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이 있나요

ピノキオピー - 内臓ありますか feat. 初音ミク / What's Inside

친구를 위해 피노키오피 님의 '내장이 있나요' 를 모티브 삼아 쓴 엽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SpwTvYgFrM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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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응보는 없고 모든 건 새옹지마다. 

서른이 되고 중학교 담임 선생님의 은퇴식을 겸한 동창회에 다녀와서 확고해진 생각이다. 

갑이라는 동급생이 있다. 갑은 말 그대로 요즘 의미의 갑이라서 집안에 돈도 많고 힘도 세고 키도 크고 갑질도 잘했다. 

을이라는 동급생이 있다. 을도 마찬가지로 요즘 의미의 을이라서 딱히 잘난 것도 없고 친구도 적고, 없던가? 괴롭힘을 당했다. 

중학교 시절 우리 반은 항상 갑이 똘마니들을 시켜 을을 괴롭히는 학교 폭력의 장이었다. 갑은 자신의 잘난 점을 과시하지 못해 안달이었고 상대를 가리지 않고 갑에게마저 초연한 태도를 보이던 을은 절호의 희생양이었다. 갑과 똘마니들 (똘마니라고 했지만 나보다 훨씬 위의 존재들이다) 은 을을 사이에 두고 퍽 소리가 나게 밀치거나 급식으로 나오는 우유를 실수를 가장해 터뜨리거나 모기가 있다며 을의 뺨을 짝 갈기기도 했다. 을의 문제는 초연한 성격이었다. 처음에 하지 말라고 화를 냈다면 상황이 많이 바뀌었겠지만 을은 이 정도는 애들 장난이란 듯이 아무 말 없이 자리를 피하고 찢긴 책을 정리하곤 했다. 그 모습이 갑을 자극했다. 왜 그렇게 맞고 지냈어. 바보같이. 약자에 가까웠던 나는 마음 속으로 을을 응원하고 을의 초연한 모습을 동경했다. 동경이란 상대를 타자화해서 멀리 떨어트려 보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한 번도 을을 돕지 못했다. 떨어진 교과서 한 번 주워 준 적이 없었다. 나는 방관자였다. 힘이 약한 가해자였다. 

시끌벅적한 동창회는 우유를 닦은 걸레 마냥 비릿한 냄새를 떠올리게 했다. 

갑은 동창들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인싸였다. 그리고 인싸의 대화 방식은 대체로 타인을 까내린다. 아마 내 편견이겠지만.

갑은 말했다. 을은 안 왔냐고. 하긴 올 리가 없지. 무슨 낯짝으로 내가 있는 데에 와?

아마 누군가는 이상함을 느끼겠지. 갑, 네가 그런 말을 할 처지냐고. 하지만 이야기는 조금 복잡했다. 

을은 괴롭힘 초기에는 평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점점 스트레스를 받더니 눈에 띄는 이상 증세를 보였다. 춥지도 않은데 몸을 떨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표정과 한숨을 숨기지 않게 됐다. 을은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됐다. 반의 모두가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갑에게 을은 그저 찌르면 몸을 부풀리고 도망갈 시간을 버는 행동을 하는 짐승으로 보였다. 갑은 언제 터지나 보자는 마음인지 을을 더 심하게 괴롭혔다. 하지만 갑은 좋은 성적과 집안으로 선생님들께 귀여움 받는 존재였다. 갑은 을과 다른 의미로 머리가 좋았고 (회전이 빠르다고 말하면 좋을까) 그 괴롭힘은 한 번도 꼬리를 밟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은 평소처럼 을을 모욕했다. 무슨 모욕이더라. 앞 부분은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을은 그 자리에서 몇 번 점프했다. 뛰고 발을 구르고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갑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목을 졸랐다. 그리고 그 장면은 지나가던 선생님께 그대로 보여졌다. 나는 그 때도 을을 위한 변호 한 번 하지 못했다. 

갑의 똘마니였던 (성인이 돼서 겨우 동등한 지위가 된) 친구가 말했다. 을 말이야, 다니던 회사가 망했대. 사장이 갑자기 사무실 비우고 날랐대. 을 월급도 몇 달 밀렸을 걸. 

갑은 말했다. 인과응보. 정말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이번에도 한 마디 쏘아붙이지 못하고 갑을 흘겨보는 다른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하면 잔기침을 하는 나는 콜록콜록 소리를 내면서 집에 돌아왔다. 씻기는 싫고 귀찮았지만 정신은 이상하게 또렷했다. 일탈? 그렇게 부르기엔 거창하고 평소에 하지 않을 행동을 하고 싶었다. 나는 을과 연락해보고 싶었다. 을은 sns의 업로드도 끊어서 나는 을의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었다.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부를 쭉 내린다.

나는 을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따라 수신음이 길다. 밤이 늦어서인가 수신음이 유독 크게 들린다. 을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가해자가 되지 못한 방관자로 보였다면 조금 슬프겠지만 납득하지 못할 답변은 아니다. 결국 나는 을을 돕지 못했으니까. 결과만 보면 그랬다. 나는 방 안을 꽉 채우는 폭력적인 수신음을 견디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여전히 샤워를 하기 싫어서 잠시 누워 있을까 했다.

뚜르르. 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인사했다. “여보세요.”

을은 가볍게 받아쳤다. “안녕. 오랜만이네. 무슨 일 있어?”

별 일은 아니고 오늘 동창회에 다녀왔는데 을, 네 얘기가 들려서 생각나서 연락해봤어. 아, 나도 동창회 연락이 오긴 했는데 내가 가면 싫어하겠지 싶어서 안 갔어. 뭐, 상황도 힘들고. 상황? 아, 응. 너도 들었구나? 을의 목소리는 전보다 낮아졌지만 여전히 초연한 느낌이 있었고 자신의 슬픔과 힘듦을 다소 무신경하게 말하는 버릇이 생긴 모양이었다. 을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꺼냈다. 알다시피 다니던 회사가 망했다, 하룻밤 만에 사람이 모든 흔적을 끊고 도망칠 수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취미로 모으던 모형 완구를 전부 팔아치웠다, 슬플 줄 알았는데 눈물은 나지 않더라. 나는 계속 응, 그랬구나, 맞장구를 치거나 말을 잃거나 했다. 나는 그저 을이 나를 탓하고 있는지 아니면 용서했는지 듣고 싶었을 뿐인데. 

그러던 중 을이 말했다. “우리 집 이제 물이 끊겨서 공원 화장실에 가거든.” 나는 말을 잃었다. “공중 화장실에는 되게 더러운 낙서들이 많잖아.” 그렇지. “누가 거기에 장기 팔 사람 연락하라면서 찌라시를 남긴 거야. 빨간 종이에 검은 글자. 스카치 테이프로 휴지 위에 붙여 놨더라.” 차라리 말을 잃었어야 했는데. “그래서?” 나는 듣기 지쳤다는 티를 팍팍 내며 답했다. “아무것도 하지는 않았지. 그런데 내가 그 찌라시를 진지하게 읽고 있더라. 어때? 무섭지?” 무서웠다. 웃을 일이 아니라서 웃지도 못했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전화를 건 스스로가 못나서 대꾸도 못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대로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적막한 분위기 속에 을이 전화를 끊을 것이다. 

하지만 을은 말했다. “그 때 주먹질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많은 게 바뀌었겠지.” 자기 때문이 아닌 일에 대고 자기 탓을 했다. 아니야, 나는 그 때 을이 폭력을 써서라도 반항한 게 속 시원했어.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을의 인생을 살아주지 못하니까 말이다. 그 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나는 말했다. “인과응보는 없어.” 라고. 이게 무슨 말이냐면, 어, 그게…. 말의 음량이 줄었다. 내가 무슨 철학자나 된다고. 부모님 도움 받아서 구한 자취방에서 등 따시게 지지고 있는 내가 인생의 뭘 안다고. 나이만 서른인 애새끼 주제에 부끄러운 소리를 한다. “어, 그게 무슨 말이냐면.” 내가 궤변을 덧붙이려고 할 때 을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일러주듯이 입을 열었다. “맞아. 모든 건 새옹지마에 불과해.” 그대로 전화가 끊겼다. 덕분에 나는 나도 모르는 개똥철학을 얼기설기 늘어놓지 않아도 됐다. 

나는 확 깨버린 맑은 정신이 기분 나빠서 옷을 벗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물에 잠기면 차라리 나을까 싶었지만 욕조는 딸려있지 않았다. 따뜻한 물줄기를 맞으며 을과 나눈 대화를 중얼거렸다. 을과의 대화는 맥락이 이어지는 선문답 같았다. 말이 안되는 문장이란 건 나도 안다. 다만 을은 이해해도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라는 점에서 그랬다. 

을과 나눈 대화 중에서 유독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 말이 있었다. 장기 매매, 즉 내장을 파는 행위였다. 을은 사람의 정곡이나 치부를 찌르면 찔렀지 일부러 자극적인 말을 꺼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말을 꺼냈을까. 내장이라. 내장. 나는 배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졌다. 을의 배는 나만큼 살이 붙어 있을까. 아마 아니겠지. 식비도 상당히 줄이고 있을 터였다. 갑은 나보다 잘 살지만 다이어트니 식이조절이니 하고 있어 아마 나보다 살이 적겠지. 울컥해서 뱃살을 꼬집어봤다. 갑 같이 욕심이 뒤룩뒤룩한 놈이나 뱃살이 붙었어야 했는데. 이 때 번뜩인다. 

내 배에 붙은 건 푸짐한 살점이지 내장이 아니라고. 내겐 내장이 없을지도 모른다. 삶을 관장하는 인체의 정수, 인간의 본질, 그런 것이 내겐 없을지도 모른다. 내장이 있나요? 스스로에게 물어봤지만 나는 내 속을 본 적이 없다. 텅 빈 몸을 뜨겁게 덥히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나는 샤워기의 물을 껐다.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으며 생각했다. “모든 건 새옹지마에 불과해.” 그렇다. 을은 그렇게 힘든 중에도 나를 위한 답을 건넸다. 자신의 행동으로 벌을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상사는 어떠한 파동의 형태를 띄고 있어서 그 파형에 의해 오르락내리락, 노력에 의해 작은 노이즈를 만들 수 있을 뿐이다. 방관자 시절 이후로 나는 뭔가를 누릴 가치가 없는 속 빈 강정처럼 산다고 느꼈지만 그건 모두 착각이었다. 나는 노력하지 않은 무기력한 사람일 뿐이었다. 

모든 건 새옹지마에 불과해. 을의 목소리 너머로 연꽃이 핀다.

모든 건 새옹지마에 불과해. 을의 목소리 너머로 검은 말이 달려간다.

모든 건 새옹지마에 불과해. 을의 목소리 너머로 불상이 세워진다. 

나는 을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잠들었다. 꿈 속에서 어린 을을 만난다면 그를 구원해야지. 꼭 한 마디 건네야지.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나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개운한 아침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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