. 불과 몇 달 전부터 미라빌리스의 해안에서 크게 유명해졌다. 제물이 될 마법사를 운송하는 배나 부유한 귀족들의 상선을 공격하며, 제국의 탄압과 평민들의 지지를 동시에 산 것이다. 미라빌리스의 해안에서 경비를 단단히 하고 상륙을 방해하는 탓에, 버스트와 함께 남부의 해안을 떠돌고 있는 판국이었지만 말이다.

에코는 그의 문제를 도울 수 있는 조력자로 그들을 선택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 외에 에코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에코는 제국군의 감시가 덜한 밤 미라빌리스 부두에 작은 보트를 띄웠다. 월광 자욱한 밤에 바다로 배를 몰아, 아니스의 해적선 선미를 두드리며 그들을 찾았다.

“오를레앙 가문에서는 제게 보내는 자금 지원을 중단했습니다. 저를 사칭하는 그 자가 오를레앙 가문을 장악한 모양인데, 가주님께서도 그 자를 진짜 저라고 믿고 계시는 모양입니다. 안셀 수장께서는 북부 전선에 고립되기 시작해 도움을 주시기 어렵고, 이대로면 혁명 활동이 제대로 지속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 사기꾼의 정체를 당장 밝혀내고, 오를레앙 후작저를 되찾아야 한다 그거지.”

아니스는 호쾌한 목소리로 그들의 전략적 목표를 요약했다. 그리고 고민스러운 기색을 떨치지 못한 채 고개를 내저었다.

“근데,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항구에서는 해적선을 받아주질 않으니, 내륙으로 들어갈 방법부터 어렵고…”

책상 위에 펼친 지도 위로는 공중섬 네시디온 전역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에코 역시도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있었으니, 손가락으로 지도 위를 툭툭 치며 고민에 빠져 있을 따름이었다. 이미 오를레앙 후작가는 가짜 에코, 엘로이즈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에코가 도로 그곳을 찾아간다 한들 받아줄 리가 만무하다. 가주 이본느와 여동생 엘리제까지 속여 넘긴 사람이라면 평범한 사기꾼은 결코 아닐 것이다. 후작가의 병력을 뚫고 들어가는 것부터 만만치 않은 과제다.

오를레앙 후작가의 지원이 없다면 외곽 지역의 혁명 활동이 이전 같은 규모로 지속되기 힘들다. 혁명군의 수장 안셀 벨레너스는 북부에 발이 묶여 있고, 내륙으로 들어가기 어려운 아니스와 버스트도 도움을 주기 어렵다. 판을 뒤집을 인력이 충분하지 않다. 상황을 타개할 전략을 입안하고 시행할 사람이 필요하다.

“다닐을 찾아보는 건 어떱니까?”

버스트의 물음이었다. 탁월한 판단력을 지닌 천재 의사 다닐 이반 레베데프, 그라면 무언가 답을 찾을지 몰랐지만, 작년 말 마력 폭주를 일으켜 북부의 작은 마을을 궤멸한 이후 신원이 불분명한 상태였다.

“행방이 묘연하지 않습니까. 우리 중에 다닐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그 녀석이라면 다닐을 찾을 수 있을 걸. 분명 팔 걷고 도와줄 거다.”

아니스는 대범하게 병나발을 들이키더니, 술병을 지도 위로 밀어놓았다. 아니스가 민 술병은 동부에 위치한 한 작은 마을에서 멈췄다.


“그들이 티돕프 마을을 공격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조금의 꼬투리만 잡으면 마을 사람들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엘로이즈는 빅토리야의 모친과 어울려 다니던, 혁명군을 자처하던 불량배들을 콕 집어 말했다. 빅토리야의 어머니 마케나 티돕프는 혁명군을 자칭하며, 연고가 드문 마법사들에게 폭력을 일삼던 사람이었다. 그의 칼날은 친딸이었던 빅토리야에게 향했고, 불과 4년 전 빅토리야는 친어머니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다.

“따라서 당신이 당신 친어머니를 감옥에 들어가게 만든 셈이니, 그들은 당신과 당신 마을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당신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빅토리야는 담담한 어조로 엘로이즈에게 되물었다.

“오를레앙의 사병단이 제국 경찰과 협력해, 그들을 붙잡는다면 티돕프 마을은 무사할 겁니다. 내전 진압에 행정력을 쏟아붇느라 제국 정부가 직접 진압할 여력이 나지 않아, 불량배들이 골칫덩이로 남은 것 아닙니까? 따라서 오를레앙 사병 군대로 하여금 이들을 제압하게 한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그들을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티돕프 마을이 위험할 텐데 말입니다.”

엘로이즈의 얼굴 위로는 특유의 자신만만한 표정이 비쳤다. 빅토리야는 엘로이즈의 속내를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빅토리야는 엘로이즈의 논리 전개를 충분히 이해했다는 듯 수긍의 의사를 비쳤다.

“그래서, 내가 그걸 받아들인다고 하면… 조건이 뭐냐니까.”

엘로이즈는 빅토리야의 마을을 위협할 불량배들을 진압해주는 대가로, 놀라운 조건을 내놓았다.

“제국 군대에 입대하도록 하세요. 지금 제국은 병력이 귀중한 상황이고, 교육을 받은 청년이나 마법사라면 장교로 기용하고 싶어할 겁니다. 자선가로서 당신이 쌓아 온 이름값은 군대를 지휘하는 데도 중요한 자산이 될 겁니다.”

분명 빅토리야는 엘로이즈가 떠나기 전의 모습을 기억한다. 엘로이즈는 명백히 제국이 가져오는 희생을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며, 그 때문에 신앙과 안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빅토리야와 언쟁을 벌였다. 그렇다면 엘로이즈에게 제국이라는 선택지는 매력적인 선지가 될 수 없었고, 빅토리야는 엘로이즈와 자신이 끝내 평행선을 달릴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엘로이즈는, 빅토리야로 하여금 그와 같은 편으로서 제국의 군대에 몸담으라 제안한 것이다. 도대체 그가 가문을 떠나 있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빅토리야가 납득하지 못할 제안은 아니었다. 빅토리야는 제국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안녕과 평화를 찾을 수 있는 선택지를 모색했다. 내전을 끝내는 것이 신앙을 지키고 안정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면 빅토리야는 기꺼이 그렇게 할 용의가 있었다.

“...그게 다야? 네가 말하는, 제안이라는 게.”

“예, 그 이상의 조건은 없습니다. 당신이 제국을 위해 힘을 써 주었으면 한다는 것, 유능한 마법사로서 적극적으로 작전에 참여해주었으면 한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빅토리야는 엘로이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전히 찝찝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도대체 그 엘로이즈가 제국의 그늘로 되돌아 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영민한 빅토리야로서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얼마 뒤 아주 중요한 작전이 있을 겁니다. 그때 나는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겁니다.”


아니스가 다닐을 찾을 인재로 지목한 사람은 동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데일 테메움이었다.

“아니스는 당신의 직감이 다닐의 행방을 찾을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와 버스트를 당신에게 보냈고, 당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러 온 겁니다.”

얼마 전 혁명군 메테시스에 합류한 데일 테메움은 백병전에 뛰어난 마법사로 악명이 높았다. 제국에는 반역자라는 명목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혁명군에게 그는 수 차례의 큰 전투와 수십 차례의 작은 교전에서 한 번도 중상을 입지 않은 유능한 전투원이었다.

“하도 사람이 없으니 이런 일까지 나한테 떠넘기는군. 그래, 어디로 가면 되겠나?”

그가 씩 웃어 보이자 짙은 눈썹에 박힌 피어싱이 흔들렸다. 버스트는 그들의 행선지가 북부라고 설명했지만, 그보다 자세한 위치는 알 수 없다고 답했다.

“...그러면 답은 단순한 것 아닌가? 직접 북부에 마을이란 마을을 닥치는 대로 수소문해서, 그놈의 장의사를 봤다는 곳이 하나라도 나오면 그대로 쫓아가면 되겠지. 뭐 대단한 방법까지 동원할 필요 있나?”

데일은 가장 단순하고 직관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그리고, 다닐의 행선지를 모르는 이상 이는 그들에게 있어 최선의 방법이 맞았다. 어쨌든, 데일의 해결책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그들이 세 번째로 도착한 마을에서 한 달 전에 레베데프라는 이름의 장의사가 들렀다는 주민의 얘기가 있었다. 다섯 번째로 도착한 마을에서는 일주일 전, 아홉 번째로 도착한 마을에서는 삼일 전까지 간격을 좁힐 수 있었다.

그들의 발길이 열두 번째로 멈춘 곳은 폐허가 되어버린 어느 마을이었다. 수상한 기척을 느낀 데일이 발걸음을 멈추자, 남은 두 사람은 조금 의아하다는 듯 따라 걸음을 멈췄다.

“설마 이런 곳에 다닐이 있겠습니까. 그대로 지나가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에코는 무너진 폐허를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다. 버스트 역시 에코의 생각에 동감을 표했다.

“에코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아니, 내 감이 여기에 있을 거라고 말하고 있다.”

이번에도 데일의 감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잔해를 남기고 무너진 민가들, 조각난 평상과 박살난 우물, 그 틈새에 자라고 있는 식물들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어 일행은 한 무더기의 무덤이 줄지어 있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덤이 줄지은 곳 가장 끝에 흰 머리를 길게 땋은 한 사람의 실루엣이 있었다. 한 손에는 삽을 들었는데, 바닥으로 무언가를 토해내는 것 같았다.

“다닐… 당신을 찾고 있었…”

에코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다닐은 고개를 돌려 금방이라도 삽을 휘두를 듯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다. 눈동자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입가에는 먹은 것이 없어 토해내던 위액 자국이 남았다.

“저리 꺼져! 저희 같은 것들이 뭘 안다고!”

그리고 다닐은 그들에게 크게 소리치고-아마도 그들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도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얼마 뒤, 다닐은 그대로 제가 파던 구덩이 안으로 기절한 것처럼 엎어지고 말았다. 가뜩이나 약한 몸에, 잠을 자지 못한 데 제대로 먹지 못한 것이 겹쳐 그대로 기절해버린 것이다.

버스트는 쓰러진 다닐을 보고, 주변으로 고개를 돌렸다. 버스트는 어렵지 않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닐은 몇 달 전, 자기가 마력 폭주를 일으킨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이 마력 폭주를 일으켰던 밀워드 마을에서, 자기 자신까지 묻으려고 했다. 소중한 선생님조차 지키지 못했던 자신이 한심스러운 탓이었다.

“일어나면 이거 제대로 알려줘야겠군, 이거 머리만 좋으면 뭐하나.”

데일은 구덩이 근처에 앉아 배낭에서 먹을 것을 꺼냈다.

“우리에게 아직 할일이 남아있다고 말입니다.”

에코는 구덩이에 쓰러진 다닐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푸른 머리칼이 바닥 위로 물결치듯 떨어졌다. 잘린 머리카락 토막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어져 엉켰다. 프레이야의 장갑 낀 손이 엘로이즈의 머리 위를 누비자, 가위가 쪽빛 머리 뭉텅이를 잘라냈다. 엘로이즈는 맞은편의 거울을 응시했다.

“페후, 우리의 뜻이 바야흐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내게 이야기한 것과 꼭 같습니다.”

프레이야의 손은 엘로이즈의 머리를 긴 머리를 다듬어 짧은 단발로 만들었다. 엘로이즈는 어린 시절, 머리칼이 제 목 아래로 내려오지 않은 단발머리를 고수했더랬다. 시나브로 시간이 흐르고 성숙함이 더해질 즈음, 엘로이즈가 세상 너머를 바라보며 제 꿈을 펼치기 시작할 때에 그의 머리칼은 함께 자라난 바 있었다.

“내가 당신을 떠나 있었던 동안, 나는 당신이 괴로워했던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의 곁을 지키지 못했던 동안, 당신은 남은 모든 것을 잃고 외로이 절망했었던 줄을 나 역시 모르지 않습니다.”

프레이야는 솔을 가져와 엘로이즈의 짧은 머리를 정리했다. 어린 시절과 꼭 닮은 단발머리가 모양을 잡았다.

두 해 전, 엘로이즈 F. 오를레앙은 중앙에서의 무도회 이후 자취 하나 없이 종적을 감추었다. 가문에서 제명되었다는 추측성 소문만이 무성했다. 그 사이 프레이야는 그가 소중히 여겼던 것들을 잃어버렸다. 사랑했던 고향은 불에 타 사라졌고, 프레이야를 길러주었던 시장은 반란군으로 처형당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불과 며칠 전, 엘로이즈는 프레이야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프레이야에게 남은 것은 그뿐이었지만, 프레이야는 제게 남은 것이 있기에 그저 절망으로 가라앉지 못했다. 엘로이즈의 존재는 그로 하여금 남은 삶을 추동하게끔 했다. 설령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말이다.

“앞으로 나는 당신의 곁에 언제까지라도 남아 있을 겁니다. 당신이 바라는 것을 함께하고, 당신이 쓰러지지 않도록 언제까지고 곁을 지킬 생각입니다.”

프레이야가 엘로이즈의 머리에서 잔 머리카락을 털어내자, 엘로이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 매무새를 잡았다. 콧등에는 흉터가 없었고, 안경알은 하나가 아닌 두 개였으며, 머리는 길게 땋지 않고 짧게 잘랐다. 프레이야가 오랫동안 봐 온 엘로이즈 F. 오를레앙의 모습이었다.

프레이야는 간절히 부탁이라도 하는 양 엘로이즈의 손을 붙잡았다. 손에 끼워진 반지가 반짝였다.

“그래요, 나의 에갈리테. 다시는 내 곁을 떠나지 말아요. 다시는 나를 혼자 두지 말아요. 내가… 홀로 망가지도록 내버려두지 말아요.”

프레이야는 엘로이즈의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입을 맞췄다. 설령 그것이 꿈이라 하여도, 거짓으로 꾸며진 허상이라 할지라도 프레이야는 믿고 싶었다. 엘로이즈가 제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영원토록 그의 곁에 머무르리라는 지워지지 않을 언약을. 그것이 단순히 조악한 야바위 내지 사기 행각에 불과했더라도 말이다.

거짓은 때때로 진실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하며, 찬란한 거짓은 가혹한 진실보다도 아름답다. 달콤한 위장이요 능란한 사칭범은 이미 그 주인의 자리를 완전히 빼앗았는지도 몰랐다. 그것이 허위의 세계가 현존 이상으로 고통스럽지 않은 까닭이다.


“아직도 살아있네. 빌어먹을 목숨 하나는 지독하게 질기군.”

다닐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바위에서 일어났다. 에코, 데일, 버스트 세 사람이 다닐의 주위에 앉아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한참 기절해 있던 다닐을 바위 위에 눕히고 쉴 수 있게 담요를 덮어 둔 것이다.

“너넨 왜 여기까지 왔냐? 나랑 뭐하자고?”

다닐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자 데일은 짧게 답했다.

“어디서 뭐하고 있나 했더니, 이러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다닐의 보호자이자 ‘선생님’이었던 이반 레베데프는 마땅한 연고가 없는 마법사였다. 제국은 코어의 존속을 위해 연이 없는 마법사들을 붙잡아 희생시켜 왔고, 다닐의 선생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다닐이 독립해 장의사로 일하기 시작한 이후 실질적으로 누구와도 연이 없는 마법사였다. 제국의 표적이 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선생님이 제국의 제물로 붙잡혔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닐은 분노했다. 다닐 자신마저 납치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마력 폭주를 일으켜 마을을 무너뜨려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여럿 죽었고, 다닐은 그들의 무덤을 만들었다. 잠도 자지 못하고, 먹은 것도 없어 쇠약한 몸에 마력 폭주까지 더해졌으니 만신창이가 따로 없었다.

그는 선생님을 지키지 못한 과거와, 관계없는 마을 사람들까지 희생시킨 결과에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폭주를 일으켰던 마을로 되돌아 와, 제 무덤을 파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닐, 메테시스가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에코는 다닐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이 드러난 반장갑이 악수를 건네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다닐의 뛰어난 조직력과 두뇌가 필요했다. 이곳에서 삶을 정리하기에 다닐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다닐이라는 이름은 버렸다. 그냥 이반 레베데프, 이반이라고 불러. 그래서, 그 도움이라는 게 뭔데.”

이반은 품에서 한 개비의 담배를 꺼내 입에 꼬나물었다. 설명은 버스트의 차례였다.

“에코, 그러니까 엘로이즈를 사칭하는 사기꾼이 있는 것 같아요. 그 놈이 혁명의 뒤를 봐주던 오를레앙을 자기 손아귀에 집어넣었고…”

“그래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을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우리 혁명군, 메테시스와 함께했으면 합니다.”

이반은 하늘로 담배연기를 내뿜고, 에코가 건넨 손을 천천히 붙잡았다. 찌든 담배 냄새는 낯설지 않았다.

“얼어죽을… 사람 목숨 가지고 연명하는 코어라면 차라리 부숴버리는 게 낫지. 이미 버린 목숨이면 차라리 그렇게라도 쓰는 게 더 낫겠어. 뭐라도 좋으니까 일단 같이 해보자고.”

담배 냄새가 뿌옇게 흩어지자, 이내 이반은 한 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문제는 서부 지역이지. 오를레앙 후작저를 되찾고, 사기꾼의 정체를 밝혀내는 거. 그걸 위해서는 서부 전선에서 기회를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 적들의 병력을 유도하고, 빈틈을 만들어야지. 나한테 좋은 생각 하나가 있다.”

그 제안을 들은 세 사람은 모두 놀랐다. 실제로 가능한 전략일 거라고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걸 시도해보려면 기술력이 필요한데… 프레이야를 데려올 수는 없을 테고, 그러면 남는 건 한 사람뿐이다. 우리는 지금 알비누스를 데려와야 한다.”


그날, 오를레앙의 광장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연단 위에는 머리를 짧게 자른 엘로이즈가 섰다. 연단 뒷편으로는 오를레앙의 가주 이본느와 후계자 엘로이즈의 아내인 프레이야가 앉아 연설을 듣고 있었다. 오를레앙의 영지민들은 돌아온 후계자를 환영하기 위해 광장을 가득 채웠다.

“안녕하십니까, 오를레앙의 여러분. 저는 오늘 오를레앙 가문의 계승자로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엘로이즈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힘이 있었는데, 사람들을 자연스레 일어나게 만드는 매력이라기보다는 첨예한 예리함이라는 표현이 적확했다.

“오를레앙은 네시디온의 무수한 진보를 이끌어 온 가문입니다. 지난 50여 년 동안 서부의 발전은 오를레앙이 이끌어왔다 해도 결코 과언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항간에 이단자라는 의혹과 소문이 있어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최근에는 반란군을 지원하고 있다는 비난까지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엘로이즈의 담담한 목소리는 진취적인 강단이 있는 의견의 표명이라기보다 차가운 사실의 서술에 가까웠다.

“따라서 저는 네시디온의 지속적인 진보와 발전을 지향하는 오를레앙의 방향성을 유지하는 한편, 오를레앙을 둘러싼 의혹과 비판에 대해 명확히 할 생각입니다. 가주 이본느 오를레앙의 이름을 빌려, 이 자리에서 오를레앙 가문의 계승자로서 한 가지를 선언하고자 합니다.”

프레이야는 엘로이즈의 뒤에 서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프레이야가 바라는 일이기도 했다.

“그동안 중립을 표방해 왔던 오를레앙은, 금일부로 속칭 혁명군을 자처하는 반란군 일파에 대한 진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표명합니다. 저는 이것이 네시디온의 평화와 안녕을 위하는 일이며, 더 나은 네시디온의 미래를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오를레앙 소후작의 선언은 오를레앙 가문의 노선을 완전히 비트는 대사건이었다. 그간 오를레앙은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하면서, 물밑으로 혁명군을 조력해 온 혁명의 비밀스러운 대모 같은 세력이었다. 그러나 가문으로 되돌아온 소후작이 혁명군 진압에 동참할 것을 선언하면서 이 구도는 완전히 비틀리게 된 것이다.

“오를레앙 가문은 앞으로 제국을 위해 헌신할 것임을 서약합니다. 오를레앙은 결코 이단자들이 아니며, 오로지 제국만이 진정한 진보의 궤적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 믿는 신실한 이들입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어, 폭동과 내분을 추동하는 반란 세력과는 그 결이 결코 같지 않습니다.”

엘로이즈는 오를레앙이 앞으로 혁명군과 같은 길을 걸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오를레앙은 앞으로 제국을 위해 일하게 될 것이며, 한때 그들이 도왔던 혁명군에게 총칼을 겨눌 터였다. 연단 뒷편에서 프레이야는 조용히 엘로이즈의 연설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프레이야의 믿음은 결코 배반당해서는 안 된다. 프레이야는 제국이 점진적인 발전과 더 나은 미래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고, 혁명군의 방식은 내분으로 점철된 폭력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자신이 만들었던 기술이 그의 고향을 무너뜨리고 사랑하던 시장님의 목숨을 앗아갔을 때에도… 프레이야는 자신의 믿음을 합리화할 방법을 찾았다. 그가 옳은 선택을 해왔노라는 근거가 필요했다.

에코는 그렇지 않았겠으나, 엘로이즈는 프레이야의 선택이 옳다는 근거가 되어주었다. 에코는 프레이야를 홀로 남겨둔 채 떠나갔으나, 엘로이즈는 프레이야의 곁을 결코 떠나지 않았다. 거짓이라도 좋았다. 만들어진 가면일지라도 상관없었다. 프레이야에게 필요했던 것은 단지 그뿐이었다.

그것이 만들어진 메아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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