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문대 전력] 남자주인공을 꼬시지 않으면 죽는 병 걸림

클리셰

…….

그동안 읽어제꼈던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에나 나오는 일이 나한테 일어난다고?

류건우는, 아니, 얼마 전 읽었던 웹소설의 등장인물 ‘박문대’가 되어버린 류건우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속으로 절규했다.

 

[ Mission ! 소설 장르 바꾸기~ 장르는 BL >_< ]

 

“…미친 걸까?”

 

눈앞에는 이상한 안내문까지 떠올랐다. 그것은 그를 약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앞에 둥둥 떠다녔다.

박문대는 당장 뛰어내릴 각오로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미친 안내문이 안내 멘트를 바꿨다.

 

[ Warning ! 미션을 해결하지 못하면 다른 작품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 ]

 

“미친 새끼.”

 

박문대는 곱게 창문을 닫고 낡은 매트리스 위에 누웠다. 어차피 죽지도 못하게 하려는 건지 그의 집은 반지하였다.

그는 누워 생각했다.

박문대 박문대 박문대. 어디서 들어봤더라?

일단 주인공은 절대 아니고.

아무리 수없이 많은 웹소설을 봤다고 해도 주인공 이름이 박문대였으면 바로 기억해낼 게 분명했다.

대체 어떤 작가가 주인공 이름을 박문대 같은 걸로 짓겠냐고.

그는 뒤척이다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때 매트리스 아래에 놓인 사원증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뻗어 그것을 확인하고 그는 깨달았다.

T1 ESG 혁신부 박문대 대리

‘T1 박문대 대리. 티원…? 잠깐만. 회사에서 일 안하고 연애하기? 대충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줄여서 회사연애.

어처구니없는 제목과 달리 내용이 꽤나 현실적이었던 웹소설. 일도 하면서 연애도 하는 2마리 토끼를 안 놓치려고 버둥거리는 내용이라 어떨 때는 주인공들이 회사에 너무 갈려서 공감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열심히 읽었던 소설인데.

박문대는 여주인공의 직속 상사였다. 조연인데도 나름 자주 출연해서 문대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그 점에서 설정이 꽤 탄탄하다는 평도 있었지.’

조연 설정에 힘을 쓰는 작가는 거의 없으니까. 처음엔 서브남인가 싶기도 했는데 그렇다기엔 너무 일만 해서 금방 배제됐고.

그런데 작가가 설정해둔 조연이 이제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회사연애의 작가가 알게 된다면 기함할 일이었다.

그것도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예쁘고 착한 캔디과의 여주인공 대신에 그 여주인공의 상사가 남자주인공을 유혹해서 사랑에 빠져야 한다니.

박문대는 한숨을 쉬었다. 작품을 망치게 될 작가도 안 됐지만 그보다 제가 더 안 됐다.

미션에 실패하면 다른 작품으로 이동하게 된다고?

그렇다면 무조건 여기서 성공시켜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야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소설은 살아남기 쉬운 편이다.

그간 제가 읽었던 소설을 떠올려보면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한 히어로물, 상태창이 제시하는 미션에서 살아남는 아이돌, 회귀를 거듭하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 귀족 여주. 생존 난이도부터가 달랐다. 그런 것에 비하면 이 소설은 현실, 게다가 대한민국의 어느 회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나.

박문대는 혼자 생존 욕구를 불태웠다.

“그래, 내가 죽기는 왜 죽어. 멀쩡한 직장도 있고 집도 있고. 강아지 같은 미션도 있는데.”

그는 직전에 나왔던 멘트에서 아직 바뀌지 않은 안내창을 툭툭 두드렸다. 손끝에 핸드폰 화면을 두드리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어쨌든 안내창은 또다른 멘트를 제시했다.

 

[ 다정공 능글공 미남공 아기공 재벌공 ]

 

“뭔데, 이게.”

 

[ 다정공 능글공 미남공 아기공 재벌공 <- 공의 키워드 (^///^) ]

 

“그래, 고맙다.”

얼굴은 왜 붉히는데.

안내창이 공의 키워드를 제시했다. 그러니 닥치고 나더러 깔리라는 거지.

 

개같은 미션.

박문대는 눈에서 눈물이 차오르는 듯 했다.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은 류청우였다. 그리고 안내창이 뱉어낸 키워드가 퍽 잘어울리는 인물이기도 했다. 모든 사람한테 다정한데 여자주인공한테는 훨씬 더 다정해졌고 여주가 자기한테만 친절한 게 아니라서 서운함을 토로하니 능글맞게 구렁이처럼 넘어가는 장면도 있었다. 그리고 일러가 미남공에 알맞게 잘 나오기도 했고 회장의 손자라는 설정까지…. 아기공은 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뭐 어쨌든 주인공은 그대로 류청우인 것 같았다.

그런데 여주인공한테만 다정한 이 재벌 3세를 무슨 수로 내가 꼬셔.

잠깐.

나 말고 다른 놈이랑 엮어주면 되는 거 아닌가?

회사에 남자가 몇 명인데.

“야, 그건 상관없는 거냐?”

[ (^///^) ]

“말을 해.”

상태창은 여전히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얼굴도 없는 게 하는 짓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Make a wish~ Come true true true~ ♪♬

그때였다. 갑자기 벨소리가 울린 건.

머리맡에서 충전되고 있는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T1] 류청우 부장님

뭐야. 이 시간에 류청우가 왜.

벌떡 일어나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참고로 상사 전화는 누워서 받으면 안 된다. 누워 있으면 목소리 눌려서 다 티나거든.

“예, 부장님.”

- 아, 박문대 대리. 아직 오는 중입니까?

“예?”

- 원래 8시까지 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박문대 대리가 자리에 없어서 전화해봤습니다. 혹시 출근하는 걸 잊은 건 아니죠?

“하하, 아니죠. 가고 있습니다, 부장님. 오늘 차가 많이 막히네요.”

- 하하하, 그렇죠? 아무리 어제 과음했다지만 박문대 대리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이따 봅시다.

“예, 부장님. 이따 뵙겠습니다.”

미친 새끼.

이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몰라도 이걸 만든 새끼는 미친 놈이 틀림없다.

갑자기 소설 속 세계에 떨어진 것도 적응 안 되는데 게다가 평일 아침이라고?

그래도 다행히 지각은 면할 것 같았다. 남자주인공 덕분에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개꼰대 상사 때문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9시 전에 출근을 해야한다는 사실이라도 알았지 않은가.

다행히도 박문대는 회사에서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에 살고 있었다. 지도앱으로 확인해보니 걸어가도 10분 남짓.

‘그래서 8to10 근무가 가능했구나…. 회식 다음 날도…. 남주여주 연애할 때 네가 피똥 쌌겠구나.’


“안녕하십니까.”

정신없이 준비해서 8시 40분 쯤 도착할 수 있었다. 자리를 둘러보니 상급자들 중 자리에 있는 건 아무도 없었다. 내게 전화를 걸었던 류청우도 잠시 탕비실에라도 간 건지 자리에는 없었다. 여주인공도 도착한지 얼마 안 됐는지 이제야 사내 메신저에 로그인하는 중이었다.

“대리님, 어제 많이 드셨나봐요.”

“아, 예. 평소보다 과음했던 것 같네요. 나경 씨는 괜찮아요?”

“네, 저는 대리님이 1차 끝나자마자 빼주셨잖아요. 감사해요.”

여주인공, 권나경이 조용히 속삭였다. 그랬나, 어쩐지 기억에 여주인공이 없더라.

“책상 위에 그거, 부장님께서 주신 거에요.”

권나경이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책상 위에는 숙취해소제 하나가 놓여있었다.

평일에 회식 잡은 게 미안하기는 했나봐요.

그녀는 자리에 있지도 않은 류청우 눈치를 살피며 더욱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의 책상 위에도 박문대 책상에 놓인 것과 같은 숙취해소제가 있었다.

‘여주인공 것만 사기 뭐해서 내 것도 산 거네.’

“감사 인사는 드렸습니까?”

“아, 아뇨. 와보니까 아무도 안 계시는데 자리에 있더라구요.”

“좋은 아침입니다.”

류청우가 상급자 둘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권나경과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각자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대답했다.

“나경 씨, 문대 씨, 이리 와봐. 부장님이 커피 사셨어.”

열심히 일하던 척을 하려는 찰나, 과장 하나가 말했다.

숙취해소제에 커피까지? 진짜 미안했나보네요.

그러게요.

권나경과 눈짓을 주고 받으며 과장의 자리로 향했다. 과장 둘은 이미 각자 커피를 받아 제 자리에 착석했고, 류청우가 남은 커피를 들고 있었다.

“박문대 대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맞죠?”

류청우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아메리카노를 건네었다.

뭐야, 왜 저렇게 웃어.

“예,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숙취해소제도 감사합니다.”

“저도 감사합니다, 부장님.”

“별거 아닌데요. 권나경 씨도 받아요.”

역시 내가 아니라 권나경한테 웃은 거군. 그런데 이걸 어떻게 떼어놓는다…. 남주 취향에 맞는 캔디 수 없나…?

“박문대 대리, 시간 괜찮으면 잠깐 얘기 좀 할까요?”

그게 박문대는 아니길 바라는데.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별 수 없이 회의실로 향했다. 신설 부서라 따로 부장 공간이 없거든.

“무슨 일이십니까?”

“내일 있을 프레젠테이션 자료, 권나경 주임이 만들기로 했죠?”

“예, 오전 중으로 완성해서 부장님께 보고 드릴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거, 미리 박문대 씨가 한 번 확인해서 부족한 부분 있으면 채워서 가져와요.”

‘네가 그렇게 신경 안 써도 대리 선에서 확인할 텐데 굳이?’

역시 아직은 여주인공에게 빠져있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리를 따로 불러내어 이렇게 업무 지시를 할 리는 없으니까.

“그런데 박문대 씨,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예?”

“아니, 어제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아서….”

왜 얼굴을 붉히는데. 왜.

“괜찮으면 됐습니다. 혹시 안 괜찮으면 오늘은 일찍 퇴근해요.”

니가 일을 그렇게 시키는데 퇴근하라는 말이 나오냐.

하지만 차마 그렇게 대답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신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상사 하나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 박문대 대리, 부장님이 무슨 말 했어요? ] 8:53

무슨 말 하긴. 일 하나 더 줬지. 아, 생각났다. 여기 과장 둘 사이에서 신경전이 있었지.

T1 ESG 혁신부. 소설의 배경이자 지금은 내 부서가 된 곳. ESG 혁신부는 해외 투자 트렌드에 맞춰 따라가겠다며 윗선에서 특별히 지시해서 생긴 부서였다. 해외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회장 손자 류청우를 부장 자리에 올리고 싶어서 급조했다는 말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요즘 기업 경영 트렌드이니만큼 필요한 부서였다. 부장인 류청우, 본사에서 신청을 받아 오게 된 과장 둘과 박문대를 포함한 대리 둘, 사원 하나, 그리고 T1 엔터에서 구르고 있다가 발탁된 캔디여주, 권나경까지 구성원은 총 일곱이다. 직급도 체계도 엉망이다, 아주. 과장 둘이야 당연히 부장 자리가 공식이니 부장으로 승진하게 될 줄 알고 신청한 거였고, 권나경은 좀 웃긴데, T1 엔터가 최근에 해외 투자를 많이 받았거든. 그래서 T1에서 가장 구멍가게인 엔터사에서 해외 미팅을 가장 많이 해봤다던 직원이라 특별히 뽑아온 거다. 개연성 무슨 일인데. 그럼 박문대는 왜 오게 됐냐고? 이직하고 싶어서 스펙 쌓으려고 신청했다. 그런데 이직 준비를 할 시간조차 없이 갈리고 있는 처지다. 신생 부서에 일이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부터 오류였다, 박문대.

[ 권나경 주임이 맡은 프레젠이션 검토해서 올리라는 말씀하셨습니다. 그 외 말씀 없으셨습니다. ] 8:55

답장, 답장해야지.

답장을 보내자마자 ‘읽음’으로 바뀌었다. 과장 둘다 류청우에게 잘 보이고 싶어 류청우의 일거수일투족을 궁금해했다. 그래서 그 아래 권나경과 박문대를 쪼아대는 바람에 권나경이 박문대에게 하소연하는 장면이 많았다. 거기서 문대리라는 별명도 만들어졌고. 소설을 읽을 때는 신데렐라 권나경과 백마탄 왕자님 류청우에만 집중했었는데, 사실 박문대가 제일 고생이었네 싶다.

그리고 지금은 나. 내가 제일 고생이다. 어쩌다 박문대한테 들어와서 이 소설을 BL로 만들어야 하는 나 말이다. 업무까지 해야 하고.

그래, 일이나 하자.

“박 대리?”

일 하겠다고요, 좀.

“네, 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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