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문대 전력] colors

오렌지주스

사람의 행위에도 색깔이 있다면 친절은 노을빛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다 그런 생각을 했냐 하면, 일단 8차선 도로의 한 가운데에 그려져 있는 횡단보도를 건너던 참이었다. 성인 남성의 걸음으로 걸으면 한 20초쯤 걸리는 횡단보도를 건너면 곧바로 숙소가 있었다. 요 근래 신축 아파트들이 그렇듯 아파트 바깥쪽에도 상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황토색에서 고동색 그 사이 어디쯤의 빛깔에 화강암처럼 검은 점들이 콕콕 박힌 채로 번쩍거리는 대리석 위에는 황동색으로 ‘Arcade’라고 적혀있었다. 처음 이 아파트로 숙소를 옮기던 날 동갑 세진이와 문대는 그걸 보고 둘이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라. 조용하고 나직한 목소리였으나 두 사람 다 냉소적인 데가 있어서 그 내용은 꽤 신랄했다. 옥외에 붙은 글자는 전부 한국어로만 쓰도록 법으로 강제해야 한다, 실제로 아케이드도 아니면서 과시가 우습기 짝이 없다, 그런 내용이었다. 벤의 맨 뒷줄에 앉아 매니저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을 만큼의 목소리로 나누는 둘의 대화를 훔쳐 들으며 허영은 황동색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제가 할 법한 생각은 아니지만 밤늦게 스케줄이 끝난 터라 잠결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꿈과 뒤섞인 것임에도 사람의 행위에 색깔을 입힌다는 독특한 발상은 꽤나 인상 깊었는지 깨고 나서도 기억에 남았다.

‘사랑에도 색깔이 있다는 발상은 제법 흔한 편이기도 하고. 동생이 어릴 때 즐겨보던 TV 만화에도 그런 내용이 있었던 것 같은데…….’

조금 유치한가, 하면서도 꽤나 흔한 발상이라는 자기 위안을 하며 혼자만의 놀이를 계속했다. 사랑은 빨강, 거절하는 건 검정, 승낙은 하양. 범죄는 핏빛…? 이상한가. 우는 건 파랑, 아니, 투명색? 눈물은 투명하잖아. 그러니까 친절이 노을빛일 거라는 생각도 평소 하던 놀이의 일종이라는 거다. 다만 친절의 색을 정하는 것은 예상보다 시간을 오래 잡아먹었다.

금빛 머리칼과 하얀 와이셔츠, 알루미늄 캔의 회색, 찰랑이는 오렌지주스. 친절의 색이 너무 많았던 탓이다. 빨주노초파남보, 색깔은 그렇게 7가지만 있는 줄 알고 살았는데 ‘친절’하면 떠오르는 풍경이 너무 많았다. 누가 봐도 잘 어울린다 말할 법한 노란 머리칼을 하고서 그 아래 하얀 교복 와이셔츠를 걸치며 숫자의 행렬을 늘어놓던 너. 그 속에 나름의 친절이 있었음은 당연했다. 리더를 못하겠다고,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던 날 무뚝뚝한 표정으로 맥주 캔을 따서 건네주던 너. 눈앞에 내밀어진 회색 알루미늄 캔이 참 반가웠는데. 그리고 비슷한 표정을 하고서 오렌지주스를 건네기도 했어.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도맡아서 해가며 스스로를 입증하려 전전긍긍하던 내게 너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했었지. 시럽을 잔뜩 넣어 혀끝이 얼얼할 정도로 단 오렌지주스를 벌컥벌컥 들이키면서, 잘하고 있다는 그 말 하나에 위로도 받았고 작은 기대도 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작은 기대를 품은 그 순간부터 이미 내 마음속에서 친절은 오렌지주스의 주황이었다. 그때는 아직 색과 행동을 연결 짓지 못할 때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와 오랜 만에 자리를 피하지 않고 대화를 나누던 그날의 색감도 마침 노을이 지던 주황색이었다. 지금처럼.

 

이성과 감성, Yes or No, 음과 양, 남성과 여성, 흑과 백. 흑백의 횡단보도는 대비감이 잘 드러나는 곳이었다. 무엇이 마음에 드는지, 마치 어떤 결정을 내리라고 종용하는 듯 했다. 그래서 다들 한 번쯤은 꼭 한 색깔만 밟고 지나가려고 하는 걸까. 처음 발끝에 닿은 색을 저 건너편까지 그대로 유지하면서 걷고 싶은 것은 제 자신만 하는 생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고 발걸음이 닿는 대로 이 색 저 색을 누르고 걸었다. 미룰 수 있다면 최대한 미루어두고 싶었다. 제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바지 주머니 안에 넣어둔 휴대폰에서 벨이 울렸다. 문대였다. 횡단보도의 한복판에 잠시 멈추어 서서 그는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발을 내딛었다. 흰색 도료가 네모반듯하게 칠해진 부분이 발부리에 닿았다.

 

“어, 문대야.”

- 어디쯤이에요?

“숙소 들어가고 있지. 무슨 일 있어?”

- 마실 것 좀 사온다던 사람이 여태 안 오고 있으니까 전화해봤죠. 혹시 무슨 일 있나 싶어서.

“하하, 그렇게 시간이 오래 됐나?”

- 저녁 거의 다 됐어요. 빨리 와요. 차유진 벌써 식탁 앞에 앉았다구요.

“유진이 기다리지 않게 하려면 빨리 가야겠네. 뭐 더 필요한 건 없어?”

- 없어요. 들어오는 중이라면서요. 상가에서 나온 거 아니에요?

“아아, 횡단보도 건너편 카페 갔어. 네가 좋아하잖아, 과일 주스.”

- ….

“문대야.”

- 네, 형.

“이따 둘이서 나갔다 올까? 저녁 먹고.”

- 얼른 들어오기나 해요. 이따 봐서 잠깐 나갔다 와요.

“하하, 그래. 다 왔어.”

 

전화를 끊으며 우연히 돌아본 풍경은 또 다시 주홍빛이었다. 긴 8차선 도로 끝에서 태양이 이글거리며 타고 있었다. 친절의 색이었다. 마실 것을 사오겠다며 현관문을 나섰을 때만 하더라도 아파트 상가에 있는 카페에 갈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횡단보도를 건너서 3분을 더 걸은 이유는 바깥에 나오자마자 익숙한 노을빛을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친절하고 싶어서였다. 그것은 곧 붉게 익어갈 색깔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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